강우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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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강우규는 조선 평안북도 덕천 출신으로, 한의학을 공부하고 한의사로 활동하며 교육 계몽 활동을 펼쳤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독립운동에 헌신하여 만주와 블라디보스토크 등지에서 활동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1920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으며, 사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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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우규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 |
| 이름 | 강우규 |
| 한자 표기 | 姜宇奎 |
| 출생일 | 1855년 4월 20일 |
| 출생지 | 덕천군 평안도 조선 |
| 사망일 | 1920년 11월 29일 |
| 사망 장소 | 경성부 서대문형무소, 일본 제국 조선 |
| 사망 원인 | 교수형 |
| 안장 장소 | '신사동 묘지' (최초 매장) '수유리' (1954년 이장) '서울국립현충원' (1967년 이장) |
| 국적 | 대한제국 |
| 직업 | 독립운동가, 한의사 |
| 종교 | 개신교(장로회) |
| 관련 활동 | 독립운동 |
| 자녀 | 2남 3녀 (장남: 강중건, 차남: 강중근) |
| 기념 웹사이트 | 기념사업회 |
| 기타 정보 | |
| 훈장 | 건국훈장 1등급 추서 |
| 본관 | 금천 강씨(衿川) |
2. 생애
강우규는 조선 평안도 덕천 출생이다.[1] 어린 시절 경상도 진주와 밀양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후, 덕천으로 돌아와 한의학을 공부했다.[1] 1884년 함경도 홍원으로 이주하여 한의사로 인술을 베풀고, 아이들에게 성리학을 가르쳤다.[29] 전언에 의하면 모종의 애국운동에 관하여 신변이 위태롭게 되자 피신 겸 이곳으로 이주하였다고 한다.[29]
강우규는 홍원에서 잡화상을 운영하며 상업에도 종사했다. 홍원의 중심가인 남문거리에서 아들 중건을 앞세워 잡화상을 운영하였으며, 주로 물감, 담뱃대, 면사, 포목 등을 팔았다.[30] 상인들에게 자금을 빌려주는 등 지역 사회에서 신망을 얻었다.[3][30]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국운이 기울어짐을 보고 만주 북간도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가 세력들과 연계하여 조선의 독립을 의논했다. 1910년 일제에 의해 조선이 강점되자 강우규는 크게 분개하였으며, 국권 회복을 위해 망명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31]
1910년 일제에 의하여 조선이 강점되자 강우규는 크게 분개하였다. 당시 그는 50이 넘은 중노인이었다.[31] 강우규는 국권 회복을 위해 망명을 결심하고 우선 큰 아들 중건부부와 자녀 3명을 하바롭스크로 이주시켰다.[3][31] 이듬해인 1911년 봄, 함경남도 홍원군 용원면을 떠나 북간도 두도구로 이주하여 한약방을 경영하였다.[32][33][5]
1915년 요동의 라오허현으로 옮겨 블라디보스토크를 왕래하면서 독립운동을 모색하고, 요하 주변의 농토를 개간하여 한인촌인 신흥촌(新興村)을 건설했다. 신흥촌은 후에 노령과 북만주를 무대로 활동하는 독립군의 주요 근거지가 되었다.[34][7] 1917년 지린성 동화 현에 광동중학교를 세워 동포 자녀들에게 민족 교육을 실시하고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데 힘썼다.[8] 그는 교회 학교에서 일하며 학생들과 인근에 거주하는 한국인들 사이에서 반일 감정을 고취시켰고,[8] 때때로 마을 사람들을 교회 강당에 모아 민족 의식을 고취시켰다.[9]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신흥동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했다. 이후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대한민국 노인 동맹단에 가입하고, 라오허현 지부장으로 활동하며 무장 투쟁을 준비했다.[11]
1919년 3·1 운동 이후, 강우규는 블라디보스토크 Shinhanchon영어 노인단 지린성 지부장이 되어 조선 총독 암살을 결심했다.[35] 그 해 러시아인으로부터 수류탄을 구입하고, 허형과 함께 원산부를 거쳐 경성부로 잠입했다.[10][11] 당시 일본 측 경비는 입국자들에게 수하물 검사를 실시했으나, 60세 이상 고령자는 예외로 면제되었고, 강우규는 속옷 속에 폭탄을 숨겨 일본 경찰의 눈을 피했다.[25][24]
1919년 9월 2일, 하세가와 요시미치의 후임으로 사이토 마코토가 조선 총독으로 부임[12][13]하는 것을 알고, 강우규는 남대문역에서 사이토에게 폭탄을 던져 암살을 시도했다.[35] 그러나 폭탄은 빗나갔고,[14] 주변에 있던 일본 경찰, 기자, 민간인 등 37명이 중경상을 입는 테러 사건이 발생했다.[25][24] 부상자 중에는 1893년 암살된 전 시카고 시장 카터 해리슨 시니어의 친척과 뉴욕 시장의 딸 등 미국인도 포함되어 있었다.[25][24]
