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당 지도자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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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치당 지도자관방(KdF)은 1934년 11월에 설립된 독일 총리실 산하 조직으로, 아돌프 히틀러를 보좌하는 역할을 했다. 필리프 보울러가 수장으로 임명되어 1945년까지 이끌었으며, 개인 관방부, 국가 및 당 문제, 당 및 관저 정무 담당, 사회 경제 문제, 내무 및 인사 등 5개의 주요 부서로 구성되었다. KdF는 히틀러와 당 관계자 간의 서신을 처리하고, 국민들의 불만을 처리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액션 T4'로 불리는 안락사 프로그램에 관여하여 정신 질환 및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41년 이후 보울러의 영향력이 감소하고, 전쟁의 영향으로 중요성이 약화되어 종전 후 연합국에 의해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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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당 지도자관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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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조직
나치당 지도자관방(Kanzlei des Führers der NSDAP, 약칭 KdF)은 1934년 11월 베를린에서 설립되었다. 이는 기존의 총리실을 한스 하인리히 라머스가 이끄는 독일 국가 총리실과 마르틴 보어만이 이끄는 나치당 총리실(1941년까지는 '부총통의 사무실'로 불림)로 나누면서 별도로 만들어진 기관이었다. KdF의 책임자는 SS-''Obergruppenführer''(상급집단지도자) 필리프 보울러였으며, 그의 공식 직함은 'NSDAP 총통 관방장'(Chef der Kanzlei des Führers der NSDAP)이었다. 그의 부관은 SS-''Sturmbannführer''(돌격대지도자) 카를 프라이헤어 미셸 폰 튀슬링이었다. KdF는 초기에 베를린의 Lützow Ufer에 있는 사무실에서 운영되었다.
필리프 보울러는 KdF의 수장으로서 나치당의 ''Reichsleiter''(전국지도자) 지위도 가졌다. 그는 1934년 11월 17일에 임명되어 1945년 4월 23일까지 그 직책을 유지했다. 히틀러는 보울러의 강한 충성심과 공손한 태도, 그리고 끈기 있는 효율성과 이념적 광신주의 때문에 그를 이 자리에 앉혔다고 알려져 있다. 1939년 KdF는 보스슈트라세 8번지에 있는 새로운 국가 총리실 건물 근처로 사무실을 이전했다. 당시 KdF의 직원은 26명이었으나, 1942년까지 5배로 증가했다.
KdF의 본래 목적은 총통과 당 관계자 간의 서신을 처리하고, 이를 통해 히틀러가 "국민들의 관심사에 직접적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사소한 불만, 사소한 고충, 그리고 당원들의 사소한 개인적 다툼"에 관한 서신이 대부분이었다. 또한 KdF는 요제프 괴벨스의 선전부와 협력하여 나치당 간행물의 이념적 정확성을 검토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KdF는 히틀러에게 직접 보고하는 5개의 주요 부서(''Hauptämter'')로 구성되었다. 특히 제Ⅱ국은 보울러의 부관이기도 했던 빅토르 브라크 아래에서 특별한 임무를 맡았다.[2] 조직 구성은 다음과 같다.
부서 | 원어 명칭 | 주요 업무 | 책임자 | 비고 |
---|---|---|---|---|
제Ⅰ국 | Privatkanzlei | 총통 개인 업무 | 알베르트 보어만 | |
제Ⅱ국 | Angelegenheiten betr. Staat und Partei | 국가 및 당 관련 업무 | 빅토르 브라크 | T4 작전 등 특별 임무 수행 |
제Ⅱ국 a과 | Stellvertretender Leiter des Hauptamtes II | 제Ⅱ국 부책임 | 베르너 블랑켄부르크 | |
제Ⅱ국 b과 | 국가성청 관련 사항, 은사 관리 | 한스 헤펠만 | 대리: 리하르트 폰 헤게너 | |
제Ⅱ국 c과 | 국방군, 경찰, SD, 교회 담당 | 라인홀트 포어베르크 | ||
제Ⅱ국 d과 | 당내 문제 담당 | 부흐홀츠 (초대) 브뤼멜 (1942년부터) | ||
제Ⅲ국 | Gnadenamt für Parteiangelegenheiten | 당 업무 관련 사면 | 후베르트 베르켄캄프 (초대) 쿠르트 기제 (1941년부터) | |
제Ⅳ국 | Sozial- und Wirtschaftsangelegenheiten | 사회 및 경제 문제 | 하인리히 크니림 | |
제Ⅴ국 | Internes und Personal | 내부 및 인사 문제 | 헤르베르트 옌슈 |
나치당 지도자관방(Kanzlei des Führers der NSDAPdeu, 약칭 KdF)은 1934년 11월 베를린에 설립되었다. 이는 한스 하인리히 라머스가 이끄는 국가 총리실이나 마르틴 보어만이 이끄는 나치당 총리실(1941년까지는 '부총통 관방)과는 별개의 기관이었다. KdF의 설립 목적 중 하나는 아돌프 히틀러의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1941년 이후 보울러와 KdF의 영향력은 점차 감소했으며, 마르틴 보어만에게 많은 권한을 빼앗겼다. 결국 KdF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한스 하인리히 라머스가 이끄는 국가 총리실에 흡수되었다.
