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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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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제국군은 1894년 갑오개혁 이후 대한제국 개국과 함께 창설된 군대이다. 고종은 서양식 군사 제도를 도입하고 육군무관학교 등을 설립하여 군사력 강화에 힘썼으나,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군사적 압력으로 1907년 강제 해산되었다. 중앙군, 지방군, 군 통수 기구, 군사 교육 기관으로 구성되었으며, 다양한 무기와 군복을 갖추었다. 해군으로는 양무호와 광제호를 운용했다. 해산 이후 일부 병사들은 의병에 참여하여 항일 투쟁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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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군
군대 정보
대한제국 국기
대한제국 국기
대한제국 군대 휘장
대한제국 군대 휘장
표어(제공된 정보 없음)
창설일1897년 10월 13일
해체일1910년
군 종류황실 근위대
대한제국 육군
대한제국 해군
지방군
사령부(제공된 정보 없음)
비행 시간(제공된 정보 없음)
웹사이트(제공된 정보 없음)
지휘부
총사령관고종 황제
순종 황제
총사령관 직책대한제국 황제
국무총리(제공된 정보 없음)
국무총리 직책(제공된 정보 없음)
군부대신조희연 (초대)
이병무 (마지막)
군부대신 직책(제공된 정보 없음)
사령관(제공된 정보 없음)
사령관 직책(제공된 정보 없음)
병력
징병제(제공된 정보 없음)
가용 인력(제공된 정보 없음)
남성 가용 인력(제공된 정보 없음)
적합 인력(제공된 정보 없음)
남성 적합 인력(제공된 정보 없음)
동원 가능 인력(제공된 정보 없음)
여성 동원 가능 인력(제공된 정보 없음)
현역 군인28,000명 (1907년)
순위(제공된 정보 없음)
예비군(제공된 정보 없음)
배치(제공된 정보 없음)
자원
군사 지출(제공된 정보 없음)
GDP 대비 군사비 비율(제공된 정보 없음)
공급
국내 공급 업체(제공된 정보 없음)
해외 공급 업체(제공된 정보 없음)
수입(제공된 정보 없음)
수출(제공된 정보 없음)
역사
역사한국의 군사사
*조선의 만주 침공
*남대문 전투
*의화단 운동
계급(제공된 정보 없음)

2. 역사

대한제국 개국 이전 조선군은 흥선대원군 집권 당시 약 16,000명 규모의 중앙군을 보유했으나, 대부분 훈련이 부족하고 절반 이상이 노약자로 구성된 미약한 군대였다.[41] 대원군은 화약 무기를 다루는 포군(砲軍)을 증강하고, 강화유수부를 진무영으로 개편하는 등 지방군 강화를 꾀했다. 고종은 서양 군함들의 출몰로 인한 혼란을 겪으며 해안 포대를 강화하려 했다. 1873년 흥선대원군 실각 후, 고종은 친위부대인 무위소를 설치하여 친정체제를 공고히 했다. 1876년과 1880년, 고종은 일본수신사를 파견하여 일본의 신식 군제와 무기, 기술을 배우려 했으며, 청국에는 1879년에 신식 무기 구입을 요청하고 군사 지원 조약을 체결했다.

갑오개혁 직후 조선 군대는 훈련대와 신설대 뿐이었고, 지방은 무방비 상태였다. 김홍집 내각은 지방에 군대 배치를 구상했고, 을미개혁 당시 평양 등에 훈련대 대대를 두었다. 김홍집 내각은 대한제국군에 74만여 원을 투자했으나,[42] 아관파천으로 중단되었다.

이후 러시아 고문단의 지원으로 시위대가 다시 만들어지고, 지방에는 지방대와 진위대가 편성되었다. 육군무관학교(1896~1909년)와 통제영학당(1893~1896년)에서 장교를 양성했다. 1899년에는 최고통수기구인 원수부와 참모부인 참모부가 개설되었고, 헌병사령부가 원수부 직속으로 설치되었다. 황제 경호를 위한 호위대도 창설되었으며, 원수부 군무국 총장이 호위대장을 겸임했다.

초기 중앙군과 지방군은 1901년 편제상 18,378명 규모였다. 1897년 중앙군 시위대는 약 2,600명, 지방 진위대는 7천 명 수준이었다. 1904년 전까지 시위대와 친위대는 각각 5,700여 명과 4,840명, 지방군은 18,000명이었다. 1905년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영향으로 군축이 이루어져 시위대는 2,513명으로 축소되고 친위대는 폐지, 지방군 진위대는 4,438명 수준으로, 중앙군과 지방군을 합쳐 7,000명 수준이었다. 1907년 군제개혁으로 중앙군은 4,215명으로 늘었지만, 진위대는 4,305명이었다.

1899년 의화단 운동 당시 대한제국은 참전을 거부했다. 이후 고종이 참전 의사를 밝혔으나, 일본 공사는 이를 거절했다.[43]

간도의 한국인들은 대한제국 정부에 보호를 요청했고, 1901년 대한제국 정부는 간도에 대한 행정권을 펴기 위한 태세를 갖췄다. 1902년 5월 22일 이범윤을 북간도시찰로 임명해 대한제국군을 간도에 파견했다.[43] 1900년 한인들은 러시아 제국의 세력을 이용하여 간도의 군과 지방 관리들을 축출하고 이 지역을 장악, 청나라와 다투었다.

1904년 양측 전투로 한인 피해가 속출, 청은 대한제국 외부에 이범윤 소환 및 처벌을 요청했다. 변계경무소나 진위대도 감계회담을 추진했으나,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교섭 중단을 요청하며 무산되었다. 6월 변계경무관 최남륭 등은 이범윤 소환과 현상유지를 합의했다. 이후 국경 문제는 간도협약으로 해결된다.

조선갑오개혁을 통해 조선군을 쇄신했다. 1895년 2월 12일(개국 504년 1월 18일) 훈련대가 설립되었고, 5월에는 친위대시위대가 편성되었다. 을미사변으로 시위대는 훈련대에 흡수되었지만, 훈련대 역시 해산되고 친위대와 진위대로 개편되었다. 1897년 1월 러시아 지원으로 시위대가 부활했다. 10월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면서, 대한제국군은 친위대, 시위대, 진위대로 시작했다.

1899년 「대한국 국제」 제5조에 따라 일본 제국 육군을 본뜬 국군을 편성하게 되었으나, 지원제를 채택했다. 법제상의 병력은 약 9,000명이었다.

1902년, 친위대는 시위대와 통합되어 시위혼성여단이 되었다. 진위대는 1900년 9월부터 전국적인 편성을 전개하여 최성기에는 6개 연대 2만 명 정도의 병력을 보유했으나, 러일전쟁 이후 8개 대대로 축소되었다.[27]

1905년부터는 러일전쟁이 끝나고 일본의 입김이 강해지면서 군축이 이뤄졌다. 시위대는 2,513명으로 축소되고 친위대는 폐지되었다. 당시 지방군인 진위대는 4,438명 수준으로, 중앙군과 지방군을 합쳐 7,000명 수준이었다. 1907년에는 다시 군제 개혁이 이루어져 중앙군이 개편되면서 4,215명으로 늘어났지만, 진위대는 4,305명이었다. 인원 변화는 크지 않았지만, 일본은 남부의 병력을 북부로 이동시키는 등 중국을 대비한 식민화 작업에 들어갔다.

