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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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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태평기》는 14세기 중엽부터 14세기 후엽까지 여러 저자에 의해 편찬된 일본의 역사 서사시이다. 고다이고 천황의 즉위부터 가마쿠라 막부의 멸망, 겐무 신정의 실패와 남북조 분열, 무로마치 막부 내부 혼란 등 약 50년간의 역사를 다루며, 유교적 대의명분론과 군신론, 불교적 인과응보론에 기반하여 남북조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작품은 40권으로 구성되었지만, 사본에 따라 권수의 차이가 있으며, 《헤이케 이야기》의 영향을 받았다. 이 작품은 무로마치 시대부터 구전되었으며, 에도 시대에는 병법서로도 활용되었다. 《태평기》는 1차 사료로서 가치를 지니지만, 과장과 오류가 존재한다는 비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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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기
지도
기본 정보
제목태평기
원어太平記
로마자 표기Taiheiki
장르군담 소설
시대남북조 시대
국가일본
저자
작가미상 (여러 작가들의 합작으로 추정)
창작 배경 및 시기
창작 시기14세기 후반 ~ 15세기 초
배경일본 남북조 시대의 격동기
내용
주요 내용고다이고 천황의 즉위와 겐무 신정의 시작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반역과 무로마치 막부의 성립
남북조 대립과 무장들의 활약
구성전 40권 (또는 20권, 판본에 따라 다름)
특징군담 소설의 대표작
등장인물의 영웅적 면모와 비극적 운명을 그림
역사적 사실과 허구를 섞어 극적인 재미를 강조
관련 작품
영상화NHK 대하드라마 태평기
만화화미즈키 시게루의 만화 작품
참고 자료
관련 링크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 컬렉션
코토방크 (일본어 사전) 태평기 항목
문화청 지정 국보 태평기

2. 작가와 성립 시기

《태평기》의 작가와 성립 시기는 불분명하지만, 이마가와 사다요(今川貞世)의 《난태평기》(難太平記)에 호쇼지(法勝寺)의 승려 에이진 쇼닌(엔칸(円観))이 아시카가 다다요시(足利直義)에게 30여 권을 보여주었다는 기사가 있다. 이를 바탕으로 고다이고 천황(後醍醐天皇)의 죽음이 묘사된 21권까지의 부분이 엔칸, 겐에(玄慧) 등 아시카가 막부(足利幕府)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14세기 중엽까지 편찬되었다고 여겨진다.[5]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光)나 간레이(管領) 호소카와 요리유키(細川賴之)가 수정에 관여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어떤 설을 따르든 《태평기》는 한 사람의 손으로 단기간에 완성된 것은 아닐 것으로 여겨진다. 에도 시대의 《태평기평판비전이종초》(太平記評判秘伝理尽鈔)에는 (근거가 빈약한 전설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지만) 실제로 열 명이 넘는 저자들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다.

겐에를 저자로 보는 설에 대해서는 고태본(古態本)의 하나인 진구쇼코칸본(神宮徴古館本)의 고지(弘治) 원년(1555년)차의 오서(奥書)에 「독청재치지홍서」(独清再治之鴻書)라고 되어 있다. 「독청」(独清)은 겐에의 호인 「도쿠세이켄」(独清軒)을 가리키는 것이고, 「재치」(再治)는 '다시 편집하였다'는 것, 「홍서」(鴻書)란 분량이 많은 책을 가리키는 단어이다.[5]

고지마 법사(小島法師) 등의 손에 의해 증보 개정되어, 늦어도 14세기 후엽(1370년경)까지는 총 40권의 《태평기》가 성립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같은 시대의 사료에서 태평기의 이름이 확인되는 가장 오래된 것은 구게(公家) 도인 긴카타(洞院公定)의 일기인 『도인 긴카타 일기(洞院公定日記)』 오안(応安) 7년(1374년) 5월 3일조이다.[6] (태평기 자체의 작중 기사로 가장 새로운 연대 기술은 오안 4년인 서기 1371년 이후 시바 요시마사(斯波義将) 추토에 대한 것이다).

《난태평기》를 제외하면, 동시대 또는 그에 가까운 시대의 사료에서 《태평기》의 저자로 지목되고 있는 것은 이 '고지마 법사' 뿐이지만, 이 인물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고지마 다카노리(児島高徳) 설(메이지 시대부터 제창되었다) 외에도 히젠 고지마(備前児島)와 연고가 있는 야마부시(山伏)라는 설(와카모리 타로, 가노카와 겐키), 오에 오가이(近江外嶋)의 관계자(고토 단지) 등 여러 가지 설이 있어서 일본 학계에서도 확정된 설은 없다.