3. 주요 활동
KdF의 책임자로는 SS-''Obergruppenführer'' 필리프 보울러가 임명되었으며, 그는 'NSDAP 총통 관방장'(Chef der Kanzlei des Führers der NSDAPdeu)이라는 직함을 가졌다. 히틀러는 보울러의 강한 충성심과 효율성, 이념적 광신성을 높이 평가하여 이 자리에 앉혔다. 보울러의 부관은 SS-''Sturmbannführer'' 카를 프라이헤어 미셸 폰 튀슬링(Karl Freiherr Michel von Tüßlingdeu)이었다. KdF는 처음에는 베를린의 뤼초우 우퍼(Lützow Uferdeu)에서 운영되다가, 1939년에는 포스슈트라세(Voßstraße) 8번지에 있는 새로운 국가 총리실 건물 근처로 이전했다. 당시 KdF는 26명의 직원으로 시작했으나, 1942년까지 그 규모가 5배로 증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초기에 KdF는 히틀러와 당 관계자 간의 서신을 처리하고, 이를 통해 히틀러가 "국민들의 관심사에 직접적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했다. 주로 사소한 불만 사항, 개인적인 고충, 당원 간의 분쟁 등을 다루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KdF의 업무는 확장되어, 요제프 괴벨스의 국민계몽선전부와 협력하여 나치당 간행물의 이념적 정확성을 검토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또한 다음과 같은 다양한 신청 및 민원 업무를 처리했다.
이러한 업무 중 특히 인종 및 우생학 관련 업무는 이후 T4 작전으로 이어지는 배경이 되었다.
KdF는 다음과 같은 5개의 주요 부서(Hauptämterdeu)로 구성되었으며, 모두 히틀러에게 직접 보고했다.
부서 | 독일어 명칭 | 주요 업무 | 책임자 |
---|---|---|---|
Hauptamt I | Privatkanzleideu | 총통 개인 업무 | 알베르트 보어만 |
Hauptamt II | Angelegenheiten betr. Staat und Parteideu | 국가 및 당 관련 업무 | 빅토르 브라크 (부국장: 베르너 블랑켄부르크) |
Hauptamt III | Gnadenamt für Parteiangelegenheitendeu | 당 관련 사면 업무 | 후베르트 베르켄캄프 (1941년부터 쿠르트 기제) |
Hauptamt IV | Sozial- und Wirtschaftsangelegenheitendeu | 사회 및 경제 문제 | 하인리히 크니림 |
Hauptamt V | Internes und Personaldeu | 내부 및 인사 문제 | 헤르베르트 옌슈 |
이 중 빅토르 브라크가 이끈 Hauptamt II는 1939년부터 시작된 T4 작전, 즉 정신 질환 및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안락사 프로그램을 조직하고 실행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자세한 내용은 #T4 작전 참조)
그러나 1941년 이후 보울러와 KdF의 영향력은 점차 감소했으며, 마르틴 보어만에게 많은 권한을 빼앗겼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진행되면서 KdF의 중요성은 더욱 줄어들었고, 결국 한스 하인리히 라머스가 이끄는 국가 총리실에 흡수되었다. 전쟁 말기에는 직원 수도 크게 감소한 것으로 보인다.
1945년 10월 10일, 연합국 관리 이사회는 법률 제2호를 통해 나치당의 여러 조직과 함께 KdF를 공식적으로 금지하고 그 재산을 몰수했다.
3. 1. T4 작전
총통 관방(KdF)의 Hauptamt II(국가 및 당 업무 담당 부서, 책임자 빅토르 브라크) 소속 관료들은 이른바 T4 작전이라 불리는 '안락사' 프로그램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 프로그램은 정신 질환이나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조직적으로 살해하는 것을 목표로 했으며, 1939년부터 시작된 아동 '안락사' 계획도 포함되었다.
