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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먼 화이트사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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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먼 화이트사이드는 북아일랜드 출신의 전 축구 선수로, 1982년 FIFA 월드컵에서 17세의 나이로 출전하여 월드컵 최연소 출전 선수 기록을 세웠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FA컵 2회 우승, FA 커뮤니티 실드 우승을 경험했으며, 에버턴에서도 선수 생활을 했다. 잦은 부상과 음주 문제로 26세에 은퇴한 후, 족병 전문의로 활동하며 자서전을 출판하고 방송 해설가로도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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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먼 화이트사이드
기본 정보
2013년의 노먼 화이트사이드의 모습
2013년의 화이트사이드
이름노먼 화이트사이드
본명노먼 화이트사이드
출생일1965년 5월 7일
출생지벨파스트, 북아일랜드
신장188cm
포지션미드필더, 공격수
클럽 경력
청소년 클럽1978-1982: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클럽1982-1989: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1989-1991: 에버턴
클럽 출장 (골)맨체스터 유나이티드: 206 (47)
에버턴: 29 (9)
총 출장 (골)235 (56)
국가대표 경력
국가대표팀북아일랜드 U23: 1989
북아일랜드: 1982-1989
북아일랜드 학교 대표
국가대표 출장 (골)북아일랜드 학교 대표: 8 (0)
북아일랜드 U23: 1 (0)
북아일랜드: 38 (9)

2. 어린 시절

벨파스트에서 노먼과 에일린 화이트사이드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샹킬 로드에서 자랐다. 이러한 배경과 공격적이고 거친 플레이 스타일 때문에 그는 나중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팬들로부터 "샹킬 스킨헤드"라는 별명을 얻었다.[3][4] 그의 가족은 나중에 다뉴브 스트리트 10번지로 이사했고, 가난 때문에 화이트사이드는 두 형제와 침대를 함께 사용해야 했다.[5] 그는 상대적으로 북아일랜드 분쟁의 영향을 받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개신교도인 그의 부모가 자녀들이 집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고 얼스터 로열리즘에 연루되지 않도록 단단히 감시했기 때문이다.[6] 약 7살 때 그는 소년단에 가입했고, 자신의 축구 재능을 빠르게 보여주었는데, 거의 두 배 나이 많은 소년들과의 경기에서 10골을 넣었다.[7] 그는 케언마틴 고등학교를 다녔고, 11살 때 샹킬 지역에서 축구 신동으로 유명해졌다.[8]

그는 입스위치 타운의 스카우트 짐 로저스(소년 시절 그의 골 덕분에 그는 이미 북아일랜드의 모든 축구 스카우트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다)에게 발탁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당시 감독인 바비 롭슨은 화이트사이드가 더 나이 들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다.[9] 그러나 벨파스트 출신의 조지 베스트와 새미 맥일로이를 이전에 클럽에 영입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80세 얼스터 스카우트 밥 비숍이 처음으로 그에게 잉글랜드 클럽에서의 시험 기회를 제안했다.[9][105] 화이트사이드의 가족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팬이었지만, 화이트사이드 자신은 특별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9] 그는 미국으로의 학교 수학여행 중에 클럽에서 학생 계약을 제안받았다. 여행 중에 그는 급우들과 함께 오벌 오피스에서 지미 카터 대통령을 만났는데, 이것은 불우한 환경의 아이들에게는 드물고 특별한 일이었다.[10]

3. 클럽 경력

노먼 화이트사이드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학생 계약을 맺기 며칠 전, 리버풀의 트라이얼 제안을 받았다. 하지만 유나이티드의 수석 스카우트 조 브라운이 즉시 그에게 학생 계약을 제안하기 위해 벨파스트로 날아갔다.[11] 화이트사이드는 벨파스트에 남아 주말마다 맨체스터로 가서 훈련을 받았다.[12] 그는 14세 때부터 조지 베스트와 비교되었는데, "우리가 같은 곳에서 태어났고, 같은 클럽에서 뛰었고, 같은 사람에게 발견되었다는 것뿐"이라며 비교를 피하려 하지 않았다.[13]