『도인 긴카타 일기(洞院公定日記)』에 보이는 《태평기》의 본문은 전혀 불명이지만, 후술할 에이와본(永和本)의 본문이 현존하는 《태평기》 본문과 거의 일치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태평기》 작중 최신(최종) 기사의 사건에서 10년 정도 전후로 현존 본문이 성립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일관되게 남조의 시점으로 되어 있는 것은 남조 측의 인물이 썼거나 남조 측에 대한 진혼의 의미를 두고 썼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또한 「바사라(ばさら)」라 불리는 당시 일본의 사회 풍조나 하극상(下剋上)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쓰여 있다.

3. 구성과 내용

《태평기》는 난보쿠초 시대(南北朝時代)를 배경으로 고다이고 천황(後醍醐天皇)의 즉위부터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의 멸망, 겐무 신정(建武新政)과 그 붕괴 후의 남북조 분열, 간노의 소란(観応の擾乱)과 2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라(足利義詮)의 사망 및 호소카와 요리유키(細川賴之)의 간레이(管領) 취임까지, 분포 2년(1318년)부터 조지 6년(1368년)경까지의 약 50년간의 일들을 소재로 한 군담소설(군키모노가타리)이다. 이마가와 가본(今川家本), 고활자본(古活字本), 세이겐인본(西源院本) 등의 여러 종류가 있다.

제목인 '태평'(太平)은 평화를 기원하는 의미로 붙여졌다고 생각되며, 원령 진혼적인 의의도 있다.[17]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에서 제목을 '태평기'로 붙인 소설이나 드라마가 많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혼동을 피하기 위해 《'''고전''' 태평기》라고 불리는 경우도 있다.

전체적으로 유교적인 대의명분론(大義名分論)과 군신론(君臣論), 불교인과응보(因果応報論) 사상을 바탕으로 송학(宋學)의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사상에 따라 고다이고 천황은 작중에서 '부덕한 군주'로 그려진다. 그러나 후세 에도 시대 미토 번의 도쿠가와 미쓰쿠니(徳川光圀)는 《대일본사》에서 "천황 친정을 노렸던 고다이고야말로 정통 천황이다!"라고 주장했다. 미토학(水戶學)은 훗날 막부 말기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 더 나아가 태평양 전쟁 전의 황국사관(皇國史觀)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메이지 시대 이후 일본 제국 패망 전 쇼와 초기까지 《태평기》가 중시되지 않았던 시기도 있었다.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淸盛)의 죽음과 비슷하게 처리된 고다이고 천황의 죽음 등 곳곳에 《헤이케 이야기》의 영향이 나타나며, 이야기 흐름에서 벗어난 고전 인용이나 각색도 많다. 「오월전쟁」, 「초한전쟁」 등은 권 하나의 몇 분의 1 정도를 점하는 장문이다. 《태평기》에 인용된 고사는 중국 서적(혹은 《일본서기》 등 일본의 사서)과 다른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는 단순한 착오가 아니라 '변문'(変文)이라 불리는 통속물 등이 소재로 쓰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권25 「이세의 보검 설화」에는 《일본서기》 본문이 아닌 중세 일본기를 소재로 한 기묘한 신대 설화(神代説話)가 실려 있다.

《태평기》는 군담소설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실제로는 중세 일본 무사들이 일종의 백과사전처럼 사용하기 위한 '생활사전'(오라이모노)으로 만들어졌다는 견해도 있다.[17]

최근 영어 번역본은 40장으로 구성된 서사시 중 12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고다이고 천황의 즉위(1318년, 다카우지가 가마쿠라 막부 호조 씨의 소규모 가신이었던 시절)부터 다카우지의 호조 씨 배신, 1333년 고다이고 천황의 몰락과 다카우지에 의한 폐위, 1338년 교토로의 귀환까지를 다룬다.