1907년(광무 11년) 7월 24일에 맺어진 제3차 한일 협약의 비밀 협정(부속 각서)에는 군대 해산 규정이 있었다.[28] 8월 1일, 대한제국군 장교들은 비상 소집에 따라 각 부대에 배속된 일본군 장교와 함께 조선 주차군 사령관(하세가와 요시미치) 관저에 집결했다. 이 자리에서 군부대신 이병무순종 황제의 명에 따라 대한제국군 해산을 선포했다.

하세가와 요시미치의 지시에 따라 대한제국군 병사들은 동대문 근처 훈련원 광장에 집결했다. 2,000명이 넘는 병사들이 은급 지급과 훈련을 이유로 총을 소지하지 않은 채 모였지만, 무장한 일본군이 이들을 포위했다. 군부 협판(차관) 한진창은 군대 해산과 은급 지급[29]을 발표했지만, 병사들 사이에서는 동요가 일었다.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은 불길한 낌새를 느끼고 훈련원에 나가지 않았고, 제2연대장 구의선도 함께 했다.[30] 명성황후 시해 이후 일본군에 복수하려던 박승환과 부하들은 대한제국군 해산으로 복수의 기회를 잃을 것을 우려했다. 훈련원의 소식을 들은 박승환은 일본군 장교 앞에서 권총으로 자결했고, 대장의 죽음에 분노한 병사들은 무기고에서 무장한 뒤 제2연대, 훈련원 병사들과 합세하여 약 600명의 병력으로 일본군과 총격전을 벌였다.

전투를 알리는 프랑스 일간지 "르 프티 저널" 1907년 8월 4일자.


대한제국군 병사들은 포위를 뚫고 종로에서 남대문으로 향했지만, 호치키스 기관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에 밀려 탄약이 떨어지고 비로 인해 구식 총이 발사되지 않자 백병전을 벌였다. 결국 일본군에 제압된 대한제국군 병사들은 도망쳤지만, 일본군은 민가까지 수색하며 조선인 68명을 사살하고 100여 명을 부상시켰으며, 500여 명을 체포했다. 일본 측은 가지와라 요시히사 보병 대위(보병 제51연대 제3대대 제9중대장) 등 3명이 사망하고 27명이 부상당했다.

남대문 전투한성부가 수도가 된 이후 조선 왕조 멸망까지 벌어진 유일한 전투였다.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군은 해산되었고, 각지 분견대도 해산되었다. 그러나 무장 해제를 거부한 병사들은 각지에서 폭동을 일으켜 의병 투쟁에 참여했다. 구 대한제국군의 봉기와 민간인의 저항은 한일 병합 이후 1914년경까지 이어졌다. 진위대는 1905년 이후 의병 대장 원용팔(元容八)을 체포한 것을 비롯하여 강릉·단양·예천의 의병을 체포하거나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하였다. 을사조약으로 국권을 잃은 후 진위대는 오히려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의병운동을 진압한 것이다. 남대문 전투 이후 일제에 의해 해산당한 대한제국군 가운데 최대 550여명이 서소문을 통해 탈출한 것으로 추정되며, 일부는 정미의병에 참가하였다.

해산된 대한제국군은 황제 호위를 위한 소규모 근위병인 '근위 보병대'와 '근위 기병대'로 재편되었다.[30] 이들은 한일 병합 이후에도 '조선 보병대'와 '조선 기병대'로 존속했지만 점차 축소되어 1930년에 완전히 폐지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근위병#일본 통치하의 조선 문서 참고)

시위 군악대는 이왕직 양악대로 개편되었으나 1915년에 해산되었다.[31]

2. 1. 갑오개혁과 대한제국군의 성립 (1895년 ~ 1897년)

조선군을 기반으로 1894년 7월 27일 갑오개혁으로 군제가 개편되면서 대한제국군이 성립되었다. 시위대, 친위대, 진위대 등이 조직되어 규모가 확장되었으나, 일본의 개입, 국가 역량 부족, 고위 관료들의 판단 오류로 제대로 활동하지 못하고 최후를 맞았다. 병력 충원은 모병제를 유지했으며, 통수권자는 황제였다. 갑오개혁 직후에는 군무아문(軍務衙門)이, 을미개혁 때는 군부(軍部)가 담당했고, 군부대신이 오늘날의 국방장관 역할을 했다.[41]

갑오개혁 직후 조선 군대는 훈련대와 신설대 뿐이었고, 지방은 무방비 상태였다. 김홍집 내각은 지방에 군대 배치를 구상했고, 을미개혁 당시 평양 등에 훈련대 대대를 두었다. 김홍집 내각은 대한제국군에 74만여 원을 투자했으나,[42] 아관파천으로 중단되었다.

이후 러시아 고문단의 지원으로 시위대가 다시 만들어지고, 지방에는 지방대와 진위대가 편성되었다. 육군무관학교(1896~1909년)와 통제영학당(1893~1896년)에서 장교를 양성했다. 1899년에는 최고통수기구인 원수부와 참모부인 참모부가 개설되었고, 헌병사령부가 원수부 직속으로 설치되었다. 황제 경호를 위한 호위대도 창설되었으며, 원수부 군무국 총장이 호위대장을 겸임했다.

초기 중앙군과 지방군은 1901년 편제상 18,378명 규모였다. 1897년 중앙군 시위대는 약 2,600명, 지방 진위대는 7천 명 수준이었다. 1904년 전까지 시위대와 친위대는 각각 5,700여 명과 4,840명, 지방군은 18,000명이었다. 1905년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영향으로 군축이 이루어져 시위대는 2,513명으로 축소되고 친위대는 폐지, 지방군 진위대는 4,438명 수준으로, 중앙군과 지방군을 합쳐 7,000명 수준이었다. 1907년 군제개혁으로 중앙군은 4,215명으로 늘었지만, 진위대는 4,305명이었다.

1899년 의화단 운동 당시 대한제국은 참전을 거부했다. 이후 고종이 참전 의사를 밝혔으나, 일본 공사는 "우스운 일"이라며 거절했다.[43]

간도의 한국인들은 대한제국 정부에 보호를 요청했고, 1901년 대한제국 정부는 간도에 대한 행정권을 펴기 위한 태세를 갖췄다. 1902년 5월 22일 이범윤을 북간도시찰로 임명해 대한제국군을 간도에 파견했다.[43] 1900년 한인들은 러시아 제국의 세력을 이용하여 간도의 군과 지방 관리들을 축출하고 이 지역을 장악, 청나라와 다투었다.

1904년 양측 전투로 한인 피해가 속출, 청은 대한제국 외부(外部)에 이범윤 소환 및 처벌을 요청했다. 변계경무소나 진위대도 감계회담을 추진했으나,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교섭 중단을 요청하며 무산되었다. 6월 변계경무관 최남륭 등은 이범윤 소환과 현상유지를 합의했다. 이후 국경 문제는 간도협약으로 해결된다.