15세 때부터 부상 문제가 시작되었다. 사타구니 근육통을 해결하기 위해 글렌토란의 물리치료사 바비 맥그리거에게 강한 마사지를 받았는데, 이로 인해 골반이 손상되고 속도가 느려졌다고 한다.[14] 속도 부족은 그의 경기에서 유일한 약점으로 여겨졌다.[15] 1981년 7월, 견습 기간 6주 만에 프레스턴 노스 엔드 선수에게 태클을 당해 오른쪽 무릎 수술을 받아야 했다.[16] 7개월의 휴식과 연골 제거 수술 후, 1982년 1월에 건강을 회복했다.[18] 그는 손상된 무릎과 골반을 보상하기 위해 플레이 스타일을 바꿔야 했고,[19] 유소년 팀 코치 에릭 해리슨 밑에서 성장했다.[20]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성공적인 선수 생활을 보낸 후, 1989년에 에버턴으로 이적하였다. 이적료는 600000GBP였으며, 화이트사이드가 50경기에 출전하면 150000GBP가 추가되는 조건이었다.[46][62] 에버턴과 4년 계약을 맺었고,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도움으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8년 동안 받은 돈보다 더 많은 돈을 2년 동안 받게 되었다.[66]

1989-90 시즌, 화이트사이드는 에버턴의 플레이메이커로 활약하며 35경기에 출전해 13골을 넣었다.[69] 그러나 잦은 부상으로 인해 1991년 26세의 젊은 나이로 은퇴하게 되었다.[72]

클럽시즌1부 리그FA컵리그컵유럽대항전기타총계
경기득점경기득점경기득점경기득점경기득점경기득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1981–82210000000021
1982–83398739320005714
1983–843710106161105112
1984–85279641050003913
1985–8637451420051518
1986–87318214100003710
1987–88277315200003510
1988–89600000000060
총계2064724102991316127868
에버턴1989–90279632100003513
1990–91200000000020
총계299632100003713
통산23556301331101316131581


3. 1.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1982년 4월 24일, 17세 생일 2주 전에 브라이튼 & 호브 알비온과의 1-0 리그 승리 경기에서 골드스톤 그라운드에서 교체 선수로 데뷔하며, 던컨 에드워즈 이후 유나이티드에서 가장 어린 1군 선수가 되었다.[21][22] 17세 생일에 올드 트래포드에서 프로 계약을 맺고 3년 계약서에 서명했다.[24] 시즌 마지막 날, 17세 생일 8일 후, 스토크 시티와의 2-0 홈 경기 승리에서 클럽 최연소 득점자가 되었다.[27]

1982-83 시즌에 프랭크 스테이플턴과 함께 유나이티드 공격의 선봉에 섰다.[28] 브라이언 롭슨이 공격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수행했다.[29] 시즌 초 5경기에서 4골을 넣었지만, 이후 17경기 연속 무득점에 빠졌다.[30] 그 시즌 국내컵 대회 16경기에서 6골을 넣으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리그컵FA컵 결승에 진출하는 데 기여했는데, 특히 FA컵 준결승전에서 아스널을 상대로 골을 넣었다.[31] 리그컵 결승전 패배 경기에서 웸블리에서 득점하여 리그컵 결승전에서 득점한 최연소 선수가 되었다.[32] FA컵 결승전에서 스테이플턴에게 어시스트를 제공했는데, 브라이튼 & 호브 알비온과 2-2 무승부를 기록했다.[33] 재경기에서 헤딩골을 넣어 유나이티드의 4-0 승리를 이끌었고, FA컵 결승전에서 득점한 최연소 선수가 되었다. 그는 또한 한 시즌에 국내컵 결승전에서 모두 득점한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34] 그 시즌 모든 대회에서 57경기에 출전했고, 리그 경기에서 단 3경기만 결장하며 총 14골을 넣었다.

1983-84 시즌에 국내컵 대회에서 서드 디비전 팀에게 탈락하며 무관에 그쳤다.[38] 유러피언컵 윈너스컵 3라운드에서 올드 트래포드에서 바르셀로나를 3-0으로 이기는 데 기여했는데, 이는 1차전 2-0 패배를 뒤집은 결과였다.[39]

1984-85 시즌에서 미드필더 레미 모세스의 부상으로 중원에 공석이 생겼고, 화이트사이드는 지능적인 플레이와 위치 선정 능력으로 그 역할에서 혁신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감독 론 애킨슨이 클럽에 있는 동안 미드필더로 남았다.[42] 1985년 3월 9일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와의 FA컵 8강전 홈 경기에서 4-2 승리를 거두며 프로 경력 중 유일한 해트트릭을 기록했다.[44] 연장전 20분에 오른쪽에서 슛을 감아 차 넣으며 10명이 남은 유나이티드에게 에버턴을 상대로 승리를 안겨주었고, 화이트사이드에게 두 번째 FA컵 우승 메달을 안겨주었다.[45][46]

