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조인노 사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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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니조인노 사누키는 1141년경 무사 가문 출신 시인 미나모토노 요리마사의 딸로 태어난 일본의 여성 가인이다. 니조 천황의 뇨보로 궁중 생활을 시작했으며, 니조 천황 사후에는 간슈지류의 실무 관료 후지와라 시게요리와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고토바 천황 시대에는 뇨보로 활동하며 가단에서 주목받았고, 여러 칙찬집과 사찬집에 작품이 수록되었다. 그녀의 대표작은 오구라 백인일수에 수록된 와카로, '오키노이시노 사누키'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섬세하고 애절한 감정을 표현하는 시풍으로 당대 최고의 여성 가인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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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조인노 사누키 | |
---|---|
인물 정보 | |
이름 | 니조인노 사누키 |
로마자 표기 | Nijōin no Sanuki |
한자 표기 | 二条院讃岐 |
생몰년 | 1141년경 ~ 1217년 |
직업 | 니조 천황의 뇨보 (궁녀) |
활동 시기 | 헤이안 시대 말기부터 가마쿠라 시대 초기 |
다른 이름 | 주구 사누키 (中宫讃岐) |
작품 활동 | |
장르 | 와카 시인 |
대표 작품 | 신고금 와카집 등 |
2. 생애
니조인노 사누키는 1141년경 미나모토노 요리마사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요리마사는 셋쓰 겐지(摂津源氏) 출신의 무사이자 시인이었다.[1] 사누키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와카를 배우고 창작 활동을 했다.
1158년 니조 천황 즉위 후 궁녀(뇨보)로 출사하여,[1] 와카 모임에 참여하며 가인(歌人)으로 인정받았다. 1165년 니조 천황 사후 후지와라 시게요리와 결혼하여 시게미쓰와 아리요리 등을 낳았다.[1]
1159년 이후 니조 천황의 와카 모임과 슌에의 와카 모임(가회) 가린엔에 참가하여[1] 궁중 가단(歌壇)에서 평가받았다. 1172년경 저술된 『가센 낙서』는 사누키를 "풍체가 아련하고 애처롭다. 여자 노래는 이럴 수도 있겠구나, 슬프다"라고 평했다.[1]
1180년(治承일본어 4년), 모치히토 왕의 거병과 우지 전투에서 아버지 미나모토노 요리마사와 형제들이 전사하는 비극을 겪었다. 이후 사누키는 슬픔을 딛고 시작 활동을 이어갔으며, 자선집인 『니조인 사누키집(二条院讃岐集)』을 가모 신사에 봉납했다.
1190년(겐큐 원년)경, 고토바 천황의 황후 구조 린시(기슈몬인)의 뇨보가 되었다.[1] 1194년(겐큐 5년)에는 구조 가네자네의 일기 『교쿠요』에 황후의 와카 모임에 기슈몬인 단고와 함께 참여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고토바 천황 시대는 와카가 융성했던 시기로, 사누키는 실력 있는 여성 가인 중 한 명으로 주목받았다. 1200년(쇼지 2년) 『쇼지 초도 백수』의 가인으로 선정되며 가단(歌壇)에 복귀했다. 이때는 이미 출가한 상태였으며, 나이는 60세에 가까웠다.
1216년(겐포 4년) 『내리 가합』에 참여하는 등 노년까지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쳤다.[1] 1207년(조겐 원년) 이세 국 고바타 촌(현 미에현요카이치시 오지타)을 둘러싸고 가마쿠라에 소송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면모를 보였다.[1] 이는 이세 헤이 씨·도다 모토도의 압령을 받고 있던 중, 1203년(겐닌 3년) 말부터 미카 헤이 씨의 난으로 도다가 처형되면서 몰수지에 지토가 새로 임명되었기 때문이었다.[1] 니조인 사누키는 료케로서 소송을 제기했고, 미요시 요시노부의 봉행으로 지토직 설치가 중지되었다.[1] 만년에는 와카사 국 미야가와 보(현 오바마시)의 지토직을 "사누키니"로서 영유했다.[1]
2. 1. 가계와 초기 활동