조선갑오개혁을 통해 조선군을 쇄신했다. 1895년 2월 12일(개국 504년 1월 18일) 훈련대가 설립되었고, 5월에는 친위대와 시위대가 편성되었다. 을미사변으로 시위대는 훈련대에 흡수되었지만, 훈련대 역시 해산되고 친위대와 진위대로 개편되었다. 1897년 1월 러시아 지원으로 시위대가 부활했다. 10월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면서, 대한제국군은 친위대, 시위대, 진위대로 시작했다.

1899년 「대한국 국제」 제5조에 따라 일본 제국 육군을 본뜬 국군을 편성하게 되었으나, 지원제를 채택했다. 법제상의 병력은 약 9,000명이었다.

1902년 친위대는 시위대와 통합, 시위혼성여단이 되었다. 진위대는 1900년 9월부터 전국 편성을 전개, 최성기 6개 연대 2만 명 정도였으나, 러일 전쟁 이후 8개 대대로 축소되었다[27]

2. 2. 광무개혁과 군사력 강화 (1897년 ~ 1904년)

대한제국 선포 이전, 조선군은 흥선대원군 집권 당시 약 16,000명 규모의 중앙군을 보유한 미약한 군대였다. 대부분의 병력은 훈련이 부족했고, 절반 이상이 노약자로 구성되어 있었다.[41] 대원군은 화약 무기를 다루는 포군(砲軍)을 증강하고, 강화유수부를 진무영으로 개편하는 등 지방군 강화를 꾀했다.

고종은 서양 군함들의 출몰로 인한 잦은 혼란을 겪으며 해안 포대를 강화하려 했다. 1873년 흥선대원군 실각 후, 고종은 친위부대인 무위소를 설치하여 친정체제를 공고히 했다. 1876년과 1880년, 고종은 일본수신사를 파견하여 일본의 신식 군제와 무기, 기술을 배우려 했으며, 청국에는 1879년에 신식 무기 구입을 요청하고 군사 지원 조약을 체결했다.

갑오개혁 직후, 조선 군대는 훈련대와 해체된 기존 군영의 군사들을 모아 임시로 편성한 신설대가 유일했으며, 그나마 서울에만 존재했다. 지방은 무방비 상태였기 때문에 을미의병이 일어났을 때 이를 제어할 군대가 없었다. 김홍집 내각은 지방에 군대를 배치한다는 구상을 하고, 을미개혁 당시 평양 등지에 훈련대 대대를 두었다. 김홍집 내각은 대한제국군에 74만여 원을 투자했는데, 당시 390만 원 정도였던 예산을 감안하면 매우 큰 금액이었다. 제1 훈련대비로 210,795원, 제2 지방대비로 50,713원을 지출했고, 예산 외로 554,276원 17전을 사용했다.[42] 그러나 아관파천으로 김홍집 내각이 무너지면서 제대로 시작도 하지 못하고 중단되었다.

이후 러시아 고문단의 지원을 받아 시위대가 다시 만들어지고, 지방에는 해산된 구식 군대의 병사들을 임시로 편성한 지방대와 진위대가 만들어졌다. 1896년부터 1909년까지 육군 장교를 양성하는 육군무관학교와 1893년부터 1896년까지 해군 장교를 양성하는 통제영학당이 운영되었다.

점차 군대의 모습을 갖춰가면서 제주도에도 진위대가 설치되고, 한성에는 육군 법원과 병원이 만들어졌다.

1899년(광무 3년)에는 최고 통수 기구인 원수부와 참모 본부인 참모부가 개설되어 근대 군 통수 기구가 도입되었다. 원수부 산하에는 군무국, 검사국, 기록국, 회계국이 설치되었으며, 헌병사령부가 원수부 직속으로 설치되었다. 황제의 근접 경호를 맡는 경호실 격의 호위대가 창설되었는데, 원수부 군무국 총장이 호위대장을 겸임했다.

초기에는 중앙군을 구성하고 지방군을 중앙군과 비슷한 편제로 고쳐나갔는데, 편제상 1901년에 18,378명 규모였다. 실제로는 1897년에 중앙군인 시위대가 약 2,600명, 지방의 진위대는 7천 명 수준이었다. 1904년 전까지는 중앙군인 시위대와 친위대의 규모가 각각 5,700여 명과 4,840명에 이르렀으며 지방군은 도합 18,000명이었다.

1902년, 친위대는 시위대와 통합되어 2개 연대로 구성된 시위혼성여단이 되었다. 한편 진위대는 1900년 9월부터 전국적인 편성을 전개하여 최성기에는 6개 연대 2만 명 정도의 병력을 보유했으나, 러일전쟁 이후 8개 대대로 축소되었다.[27]

1905년부터는 러일전쟁이 끝나고 일본의 입김이 강해지면서 군축이 이루어져 시위대는 2,513명으로 축소되고 친위대는 폐지되었다. 당시 지방군인 진위대는 4,438명 수준이었다. 즉, 중앙군과 지방군을 합쳐 7,000명 수준이었다. 1907년에는 다시 군제 개혁이 이루어져 중앙군이 개편되면서 4,215명으로 늘어났지만, 진위대는 4,305명이었다. 인원 변화는 크지 않았지만, 일본은 남부의 병력을 북부로 이동시키는 등 중국을 대비한 식민화 작업에 들어갔다.

2. 3. 일본의 군사적 압력과 군대 해산 (1904년 ~ 1907년)

러일 전쟁 발발 직후, 일본은 강압적으로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여 한국 내 보급을 용이하게 했다. 일본은 용산구에 주차 일본군을 주둔시켰을 뿐만 아니라, 독도에도 군사 기지를 설치했다. 1904년 5월, 일본은 한국 내 자국 군대의 공식 주둔을 선포하고, 대한제국군의 규모를 축소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대한제국군에 총 세입의 43%를 사용하는 것은 과도하다고 주장하며, 일본군이 대한제국군의 무력 역할을 대신할 것이라고 밝혔다.[41]

일본의 승리가 확실시되면서, 일본은 무관청의 대부분의 권한을 빼앗고, 1904년 말에는 이 기구를 해산하여 황제의 권위를 약화시켰다. 무관청 해산 외에도 군기창이 폐지되었고 군부 역시 축소되었다.[41]

1905년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후, 일본은 한국 대신들에게 을사조약을 강요했다. 조약에 따라 한국 정부는 해군을 해산하고 대한제국 육군의 시위대와 진위대의 병력을 감축했다.[9][18][19] 진위대의 총 병력은 3,000명 미만이었다.

시위대의 봉기를 진압하고 병영을 점령한 일본군. 1907년 8월 1일 촬영.


1907년(광무 11년) 7월 24일에 맺어진 제3차 한일 협약에 따른 비밀 협정(부속 각서)에 군대 해산 규정이 있었다.[28] 8월 1일, 새벽부터 억수같이 비가 쏟아졌지만, 대한제국군 장교들은 비상 소집에 따라 각 부대에 배속된 일본군 장교와 함께 조선 주차군 사령관(하세가와 요시미치) 관저의 한 방에 집결했다. 관저 주변은 무장한 일본군 병사들이 포위하고, 사정을 모르는 조선인 장교들 앞에 하세가와 요시미치와 함께 나타난 군부대신 이병무가 대한제국군 해산을 명하는 순종의 칙서를 갑자기 전했다.

