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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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숭례문은 조선 시대에 건립된 서울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1398년(태조 7년)에 완공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숭례문 주변 성곽이 훼손되고 일반인 출입이 금지되었으며, 1934년에는 보물 1호로 지정되었다. 한국 전쟁 중 숭례문이 손상되었고, 1962년 국보 제1호로 지정되었다. 2008년 방화 사건으로 숭례문이 훼손되었으나, 2013년 복구 공사를 완료하고 일반에 공개되었다. 숭례문 현판은 양녕대군이 썼다는 설과 다른 인물이 썼다는 설이 있으며, 방화 사건으로 손상된 후 복원되었다. 숭례문은 국보 1호 변경 논란, 부실 복원 논란, 쓰레기 집하장 설치 논란 등 다양한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숭례문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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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숭례문
공식 명칭숭례문
별칭남대문
위치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40
개장일1398년
유형국보
지정 번호1
지정일1962년 12월 20일
소유국유
관리문화재청 덕수궁관리소
참고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시설
시대조선 태조 7년(1398년)
이름
한글숭례문
로마자 표기Sungnyemun
한글 (별칭)남대문
로마자 표기 (별칭)Namdaemun
기타 정보
문화재청문화재청 - 숭례문
일본어5年3ヶ月ぶりに「崇礼門」復元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610년의 역사를 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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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wikitext

숭례문 (1900년경)
숭례문 (1900년경)

숭례문 (1904년)
숭례문 (1904년)

숭례문 (1935년)
숭례문 (1935년)

태조 5년(1396년)에 최유경의 지휘로 숭례문 건립이 시작되어 태조 7년(1398년)에 완성되었다. 양녕대군이 숭례문의 현판을 썼다. 세종 30년(1448년)에 개축되었고, 성종 10년(1479년)에도 대규모 중수가 있었다는 사실이 1961~1963년 해체·수리 때 밝혀졌다.

1907년 요시히토 일본 황태자가 방한하자 일본 제국은 “대일본 제국의 황태자가 머리를 숙이고 문루 밑을 지나갈 수 없다”는 이유로 숭례문과 연결된 성곽을 헐어버렸다. 성곽을 헌 자리에 도로와 전차길을 내고, 숭례문 둘레에 화강암으로 일본식 석축을 쌓았고, 문앞에는 파출소와 가로등을 설치했다. 또한 이때부터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1908년 9월에는 숭례문과 소의문 부근 성벽 총 77간을 헐어서 철거했다.

조선총독부는 1916년 고적급유물보존규칙을 공표하고, 고적조사위원회를 설치했다. 1924년에는 고적급유물등록대장초록을 간행하여 1호 원각사지십층석탑 등 193점의 유물을 등록했지만, 숭례문과 흥인지문은 등록되지 않았다. 1934년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보물 1호로 숭례문을, 보물 2호로 흥인지문을, 보물 3호에 원각사지십층석탑을, 보물 4호로 보신각종을 지정하였다.

한국통감부의 문 주변 도로 전차(경성전차) 노선 설치로 인해 1907년에 일반인 출입이 금지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한편으로는 1922년 이전에 촬영된 자유롭게 통행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도 남아 있어 실제로는 통행이 금지되지 않았다.

한국 전쟁 중 숭례문은 심하게 손상되었고, 1961년 마지막 대규모 수리가 이루어져 1963년 5월 14일에 준공식이 열렸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호"로 재지정되었다.

2005년 숭례문 주변에 잔디밭을 조성하여 다시 한번 보수 공사를 거쳤고, 2006년 3월 3일 일반인에게 다시 공개되었다.

2008년 2월 10일, 숭례문 방화 사건으로 숭례문은 큰 피해를 입었다. 석축과 1층 일부만 남고 2층 문루의 90%와 1층 문루의 10%가 타 버렸다. 2010년 2월 10일 숭례문 복구공사가 시작되어 2013년 4월 29일 완공되었고, 5월 4일 공식 개방되었다. 숭례문 관리단체는 2013년 5월 1일 중구청에서 문화재청으로 변경되었다.

