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경 (고려)
1. 개요
남경은 고려 시대에 설치된 지역으로, 현재의 서울 일대에 해당한다. 고려 문종 21년(1067년)에 처음 설치되었으며, 숙종 대에는 남경 천도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궁궐이 건설되었다. 남경의 영역은 북악산, 인왕산 등을 경계로 설정되었으며, 고려 시대 여러 왕조에서 천도 논쟁이 벌어졌다. 특히 공민왕은 남경 천도를 추진했으나, 전쟁과 기근, 반대 여론으로 인해 실행되지 못했다. 우왕과 공양왕 대에도 천도 논의가 있었으나, 공민왕 때와 같은 이유로 무산되었다. 공양왕은 남경으로 천도했으나, 곧 개경으로 환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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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경 -
서경 (고려)
고려 시대 평양을 지칭하던 서경은 태조 때부터 중요시되어 행정 기구가 확립되었으나, 묘청의 난과 조위총의 난 이후 위상이 변화되었고 몽골 침략기에 동녕부로 편입되었다가 고려에 반환된 후 평양부로 개칭되었다. -
고려 문종 -
문종 (고려)
문종은 고려 제11대 왕으로, 유능한 인재 등용과 과거 제도 정비, 여진족 정벌 및 국방력 강화 등의 노력으로 고려의 전성기를 이끌었으나, 문벌 귀족 사회의 폐단이 시작된 시기이기도 하다. -
고려 문종 -
전시과
전시과는 고려시대 관리들의 관직과 인품을 기준으로 토지를 지급하던 제도로, 시정전시과, 개정전시과, 경정전시과를 거치며 문무 관료, 군인, 한인에게 수조권을 지급했으나 관직에서 물러나거나 사망 시 반납되었고 과전법 시행으로 폐지되었다. -
대한민국의 역사에 관한 -
백낙청
백낙청은 대한민국의 영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 사회운동가로서, 《창작과비평》 창간, D. H. 로런스 연구, 유신 정권 비판, 남북 화해와 통일 운동 참여, 민족 문학론과 분단 극복론 주창 등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
대한민국의 역사에 관한 -
한승헌
2. 위치와 영역
남경의 영역은 동쪽으로 대봉(大峰), 서쪽으로 기봉(岐峰), 북쪽으로 면악(面嶽), 남쪽으로 사리(沙里)를 경계로 하였다. 이 중 면악은 북악산을 가리킨다. 사리는 '모래마을'이라는 이름으로 보아 용산 일대 한강 백사장으로 생각되기도 하지만, 면악에서 바라볼 수 있는 시야의 한계를 고려하면 조선 시대 황토현(黃土峴) 앞으로 추정된다. 대봉은 창덕궁 뒤 응봉(應峰)에서부터 송현(松峴)까지의 산줄기이며, 기봉은 인왕산으로 추정된다. 남경 행궁은 향원지(香遠池) 서쪽 언덕 부근으로 추정되며, 연흥전(延興殿), 천수전(天壽殿), 북녕문(北寧門), 남명문(南明門) 등의 건물이 있었다.
2.1. 지리적 범위
남경의 영역은 동쪽을 대봉(大峰), 서쪽을 기봉(岐峰), 북쪽을 면악(面嶽), 남쪽을 사리(沙里)로 삼았다. 이 가운데 면악(面嶽)은 북악산을 가리킴이 명확하다. 사리(沙里)는 ‘모래마을’이라는 이름으로 볼 때 용산 일대의 한강 백사장으로 생각되기도 하나, 면악에서 바라볼 수 있는 시야의 한계를 고려하면 조선 시대의 황토현(黃土峴) 앞으로 추정된다. 대봉(大峰)은 창덕궁 뒤 응봉(應峰)에서부터 송현(松峴)까지의 산줄기로, 기봉(岐峰)은 인왕산으로 추정된다.
2.2. 행궁의 위치
남경의 영역은 동쪽을 대봉(大峰), 서쪽을 기봉(岐峰), 북쪽을 면악(面嶽), 남쪽을 사리(沙里)로 삼았다. 이 가운데 면악(面嶽)은 북악산을 가리킴이 명확하다. 사리(沙里)는 ‘모래마을’이라는 이름으로 볼 때 용산 일대의 한강 백사장으로 생각되기도 하나, 면악에서 바라볼 수 있는 시야의 한계를 고려하면 조선 시대의 황토현(黃土峴) 앞으로 추정된다. 대봉(大峰)은 창덕궁 뒤 응봉(應峰)에서부터 송현(松峴)까지의 산줄기로, 기봉(岐峰)은 인왕산으로 추정된다.