거사 직후 강우규는 현장에서 피신하여 오태영, 장익규, 임승화 등의 도움으로 은신했으나,[16] 총독부 고등계 형사인 친일파 김태석에게 체포되어 9월 17일 수감되었다.[16] 이후 총독 암살미수혐의와 민간인 사상 혐의로 사형을 구형받고,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강우규는 블라디보스토크 Shinhanchon영어 노인단 지린성 지부장이 되어 조선 총독 암살을 결심하였다.[35] 그 해 러시아인으로부터 수류탄을 구입하고, 허형과 함께 원산부를 거쳐 경성부로 잠입했다.[35] 1919년 9월 2일 하세가와 요시미치 후임으로 사이토 마코토가 조선 총독으로 부임하는 날, 남대문역에서 사이토에게 폭탄을 던졌으나 빗나갔다.[35] 이 폭탄으로 인해 일본 경찰, 기자, 민간인 등 37명이 중경상을 입었다.[25][24] 현장에 있던 올리버 에비슨 박사가 윤치호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사이토 마코토 총독 일행은 피폭되지 않고 구경꾼들이 부상당했다.[36]
남대문역 현장에서 몸을 피한 강우규는 오태영 등의 도움으로 은신하였으나, 친일파 형사 김태석에게 1919년 9월 17일 체포되었다.[35] 재판 과정에서 강우규는 자신의 독립운동에 대한 신념을 굽히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총독 암살 미수 및 민간인 사상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35] 사형이 확정된 후에도 강우규는 매일 성경을 읽고 아침저녁으로 기도하며 편안한 마음으로 마지막 날을 기다렸다.[11]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했다.[35][11][10] 순국 직전 "단두대상에 홀로서니 춘풍이 감도는구나. 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라는 유언시를 남겼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계몽 활동 (1859~1910)
강우규는 조선 평안도 덕천에서 출생했다.[1] 어린 시절 경상도 진주와 밀양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후, 덕천으로 돌아와 한의학을 공부했다.[1] 1884년 함경도 홍원으로 이주하여 한의사로 인술을 베풀고, 아이들에게 성리학을 가르쳤다.[29] 전언에 의하면 모종의 애국운동에 관하여 신변이 위태롭게 되자 피신 겸 이곳으로 이주하였다고 한다.[29]강우규는 홍원에서 잡화상을 운영하며 상업에도 종사했다. 홍원의 중심가인 남문거리에서 아들 중건을 앞세워 잡화상을 운영하였으며, 주로 물감, 담뱃대, 면사, 포목 등을 팔았다.[30] 상인들에게 자금을 빌려주는 등 지역 사회에서 신망을 얻었다.[3][30]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국운이 기울어짐을 보고 만주 북간도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가 세력들과 연계하여 조선의 독립을 의논했다. 1910년 일제에 의해 조선이 강점되자 강우규는 크게 분개하였으며, 국권 회복을 위해 망명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31]
2. 2. 만주 망명과 독립운동 (1910~1919)
1910년 일제에 의하여 조선이 강점되자 강우규는 크게 분개하였다. 당시 그는 50이 넘은 중노인이었다.[31] 강우규는 국권 회복을 위해 망명을 결심하고 우선 큰 아들 중건부부와 자녀 3명을 하바롭스크로 이주시켰다.[3][31] 이듬해인 1911년 봄, 함경남도 홍원군 용원면을 떠나 북간도 두도구로 이주하여 한약방을 경영하였다.[32][33][5]1915년 요동의 라오허현으로 옮겨 블라디보스토크를 왕래하면서 독립운동을 모색하고, 요하 주변의 농토를 개간하여 한인촌인 신흥촌(新興村)을 건설했다. 신흥촌은 후에 노령과 북만주를 무대로 활동하는 독립군의 주요 근거지가 되었다.[34][7] 1917년 지린성 동화 현에 광동중학교를 세워 동포 자녀들에게 민족 교육을 실시하고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데 힘썼다.[8] 그는 교회 학교에서 일하며 학생들과 인근에 거주하는 한국인들 사이에서 반일 감정을 고취시켰고,[8] 때때로 마을 사람들을 교회 강당에 모아 민족 의식을 고취시켰다.[9]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신흥동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했다. 이후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대한민국 노인 동맹단에 가입하고, 라오허현 지부장으로 활동하며 무장 투쟁을 준비했다.[11]
2. 3. 사이토 총독 저격 사건 (1919)