1939년 4월부터 한스 헤펠만은 아동 '안락사' 계획을 위탁받았고, 같은 해 7월 말부터는 정신 장애인의 대량 학살 계획이 시작되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1939년 9월 1일자(소급 적용) 서한을 통해 총통 관방장 필리프 보울러와 자신의 주치의 카를 브란트를 안락사 프로그램 책임자로 공식 임명했다.[1] 히틀러가 보울러를 선택한 이유 중 하나는 그의 강한 충성심과 더불어, 총통 관방이 작전을 은밀하게 지시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보울러는 15~20명의 의사로 구성된 선발팀을 조직하고, 전쟁 대비를 위한 병상 및 인력 확보 필요성을 명분으로 내세워 프로그램을 정당화하려 했다.
실제 작전 실행은 보울러의 부하인 빅토르 브라크와 SA-''Oberführer'' 베르너 블랑켄부르크 등에게 맡겨졌다. 총통 관방의 직접적인 개입을 은폐하기 위해, 브라크가 작전 관리를 책임졌다. 아동 '안락사'와 관련된 살해 단계에서는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유전성 중증 질환의 과학적 등록을 위한 국가 위원회'(Reichsausschuss zur wissenschaftlichen Erfassung erb- und anlagebedingter schwerer Leiden|라이히스아우스슈스 추어 비센샤프틀리헨 에어파숭 에릅- 운트 안라게베딩터 슈베러 라이덴deu)라는 위장 명칭이 사용되었고, 관련자들은 코드명을 사용했다. 살해 대상자를 선정하는 과정에서는 형식적으로 세 명의 의사(정신과 의사 포함)가 진단에 동의해야 했지만, 실제로는 해당 인물의 노동 능력에 대한 경제적 판단이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환자 이송 및 살해를 실행하기 위해 '공익 환자 수송 유한회사'(Gemeinnützige Krankentransport GmbH|게마인뉘치게 크랑켄트란스포르트 게엠베하deu)라는 위장 조직이 설립되었고, 라인홀트 포어베르크가 책임을 맡았다. 이 조직의 사무실은 베를린의 티어가르텐슈트라세 4번지(Tiergartenstraße|티어가르텐슈트라세deu 4)에 위치했는데, 여기서 작전의 약칭인 'T4'가 유래했다. 히틀러는 비밀 유지를 극도로 강조하며 보울러에게 총통 관방이 작전에 직접 관여한 사실이 드러나서는 안 된다고 지시했다.
T4 작전은 1941년 8월에 공식적으로 중단되었지만, 작전에 가담했던 인력들은 다른 학살 계획에 동원되었다. 이전에 '안락사 계획의 보조원'으로 일했던 92명은 1941년 9월 이후 동부 점령 지역으로 파견되어 오딜로 글로보치니크의 지휘 아래 라인하르트 작전에 참여했다. 이들은 폴란드계 유대인 약 170만 ~ 190만 명을 학살하고 절멸 수용소로 이송하는 데 깊숙이 관여했다.[3] 이들의 급여는 여전히 총통 관방에서 지급되었다.[4] T4 작전 당국 자체도 공식 중단 이후 사실상 총통 관방으로부터 독립되어 존속했으며, 글로보치니크가 인사 책임을 맡았음에도 총통 관방은 인사 문제에 대한 관리를 유지했다.
4. 종전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인 1945년 10월 10일, 연합국 관리 이사회는 법률 제2호를 통해 나치당 지도자관방(총통 관방)의 활동을 금지하고 모든 재산을 몰수하였다.
참조
[1]
문서
Das Schreiben Hitlers im Faksimile
http://nuremberg.law[...]
Nürnberger Dokument PS-630
[2]
간행물
zusammengestellt nach staatsanwaltschaftlichen Ermittlungen gegen Verantwortliche der Aktion T4 bei
[3]
서적
Euthanasie im NS-Staat.
[4]
서적
Die Aktion Reinhard.
[5]
서적
Leaders of the SS and German Police, Vol. 1
R. James Bender Publishing
[6]
서적
Deutschland-Sein oder Nicht-sein?
Materialismus Verlag
[7]
서적
The Origins of Nazi Genocide: From Euthanasia to the Final Solution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8]
서적
Hitler: 1936–1945, Nemesis
W. W. Norton & Company
[9]
서적
From Racism to Genocide: Anthropology in the Third Reich
https://archive.org/[...]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10]
서적
The Destruction of the European Jews
https://archive.org/[...]
Holmes & Meier
[11]
서적
Racial Hygiene: Medicine under the Nazis
https://archive.org/[...]
Harvard University Press
[12]
서적
Leaders & Personalities of the Third Reich, Vol. 1
R. James Bender Publishing
[13]
서적
The Encyclopedia of the Third Reich
MacMillan Publishing
[14]
서적
The Routledge Companion to Nazi Germany
https://archive.org/[...]
Routle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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