3. 1. 구성

현재 유포된 《태평기》는 전40권으로 되어 있지만, 16세기 시점에서 이미 22권이 사라져 버렸다. 22권은 남은 앞뒤 21권과 23권에서 소재를 찾아내어 보완한 것으로 보인다. 내용은 3부 구성으로, 후다이고 천황의 즉위에서 가마쿠라 막부의 멸망까지를 그린 제1부(권1~11), 겐무 신정의 실패와 남북조 분열에서 후다이고 천황의 사망까지가 2부(권12~21), 남조측 원령에 의한 아시카가 막부 내부의 혼란을 그린 제3부(권23~40)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태평기》의 사본 가운데 권22가 있기는 하지만, 내용 자체는 권23~24의 내용을 사용하고 있어 권22는 누락된 편이다. 그 원인으로서는, 천황이나 무가측에 대해 어울리지 않는 내용이 쓰여 있어서 삭제되었다고 여겨지지만, 현재로서는 확실히 알 수 없다.[8]

권수에 대해서는 전40권이 일반적이지만, 고태본(古態本)은 권22를 뺀 39권본이며, 후출본(後出本)은 권22를 편집해 메꾼 40권본이다. 이밖에도 마지막 부분(40권본의 권38 또는 권39 - 권40)을 2권 또는 3권으로 나누어서 41권 또는 42권본으로 하는 사본도 존재한다. 요네자와본(米沢本) 및 교토대본(京大本) 계통 등이 그것이다.[8]

이러한 본문의 분할과는 별개로 헤이케모노가타리에서도 보이듯이 (주로 겐지의) 보검 전설을 모아서 「쓰루기의 권」(剣巻)으로써 1권을 엮은 것을 부속한 사본(제판본으로도 소수 있다)도 있다. 다만 이 경우 「쓰루기의 권」은 권수에 포함되지 않는다.[8]

3. 2. 내용

난보쿠초 시대(南北朝時代)를 배경으로 고다이고 천황(後醍醐天皇)의 즉위부터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의 멸망, 겐무 신정(建武新政)과 그 붕괴 후의 남북조 분열, 간노의 소란(観応の擾乱)과 2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라(足利義詮)의 사망 및 호소카와 요리유키(細川賴之)의 간레이(管領) 취임까지, 분포 2년(1318년)부터 조지 6년(1368년)경까지의 약 50년간의 일들을 소재로 한 군담소설(군키모노가타리)이다. 이마가와 가본(今川家本), 고활자본(古活字本), 세이겐인본(西源院本) 등 여러 종류가 있다.

제목인 '태평'(太平)이란 평화를 기원하는 의미로 붙여졌다고 생각되며, 원령 진혼적인 의의가 있음도 지적되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에서 제목을 '태평기'로 붙인 소설이나 드라마가 많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애매함을 피하기 위해서 《'''고전'''태평기》('''古典'''太平記)라고 불리는 경우도 있다.

전체 구상은 유교적 대의명분론(大義名分論)과 군신론(君臣論), 불교적 인과응보론(因果応報論)에 기조를 두고 여기에 송학(宋學)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이러한 사고 방식에 따라 작중 고다이고 천황은 '부덕한 군주'로 그려지고 있다.

중반의 고다이고 천황의 죽음이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淸盛)의 죽음 장면과 비슷하게 처리된 점 등 곳곳에 《헤이케 이야기》의 영향이 나타나고 있으며, 때때로 이야기의 흐름에서 벗어난 고전에서의 인용이나 각색도 많다.

유명한 「오월전쟁」, 「초한전쟁」 등은 권 하나의 몇 분의 1 정도를 점하는 장문이다. 원래 이 둘은 태평기 한적 유래 고사 가운데서도 다른 기록들을 거의 압도할 정도로 방대한 분량이지만, 이미 에도 시대 이전의 일본의 옛 주석들에서도 지적된 바와 같이 《태평기》에 인용된 고사는 때때로 단순한 착각으로 간주하기 힘들 정도로 중국 서적(혹은 《일본서기》 등 일본의 사서)과 다른 것이 있는 등 종종 부정확하다. 단, 중국 서적에 대해서는 마스다 모토무(増田欣)의 연구 등에 의해 이른바 「변문」(変文)이라 불리는 통속물 등이 소재로써 상당한 양이 쓰이고 있는 것도 이유의 하나로 되어 있다. 또한 권25 「이세의 보검 설화」(伊勢宝剣説話)에는 상당한 기묘한(기괴한) 신대 설화(神代説話)가 실려 있는데, 이것도 《일본서기》 본문에서 따온 것이 아니라 중세 일본기(日本紀)를 소재로 한 것이리라 여겨지고 있다.