1985-86 시즌 초 리그 10경기를 승리했고, 첫 15경기에서 무패를 기록하며 퍼스트 디비전 우승을 확실시했다.[50] 그러나 시즌 중반에 부진했고, 최종 18경기에서 6승만 거두며 시즌을 4위로 마쳤다. 우승팀 리버풀과는 12점 차이였다.[51]

1986-87 시즌을 37경기 10골로 마무리했지만, 유나이티드는 11위에 그쳤다.

1987-88 시즌 초반, 리그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나머지 세계'와의 경기에서 풋볼 리그를 대표했다.[57] 35경기에서 10골을 넣었지만, 유나이티드는 리그에서 리버풀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57]

1987-88 시즌 중반에 아킬레스건이 파열되어 거의 1년 동안 1군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60] 1988년 2월 10일 베이스볼 그라운드에서 열린 리그 경기에서 더비 카운티를 2-1로 이긴 경기에서 화이트사이드가 넣은 골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의 마지막 골이 되었다.

1988-89 시즌에 리그 경기에서 단 6경기만 출전했다.

1989년 7월 에버턴으로 이적하기 전까지 유나이티드에서 모든 대회를 통틀어 총 274경기에 출전하여 67골을 넣었고, FA컵에서 두 번의 우승 메달을 획득했다.[65]

3. 2. 에버턴

화이트사이드는 에버턴과 4년 계약을 맺었고, 알렉스 퍼거슨이 그의 협상을 도와 굿디슨 파크에서 2년 동안 맨체스터에서 8년 동안 받은 돈보다 더 많은 돈을 받게 되었다.[66] 그는 또한 퍼거슨을 비판하는 타블로이드 기사에 자신의 이름을 빌려주는 대가로 5만 파운드를 제안받았지만 거절했다.[67] 당시 에버턴은 두 번의 리그 우승, FA컵, 유러피언컵 위너스컵 우승으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보다 최근 더 나은 성공을 거두었다.[68] 콜린 하비 감독은 "토피스"의 우승 가능성을 높이려고 계획했고, 1989년에는 마이크 뉴얼, 마틴 키언, 스테판 렌, 레이먼드 아테벨드를 영입했다.[68] 화이트사이드는 1989-90 시즌에 에버턴의 플레이메이커가 되었고, 미드필더에서 스튜어트 맥컬과 효과적인 파트너십을 형성하여 35경기에 출전하여 13골을 넣었다.[69] 에버턴은 그 시즌을 6위로 마쳤는데, 라이벌 리버풀보다 20점이나 뒤처졌다.[70]

그러나 믹 라이언스 코치가 진행한 고강도 러닝 훈련이 그의 오른쪽 무릎에 무리를 주었고, 1990년 9월 20일 연습 경기에서 충격을 받아 오른쪽 무릎 수술을 또 받아야 했다.[71] 1990년 11월 하워드 켄달이 감독으로 복귀한 후, 화이트사이드는 몇몇 예비팀 경기에 출전했지만, 이는 불가피한 상황을 늦출 뿐이었고, 그는 1991년 6월 26세의 나이로 은퇴해야 했다.[72] 그는 1992년 5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에버턴 간의 올드 트래포드에서 테스티모니얼 경기를 가졌지만, 유나이티드가 전주에 우승을 놓쳐 7,434명만이 참석했다.[73]

4. 국가대표 경력

화이트사이드는 펠레의 기록을 깨고 월드컵 최연소 출전 선수가 되었다. 17세 41일의 나이로 1982년 월드컵에서 북아일랜드 대표로 데뷔했다.[74][75] 당시 감독 빌리 빙엄에 의해 월드컵 대표팀에 선발되었을 때, 그는 클럽 레벨에서 단 두 경기만 치렀다.[76]