하세가와 요시미치의 지시에 따라 대한제국군 일반 병사들은 모두 동대문 근처의 연병장 '훈련원(훈련원)' 광장에 집결했다. 2,000명이 넘는 병사들이 은급 지급과 맨손 훈련이라는 명목으로 총을 소지하지 않은 채 집결했지만, 이 또한 총검으로 무장한 일본군이 포위했다. 군부 협판(차관) 한진창이 군 해산과 은급 지급[29]을 알렸지만, 병사들 사이에서는 동요가 퍼졌다.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은 불길한 예감에 병을 핑계로 관저에도 훈련원에도 출두하지 않았고, 인접한 제2연대장 구의선도 그에 따랐다.[30] 박승환은 명성황후 시해 이후 일본군에 대한 복수를 생각하고 있었고, 부하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훈련원에서의 소동을 알게 된 박승환은 대한제국군이 해산되면 본래의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이라고 짐작하고, 호출하러 온 일본군 장교 앞에서 권총으로 자결했다. 대장의 순국을 알고 격앙된 병사들은 무기고로 몰려가 재빨리 무장을 갖추고, 제2연대, 훈련원에 있던 병사들도 여기에 합류하여 약 600명이 된 병사들은 병영을 포위한 일본군과 곧바로 총격전을 벌였다.

포위를 돌파한 대한제국군 병사들은 종로에서 남대문 방면으로 향했지만, 호치키스 기관총을 앞세운 일본군에 맞서 대한제국군 측 병사들의 탄약이 떨어지고 구식 총이 폭우 속에서 발화하지 않게 되자 격렬한 백병전이 벌어졌다. 대한제국군 병사들은 제압되어 도망쳤지만, 일본군은 도망간 민가 등을 샅샅이 수색하여 이날 조선 측은 68명이 사살, 100여 명이 부상, 500여 명이 체포되었다. 일본 측은 가지와라 요시히사 보병 대위(보병 제51연대 제3대대 제9중대장) 이하 3명이 사망, 27명이 부상했다.

남대문 전투한성부가 수도가 된 후 조선 왕조가 끝날 때까지의 유일한 전투가 되었다.

1907년 8월 1일에 국군으로서의 대한제국군은 해산되었고, 며칠 후 각지의 분견대의 해산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무장 해제를 거부한 전직 병사 일부는 정미의병 등 각지에서 폭동을 일으키고, 무력에 의한 항일 운동인 의병 투쟁에 참여했다.

2. 4. 해산 이후 (1907년 ~ 현재)

1907년 (광무 11년) 7월 24일에 맺어진 제3차 한일 협약의 비밀 협정(부속 각서)에는 군대 해산 규정이 있었다.[28] 8월 1일, 대한제국군 장교들은 비상 소집에 따라 각 부대에 배속된 일본군 장교와 함께 조선 주차군 사령관(하세가와 요시미치) 관저에 집결했다. 이 자리에서 군부대신 이병무순종 황제의 명에 따라 대한제국군 해산을 선포했다.

하세가와 요시미치의 지시에 따라 대한제국군 병사들은 동대문 근처 훈련원 광장에 집결했다. 2,000명이 넘는 병사들이 은급 지급과 훈련을 이유로 총을 소지하지 않은 채 모였지만, 무장한 일본군이 이들을 포위했다. 군부 협판(차관) 한진창은 군대 해산과 은급 지급[29]을 발표했지만, 병사들 사이에서는 동요가 일었다.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은 불길한 낌새를 느끼고 훈련원에 나가지 않았고, 제2연대장 구의선도 함께 했다.[30] 명성황후 시해 이후 일본군에 복수하려던 박승환과 부하들은 대한제국군 해산으로 복수의 기회를 잃을 것을 우려했다. 훈련원의 소식을 들은 박승환은 일본군 장교 앞에서 권총으로 자결했고, 대장의 죽음에 분노한 병사들은 무기고에서 무장한 뒤 제2연대, 훈련원 병사들과 합세하여 약 600명의 병력으로 일본군과 총격전을 벌였다.

대한제국군 병사들은 포위를 뚫고 종로에서 남대문으로 향했지만, 호치키스 기관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에 밀려 탄약이 떨어지고 비로 인해 구식 총이 발사되지 않자 백병전을 벌였다. 결국 일본군에 제압된 대한제국군 병사들은 도망쳤지만, 일본군은 민가까지 수색하며 조선인 68명을 사살하고 100여 명을 부상시켰으며, 500여 명을 체포했다. 일본 측은 가지와라 요시히사 보병 대위(보병 제51연대 제3대대 제9중대장) 등 3명이 사망하고 27명이 부상당했다.

남대문 전투한성부가 수도가 된 이후 조선 왕조 멸망까지 벌어진 유일한 전투였다.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군은 해산되었고, 각지 분견대도 해산되었다. 그러나 무장 해제를 거부한 병사들은 각지에서 폭동을 일으켜 의병 투쟁에 참여했다. 구 대한제국군의 봉기와 민간인의 저항은 한일 병합 이후 1914년경까지 이어졌다.

해산된 대한제국군은 황제 호위를 위한 소규모 근위병인 '근위 보병대'와 '근위 기병대'로 재편되었다.[30] 이들은 한일 병합 이후에도 '조선 보병대'와 '조선 기병대'로 존속했지만 점차 축소되어 1930년에 완전히 폐지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근위병#일본 통치하의 조선 문서 참고)

시위 군악대는 이왕직 양악대로 개편되었으나 1915년에 해산되었다.[31]

3. 조직

대한제국군의 기반은 조선군이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군제가 개편되면서 시위대, 친위대, 진위대 등이 편성되었으나, 일본의 간섭과 국가 역량 부족, 고위 관료들의 판단 오류로 제대로 활동하지 못하고 해체되었다. 병력 충원은 모병제를 유지했으며, 통수권자는 황제였다. 갑오개혁 직후에는 군무아문(軍務衙門)이, 을미개혁 이후에는 군부(軍部)가 군정을 담당했으며, 군부대신이 국방장관 역할을 했다.

대한제국군은 대한제국 육군대한제국 해군으로 구성되었다.

외국인 교관의 지도하에 맥심 기관총의 시연 과정을 지켜보는 대한제국 육군 병사.


육군 조직은 다음과 같다.

1899년, 대한국 국제 제5조는 "대한국 대황제께서는 국내 육해군을 통솔하고, 편제를 정하며, 계엄 해제를 명한다."라고 규정하여 황제가 군 통수권자임을 명시했다. 고종1898년 자신을 대원수로 임명하고 육해군 최고 사령관이 되었으며, 덕수궁원수부를 설치했으나 1904년 폐지되었다.