한편 이러한 ’탈선‘의 대부분의 이유에 대해서는 오스미 가즈오(大隅和雄)의 설처럼 《태평기》는 ‘군담소설‘(군키모노가타리)의 외피를 쓰고는 있지만 실제로는 ‘생활사전‘(오라이모노)로 만들어진 것이며 중세 일본의 무사들이 일종의 ‘백과사전’으로 사용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 아니냐는 견해도 존재한다.[17]

《태평기》 속에서 화려한 활약상이 그려지고 있는 구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는 그 이름을 「구스노키」(楠木)로 표기하게 되는 것은 메이지 시대에 들어서부터, 태정관(太政官)의 수사관(修史館)에서의 결정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태평기》 사본들은 그 이름을 일관되게 「楠正成」라고 표기하고 있다.[18] 다만 《구스노키 합전 주문》(楠木合戦注文)[19]을 비롯한 1차 사료 대부분은 「楠」가 아닌 「楠木」로 되어 있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로써 楠木가 바른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최근 영어 번역본은 40장으로 구성된 서사시 중 12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고다이고 천황(後醍醐天皇)이 즉위한 1318년(다카우지(尊氏)가 아직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의 호조씨(北条氏)의 소규모 가신이었던 시절)부터 다카우지의 호조씨 배신, 1333년 고다이고 천황의 몰락과 다카우지에 의한 폐위, 그리고 1338년 교토(京都)로의 귀환까지를 다루고 있다.

《태평기》에는 정사 《삼국지》와 백화소설 《삼국지연의》의 요소를 참고한 묘사가 여러 군데 보인다. 예를 들어 전투 묘사에서 구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와 제갈량의 비교가 많은데, 이는 마사시게의 현명한 장수임을 주제로 삼기 위해 "위대한 지략가로서의 제갈량"을 등장시켜 주종 관계를 의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3. 3. 여러 사본

《태평기》는 여러 종류의 사본이 존재한다. 크게 고태본(古態本)과 후출본(後出本)으로 나뉜다.

구분사본 종류특징비고
고태본권22가 빠진 채로, 기사 배열의 조작을 가하지 않은 오래된 형태
후출본권22를 편집하여 채워 넣은, 비교적 후대에 나온 사본
소재 불명


에이와본(永和本)권32에 해당하는 단본(영본)으로, 《태평기》 최종 기사 연대에 가까운 1375년~1379년경의 고사본으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태평기》 여러 사본과 거의 일치하는 본문을 가지고 있다.