1982년 6월 17일 사라고사의 라 로마레다에서 열린 유고슬라비아와의 개막전이 그의 국제 대표팀 데뷔전이었다. 그는 네나드 스토이코비치에게 파울을 범해 후반전에 경고를 받았고, 경기는 0-0 무승부로 끝났다.[77] 5일 후, 그는 온두라스와의 경기에서 1-1 무승부를 거두었는데,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북아일랜드의 토너먼트 진출 가능성을 망쳤다고 생각했다.[78] 그들은 발렌시아의 메스타야 스타디움에서 열린 세 번째이자 마지막 조별 경기에서 개최국 스페인을 상대로 승리가 필요했다. 에크토르 오르티스 심판의 판정 논란 속에서도,[79] 루이스 아르코나다의 실수로 제리 암스트롱이 경기의 유일한 골을 넣었고, 60분에 말 도나기가 퇴장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북아일랜드는 1-0 승리를 거두었다.[80] 화이트사이드는 빈센테 칼데론 스타디움에서 오스트리아와의 경기에서 2-2 무승부를 기록했다.[81] 프랑스를 이기면 준결승에 진출할 수 있었지만, 미셸 플라티니가 이끄는 프랑스 팀이 4-1로 승리하여 북아일랜드를 토너먼트에서 탈락시켰다.[82]

그는 UEFA 유로 1984 예선에 출전했다. 조 마지막 경기에서 서독을 1-0으로 이겼고, 화이트사이드는 세계 최고의 맨 마커 중 한 명인 칼하인츠 뢰어를 제압했다. 그러나 서독은 조의 마지막 경기에서 알바니아를 상대로 후반 추가시간 극적인 결승골을 넣어 조에서 유일한 진출권을 확보했다.[83]

화이트사이드는 북아일랜드가 1983-84년 100주년 기념이자 마지막 영국 홈 챔피언십에서 우승하는 데 기여했다.[84]

북아일랜드는 조 마지막 경기에서 잉글랜드와 0-0 무승부를 거두며 두 번째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을 확정지었다. 화이트사이드는 예선 과정에서 3골을 넣었고, 윈저 파크에서 루마니아를 상대로 넣은 골은 루마니아를 제치고 본선 진출을 확정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85] 멕시코에서 열린 1986년 FIFA 월드컵 본선에서 그는 에스타디오 트레스 데 마르소에서 알제리와의 경기에서 프리킥이 굴절되어 들어가는 골을 넣으며 1-1 무승부를 기록했다. 그들은 다른 두 조별 경기에서 스페인에 2-1로, 브라질에 3-0으로 패했다.[86]

화이트사이드는 북아일랜드에서 8년간 총 38경기에 출전하여 9골을 기록했다.[46]

북아일랜드 국가대표팀 경기 기록[104]
년도경기 수득점 수
198270
198353
198462
198552
198671
198740
198820
198921
합계389



#날짜장소상대득점결과경기
11983년 9월 21일벨파스트, 북아일랜드오스트리아2–03–1UEFA 유로 1984 예선
21983년 11월 16일함부르크, 서독서독1–01–0UEFA 유로 1984 예선
31983년 12월 13일벨파스트, 북아일랜드스코틀랜드1–02–01983–84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41984년 9월 12일벨파스트, 북아일랜드루마니아2–13–21986 FIFA 월드컵 예선
51984년 10월 16일벨파스트, 북아일랜드이스라엘1–01–0친선 경기
61985년 5월 1일벨파스트, 북아일랜드터키1–02–01986 FIFA 월드컵 예선
72–0
81986년 6월 3일과달라하라, 멕시코알제리1–01–11986년 FIFA 월드컵
91989년 9월 6일벨파스트, 북아일랜드헝가리1–21–21990 FIFA 월드컵 예선


5. 은퇴 후

살포드 대학교에서 학위를 받고 족병 전문의가 되기 위해 공부했으며, 1991년 10월부터 1992년 3월까지 노스위치 빅토리아의 수석 코치 겸 물리치료사로 일했다.[93] 경기 사이의 이동 시간이 너무 길어서 그 역할을 그만두었다.[94] 선수 시절 릴리샬에서 코칭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한 강좌를 수강했지만, 코칭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95] 대신 만찬 연설가가 되었다. 프로 축구 선수 협회에서 일하면서 맨체스터 메트로폴리탄 대학교에서 대학원 과정을 수료했다.[96] 이후 맨체스터에서 족병 전문의로 개인 진료를 시작했다.[2][90] 1994년부터 올드 트래퍼드의 기업 접대 부서에서도 일했다.[4][97] 2003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대한 나의 기억"이라는 책을 출판했고,[98] 2007년 8월에는 작가 롭 바그치의 도움을 받아 배우 제임스 네스빗의 서문이 있는 자서전 "결의"를 헤드라인에서 출판했다.[99]