군부 조직은 다음과 같다.[34][35][36][37][38]

기관명구성
군부 (국방부에 해당)차관: 한진창
시종무관부시종무관장: 조동윤 부장
배종무관부배종무관장: 이근택 부장
장관회의소
헌병사령부국장: 엄준원 참장, 헌병대장: 장봉환 부령
헌병부
육군법원
연성학교교장: 김승규 참장
무관학교교장: 노백린 정령
유년학교
군기창창장: 김정우 부령
위생대


3. 1. 중앙군

1895년 5월에 설치된 시위대덕수궁과 황실 경비 및 수도 방어를 담당한 대한제국의 핵심 중앙군 부대였다. 시위대는 2개 대대로 구성된 1개 연대였으며, 각 대대는 2개 중대, 각 중대는 3개 소대로 편성되었다. 정원은 약 8,000명으로 추정된다. 을미사변 당시 일본군에 저항하다 실패하고 해산되었으나, 1897년 1월 러시아 군사고문의 지도로 다시 편성되어 최대 20,000명까지 증강되었다.

1897년, 대한제국군은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구성되었다. 중앙군의 핵심은 시위대(親衛隊), 호위대(扈衛隊) 및 수도 방위군으로 구성된 황실 근위대였다. 중앙군은 황제와 수도 한양을 방어하기 위해 육군 참모부 소속 정애근 참령의 직접 지휘를 받았다.

1895년, 시위대는 육군의 핵심이자 궁궐 경비를 담당했다.[2] 초기 시위대는 2개 대대, 1,700명 규모였으나, 1896년 3월 고종이 3개 대대를 추가하여 총 5개 대대, 4,400명으로 확대되었다.[9] 내부대신은 제3대대를 호위대로 배속하여 황족 호위를 담당하게 했다. 고종은 갑오개혁 이전부터 호위대를 직접 지휘했으나,[2] 개혁 이후 궁내부, 군부, 탁지부, 학부 대신이 시위대장 직을 겸임했다.[9][10] 호위대는 이후 공병대로 개편되었다가 국내 정세 불안으로 해산되었다.[11] 1896년 4월 22일, 고종은 2개 대대를 러시아 군사 체제에 따라 10개 중대로 구성된 1개 연대로 개편하고, 독립 대대 1개와 기병대 1개 대대를 추가했다.[9][11] 1900년에는 730명 규모의 호위대가 재창설되었고,[2] 1902년 시위대는 2개 연대로 확장되었다.[11]

1897년, 군부는 덕수궁 경비를 위해 수도 방어대를 재창설했다. 초기에는 일부 시위대 부대와 1,000명 규모의 1개 대대(5개 중대)로 구성되었고, 러시아 장교의 훈련을 받았다. 이후 1,070명 규모의 연대로 확장되었으며, 각 중대는 최대 200명의 경비병을 배치했다.[12] 이후 각 연대는 3,000명 규모의 3개 보병 대대, 652명 규모의 1개 포병 대대(1개 포병 중대, 2개 산악 포병 중대)로 확장되었다.[9] 1902년 10월, 군부는 추가 연대를 창설하여 2개 연대, 4,300명 규모의 독립 기병대 1개를 편성했다. 각 연대는 4개 보병 대대, 2개 포병 대대, 1개 기병 대대를 거느렸으며, 제1시위연대와 같이 원수부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았다. 최종적으로 총 병력은 4,672명, 기병 400명, 군악대 102명으로 총 5,174명에 달했다.[6][13]

조선1894년부터 1895년까지 진행된 갑오개혁을 통해 낡은 군사 제도를 개혁했다. 1895년 2월 12일(개국 504년 1월 18일), 친군영 병사 중 선발된 인원과 구세 코우히코 등 일본인 군사 고문을 교관으로 하는 훈련대가 설립되었다. 5월에는 미국인과 러시아인을 교관으로 하여 덕수궁과 황제를 호위하는 친위대시위대가 편성되었다. 을미사변 이후 시위대는 훈련대에 흡수되었으나, 훈련대 역시 명성황후 시해 책임을 지고 해산되었고, 친위대와 진위대로 개편되었다. 1897년 1월, 러시아의 지원으로 시위대가 부활했고, 10월 대한제국 선포와 함께 대한제국군은 친위대, 중앙군인 시위대, 지방군인 진위대로 구성되었다.

1902년, 친위대는 시위대와 통합되어 2개 연대로 구성된 시위혼성여단이 되었다.

이하 내용은 칙령 제6호 『군부관제』(광무 9년 2월 22일), 『한국 주차 군 한국 군대 해산에 관한 건』(1907년 8월 2일)[32], 및 『승정원일기 3206책』[33]에 근거한 최종 편성을 나타낸다. (의병 참가자는 굵은 글씨)

육해군 통괄 기관으로 원수부가 있었으나 1904년 폐지되었다.

  • 군부 (국방부에 해당), 차관: 한진창
  • * 대신관방
  • * 군무국 (국장: 이희두 참장[34])
  • ** 군사과
  • ** 보병과 (과장: 이태래 정령)
  • ** 기병과 (과장: 이민섭 부령)
  • ** 포병과
  • ** 공병과
  • ** 군법과
  • ** 의무과
  • ** 해방과
  • * 경리국
  • * 참모국 (국장: 조성근 참장)
  • * 교육국 (국장: 백성기 참장[35])
  • ** 교무과
  • ** 편수과 (과장: 정태석 참령[36])
  • 시종무관부 (시종무관장: 조동윤 부장[37])
  • 배종무관부 (배종무관장: 이근택 부장)
  • 장관회의소
  • 헌병사령부 (국장: 엄준원 참장, 헌병대장: 장봉환 부령)
  • 헌병부
  • 육군법원
  • 연성학교 (교장: 김승규 참장)
  • 무관학교 (교장: '''노백린''' 정령)
  • 유년학교
  • 군기창 (창장: 김정우 부령[38])
  • 위생대
  • 시위혼성여단 사령부 (여단장: 양성환 참장[39], 참모관: 박영철 참령)
  • * 보병 제1연대 본부 (연대장: 이근형 정령)
  • ** 보병 제1연대 제1대대 (대대장: 박승환 참령)
  • ** 보병 제1연대 제2대대 (대대장: 김현대 참령)
  • ** 보병 제1연대 제3대대 (대대장: 이용승 참령)
  • * 보병 제2연대 본부 (연대장: 구의선 정령)
  • ** 보병 제2연대 제1대대 (대대장: 이기표 참령)
  • ** 보병 제2연대 제2대대 (대대장: 조영규 참령)
  • ** 보병 제2연대 제3대대 (대대장: 홍창걸 참령)
  • * 기병대 (대장: '''유동설''' 참령)
  • * 야전포병대 (대장: 박두영 참령)
  • * 공병대 (대장: 김기원 참령)
  • * 군악대 (중대장: 백우용 이등군악장)
  • * 군수대
  • * 홍릉수비대

3. 2. 지방군

1897년, 대한제국군은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구성되었다. 지방군(地方隊, '''지방대''')과 진위대(鎭衛隊, '''진위대''')는 국경을 방어했다.[2][9] 중앙군과 지방군을 합쳐 1907년 이전까지 군대는 28,000명으로 급증했다.

