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텐 겐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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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이텐 겐조는 18세기 일본의 승려로, 린자이슈 소속 사찰인 쇼코쿠지에서 수행했으며, 조선과의 외교에도 관여했다. 1771년 고산 석학으로 선발되어 조선 수문직에 임명되었고, 쇼코쿠지 주지를 역임했다. 그는 시문에도 능하여 여러 시집과 저서를 남겼으며, 이토 자쿠추 등과 교류하며 문화 활동을 지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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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텐 겐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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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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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대텐 겐조 |
출생 | 1719년 |
사망 | 1801년 |
출생지 | 오미국 |
종파 | 임제종 상국사파 |
사원 | 황벽산 만복사, 상국사, 남선사 |
스승 | 독봉자수 |
저서 | 『작비집』 |
2. 생애
다이텐 겐조는 여덟 살 때 부친과 상경하여 교토 우지의 오바쿠슈(황벽종) 만푸쿠지에 들어갔다가 린자이슈(임제종) 쇼코쿠지로 옮겨 시운안의 도호쿠지쇼(독봉자수)에게 지도받으며 열한 살에 득도하였다.[1]
도호쿠지쇼(독봉자수)가 천화하자 41세(1759년)부터 54세(1772년)까지 쇼코쿠지를 떠나 교토 인근 산중에 은둔하며 문인으로 생활하면서 기무라 겐카도 등과 교류하였다. 이때 조선 신사와 만나고, 이토 자쿠추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54세에 쇼코쿠지로 돌아와 59세(1777년)에 제113대 방장화상으로 추대되었고, 63세(1781년)에 쓰시마 이테이안 린반소(輪番僧)로 임명되어 2년간 조선 관련 외교문서 작성을 담당하였다.[1] 69세(1787년)에는 조선 통신사 초빙 기한 연기 문제로 에도 막부 로주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의 자문에 응했다. 75세(1793년)에 텐다이슈(천태종) 리쿠뇨지슈(육여자주)와 함께 일본에 있지만 중국에 없는 석전(釋典)을 모아 나가사키를 통해 중국에 보내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78세(1796년)와 80세(1798년)에 에도에서 막부에 조선 통신사 초빙을 자문하였다.
덴메이 5년(1785년) 난젠지 주지가 되어 에도 막부의 명으로 배례를 위해 에도로 갔으며, 이후 여러 차례 조선 외교에 대해 헌책했다.[1] 덴메이 8년(1788년) 덴메이 대화재로 쇼코쿠지가 전소되었지만, 귀중한 전적 재수집과 재건에 진력했다.[1] 1801년에 쇼코쿠지 시운안에서 83세로 입적하였다.[1]
유학은 우노 묘우카에게, 시는 타이쵸 겐코에게 배웠다.[1] 이케노 다이가, 간 사잔, 고 후요, 카츠 코킨, 시노자키 산소 등 많은 문인묵객과 교류했다.[1]
2. 1. 출생과 출가
다이텐 겐조는 1726년 여덟 살 때 부친과 함께 교토로 상경하여 우지(宇治)에 있는 오바쿠슈(黃檗宗) 소속 사찰인 만푸쿠지(万福寺)에 들어갔다. 이후 린자이슈(臨済宗) 소속 사찰인 쇼코쿠지(相国寺)로 옮겨 시운안(慈雲庵)의 도호쿠지쇼(独峯慈秀)의 지도를 받으며 열한 살에 득도하였다.[1]오미국 간자키군 이바 향(현 시가현히가시오미시)의 유의(儒醫) 이마호리 토안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으나,[1] 권대납언(權大納言) 소노 모토카츠의 사생아로 태어나 양자로 보내졌다는 설도 있다.[1] 1728년 상국사의 도쿠호 쥬슈 아래에서 선 수행에 힘썼다.[1]
2. 2. 수행과 은둔
다이텐 겐조는 8세(1726년)에 부친과 상경하여 우지의 오바쿠슈(황벽종) 소속 사찰인 만푸쿠지에 들어갔다가 린자이슈(임제종) 소속 쇼코쿠지(상국사)로 옮겨 시운안의 도호쿠지쇼(독봉자수)에게 지도받으며 11세에 득도하였다.[1]도호쿠지쇼(독봉자수)가 천화하자 41세(1759년)부터 54세(1772년)까지 쇼코쿠지(상국사)를 떠나 교토 인근 산중에 은둔하며 문인으로 생활하면서 기무라 겐카도 등과 교류하였다. 이때 조선 신사(信使)와 만나고, 이토 자쿠추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54세에 쇼코쿠지(상국사)로 돌아와 59세(1777년)에 제113대 방장화상으로 추대되었고, 63세(1781년)에 쓰시마 이테이안 린반소(輪番僧)로 임명되어 2년간 조선 관련 외교문서 작성을 담당하였다.[1] 69세(1787년)에는 조선 통신사 초빙 기한 연기 문제로 에도 막부 로주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의 자문에 응하기도 했다. 75세(1793년)에 텐다이슈(천태종) 리쿠뇨지슈(육여자주)와 함께 일본에 있지만 중국에 없는 석전(釋典)을 모아 나가사키를 통해 중국에 보내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78세(1796년)와 80세(1798년)에 에도에서 막부에 조선 통신사 초빙을 자문하였다. 1801년에 쇼코쿠지(상국사) 시운안에서 83세로 입적하였다.