4. 각 권의 개요

서력내용
11318고다이고 천황 즉위.
style="vertical-align:top" |1324고다이고 천황가마쿠라 막부 타도 계획이 발각됨(쇼추의 변).
21331다시 막부 타도 계획이 발각. 이후 겐코의 난으로 이어짐. 고다이고 천황은 가사기 산성(笠置山城)으로 탈출.
3구스노키 마사시게, 아카사카 성에서 거병. 가사기 산 함락. 고다이고 천황 체포. 아카사카 성도 함락.
41332고다이고 천황, 오키로 유배.
5막부의 싯켄 호조 다카토키는 「덴가쿠(田楽)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라고 평가됨.
6구스노키 마사시게, 아카사카 성 재공략.
7구스노키 마사시게, 다시 지하야 성(千早城)에서 거병. 고다이고 천황, 오키 제도 탈출.
81333아카마쓰 노리무라(赤松則村)가 하리마 국에서 반란을 일으켜, 교토의 로쿠하라 군과 싸움.
9아시카가 다카우지, 가마쿠라에서 상경. 도중에 막부 타도를 결의하고, 로쿠하라 단다이를 공격.
10닛타 요시사다고즈케 국에서 거병. 가마쿠라를 공격, 호조 다카토키 사망. 가마쿠라 막부 멸망.
11규슈진제이 단다이도 함락. 고다이고 천황이 귀경. 겐무 신정.
121334구게(公家)의 정치에 무사는 불복. 모리요시 친왕이 체포되어 실각. 이듬해 암살.
131335다카토키의 아들 호조 도키유키가 가마쿠라를 점령. 다카우지가 동정하여 가마쿠라를 탈환(나카센다이의 난).
14닛타 요시사다가 다카우지 토벌을 위해 동정(겐무의 난 시작). 다카우지는 닛타 군과 싸우면서 입경.
151336오슈기타바타케 아키이에 군이 상경. 다카우지는, 닛타・기타바타케・구스노키 연합군에 패배하고, 도망침.
16다카우지는 규슈를 근거지로 다시 상경. 미나토가와 전투에서 구스노키 마사시게 전사.
17다카우지 입경. 북조의 고묘 천황이 즉위.
18고다이고 천황은 요시노로 잠행하고, 남북조 분열. 1337년 닛타 군이 지키는 에치젠의 가네가사키 성 함락.
191338기타바타케 아키이에가 이와쓰 전투(石津の戦い)에서 전사. 다카우지는 세이이타이쇼군이 되고, 무로마치 막부 시작.
20닛타 요시사다, 에치젠 국의 후지시마 전투(藤島)에서, 시바 다카쓰네와 싸워 전사.
211339고다이고 천황 붕어. 고무라카미 천황이 후계로 즉위.
221342와키야 요시스케(닛타 요시사다의 동생)가 이요 국에서 병사.
23도키 요리토가 술에 취해 고곤 상황의 우차(牛車)에 화살을 쏘아 참수.
241345다카우지, 덴류지를 짓고, 고다이고 천황을 공양.
251347구스노키 마사시게의 적남 구스노키 마사쓰라가 거병. 후지이데라와 스미요시에서 승리.
261348막부의 시쓰지(執事) 고노 모로나오가, 시조나와테 전투에서 구스노키 마사쓰라와 싸워, 마사쓰라는 전사. 이어서 모로나오는 요시노를 공격, 고무라카미 천황은 탈출.
271349다카우지의 동생 아시카가 다다요시와 고노 모로나오가 불화. 다다요시는 출가. 그 정무를 다카우지의 적자 아시카가 요시아키라가 계승.
281350다다요시가 교토를 탈출, 남조와 결탁하여 고노 모로나오에 대해 거병(간노의 소란).
291351고노 모로나오 형제는, 다다요시와 화목했지만, 다다요시 측의 우에스기 요시노리에게 살해당함.
30다카우지가 남조와 화목하고, 4개월간의 쇼헤이 일통. 다다요시 공격을 위해 다카우지는 간토로 감. 1352년 다다요시는 가마쿠라에서 급사. 다카우지가 교토에 없는 사이에, 기타바타케 아키이에의 동생 기타바타케 아키요시와,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삼남 구스노키 마사노리가, 제1차 남조군 입경.
31다카우지는 간토에서 닛타 군에 승리(무사시노 전투). 요시아키라는 교토를 탈환(하치만 전투).
321353구스노키 마사노리와 다다요시의 옛 부하 야마나 도키우지 등이, 제2차 남조군 입경.
style="vertical-align:top" |1355다카우지의 서자 아시카가 다다후유와 야마나 도키우지 등이, 제3차 남조군 입경(고나이 전투). 모두 다음 달에는 요시아키라・다카우지 군이 교토를 탈환.
331358다카우지, 등의 종양으로 병사.
34아시카가 요시아키라, 아시카가 가 제2대 쇼군이 됨. 니키 요시나가를 계승하여 호소카와 기요우지가 시쓰지(執事)가 됨.
351360호소카와 기요우지와 간토 간레이 하타케야마 구니키요에 의해, 니키 요시나가가 실각.
361361호소카와 기요우지도 실각. 니키 요시나가와 호소카와 기요우지는 남조로 내려감. 하타케야마 구니키요도 실각하고 이즈에서 반란.
37호소카와 기요우지와 구스노키 마사노리가, 제4차 남조군 입경. 다음 달 철수.
381362호소카와 기요우지는, 사촌 호소카와 요리유키와 싸워 사누키에서 전사. 하타케야마 구니키요는 슈젠지(修善寺)에서 항복.
391363스오나가토오우치 히로요, 산인의 야마나 도키우지, 니키 요시나가 등이 막부에 따름.
401367아시카가 요시아키라가 병사. 호소카와 요리유키가 간레이가 되어, 신임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를 보좌.


5. 영향과 자료적 가치

《태평기》는 무로마치 시대부터 모노가타리승(物語僧)의 '태평기 읽어주기'를 통해 구전되었고, 초등 학문의 교과서나 에도 시대 '강담'의 소재로 활용되었다. 센고쿠 시대 무장들은 《태평기》를 병법서로 활용하며 논평을 더했는데, 그 결과물이 《태평기평판비전이종초》(太平記評判秘伝理尽鈔)이다. 이는 에도 시대까지 무사들의 필수 병법서가 되었다.

16세기 일본에서 그리스도교를 전도하던 예수회 선교사들은 《태평기》를 일본의 역사, 문화, 사상, 일본어 등을 배우기 위한 자료로 활용하였다. 그들은 《태평기발서》(太平記抜書)를 간행하고, 《일포사서》(日葡辞書)에서 어휘 설명을 위해 《태평기》를 인용하였다.