2.1. 조선 시대

숭례문 (1900년경)
숭례문 (1900년경)

숭례문 (1904년)
숭례문 (1904년)

숭례문 (1935년)
숭례문 (1935년)

태조 5년(1396년)에 최유경의 지휘로 숭례문 건립이 시작되어 태조 7년(1398년)에 완성되었다. 양녕대군이 숭례문의 현판을 썼다. 세종 30년(1448년)에 개축되었고, 성종 10년(1479년)에도 대규모 중수가 있었다는 사실이 1961~1963년 해체·수리 때 밝혀졌다.

20세기 초, 일본 제국은 요시히토 황태자의 방문을 이유로 "대일본 제국의 황태자가 머리를 숙이고 문루 밑을 지나갈 수 없다"며 숭례문과 연결된 성곽을 헐었다. 이로 인해 숭례문 주변의 성곽이 철거되고, 그 자리에 도로와 전차 길이 놓였으며, 숭례문 둘레에는 일본식 석축이 쌓였다. 1907년 이후 숭례문은 일반인에게 폐쇄되었다. 1938년 숭례문은 국보 제1호로 지정되었다.

한국 전쟁으로 숭례문이 크게 손상되자 1961년에 대규모 수리 작업이 시작되어 1963년 5월 14일에 완료되었다. 1962년 12월 20일, 숭례문은 "국보 제1호"로 재지정되었다. 2005년에는 숭례문 주변에 잔디밭이 조성되었고, 2006년 3월 3일에는 일반인에게 다시 개방되었다.

2.2. 일제강점기

숭례문 (1900년경)
숭례문 (1900년경)

숭례문 (1935년)
숭례문 (1935년)

1907년 요시히토 일본 황태자가 방한하자 일본 제국은 “대일본 제국의 황태자가 머리를 숙이고 문루 밑을 지나갈 수 없다”는 이유로 숭례문과 연결된 성곽을 헐어버렸다. 성곽을 헌 자리에 도로와 전차길을 내고, 숭례문 둘레에 화강암으로 일본식 석축을 쌓았고, 문앞에는 파출소와 가로등을 설치했다. 또한 이때부터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1908년 9월에는 숭례문과 소의문 부근 성벽 총 77간을 헐어서 철거했다.

조선총독부는 1916년 고적급유물보존규칙을 공표하고, 고적조사위원회를 설치했다. 1924년에는 고적급유물등록대장초록을 간행하여 1호 원각사지십층석탑 등 193점의 유물을 등록했지만, 숭례문과 흥인지문은 등록되지 않았다. 1934년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보물 1호로 숭례문을, 보물 2호로 흥인지문을, 보물 3호에 원각사지십층석탑을, 보물 4호로 보신각종을 지정하였다.

한국통감부의 문 주변 도로 전차(경성전차) 노선 설치로 인해 1907년에 일반인 출입이 금지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한편으로는 1922년 이전에 촬영된 자유롭게 통행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도 남아 있어 실제로는 통행이 금지되지 않았다.

2.3. 대한민국

숭례문은 1396년(태조 5년) 최유경의 지휘로 건설되기 시작하여 1398년(태조 7년)에 완성되었다. 태종의 맏아들 양녕대군이 숭례문의 현판을 썼다. 1447년(세종 29년)에 재건축되었으며, 이후 여러 차례 보수되었다. 1479년(성종 9년) 4월 2일에는 숭례문 중수가 완료되었다.

숭례문 (1900년경)
숭례문 (1900년경)

숭례문 (1904년)
숭례문 (1904년)

숭례문 (1935년)
숭례문 (1935년)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 제국이 요시히토 황태자의 방한을 이유로 숭례문과 연결된 성곽을 헐고, 그 자리에 도로와 전차길을 냈다. 1907년 숭례문 주변에 전차가 건설된 후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1908년 9월에는 숭례문과 소의문 부근 성벽 총 77간이 철거되었다. 1938년 숭례문은 국보 제1호로 지정되었다.

한국 전쟁 중 숭례문은 심하게 손상되었고, 1961년 마지막 대규모 수리가 이루어져 1963년 5월 14일에 준공식이 열렸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호"로 재지정되었다.