평양에 배치된 진위대


무관청은 진위대를 관할했다. 1896년 5월, 무관청은 진위대를 200명에서 600명 규모의 8개 대대로 확장하고 대대장(소령)을 임명하여 지휘하게 했다. 그러나 1896년 9월, 부대 표준 병력이 400명으로 조정되었고, 14개 대대로 확장되어 총 5,600명의 병력이 편성되었다.[9] 또한 진위대는 구식 군대를 개편하여 최초의 근대적 지방군인 진위대로 전환하는 과도기적 군사 조직의 역할을 수행했다. 1900년 6월 30일, 고종은 무관청에 일부 진위대 대대를 진위대에 편입하도록 명령했다. 처음에는 전주와 평양에 각각 1개 진위대 대대를 배치했으며, 각 대대는 2개 중대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북방 방어를 담당했던 평양의 진위대 대대의 경우, 5개 중대로 나뉜 1,000명 규모의 1개 대대 방식의 중앙군 방식을 따랐다. 진위대는 외세 간섭을 막고 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병력이 크게 증강되었다. 1900년 7월, 육군은 6개 진위대 연대로 18개 대대를 창설했으며, 각 연대는 강화, 수원, 대구, 평양, 북청, 의주, 제주에 사령부를 두었다.[9] 이후 1901년 8월에는 6개 연대로 확장되어 총 18,000명의 병력이 되었다.[2]

1902년, 진위대는 1900년 9월부터 전국적인 편성을 전개하여, 최성기에는 6개 연대 2만 명 정도의 병력을 보유했으나, 러일 전쟁 이후 8개 대대로 축소되었다.[27]

아래는 대한제국군 지방대의 최종 편성을 나타낸다.[32][33]

  • 진위보병대
  • 수원보병 제1대대 (대대장: 최학재 참령)
  • 개성분견대
  • 안성분견대
  • 북한산분견대
  • 강화분견대 (대장: '''이동휘''' 참령)
  • 청주보병 제2대대 (대대장: 유기원 참령)
  • 공주분견대
  • 홍주분견대
  • 대구보병 제3대대 (대대장: '''양재훈''' 참령)
  • 안동분견대
  • 문경분견대
  • 보주분견대
  • 광주보병 제4대대 (대대장: 이수봉 참령)
  • 원주보병 제5대대 (대대장: 홍유형 참령, 대대장 대리: '''김덕제''' 정위[40])
  • 춘천분견대
  • 죽산분견대
  • 강릉분견대
  • 고성분견대
  • 여주주대 (대장: 백남숙 부위)
  • 해주보병 제6대대 (대대장: 박문병 참령)
  • 황주보병 제7대대 (대대장: 서상조 참령)
  • 평양분견대
  • 안주분견대
  • 의주분견대
  • 강계분견대
  • 북청보병 제8대대 (대대장: 김명환 참령)

3. 3. 군 통수 기구

1894년 갑오개혁 직후에는 군무아문(軍務衙門)이 군 통수를 담당하였고, 을미개혁군부(軍部)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군부대신은 오늘날의 국방장관에 해당한다.[3] 초대 군부 대신은 조희연이었다.[4]

1899년, 대한제국의 기본 법전인 「대한국 국제」 제5조에는 "대한국 대황제께서는 국내 육해군을 통솔하고, 편제를 정하며, 계엄 해제를 명한다."라고 규정하여, 황제가 군 통수권자임을 명시하였다.

고종은 황제의 권위를 강화하고자 1898년 6월 자신을 대원수(Grand Field Marshal)로 임명하고 육해군의 최고 사령관이 되었다. 이듬해 덕수궁원수부를 설치하여 군부의 권한을 약화시켰다.[5] 그러나 원수부1904년에 폐지되었다.

군부의 조직은 다음과 같았다.

기관명구성
군부 (국방부에 해당)차관: 한진창
시종무관부시종무관장: 조동윤 부장[37]
배종무관부배종무관장: 이근택 부장
장관회의소
헌병사령부국장: 참장, 헌병대장: 장봉환 부령
헌병부
육군법원
연성학교교장: 참장
무관학교교장: 노백린 정령
유년학교
군기창창장: 김정우 부령[38]
위생대


3. 4. 군사 교육 기관

1896년부터 1909년까지 육군 장교 양성을 위한 육군무관학교1893년부터 1896년까지 해군 장교를 양성한 통제영학당이 있었다.[41]

1900년 이전 무관학교 생도 및 장교들


1898년 7월 1일, 대한제국 무관학교가 설립되어 군부에 소속되었다.[7] 이후 1899년 6월 22일, 고종의 군대 강화 노력의 일환으로 원수부에 소속되었다.[7] 교직원은 교장 1명(대령), 부관 1명, 군의관 1명, 주임교관 1명, 교관 3명, 조교 8명으로 구성되었다.[7] 주로 교장은 해외에서 교육받은 군 장교 중에서 선발되었다.[8] 생도는 20세에서 30세 사이의 건강하고 현명한 자로서, 장교의 추천을 받은 자였다.[7] 졸업 후 495명의 생도가 장교로 임관되었다. 임관된 495명 중 291명이 진위대 또는 시위대에 배치되었다. 이 학교는 민족주의 장교 양성을 위한 학교였지만, 모든 졸업생이 민족주의자는 아니었다. 그 이유는 일부 양반 자제들이 이 학교 입학을 안정적인 직업을 얻는 방법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모든 생도가 민족주의적 감정으로 동기 부여를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많은 졸업생들이 의병에 참여하여 일본의 식민지화에 반대했다.

1892년 12월 조선 최초의 근대 해군사관학교를 설립하였고, 고종은 근대 해군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영국총영사에게 해군 교관 파견을 요청하고 1893년 3월에는 해군학교 설치령을 반포하였다. 통제영학당은 지금의 대한민국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1893년 9월부터는 15세 이상과 20세 이하의 생도 382명과 수병 3,000여 명을 모집하여 정식 개교 후 허치슨(W. du F. Hutchison)에게서 영어교육을 받기 시작하였고, 한편 영국정부에서는 1893년 6월 해군 교관 파견을 승인하였고 이에 따라 군사교관인 콜웰(W. H. Callwell)대위와 조교 커티스(J. W. Curtis)하사를 파견하여 이듬해 4월부터 이들에 의해 본격적인 군사훈련이 시작하였다.

4. 계급

대한제국군의 계급은 크게 군관(장교), 사관(부사관), 병(병)으로 나뉜다.[49]

대한제국군 계급
구분대한제국군 계급현재 군 계급
군관대원수국가원수
부원수원수
대장대장
부장중장
참장소장
정령대령
부령중령
참령소령
정위대위
부위중위
참위소위
사관특무정교주임원사
정교상사
부교중사
참교하사
상등병상등병
일등병일등병
이등병이등병


4. 1. 군관 (장교)

대한제국군 군관 (장교) 계급
견장대한제국 계급현재 군계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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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수국가원수
부원수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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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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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장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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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장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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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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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령중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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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령소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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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위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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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위중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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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위소위



대한제국 육군 장교


정복 계급장 (1900-1907)
한국어영어
대장General
부장Lieutenant General
참장Major General
정령Colonel
부령Lieutenant Colonel
참령Major
정위Captain
부위First Lieutenant
참위Second Lieutenant



대한제국군-일본군 군관 계급 비교
대한제국 군인일본 제국 군인
육군 대원수육군 대원수
육군 부원수없음 (폐지)
육군 대장육군 대장
육군 부장육군 중장
육군 참장육군 소장
육군 ○○ 정령육군 ○○ 대좌
육군 ○○ 부령육군 ○○ 중좌
육군 ○○ 참령육군 ○○ 소좌
육군 ○○ 정위육군 ○○ 대위
육군 ○○ 부위육군 ○○ 중위
육군 ○○ 참위육군 ○○ 소위


4. 2. 사관 (부사관)

대한제국군 부사관 계급
견장대한제국군 계급현재 군 계급
특무정교주임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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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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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교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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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교하사



정복 계급장 (1900-1907)
한국어영어
정교Master Sergeant
부교Sergeant First Class
참교Staff Sergeant



대한제국군-일본군 부사관 계급 비교
대한제국 군인일본 제국 군인
육군 ○○ 특무 정교육군 ○○ 특무 조장
육군 ○○ 정교육군 ○○ 조장
육군 ○○ 부교육군 ○○ 군조
육군 ○○ 참교육군 ○○ 병장

[49]

4. 3. 사병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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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군의 사병 계급은 상등병, 일등병, 이등병으로 나뉘며,[49] 이들은 모두 동일한 견장을 사용하였다.