유교적 대의명분론과 군신론, 불교인과응보론을 바탕으로 송학(宋學)의 영향을 받은 《태평기》는 고다이고 천황을 '부덕한 군주'로 묘사한다.[17] 그러나 에도 시대 미토 번의 도쿠가와 미쓰쿠니(徳川光圀)는 《대일본사》에서 고다이고 천황을 정통 천황으로 주장했다. 그의 미토학(水戶學)은 막부 말기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과 태평양 전쟁황국사관(皇國史觀)에 영향을 주었다.

《태평기》에는 내용 오류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이마가와 사다요(今川貞世)는 《난태평기》(難太平記)에서 잘못된 점을 지적했고, 구메 구니타케(久米邦武)는 자료적 가치를 부정했다. 겐코(元弘) 2년(1332년)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시모아카사카 성(下赤坂城) 탈환 날짜가 《태평기》와 《구스노키 합전 주문》(楠木合戦注文)에서 다르게 나타난다.[19]

최근 아시카가 씨(足利氏) 연구를 통해 닛타 씨(新田氏)가 아시카가 씨 일문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태평기》 속 닛타 씨와 아시카가 씨 관계 묘사가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는 비판도 제기된다.[20] 따라서 《태평기》를 역사 자료로 활용할 때는 다른 1급 자료와 비교하고 오류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5. 1. 영향

무로마치 시대에는 《태평기》의 영향을 받은 많은 군담소설이 유행했다. 아코번(赤穂藩)의 아사노(淺野) 집안의 가신이 기라 요시나카(吉良義央)를 살해한 겐로쿠 아코 사건(元祿赤穂事件)이 일어나자, 다케다 이즈모(竹田出雲) 등에 의해 《태평기》의 엔야 판관(塩冶判官) 이야기에 가탁해 《가나테본(仮名手本) 츄신구라(忠臣藏)》가 만들어지는 등 설화, 조루리(浄瑠璃) 등 일본 근세 문학에도 영향을 미쳤다.[16]

센고쿠 시대 무장들 사이에서는 《태평기》를 병법서 측면에서 파악해 다양한 논평을 더한 글도 생겼는데, 그 집대성이 《태평기평판비전이종초》(太平記評判秘伝理尽鈔)였다. 이는 에도 시대까지 무사들에게 필수적인 병법서가 되었다.

16세기 일본에서 그리스도교를 전도하던 예수회 선교사들은 《헤이케 이야기》와 함께 《태평기》를 일본의 역사, 문화, 사상, 일본어 등을 배우기 위한 자료 및 교재로 주목하였다. 때문에 예수회가 활판으로 인쇄 간행한 이른바 '기리시탄판'(キリシタン版)에도 《태평기》는 큰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어 일본의 역사, 문화, 사상, 일본어 등의 학습을 위한 교재로써 《태평기발서》(太平記抜書)가 간행되었다. 그러나 《태평기발서》에는 신불(神仏)에 관한 기술이 그리스도교의 유일신(데우스)과는 맞지 않는다 하여 '신불'은 당시 일본에서 데우스와 동의어였던 '천도'(天道)로 치환되었다. 또한 일본어 어휘를 포르투갈어로 풀이한 사전인 《일포사서》(日葡辞書)에서도 어휘 설명을 위한 예문의 대부분이 《태평기》에서 인용되었다.

일본의 남북조 시대는 고대사처럼 왕실, 즉 천황가의 혈통과도 관련된 시대였으므로, 천황의 권위를 강조하려는 황국사관 아래서 '역신'(逆臣) 다카우지나 '충신'(忠臣) 마사시게 등으로 이미지가 고정화된 《태평기》가 일본에서 소설이나 영화, TV 드라마 등의 자료로 작품화되는 일은 드물었다. 패전 후에 이르러 일본의 소설가 요시카와 에이지(吉川英治)가 《사본태평기》(私本太平記)를 통해 무로마치 막부의 창립자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그리고 그와 대립했던 구스노키 마사시게를 그때까지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다른 새로운 해석으로 그려내어 남북조 시대를 소설화했다. 1991년에는 이 《사본태평기》를 원작으로 한 NHK 대하드라마태평기》가 방송되었다.