2005년 숭례문 주변에 잔디밭을 조성하여 다시 한번 보수 공사를 거쳤고, 2006년 3월 3일 일반인에게 다시 공개되었다.

2008년 2월 10일, 숭례문 방화 사건으로 숭례문은 큰 피해를 입었다. 석축과 1층 일부만 남고 2층 문루의 90%와 1층 문루의 10%가 타 버렸다. 2010년 2월 10일 숭례문 복구공사가 시작되어 2013년 4월 29일 완공되었고, 5월 4일 공식 개방되었다. 숭례문 관리단체는 2013년 5월 1일 중구청에서 문화재청으로 변경되었다.

2.4. 숭례문 방화 사건과 복구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40분 경, 방화범 채종기(당시 69세, 경북 칠곡 출신)가 숭례문에 불을 질렀다. 이 화재로 현장에 수십여 대의 소방차가 출동해 진화 작업을 펼쳤으나, 2월 11일 0시 40분 경 건물 천장에서부터 화염이 일었고, 오전 1시 경에는 2층 누각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결국 화재 발생 5시간 만인 오전 1시 54분 경, 석축을 제외한 1, 2층 목조 누각 대부분이 전소되어 붕괴되었다. 초기에는 진화가 늦어진 이유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으나, 이는 숭례문의 구조적 문제로 지붕 밑 칸의 불은 물이 닿기 어려워 초기 진압이 어려웠기 때문으로 밝혀졌다.

목조 누각이 소실된 숭례문
목조 누각이 소실된 숭례문


화재 발생 후, 수사 당국은 누전이나 합선에 의한 화재인지, 고의적인 방화인지 조사했다. 숭례문의 전등이 꺼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누전 사고는 아닌 것으로 보고 방화 가능성에 무게를 두었다. 목격자 진술을 토대로 창경궁 문정전에 방화한 전과가 있는 채종기를 검거했다. 채종기는 토지 개발업자에게 땅을 팔고 대금을 받지 못해 격분하여 범행을 저질렀다고 경찰은 밝혔다. 그는 2006년 창경궁 방화 혐의로 기소된 적이 있었다.

숭례문 재건 중
숭례문 재건 중


600년 가까이 이어져 온 대한민국의 문화유산 중 하나가 소실된 것은 국민들에게 큰 아픔을 남겼다. 문화재청은 숭례문을 원형에 가깝게 복구할 계획을 밝히고 복구 작업을 시작하여 현재 복구되어 개방되었다. 2008년 8월 15일에는 숭례문 복구 현장이 일반 시민들에게 공개되었다. 복구 현장에서는 일제강점기에 설치된 석축 울타리 안쪽에서 한국전쟁 이후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지하 벙커가 발견되어 철거되었다. 또한, 문화재청은 옛 성곽 자리를 그림으로 복원하고 도로 위에 표시했다.

문화재청은 2006년 보수 당시 작성한 정밀 실측 도면을 바탕으로 숭례문을 최대한 유사하게 복원하는 계획을 수립했다. 2013년 4월 29일 공사를 완료하고 5월 4일 복구 준공식을 열었다. 복원된 숭례문은 화재로 무너진 숭례문의 잔해를 기초로 하였으며, 동쪽 성곽 53m와 서쪽 성곽 16m 구간이 복원되었다. 동쪽 계단 폭은 5m로 늘어났고, 지반은 이전보다 30~50cm 낮아졌으며, 1층 마루는 우물마루에서 장마루로 바뀌었다. 지붕 기와는 전통 기와로 대체되었고, 용마루 길이도 16.6m로 늘어났다. 잡상은 1층이 7개, 2층은 9개이다.