미나모토노 요리마사의 딸로 1141년경 태어났다. 아버지 요리마사는 셋쓰 겐지(摂津源氏) 출신의 무사이자 시인이었다.[1] 사누키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와카를 배우고 창작 활동을 했다.1158년 니조 천황 즉위 후 궁녀(뇨보)로 출사했다.[1] 니조 천황의 와카 모임에 참여하며 가인(歌人)으로 인정받았다. 1165년 니조 천황 사후 후지와라 시게요리와 결혼, 시게미쓰와 아리요리 등을 낳았다.[1]
1159년 이후 니조 천황의 와카 모임에 참여하여 궁중 가단(歌壇)에서 평가받았다. 슌에의 와카 모임(가회) 가린엔에도 참가했다.[1] 1172년경 저술된 『가센 낙서』는 사누키를 "풍체가 아련하고 애처롭다. 여자 노래는 이럴 수도 있겠구나, 슬프다"라고 평했다.[1]
2. 2. 결혼과 남편
아버지 요리마사의 죽음 이후, 유녀가 되었다는 속설이 있으며[4], 이를 소재로 스기모토 소노코의 소설 『니조인노 사누키』가 쓰여졌다(주오코론샤, 1982년).2. 3. 아버지와 형제의 죽음
治承일본어 4년(1180년), 모치히토 왕의 거병과 우지 전투에서 아버지 미나모토노 요리마사와 형제들이 전사하는 비극을 겪었다. 이후 사누키는 슬픔을 딛고 시작 활동을 이어갔으며, 자선집인 『니조인 사누키집(二条院讃岐集)』을 가모 신사에 봉납했다.2. 4. 고토바인 시대
겐큐 원년(1190년)경, 고토바 천황의 황후 구조 린시(기슈몬인)의 뇨보가 되었다.[1] 겐큐 5년(1194년)에는 구조 가네자네의 일기 『교쿠요』에 황후의 와카 모임에 기슈몬인 단고와 함께 참여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고토바 천황 시대는 와카가 융성했던 시기로, 사누키는 실력 있는 여성 가인 중 한 명으로 주목받았다. 쇼지 2년(1200년) 『쇼지 초도 백수』의 가인으로 선정되며 가단(歌壇)에 복귀했다. 이때는 이미 출가한 상태였으며, 나이는 60세에 가까웠다.
2. 5. 만년
겐포 4년(1216년) 『내리 가합』에 참여하는 등 노년까지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쳤다.[1] 조겐 원년(1207년) 이세 국 고바타 촌(현 미에현요카이치시 오지타)을 둘러싸고 가마쿠라에 소송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면모를 보였다.[1] 이는 이세 헤이 씨·도다 모토도의 압령을 받고 있던 중, 겐닌 3년(1203년) 말부터 미카 헤이 씨의 난으로 도다가 처형되면서 몰수지에 지토가 새로 임명되었기 때문이었다.[1] 니조인 사누키는 료케로서 소송을 제기했고, 미요시 요시노부의 봉행으로 지토직 설치가 중지되었다.[1] 만년에는 와카사 국 미야가와 보(현 오바마시)의 지토직을 "사누키니"로서 영유했다.[1]3. 작품 세계
니조인노 사누키는 섬세하고 애절한 감정을 표현하는 와카로 유명하다. 그녀의 작품은 『센자이 와카슈』를 비롯한 여러 칙선집과 사찬집(私撰集), 가집(歌集) 등에 수록되어 있다.[1] 헤이지 원년(1159년) 이후, 니조 천황의 내리 와카회("안의 어회")에 여러 번 참석하여 내리 가단에서 평가를 받았다. 아버지 요리마사나 형 나카쓰구와 함께 슌에의 가회 그룹 가린엔에도 참가했다.[1]
조안 2년(1172년)경 성립된, 동시대의 유명한 가인 20명을 논하는 『가센 낙서』에서는 "풍체가 아련한 것을 먼저 생각하고, 애처로운 모습이다. 여자의 노래는 이럴 수도 있겠지, 슬프기도 하구나"라고 평가했다.[1]
지쇼 4년(1180년), 우지 뵤도인에서의 싸움에서 아버지와 형제의 전사를 겪은 후, 주에이 원년(1182년)에는 자선집 『니조인 사누키집』을 가모 신사에 봉납하고, 가모 시게야스가 권진하는 가모 신사 봉납 백수의 가인이 되었다. 지쇼·주에이의 난 이후, 분지 4년(1188년) 성립된 『센자이슈』에서 칙선집에 처음으로 이름을 올렸다.[1]
겐큐 원년(1190년)경에는 고토바 천황의 주궁구조 린시(기슈몬인)의 뇨보가 된 것으로 보인다.[1] 고토바 원이 양위할 무렵부터 와카에 열중하고, 가단이 융성해지는 가운데, 사누키도 실력 있는 여성 가인 중 한 명으로 주목받아, 쇼지 2년(1200년)의 『쇼지 초도 백수』 가인 23명 중 한 명으로 선정되어 가단에 본격적으로 복귀했다. 겐포 4년(1216년)의 『내리 가합』까지 가인으로서 활동이 확인된다.[1]
;칙선집
가집명 | 작가명 | 가(歌) 수 |
---|---|---|
센자이 와카슈 | 니조인 사누키 사누키 | 3 1 |
신고킨 와카슈 | 니조인 사누키 | 16 |
신초쿠센 와카슈 | 니조인 사누키 | 13 |