《헤이케 이야기》(平家物語)와 비교하면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고,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등의 비판이 존재한다.[16]

에도 시대의 문인인 다카라이 기가쿠(宝井其角)는 "헤이케에서 태평기로 오니 달이 보이지 않는다"(平家なり太平記には月を見ず)라고 평하였다. 여기서 '달'은 풍부한 정서, 풍아(風雅)를 상징하며, 《헤이케 이야기》에는 있는 그것이 《태평기》에는 없다는 말로, 기가쿠는 양자를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헤이케 이야기》와는 다른 또 다른 문학성으로 차 있으며, 일본 군기문학의 새로운 경지를 연 작품이라는 평가도 있다.[21]

5. 2. 자료적 가치

《태평기》는 자료적 가치가 낮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여러 측면에서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우선, 《태평기》는 무로마치 시대부터 모노가타리승(物語僧)의 '태평기 읽어주기'를 통해 구전되었고, 초등 학문의 교과서나 에도 시대 '강담'의 소재로 활용되었다. 이는 《태평기》가 당대 사회에 널리 알려지고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준다.

또한, 센고쿠 시대 무장들은 《태평기》를 병법의 측면에서 연구하고 논평을 더했는데, 그 결과물이 《태평기평판비전이종초》(太平記評判秘伝理尽鈔)이다. 이는 에도 시대까지 무사들에게 필수적인 병법서가 되었다.

16세기 일본에서 그리스도교를 전도하던 예수회 선교사들은 《태평기》를 일본의 역사, 문화, 이상, 일본어 등을 배우기 위한 자료로 활용하였다. 그들은 《태평기발서》(太平記抜書)를 간행하고, 《일포사서》(日葡辞書)에서 어휘 설명을 위한 예문으로 《태평기》를 인용하였다.

하지만, 《태평기》의 내용에는 오류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이마가와 사다요(今川貞世)는 《난태평기》(難太平記)에서 내용의 잘못된 점을 지적했고, 구메 구니타케(久米邦武)는 《태평기》의 자료적 가치를 부정했다. 예를 들어, 겐코(元弘) 2년(1332년)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시모아카사카 성(下赤坂城) 탈환 및 재거병 날짜가 《태평기》와 1차 사료인 《구스노키 합전 주문》(楠木合戦注文)에서 다르게 나타난다.[19]

최근에는 아시카가 씨(足利氏) 일문에 대한 연구를 통해, 닛타 씨(新田氏)가 아시카가 씨의 일문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태평기》에서 묘사된 닛타 씨와 아시카가 씨의 관계가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20]

따라서, 《태평기》를 역사적 자료로 활용할 때에는 동시대의 일기 등 다른 1급 자료와 비교하고, 내용의 오류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5. 3. 평가

유교적 대의명분론과 군신론, 불교인과응보론을 바탕으로 송학(宋學)의 영향을 받은 《태평기》는 고다이고 천황을 '부덕한 군주'로 묘사한다.[17] 그러나 에도 시대 미토 번의 도쿠가와 미쓰쿠니(徳川光圀)는 《대일본사》에서 "천황 친정을 노렸던 고다이고야말로 정통 천황이다!"라고 주장했다. 그의 미토학(水戶學)은 훗날 막부 말기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 더 나아가 태평양 전쟁 전의 황국사관(皇國史觀)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메이지 시대 이후 일본 제국 패망 전 쇼와 초기까지 《태평기》가 중시되지 않았던 시기도 있었다.

이야기 중반 고다이고 천황의 죽음은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淸盛)의 죽음과 비슷하게 묘사되는 등, 곳곳에서 《헤이케 이야기》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이야기 흐름에서 벗어나 고전을 인용하거나 각색하는 경우도 많다.

「오월전쟁」, 「초한전쟁」 등은 한 권의 몇 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긴 분량이다. 이들은 태평기 속 한적 유래 고사 중에서도 특히 방대한 분량이지만, 에도 시대 이전 옛 주석에서도 지적되었듯이 《태평기》에 인용된 고사는 단순한 착오를 넘어 중국 서적(혹은 《일본서기》 등 일본 사서)과 다른 경우가 종종 있어 부정확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마스다 모토무(増田欣)의 연구에 따르면, 이는 '변문'(変文)이라 불리는 통속물 등이 소재로 쓰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권25 「이세의 보검 설화」(伊勢宝剣説話)에는 기묘한 신대 설화(神代説話)가 실려 있는데, 이 역시 《일본서기》 본문이 아닌 중세일본기를 소재로 한 것으로 여겨진다.