1919년 3·1 운동 이후, 강우규는 블라디보스토크 Shinhanchon영어 노인단 지린성 지부장이 되어 조선 총독 암살을 결심했다.[35] 그 해 러시아인으로부터 수류탄을 구입하고, 허형과 함께 원산부를 거쳐 경성부로 잠입했다.[10][11] 당시 일본 측 경비는 입국자들에게 수하물 검사를 실시했으나, 60세 이상 고령자는 예외로 면제되었고, 강우규는 속옷 속에 폭탄을 숨겨 일본 경찰의 눈을 피했다.[25][24]1919년 9월 2일, 하세가와 요시미치의 후임으로 사이토 마코토가 조선 총독으로 부임[12][13]하는 것을 알고, 강우규는 남대문역에서 사이토에게 폭탄을 던져 암살을 시도했다.[35] 그러나 폭탄은 빗나갔고,[14] 주변에 있던 일본 경찰, 기자, 민간인 등 37명이 중경상을 입는 테러 사건이 발생했다.[25][24] 부상자 중에는 1893년 암살된 전 시카고 시장 카터 해리슨 시니어의 친척과 뉴욕 시장의 딸 등 미국인도 포함되어 있었다.[25][24]
거사 직후 강우규는 현장에서 피신하여 오태영, 장익규, 임승화 등의 도움으로 은신했으나,[16] 총독부 고등계 형사인 친일파 김태석에게 체포되어 9월 17일 수감되었다.[16] 이후 총독 암살미수혐의와 민간인 사상 혐의로 사형을 구형받고,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2. 4. 체포 및 순국 (1919~1920)
1919년 3·1 운동 이후, 강우규는 블라디보스토크 Shinhanchon영어 노인단 지린성 지부장이 되어 조선 총독 암살을 결심하였다.[35] 그 해 러시아인으로부터 수류탄을 구입하고, 허형과 함께 원산부를 거쳐 경성부로 잠입했다.[35] 1919년 9월 2일 하세가와 요시미치 후임으로 사이토 마코토가 조선 총독으로 부임하는 날, 남대문역에서 사이토에게 폭탄을 던졌으나 빗나갔다.[35] 이 폭탄으로 인해 일본 경찰, 기자, 민간인 등 37명이 중경상을 입었다.[25][24] 현장에 있던 올리버 에비슨 박사가 윤치호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사이토 마코토 총독 일행은 피폭되지 않고 구경꾼들이 부상당했다.[36]남대문역 현장에서 몸을 피한 강우규는 오태영 등의 도움으로 은신하였으나, 친일파 형사 김태석에게 1919년 9월 17일 체포되었다.[35] 재판 과정에서 강우규는 자신의 독립운동에 대한 신념을 굽히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총독 암살 미수 및 민간인 사상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35] 사형이 확정된 후에도 강우규는 매일 성경을 읽고 아침저녁으로 기도하며 편안한 마음으로 마지막 날을 기다렸다.[11]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했다.[35][11][10] 순국 직전 "단두대상에 홀로서니 춘풍이 감도는구나. 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라는 유언시를 남겼다.
3. 사후
강우규의 유해는 처음 신사동 공동묘지에 묻혔다가 1954년 수유리를 거쳐 1967년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되었다.[37] 1962년 3월에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18]
독립기념관에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 당하기 직전에 유언으로 남긴 한시가 적힌 어록비가 세워져 있다.[38]
:단두대상에 홀로서니 춘풍이 감도는구나 斷頭臺上 猶在春風 (단두대상 유재춘풍)
: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 有身無國 豈無感想 (유신무국 기무감상)
서울역 앞 광장에는 강우규의 의거를 기리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27]
한편, 3·1 운동 직후, 이 소식을 들은 윤치호는 "어리석은 자가 사이토 총독에게 폭탄을 던졌는데, 빗나가 여러 구경꾼이 부상을 입었다"며, "이토 히로부미 암살이 한일 병합을 촉진했던 것을 잊었단 말인가"라고 비판했다.[26]
4. 평가
지바 경기도 경찰부장은 "미운 마음은 없습니다. 입장을 바꿔보면 강우규는 우국지사였습니다."라고 평가했다.[39]
강우규의 의거는 3·1 운동 이후 최초의 의열투쟁으로서 조선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에게 큰 경고가 되었음은 물론 국내외의 한인들의 민족의식 고취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그의 의거는 물론 재판과정과 수형생활, 처형과정에서도 당당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재판과정 자체가 운동의 연속선상에서 한인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40]
1919년 3·1 운동 직후, 소식을 들은 윤치호는 "어리석은 자가 사이토 총독에게 폭탄을 던졌는데, 빗나간 폭탄으로 여러 명의 구경꾼이 부상을 입었다"며, 이토 히로부미 암살 사건 이후처럼 테러는 역효과라고 지적했다.[26]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강우규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강우규 의사 기념사업회는 3년 동안 모은 모금과 정부 지원금을 포함한 8억 2천만 원의 자금으로 2011년 9월 2일, 서울역 앞에 높이 4.9m의 강우규 동상을 건립하였다.[27]
5. 가족 관계
- 아들 : 강중근(~2015)
- 손녀 : 강영재(~198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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