복원에는 약 250억 원의 비용이 소요되었으며, 전통 기술로 진행되었다. 작업자들은 한복을 착용하고, 전동 공구는 사용하지 않았다. 복원되는 숭례문에는 적외선 열 감지기·연기 감지기, 스프링클러 설비, 감시카메라 등의 방재 시스템이 설치되었다. 그러나 복원 완료 후 단청의 균열 및 박리, 탈색 현상과 일부 목재 균열 등 부실 공사 논란이 있었다. 조사 결과, 단청에 사용된 접착제가 전통적인 것이 아닌 화학 안료를 사용한 저렴한 제품이었고, 건조가 불충분한 목재를 사용한 것이 밝혀졌다. 또한, 사용된 목재 중 일부가 금강송이 아닌 러시아산으로 확인되어 횡령 및 비용 착복 의혹이 제기되었다. 감사원은 부실 공사와 함께 기능공의 독단으로 인화성이 높은 기름이 사용되어 화재 위험이 있었으며 재공사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2016년 6월 23일, 8년 만에 숭례문 수비 의식이 재개되었다.

3. 숭례문 현판

숭례문 현판은 누가 썼는지에 대해 논쟁이 있다. 이수광의 《지봉유설》, 《신증동국여지승람》,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양녕대군이 썼다고 되어 있으나, 김정희의 《완당 전집》에는 신장의 글씨라고 적혀 있다.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정도전이 숭례문 이름을 지었고, 현판은 양녕대군이 썼다고 알려져 있으나 정난종이 썼다고도 기록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잡지 《별건곤》 1929년 9월호에는 안평대군이 아닌 중종 시대 명필 유진동의 글씨라고 적혀 있다.

숭례문 현판 (2013년 5월)
숭례문 현판 (2013년 5월)


서울 성곽의 다른 문과 달리 숭례문 현판은 세로로 만들어져 있는데, 이는 관악산의 화기(火氣)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숭례문의 이름은 '불'을 뜻하며, 오행의 조화에서 비롯되었고, 세로로 쓰면 '불'이라는 한자가 마치 보호하는 것처럼 보인다.

2008년 2월 10일 화재로 현판이 손상될 것을 우려하여 숭례문에서 분리하는 과정에서 추락하여 일부 목재편에 탈락, 결실 및 부분 균열이 발생하였다. 현판 테두리목도 파손되었으나, 결실편을 95% 정도 확보하여 원형 보존처리에는 이상이 없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분리된 현판은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로 이송되어 보존처리되었다. 국립고궁박물관의 사전 조사 및 자문 결과와 과학적 상태조사(X선, 적외선 촬영 등)를 거쳐 손상 부분을 접착 복원하는 등 정밀 보존처리가 진행되었으며, 처리 기간은 6개월 이상 소요될 예정이었다. 숭례문 현판은 총 38조각이 났으며, 2009년 5월 말 복원 완료 예정으로 진행되었다.

2009년 7월 3일 현판이 완전히 복원되었다. '숭'(崇)자 부분에 갈라진 부분을 메우고, 지덕사 소장 탁본을 토대로 변형된 글씨('崇'자와 '禮'자의 일부 등)를 원형에 가깝게 복원했다. 테두리목은 연결 부위가 심하게 파손되어 교체했으며, 중요무형문화재 각자장(刻字匠) 오옥진과 단청장(丹靑匠) 홍창원이 참여했고 원래 부재를 최대한 활용하였다. 그러나 홍창원과 그 제자들은 계약과 달리 천연 안료 대신 화학 안료를 사용해 부실 복원 혐의를 인정받아 공사 지연 및 재시공 비용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한국 정부는 목조 건축물에 새겨진 한자대로 이 랜드마크를 공식적으로 '숭례문'이라고 부른다. 비록 조선 시대 이후로 '남대문'으로 더 흔히 알려져 왔지만 말이다. 한국에서는 '남대문'이라는 이름이 일제 강점기에 강제로 부여된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있다.

4. 논란

4.1. 국보 1호 변경 논란

1996년 11월, 국보 1호 변경 주장이 이슈가 되어 문화재관리국이 서울시민을 대상으로, 서울대가 자체 학생들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하였다. 서울시민 1,000명 중 67.6%가 변경에 반대했고, 문화재전문가 144명 (문화재위원 49명, 전문위원 95명)의 59.2%가 변경에 반대했다. 반면, 서울대 학부 및 대학원생 262명 중 57%(150명)가 변경에 찬성했으며, 이들은 훈민정음을 1위로 지지했다. 2005년 11월, 감사원은 국보 1호를 변경할 것을 문화재청에 권고했으며,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국보 1호 변경에 찬성했다.