조쿠고센 와카슈 | 니조인 사누키 | 3 |
조쿠고킨 와카슈 | 니조인 사누키 | 6 |
조쿠슈이 와카슈 | 니조인 사누키 | 2 |
신고센 와카슈 | 니조인 사누키 | 3 |
교쿠요 와카슈 | 니조인 사누키 | 8 |
조쿠센자이 와카슈 | 니조인 사누키 | 4 |
조쿠고슈이 와카슈 | 니조인 사누키 | 3 |
후가 와카슈 | ||
신센자이 와카슈 | 니조인 사누키 | 1 |
신슈이 와카슈 | 니조인 사누키 | 3 |
신고슈이 와카슈 | 니조인 사누키 | 1 |
신조쿠고킨 와카슈 | 니조인 사누키 니조인 사누키 | 3 1 |
;정수 가・우타아와세
명칭 | 시기 | 작가명 | 비고 |
---|---|---|---|
베츠라이샤 우타아와세 | 1178년 (조쇼 2년) | 니조인 사누키 | 아버지와 함께 참여 |
민부경가 우타아와세 | 1195년 (겐큐 6년) 3월 3일 | 주궁 사누키 | |
쇼지 첫 번째 100수 | 1200년 (쇼지 2년) | 사누키 니조인 뇨보 | |
신고궁 선가합 | 1201년 (겐닌 원년) 3월 | 사누키 니조인 관녀 요리마사 녀 | 승(勝) 1 |
와카쇼 에이구 우타아와세 | 1201년 (겐닌 원년) 8월 3일 | 뇨보 사누키 | 후지와라노 토시나리와 한 쌍으로 패(敗) 5, 무판(無判) 1 |
8월 15일 밤 선가합 | 1201년 (겐닌 원년) | 사누키 | 패(敗) 4 |
1500번 우타아와세 | 1202년 (겐닌 2년) | 사누키 | |
내리 100번 우타아와세 | 1216년 (겐포 4년) 윤6월 9일 | 니조인 사누키 | 쿠가 미치미츠와 한 쌍으로 패(敗) 9, 지(持) 1 |
;사찬집 등
- 360번 우타아와세(1200년 (쇼지 2년))
- * 「사누키 기슈몬인 뇨보」명으로 12수
;사가집
- 『니조인 사누키슈』(신간본)(가마쿠라 시대 중기 사본 레이제이가 시구레테이 문고 중요문화재)
3. 1. 대표작
わが袖は潮干に見えぬ沖の石の人こそ知らねかわく間もなし|waga sode wa shiohi ni mienu oki no ishi no hito koso shirane kawaku ma mo nashi|나의 소매는 썰물에도 보이지 않는 바닷속 바위처럼, 남들은 알지 못하네, 마를 새도 없이 눈물에 젖어 있는 것을일본어이 와카는 오구라 백인일수 92번에 수록되어 있으며, 짝사랑의 애절함과 슬픔을 표현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노래로 인해 니조인노 사누키는 "오키노이시노 사누키(沖の石の讃岐)"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되었다.[1]
"오키노 이시"는 후대에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는 것", "항상 젖어 있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고, 여성기의 은어로 하이카이 등에서 사용되기도 하였다.
- 92번
3. 2. 평가
슌에는 사누키의 노래를 "사랑 노래의 대표곡"이라고 극찬했다. 가센 낙서에서는 "풍체가 아련하고 애처로운 모습이다. 여자의 노래는 이럴 수도 있겠지, 슬프기도 하구나"라고 평가했다.[1]4. 일화 및 전설
1166년, 니조 천황 붕어 다음 해에 열린 고시라카와인 당좌 우타아와세(後白河院当座歌合)에서 니조인노 사누키가 노련하게 행동했다는 일화가 후지와라노 사다이에의 『구히쇼(愚秘抄)』에 전해진다.[1]
백인일수에 수록된 "나의 옷소매는 물에 젖어 보이지 않는 바다의 돌처럼, 사람은 아무도 모르네, 마를 새도 없이"라는 노래에서 유래하여 "오키노 이시노 사누키"라고 불린다. 이와 관련하여 후쿠이현 오바마시의 야시로만 암초[2]와 미야기현 다가조시 하치만의 오키노 이시[3]를 연관 짓는 견해가 있다. "오키노 이시"는 후대에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는 것", "항상 젖어 있는 것", 그리고 여성기의 은어로 하이카이 등에서 사용되었다.
아버지 요리마사가 죽은 후, 유녀(遊女)가 되었다는 속설이 있으며,[4] 이를 소재로 스기모토 소노코가 소설 『니조인노 사누키』를 썼다.
참조
[1]
고문서
若狭宮河保山預注進案
https://wwwap.hi.u-t[...]
若狭秦金蔵氏文書
1235-06-14
[2]
서적
沖の石
角川書店
1989
[3]
서적
沖の石
角川書店
1979
[4]
서적
宮川
角川書店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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