오스미 가즈오는 《태평기》가 ‘군담소설‘(군키모노가타리)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실제로는 ‘생활사전‘(오라이모노)처럼 중세 일본 무사들의 ‘백과사전’으로 기능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17]

《헤이케 이야기》와 비교하면 “일관성이 부족하다”, “완성도가 미숙하다” 등의 비판이 있다.[4] 보이 기각(宝井其角)은 “헤이케에는 있고 태평기에는 없는 달을 보지 못했다”라고 평하며, “‘달’은 풍부한 정서와 풍류의 상징이며, 《헤이케 이야기》에는 있지만 《태평기》에는 없다”라고 두 작품을 비교했다. 한편으로는 “《헤이케 이야기》와는 다른 문학성으로 가득 차 군기 문학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작품”이라는 평가도 존재한다.[15]

6. 태평기를 소재로 한 작품


  • 요시카와 에이지의 소설 《사본 태평기(私本太平記)》는 무로마치 막부의 창립자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그와 대립했던 구스노키 마사시게를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해석으로 그려내어 남북조 시대를 소설화했다. 1991년에는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NHK 대하드라마태평기》가 방송되었다.[16]
  • 야마오카 소하치의 소설 《신태평기》가 있다.
  •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소설顔世일본어를 원작으로 한 영화 《악당》이 1965년에 개봉되었다.
  • 와시오 아메코의 소설 《요시노조 태평기(吉野朝太平記)》가 있다.
  • 이마 히가루의 소설 《태평기》가 있다.
  • 모리무라 세이이치의 소설 《태평기》가 있다.
  • 히사카 마사시의 소설 《태평기귀전 고지마 다카노리》가 있다.
  • 사이토 타카오의 만화 《태평기 만화 일본의 고전》이 있다.
  • 가와베 신도의 만화 《반데트 -위전 태평기-(バンデット -偽伝太平記-)》가 있다.
  • 요코야마 마사미치의 만화 《코믹 태평기》가 있다.
  • 나가이 미치코의 에세이 《태평기 기행》, 《태평기 고전을 읽는다》가 있다.
  • 진순신의 에세이 《산하 태평기》가 있다.
  • 쇼 기획에서 게임 《태평기-혈전 쿠스노키 마사나리-》를 발매했다.
  • 게임 저널에서 게임 《특집: 태평기 결전 쿠스노키 마사나리》를 발매했다.
  • 인텍에서 PC엔진 CD-ROM² 소프트 시뮬레이션 게임 《태평기를 발매했다.
  • 세가에서 메가드라이브판 게임 《NHK 대하드라마 태평기》를 발매했다.
  • NHK 엔터프라이즈에서 PC엔진판 게임 《NHK 대하드라마 태평기》를 발매했다.

참조

[1] 서적 Taiheiki https://books.google[...] Japan Encyclopedia
[2] 서적 Legends of the Samurai Overlook Duckworth
[3] 서적 Samurai Weapons & Fighting Techniques Amber Books Ltd
[4] 문서 龍谷大学図書館蔵『太平記』の研究
[5] 문서 「独清」は玄恵の号である「独清軒」のことか 「再治」は再び編集すること、「鴻書」とは大部の書の意味。
[6] 문서 『太平記』自体の作中記事で、もっとも新しい年代記述は応安4年(1371年)以降の斯波義将追討の件である。
[7] 문서 ただし「天下」と「太平記」の間に改行があり、「近日天下に翫ぶ太平記」は「近日翫ぶ天下太平記」と読むべきだという意見もある。なおこの記事と『太平記』との関連が指摘されたのは、明治19年に重野安繹によるもの。
[8] 문서 米沢本、京大本系統など。
[9] 문서 大隅は『太平記』の書名は宋の類書である『太平御覧』に因んだものとする説を紹介しており、仮にこの説が正しければ、最初から軍記物ではなく、「小説の体をとった百科事典」として制作されたいうことになる。
[10] 서적 事典の語る日本の歴史 そしえて
[11] 문서 巻32は諸本間の異同が大きく、永和本系統と他もう一系統の大きく2つにわかれ、古態本の中にはこの両方を併記したものもあり、後出本の中には二系統を混合したものもある。
[12] 서적 太平記 岩波文庫
[13] 문서 重野=進歩的、川田=保守的という思想的対立に理由を求める見方には誤りがある 2022-12
[14] 서적 中世足利氏の血統と権威 吉川弘文社
[15] 서적 太平記 新潮社
[16] 문서 龍谷大学図書館蔵『太平記』の研究
[17] 서적 사전 시대를 엮다 (publisher not specified)
[18] 서적 太平記 岩波文庫
[19] 문서 近藤 1930.
[20] 서적 中世足利氏の血統と権威 吉川弘文社
[21] 서적 太平記 新潮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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