흥인지문과 숭례문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통과하여 철수한 문으로 지적되어 일제강점기 때 보존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1934년 조선총독부보물 1호에 남대문을, 보물 2호에 동대문을 각각 지정하였다. 해방 이후에도 남대문과 동대문은 각각 국보 1호와 보물 1호로 지정되었다.

국보 제1호의 번호는 문화재의 가치 순서가 아닌 단순한 관리 번호이며, 문화재의 가치에 우열을 매긴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이 있다. 또한 교체 시에는 국내외의 각종 문헌자료를 수정해야 하는 등 혼란을 초래한다는 주장도 있다. 반면 남대문은 국보로서 대표성이 없고, 역사적, 예술적 가치가 부족하며, 일본 제국이 일방적으로 지정했기 때문에 변경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4.2. 부실 복원 논란

2013년 11월 숭례문 복원 공사 완료 후, 단청이 갈라지는 현상이 발견되었다. 전통 기법이 아니라는 이유로 들기름합성수지 대신 유동나무 기름(동유)을 사용했지만, 전통 건축에서 동유를 단청 코팅에 사용한 사례는 없었다. 문화재청의 실험 결과에서도 안료가 갈라지거나 벗겨지는 현상이 나타난다는 보고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유가 사용되었다. 2013년 12월에는 숭례문 기둥에서 균열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나무를 충분히 말리지 않고 급하게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2014년 1월에는 숭례문에 사용된 소나무가 금강송 대신 러시아산 소나무라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금강송은 강원도와 경북 북부 일부에서 자라는 소나무(Pinus densiflora)로 독특한 기후 조건에 의해 강도가 높은 고급 소나무이다. 경찰은 신응수 대목장이 관급 목재를 빼돌리고 값싼 러시아산 소나무로 바꿔치기했다는 의혹과 관련하여 압수수색을 진행했다. 문화재청은 연륜연대학 전문가 박원규 교수에게 나이테 분석을 의뢰했고, 국립산림과학원에는 유전자 검사를 의뢰했다. 박원규 교수는 1월 17일 나이테 분석 결과 19개 중 7개가 의심스럽고 그중 2개는 가짜가 유력하며 5개는 판단이 불가능하다고 인터뷰했다. 그러나 다음 날, 박원규 교수는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감사원은 부실 공사뿐만 아니라 기능공의 독단으로 인화성이 높은 기름이 사용되어 화재 위험이 있으며 재공사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숭례문 재건 중
숭례문 재건 중


복원 완료 6개월 만에 페인트가 벗겨지고 나무가 갈라지는 현상이 발생하자, 대통령 박근혜는 이 문제에 대한 조사를 지시했다.

4.3. 쓰레기 집하장 설치 논란

2009년 10월 12일, 서울특별시 중구청은 숭례문 주변 집하장 부지 발굴조사 결과 문화재나 옛 성곽 유적이 발견되지 않아 곧 공사를 시작할 수 있다는 보고서를 문화재청에 보낼 계획이라고 밝혔다. 문화재청은 이미 발굴조사를 조건으로 집하장 건립을 허가한 상태였고, 중구청은 10월 17일 ~ 10월 19일 무렵 공사를 시작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네티즌들은 국보 1호 옆에 쓰레기장을 만들겠다는 발상에 대해 "차라리 국회의사당이나 청와대 옆에 쓰레기장을 지어라"라며 비판적인 반응을 보였다. 중구청 관계자는 문화재청도 남대문시장의 쓰레기 처리를 위한 합리적인 방안임을 인정했으며, 광장 조성 시 숭례문과 시각적 조화를 이룰 것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남대문시장 일부 상인들조차 서울시와 중구가 문화 공간 개발 방침을 뒤집었다며 소송을 불사하겠다는 입장을 밝혀 논란이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