''When Saturday Comes'' 잡지 평론가 조이스 울리지는 "''결의''는 1980년대 이례적인 축구 선수 중 한 명에 대한 재미있고 잘 쓰여진 이야기이며, 화이트사이드가 무릎이 아닌 삶을 재건하는 방법에 대한 추가적인 반전이 있다"고 썼다.[100] 다음 달, 화이트사이드가 불규칙적인 심장 박동 진단을 받았다는 보도가 있었다.[101] 화이트사이드는 ITV의 UEFA 유로 2016 중계에서 해설가로 활동했다.[102]

6. 수상 경력


:** FA컵: 1982–83, 1984–85

:** FA 커뮤니티 실드: 1983[106]

:** 풋볼 리그컵: 준우승 1982–83
:**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1983–84

6. 1.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A컵: 1982–83, 1984–85[105]

FA 커뮤니티 실드: 1983[106]

풋볼 리그컵: 준우승 1982–83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출생으로, 14세 때 조지 베스트를 발굴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스카우트 빌 비숍에게 발탁되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유스팀에 입단했다.[105] 1982년 4월, 던컨 에드워즈 이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사상 최연소 리그전 출전 기록을 세웠다.[105]

1982-83 시즌 FA컵과 풋볼 리그컵 2관왕 획득에 기여했다.[105] 1984-85 시즌 FA컵 결승 리버풀 FC전에서는 연장 후반 5분 결승골을 터뜨리며 우승에 기여했다.[105]

어린 나이에 재능을 인정받아 미래의 스타 후보로 기대를 모았지만,[108][109] 1986년 론 아킨슨에 이어 알렉스 퍼거슨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에 취임하면서 규율을 중시하는 퍼거슨과의 마찰이 생기기 시작했고, 무릎과 아킬레스건의 심각한 부상과 음주 문제로 출전 기회를 점차 잃어갔다.[105] 그 후, 1989년 에버턴으로 이적했다.[105]

6. 2. 북아일랜드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1983–84 시즌에서 우승했다.

FIFA 월드컵 스페인 대회 1차 리그 유고슬라비아전에서 17세 41일의 나이로 북아일랜드 대표팀 데뷔전을 치렀다. 이 기록은 FIFA 월드컵 스웨덴 대회에서 브라질펠레가 세운 대회 최연소 출전 기록을 경신한 것이다.[107] 이후에도 선발 라인업에 이름을 올리며 북아일랜드의 2차 리그 진출에 기여했다.

FIFA 월드컵 멕시코 대회에 참가, 1차 리그 알제리전에서 1득점을 기록했다. 1989년 10월 11일 아일랜드전을 끝으로 대표팀에서 은퇴할 때까지 A매치 38경기에 출전해 9득점을 기록했다.

참조

[1] Hugman 2017-08-26
[2] 웹사이트 What Happened Next? http://fourfourtwo.c[...] 2012-04-20
[3] harvnb
[4] 뉴스 A career cruelly cut short – Norman Whiteside http://www.trulyreds[...] 2012-04-20
[5] harvnb
[6] harvnb
[7] harvnb
[8] harvnb
[9] harvnb
[10] harvnb
[11] harvnb
[12] harvnb
[13] harvnb
[14] harvnb
[15] harvnb
[16] harvnb
[17] harvnb
[18] harvnb
[19] harvnb
[20] harvnb
[21] harvnb
[22] 웹사이트 Norman Whiteside http://www.mufcinfo.[...] 2012-04-20
[23] harvnb
[24] harvnb
[25] harvnb
[26] harvnb
[27] harvnb
[28] harvnb
[29] harvnb
[30] harvnb
[31] harvnb
[32] harvnb
[33] harvnb
[34] harvnb
[35] harvnb
[36] 서적
[37] 서적
[38] 서적
[39] 서적
[40] 서적
[41] 서적
[42] 서적
[43] 서적
[44] 서적
[45] 서적
[46] 웹사이트 Irish Footballer that Played for Man Utd – Norman Whiteside http://www.soccer-ir[...] 2012-04-20
[47] 서적
[48] 뉴스 Triumph over law, lore and logic http://archive.guard[...] 1985-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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