대한제국군과 일본 제국 군인의 사병 계급 비교
대한제국 군인일본 제국 군인
육군 ○○ 상등병육군 ○○ 상등병
육군 ○○ 일등병육군 ○○ 일등병
육군 ○○ 이등병육군 ○○ 이등병


5. 군복

조선은 1895년 처음 군복을 도입한 이후 총 8번 복장 규칙에 변화가 있었다.[45] 1895년에는 정장, 군장, 예장, 상장으로 복장을 나누고, 하복과 햇빛가리개, 외투 등 특정 계절에 필요한 복식 착용법을 제시하였다. 1897년에는 상장 구성 아이템에 대한 정의가 추가되는 등 소폭 개정이 이루어졌다.[46]

1895년 복장 아이템에는 모자, 상의, 바지, 외투, 칼, 정서, 식대, 견장, 마장이 있었다. 모자는 흑색 융으로 제작되었고, 앞면 중앙에는 은색 이화장과 금색 쇠사슬, 흑색 가죽 턱끈이 있었다. 장관(장성급)과 영관(영관급)은 은색 별을 이화장 위에 추가하였다. 상의는 흑색 모직물로 만들어졌고, 은색 무지 단추를 달았으며, 수장에는 금선과 은색 태극이 배치되었다. 금선은 장관 3줄, 영관 2줄, 위관 1줄이며, 장관 중 대장은 태극 3개, 중장 2개, 소장 1개, 영관과 위관도 이와 같았다.[48]

바지는 모자와 같은 흑색 융 재질에 적색 융으로 줄을 댔는데, 장관 3줄, 영관 2줄, 위관 1줄이었다. 외투 역시 흑색 융에 은색 무지 단추를 사용했다. 수장은 은색 별을 장관 3개, 영관 2개, 위관 1개 달았다.[48] 칼은 장관의 경우 칼가루 금속 부분에 오얏잎을 새기고, 영관은 칼가루 위쪽에만 새겼다. 칼 장식 도서는 흑색견으로 만들었다. 식대는 장관이 적색 띠에 은색 술, 영관이 적색 띠에 자색 술, 위관은 모두 적색이었다. 견장은 바탕이 금색이고 장관은 은색 테두리가 있었다. 대장은 은색 별 3개, 중장 2개, 소장 1개였으며, 영관과 위관도 이에 준했다. 마장은 장관이 은선 대/소 2줄, 영관이 적색 융 선 대/소를 달았다. 1897년 5월, 육군장졸복장제식이 규정되었다.[48]

이때 장교만 착용 가능한 정모가 생겼다. 정모는 원통형으로 상반부는 흑색 융, 하반부는 홍색 융, 테두리는 흑색 가죽이었다. 정수리에는 홍색 바탕에 금색 가장자리를 두른 이화장을 부착하고, 하반부에는 양고직 장식을 더했다. 상모는 장교와 하사 이하 모두 착용 가능했으며, 형태와 재질은 정모와 같으나 흑색 실로 만든 편평한 끈으로 장식했다. 대례의는 흑색 융, 매듭단추 여밈이었다. 상의는 대례의와 형태는 같으나 순목색이었다.

의령장은 없으며 수장은 흑색 실 끈이었다. 바지는 흑색 융, 측면에 봉장을 댔는데, 봉장은 계급과 병과를 나타냈다.[48] 봉장 선 너비와 개수로 계급을 구분했는데, 장관은 7분 너비 2줄 사이에 3분 너비 1줄, 영관은 7분 2줄, 위관 이하는 1줄이었다. 위관은 1촌, 하사 6분, 병졸 3분 너비였다. 봉장 색은 기본 홍색에 기병 녹색, 포병 황색, 공병 자색, 군사 청색, 군의 옥색이었다. 이 색상 차이는 모자와 상의의 홍색 부분에도 적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대례견장은 금색 실로 만든 장반형과 타원형을 합친 모양으로, 장방형 부분에 도금한 금속제 이화 단추 1개를 달았다. 타원형 아래 술 유무와 계급장으로 계급을 표시했다. 소례견장은 홍색 융과 금색 선으로 만든 장방형이며, 가운데 표장은 대례견장과 같았다. 외투는 흑색 융에 은색 단추였다. 칼 손잡이에는 도금한 근화 잎과 앞뒤 중앙에 태극을 조각했다.

근화 잎 조각은 장관 전체, 영관 절반, 위관 3분의 1이었다. 도대는 장관 금사, 영관과 위관 흑색 가죽이었다.[48] 1900년 7월 부분 개정에서 대례의는 흑색 융 재질은 같으나 더블 브레스티드 형태로 바뀌었다. 상의는 대례의와 형태, 재질이 같으나 의령장은 없었다. 대례견장은 형식은 같으나 계급 문양에서 별만 사용하고 화살 문양은 생략되었다. 이는 군대 해산 전인 1907년까지 유지되었다.[48] 1907년 10월, 일본제국에 의한 군복 개정으로 시위연대 제2대대 군복은 흑색에서 다갈색으로 바뀌고, 상의 가슴과 허리에 주머니가 생겼다.[48]

6. 무기

강화도 조약 이후 1883년부터 대한제국유럽, 미국, 청나라, 일본 등에서 소총, 야포, 기관총과 같은 현대식 무기를 수입하기 시작했다.[24] 고종은 1887년부터 무기를 자체 생산하려 했지만 실패했다.[25]

6. 1. 소총

강화도 조약 이후 1883년에는 유럽과 미국, 청나라, 일본에서 소총, 대포, 기관총과 같은 현대식 무기가 수입되었다.

소총 종류도입 국가도입 시기비고
--영국1881-1884
--미국1884-1895
--프랑스
--독일 제국1893~대한제국군의 제식 소총
--러시아 제국1896~황실 근위대의 제식 소총이었지만, 마우저 M1871 소총만큼 신뢰성이 높지는 않았음
무라타 13년식 소총(상단)과 무라타 22년식 기병총(하단)
일본 제국1880년대~
--일본 제국1900~용산 군수 공장에서 면허 생산[26]


6. 2. 권총

강화도 조약 이후 1883년에는 유럽과 미국, 청나라, 일본에서 소총, 대포, 기관총과 같은 현대식 무기가 수입되었다.