남경 행궁의 영역이 좁아 그 남쪽을 경복궁 영역으로 삼았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 있으며, 이를 고려하면 남경 행궁은 향원지(香遠池) 서쪽 언덕 부근으로 추정된다. 남경 행궁에는 연흥전(延興殿), 천수전(天壽殿), 북녕문(北寧門), 남명문(南明門) 등의 건물이 있었다.
3. 남경 천도 논쟁
고려 문종 대에 최초로 남경 설치가 시작된 이후, 고려 숙종, 고려 공민왕, 우왕, 공양왕 대에 이르기까지 남경으로 수도를 옮기려는 논의가 여러 차례 있었다.
문종 대에는 남경이 처음 설치되고 궁궐이 건설되었다. 숙종 대에는 일관 김위제의 주장에 따라 남경개창도감이 설치되고 이궁이 완성되었으며, 최사추 등의 상소와 김위제의 도참설 등이 천도 논의에 영향을 미쳤다.
공민왕은 남경 천도를 적극 추진하였으나, 계속되는 전쟁과 기근으로 실행이 어려웠고, 윤택 등의 유학자들의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 우왕과 공양왕 역시 남경 천도를 논의했으나 비슷한 이유로 무산되었고, 공양왕은 일시적으로 남경으로 천도했다가 다시 개경으로 환도하기도 했다.
3.1. 문종 대
고려 문종 21년(1067년)에 최초로 남경이 설치되었다. 문종 22년(1068년)에는 남경에 궁궐이 건설되었다.
1099년 일관(日官) 김위제의 주장에 따라 숙종 6년(1101년) 9월에는 남경개창도감(南京開創都監)이 설치되었으며, 3년 뒤 숙종 9년(1104년) 5월에는 남경의 이궁(離宮)이 완성되었다.
일관(日官) 최사추 등은 남경 건설에 영향을 미치는 상소를 올렸다.
김위제는 도선의 비기·답산가, 그리고 저자가 불명확한 신지비사(神誌秘詞)를 근거로 개성의 지덕이 그의 시기에 쇠하였음을 이야기하며 천도의 논리를 제공하였다. 그는 비기의 내용을 인용하여 "11, 12, 1, 2월을 중경에서 지내고 3, 4, 5, 6월을 남경에서 지내며 7, 8, 9, 10월을 서경에서 지내면 36개국이 와서 조공할 것이다."라고 주장하였고, 이는 묘청의 난과 같은 고려조의 여러 사건들에서 여러 차례 근거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3.2. 숙종 대
1099년 일관(日官) 김위제(金謂磾)의 주장에 따라 숙종 6년(1101년) 9월 남경개창도감(南京開創都監)이 설치되었으며, 3년 뒤 숙종 9년(1104년) 5월에는 남경의 이궁(離宮)이 완성되었다. 신도시였던 남경에는 거란 사람들도 귀순하여 살았다.
일관(日官) 최사추 등은 남경 건설에 영향을 미친 상소를 다음과 같이 올렸다.
김위제는 도선의 비기·답산가와 저자가 불명확한 신지비사(神誌秘詞)를 근거로 개성의 지덕이 쇠하였다고 주장하며 천도의 논리를 제공하였다. 그는 “건국한 후 1백 60여 년에 목멱벌에 도읍한다”고 하면서, 오행설(五行說)을 근거로 제시하였다. 비기(秘記)에는 “11, 12, 1, 2월을 중경에서 지내고 3, 4, 5, 6월을 남경에서 지내며 7, 8, 9, 10월을 서경에서 지내면 36개국이 와서 조공할 것이다.”라는 내용이 인용되었는데, 이는 묘청의 난 등 고려 시대의 여러 사건에서 근거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3.3. 공민왕 대
공민왕은 1356년 이후 남경 천도 작업을 진행하고 이 과정을 주도하였다. 1357년 1월 임진일에 왕이 봉은사에 가서 태조 진전에 참배하고 한양(漢陽)에 천도할 데 대하여 점을 쳤더니 왕의 손에 '정(靜)'자가 잡혔고, 이제현에게 명령하여 점을 치라 하였더니 '동(動)'자를 얻었다는 기록을 통해 국왕의 천도 의지가 분명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속적인 전쟁과 기근으로 인해 그 실행은 힘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명확한 중단 기사는 없으나 공민왕 즉위 10년을 넘기면서 적극적인 천도 진행 기사를 찾아볼 수는 없게 된다. 또한 윤택 등의 유학자들이 공민왕을 제지했다는 점 또한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