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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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연기우는 대한제국 군대 해산에 항거하여 의병을 일으킨 인물이다. 1907년 지홍윤과 함께 제물포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이후 13도 창의군에 참여하여 서울 진공 작전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허위 의진과 연합하여 활동하다가 1908년 이후 강기동 의진과 연합 작전을 전개하며 3의진 활동을 펼쳤다. 1909년 동양척식회사 설립 계획에 반대 운동을 하였으며, 1910년 일본군에 체포되었다가 탈출하기도 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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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우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인물 정보 | |
이름 | 연기우 |
원어 이름 | 延基羽 |
출생일 | 생년월일 미상 |
출생지 | 경기도 삭녕 |
사망일 | 1910년 또는 1914년 |
직업 | 독립운동가, 의병 |
상훈 | [[파일:건국훈장2대통령장.png|x10px]]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
웹사이트 | 연기우(독립유공자 공훈록) |
2. 생애
연기우의 출생과 생애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일찍이 군문에 들어가 강화 진위대에서 부교(副校)로 복무하였으며 '진사'로 불릴 정도의 학식도 있었다고 한다.[2] 1907년 8월 일제의 책동으로 군대가 해산되자 동료 지홍윤과 함께 제물포(濟物浦)에서 거의하였다. 일본 경찰의 기록에 따르면 연기우는 키가 약 163~164cm 가량이었고, 얼굴 왼쪽 관자놀이와 왼쪽 어깨에서 팔둑까지 화상을 입었으며, 상투를 틀고 수염은 적었다고 한다.[2]
2. 1. 군 복무
연기우는 강화 진위대에서 부교로 복무하였으며, '진사'로 불릴 정도로 학식을 갖추었다고 한다.[2] 1907년 8월 일제의 책동으로 군대가 해산되자 동료 지홍윤과 함께 제물포에서 거의하였다. 일본 경찰의 기록에 따르면 연기우는 키가 5척 4촌(약 163~164cm) 가량이었고, 얼굴 왼쪽 관자놀이와 왼쪽 어깨에서 팔둑까지 화상을 입었으며, 상투를 틀고 수염은 적었다고 한다.[2]2. 2. 의병 활동 초기
김동수가 전사하고 지홍윤이 서해로 진출한 후, 연기우는 6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적성, 삭령, 철원, 마전, 장단, 도산 등지에서 활동했다. 군인 출신으로 지략과 용맹을 겸비하여 전투에서 승리했고, 엄격한 군율로 민폐를 끼치지 않아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다.[1]2. 2. 1. 삭령 전투 일화
김동수가 전사하고 지홍윤이 서해(西海)로 진출한 후, 연기우는 홀로 부하 60여 명을 거느리고 적성(積城), 삭령(朔寧), 철원(鐵原), 마전, 장단, 도산 등지로 진출하였다. 본래 군인 출신인데다가 지혜와 용기를 겸비하여 싸울 때마다 이겼으므로 적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또한 군율이 엄정하여 백성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일이 없어 가는 곳마다 민심을 얻었고, 지방민의 도움으로 적을 크게 무찔러 많은 전과를 올릴 수 있었다.[1]연기우는 공과 사를 분명히 가릴 줄 아는 인물이었다. 어느 날 삭령 등지로 행군하는데 아들이 찾아와 온 가족이 추위에 떨고 굶주리는 정황을 말하였으나, 연기우는 아들을 꾸짖고 조금도 돌보지 않았다. 그의 부하 중 한 사람이 몰래 아들에게 50JPY을 주었으나, 그것을 안 연기우는 크게 화를 내며 "이것은 군수금(軍需金)이다. 누가 감히 사사로이 쓸 수 있겠는가!" 하고 그 돈을 빼앗았다.[1]