권총 종류원산지비고
마우저 C96독일 제국--
마우저 지그 재그 11mm 리볼버독일 제국]]
1879년식 리볼버독일 제국]]
모델 1873 리볼버프랑스]]
프랑스 제식 리볼버, 모델 1892, 8 mm프랑스]]
콜트 M1873 싱글 액션 아미 리볼버미국--
26식 리볼버일본]]
나강 M1895 리볼버러시아 제국--
웨블리 리볼버영국--


6. 3. 화포

강화도 조약 이후 1883년에는 유럽과 미국, 청나라, 일본에서 소총, 대포, 기관총과 같은 현대식 무기가 수입되었다. 주요 화포는 다음과 같다.

  • --: 동학 농민 운동 기간에 사용되었으며, 미국에서 도입되었다(1883년~).
  • --: 외국인 교관이 대한제국 군인에게 시연하고 있으며, 영국에서 도입되었다.
  • --: 독일 제국에서 도입되었다.
  • --: 영국에서 도입되었다.
  • --: 독일 제국에서 도입되었다.
  • 핫치키스 57mm 산포
    : 미국에서 도입되었다.

6. 4. 군검

강화도 조약 이후 1883년에는 유럽과 미국, 청나라, 일본에서 소총, 대포, 기관총과 같은 현대식 무기가 수입되었다.

7. 해군

1903년 대한제국 정부는 최초의 근대식 함선인 양무호를 구매했다.[14] 하지만 양무호는 이전의 화물선으로 사용된 이력이 있어 외관만큼 효율적이지 못했다. 이에 정부는 더 효율적인 함선인 광제호의 건조를 명령했다. 그러나 일본 제국의 한국 병합으로 인해 1910년부터 1945년까지 한국의 해군 전통은 단절되었다.

7. 1. 함선

1892년 12월 한국 최초의 근대 해군사관학교가 설립되었고, 대한제국 고종은 근대 해군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영국총영사에게 해군 교관 파견을 요청하고 1893년 3월에는 해군학교 설치령을 반포하였다. 통제영학당은 지금의 대한민국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1893년 9월부터 15세 이상 20세 이하의 생도 382명과 수병 3,000여 명을 모집하여 정식 개교 후 허치슨(W. du F. Hutchison)에게서 영어교육을 받기 시작하였고, 영국정부에서는 1893년 6월 해군 교관 파견을 승인하여 군사교관인 콜웰(W. H. Callwell) 대위와 조교 커티스(J. W. Curtis) 하사를 파견하여 이듬해 4월부터 이들에 의해 본격적인 군사훈련이 시작되었다.

대한제국의 군함 양무호


대한제국의 군함 광제호


군함으로는 양무호(揚武號)와 광제호(廣濟號)가 있었다.

; 등대선:

함명 (개정 로마자 표기)한글함종건조제원
양무양무호등대선1881년, 영국: Sir Raylton Dixon & Co기준 배수량: 1200ton, 길이: 65m, 무장: 4.7인치 포 6문, 3파운더 포 2문



; 포함:

함명 (개정 로마자 표기)한글함종건조제원
광제광제호포함1904년, 일본: 가와사키 조선소기준 배수량: 약 1072945.63kg, 길이: 66.67m, 무장: 3 x 1 3인치 해군포


참조

[1] 웹사이트 (5) 군사·경찰제도 https://db.history.g[...]
[2] 문서 Military System of the Great Han Empire (Daehanjeguk)
[3] 웹사이트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 2022-01-12
[4] 웹사이트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 2022-01-12
[5] 웹사이트 나. 원수부의 창설과 군사력의 강화 http://contents.hist[...]
[6] 문서 Military Training of Siwidae (Royal Guards) in Taehan Empire
[7] 웹사이트 무관학교(武官學校) https://encykorea.ak[...] 2023-03-06
[8] 웹사이트 육군무관학교(陸軍武官學校) - sillokwiki http://dh.aks.ac.kr/[...] 2023-03-06
[9] 웹사이트 대한제국의 군사조직 정비 및 운영 체계 https://m.blog.naver[...]
[10] 웹사이트 호위대(扈衛隊) http://encykorea.aks[...]
[11] 웹사이트 친위대(親衛隊) http://encykorea.aks[...]
[12] 웹사이트 시위대(侍衛隊) http://encykorea.aks[...]
[13] 웹사이트 시위대(侍衛隊) http://www.doopedia.[...]
[14] 웹사이트 제3장 군사학교의 설립과 사관양성 (PDF Format) http://www.imhc.mil.[...] 2007-05-01
[15] 웹사이트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 2022-01-14
[16] 웹사이트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 2022-04-21
[17] 웹사이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 2022-03-12
[18] 웹사이트 시위대(侍衛隊) http://www.doopedia.[...]
[19] 웹사이트 대한제국의 군사조직 정비 및 운영 체계 https://m.blog.naver[...]
[20] 웹사이트 대한민국 1등 과학브랜드, 동아사이언스 https://m.dongascien[...] 2022-03-07
[21] 서적 A History of Korea: From Antiquity to the Present https://books.google[...] Rowman & Littlefield Publishers 2010-10-16
[22] 웹사이트 (3) 남대문 전투 http://contents.hist[...]
[23] 웹사이트 II. 洪將軍의 周邊이야기 https://db.history.g[...]
[24] 웹사이트 구한 말 사용한 총기 관련한 문의가 있어서 적는 글 https://m.blog.naver[...]
[25] 뉴스 [이일우의 밀리터리 talk] 조선총잡이로 본 '밀덕' 고종과 빵빵했던 대한제국군 https://nownews.seou[...] 2022-02-08
[26] 웹사이트 (수정 재업)대한제국도 1905년부터 아리사카 30년식 소총 자체 생산했음. https://m.blog.naver[...]
[27] 웹사이트 鎮衛隊 http://contents.hist[...] 국사편찬위원회-우리역사넷 2017-10-07
[28] 서적 朝鮮王朝史(下) 2006
[29] 문서 하사관 급여 정보
[30] 서적 (제목 없음) 2010
[31] 뉴스 芸術家を探して~洋楽パイオニア白禹鏞の子孫「指揮棒は虎のように恐ろしく楽だ」(''藝家를 찾아서 서양음악 선구자 백우용의 후손들“지휘봉 들면 호랑이같이 무섭게 변해” '') http://monthly.chosu[...] 2017-10-06
[32] 웹사이트 韓国駐箚軍 韓国軍隊解散に関する件 https://www.jacar.ar[...]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03022884200、密大日記 明治40年(防衛省防衛研究所) 2017-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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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웹사이트 承政院日記3207冊(脱草本141冊)、高宗44年4月3日己酉 http://sjw.history.g[...] 국사편찬위원회 2017-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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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저널 대한제국기 육군 복장 법령의 시기별 변화 ; A Study on the Time-Specific Characteristics of Military Uniform in Daehan Empire https://eds.p.ebscoh[...]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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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저널 대한제국기 육군 복장 법령의 시기별 변화 ; A Study on the Time-Specific Characteristics of Military Uniform in Daehan Empire https://eds.p.ebscoh[...]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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