2. 3. 13도창의군 참여 (1907년)
1907년 가을,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하는 13도 연합 의진이 서울 진공을 감행했을 때, 연기우도 부하들을 거느리고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격하였다. 그러나 미리 약속한 다른 의병 부대가 도착하지 못했고, 기밀 누설로 일본군의 방비가 완비되었기 때문에 작전은 실패했다.[1] 1908년 2월 이후 허위를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조수연, 김규식, 홍인관, 이병채, 장순원, 오수영, 김연상 등과 함께 적성(積城) 방면에서 활동했다.[1] 이들은 대외 협력 세력 규합을 위해 경현수를 중국 혁명당에 밀파하고, 전국적인 의병 연합 세력 규합을 꾀하였다.[1] 그러나 6월에 허위가 체포되고 10월에 교수형으로 순국하자 연합 의진 계획은 다시 수포로 돌아갔다.[1]2. 4. 허위 의진과의 연합 (1908년)
1908년 2월 이후 허위를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조수연, 김규식, 홍인관, 이병채, 장순원, 오수영, 김연상 등과 함께 적성(積城) 방면에서 활약하였다.[2] 이들은 대외 협력을 위해 경현수를 중국 혁명당에 밀파하고, 전국적인 의병 연합 세력 규합을 꾀하였다.[2] 그러나 6월에 허위가 체포되고 10월에 교수형으로 순국하자 연합 의진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2]2. 5. 3의진 활동 (1908년 이후)
1908년 가을 이후 강기동 의진과 연합 작전을 전개하였다. 11월 21일 2백여 명을 이끌고 포천군 송우 등지에서 일본 헌병대와 장시간 교전 끝에 적 2명을 사살하고 잔병을 격퇴시켰다.[1] 12월에는 부하 40여 명을 거느리고 강원도 철원군 동면을 지나갈 때 신내 주점에 일본 헌병과 보조원 등 7명이 묵고 있음을 탐지하고 단신으로 그 주점에 갔다가 체포되었으나, 기다리던 부하 17명이 주점을 공격하여 연기우를 구출하고 5명을 사살, 무기를 탈취하여 귀대하였다.[1] 한번은 강기동이 포천군 송우 등지에서 일본 헌병과 교전하다가 왼쪽 다리에 총상을 입었다는 정보를 접하고 부하 30명을 급파하여 강기동을 구호하였다.[1] 한편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활약하던 이진룡 의진과도 긴밀한 협조 하에 일본군 연합 부대를 공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1] 따라서 황해도·경기도 일대의 의병진은 연기우를 중심으로 하여 이진룡·강기동의 3의진이 교묘히 이합집산을 해가면서 활약하였다.[1] 점차 일본군의 대처가 강화되자 이들은 부대를 소수 정예로 편성하여 1910년까지 게릴라전을 전개하였다.[1] 그러한 가운데 연기우의 아우 연창수가 체포되어 순국하였다.[1]2. 6. 한일합방 전후 (1909년-1910년)
1909년 8월 이후 연기우는 철원, 연천(漣川)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한편 대한협회, 황성신문 등과 함께 동양척식회사 설립 계획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2] 1910년 2월부터 일제가 의병 소탕 작전에 총력을 기울이면서 삭령, 안협(安峽)으로 물러났고, 4월에는 장단(長湍)에서 크게 패하였다.[2] 5월에 일본군에게 체포되었으나 탈출하였다.[2]3. 사후
4. 일화
연기우는 방탄 요대(허리 갑옷)를 차고 다녔다고 전해진다. 소가죽 두 겹에 굵고 넓은 쇠못으로 만들어졌으며, 길이는 약 1.83m 1치 5푼, 넓이는 약 0.30m 7치였다. 요대에는 수많은 탄흔이 있었으나 탄환이 뚫지 못했다고 한다.
참조
[1]
간행물
연기우
https://e-gonghun.mp[...]
공훈전자사료관
[2]
웹인용
연기우-이 달의 독립운동가
https://e-gonghun.mp[...]
관련 사건 타임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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