교호 13년(1728년) 쇼코쿠지(상국사) 도쿠호 쥬슈에게 선 수행을 받았고, 11세에 득도하였다.[1] 메이와 7년(1771년) 고산 석학으로 선발되어 조선 수문직에 임명되고[1] 이듬해 쇼코쿠지(상국사) 주지가 되었다.[1] 메이와 9년(1773년) 4월 시운안으로 돌아갔다.[1] 덴메이 원년(1781년) 쓰시마 이테이안 주지로 2년간 부임하였다.[1] 덴메이 5년(1785년) 난젠지 주지가 되어 에도 막부의 명으로 배례를 위해 에도로 갔으며, 이후 여러 차례 조선 외교에 대해 헌책했다.[1]
덴메이 8년(1788년) 덴메이 대화재로 쇼코쿠지(상국사)가 전소되었지만, 귀중한 전적 재수집과 재건에 진력했다.[1] 교와 원년(1801년) 사망. 향년 83세.[1]
유학은 우노 묘우카에게, 시는 타이쵸 겐코에게 배웠다.[1] 이케노 다이가, 간 사잔, 고 후요, 카츠 코킨, 시노자키 산소 등 많은 문인묵객과 교류했다.[1]
2. 3. 쇼코쿠지 주지
다이텐 겐조는 린자이슈(臨済宗) 소속 사찰인 쇼코쿠지(相国寺)에서 시운안(慈雲庵)의 도호쿠지쇼(独峯慈秀)의 지도로 열한 살에 득도하였다.[1]스승인 도호쿠지쇼가 입적하자, 1759년(41세)부터 1772년(54세)까지 쇼코쿠지를 떠나 교토 인근 산중에 은거하며 문인 생활을 하였다. 이 시기에 기무라 겐카도(木村 蒹葭堂) 등과 교류하였고, 조선 신사(信使)와 만나기도 하였으며, 이토 자쿠추(伊藤 若冲)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1772년(54세) 쇼코쿠지로 돌아와 1777년(59세) 제113대 주지로 추대되었다.[1] 1781년(63세)에는 쓰시마(津島) 이테이안(以酊庵) 린반소(輪番僧)로 임명되어 2년간 조선 관련 외교문서 작성을 담당하였다.[1] 1787년(69세)에는 통신사 징빙 기한 연장 문제로 막부 로주(老中)인 마쓰다이라 사다노부(松平 定信)의 자문에 응하였다.
1793년(75세)에는 텐다이슈(天台宗)의 리쿠뇨지슈(六如慈周)와 함께 일본에 남아 있지만 중국에 없는 불경을 모아 중국에 보내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796년(78세)과 1798년(80세)에는 에도로 가서 막부에 통신사 징빙 문제를 자문하였다. 1801년 쇼코쿠지 시운안(慈雲庵)에서 83세로 입적하였다.[1]
2. 4. 외교 자문과 말년
1781년 예순세 살에 쓰시마의 이테이안 린반소(輪番僧)로 임명되어 2년간 조선을 대상으로 한 외교문서 작성을 담당하였다.[1] 1787년에는 통신사를 징빙(徵聘)하고자 정한 기한을 뒤로 물려 늘리려고 막부의 로주(老中)인 마쓰다이라 사다노부가 다이텐 겐조를 에도로 불러 자문(諮問)하기도 했다.[1] 1793년 텐다이슈(天台宗)의 리쿠뇨지슈(六如慈周)와 함께 일본에 남아 있지만 중국에 없는 석전(釋典)을 취감하여 규슈 서북부 나가사키를 통해 중국에 보내려 했으나 실현하지 못했다. 1796년과 1798년 에도로 가 막부에 통신사 징빙 관련 자문을 하였다.1801년 쇼코쿠지(相国寺) 시운안(慈雲庵)에서 향년 여든세 살로 입적하였다.[1]
3. 사상과 학문
다이텐 겐조는 사상이나 학문 면에서 특정 학파에 얽매이지 않고 폭넓은 학문적 태도를 보였다.
3. 1. 조선과의 관계
다이텐 겐조는 54세(1772년)까지 쇼코쿠지(相国寺)를 떠나 교토 인근 산중에서 생활하면서 木村 蒹葭堂 등과 교류하였다. 이 시기에 조선 신사(信使)와 만났다.[1] 63세(1781년)에는 쓰시마(津島)에 있는 이테이안(以酊庵)의 린반소(輪番僧)로 임명되어 2년간 조선 관련 외교문서 작성을 담당하였다.[1] 69세(1787년)에는 통신사(通信使)를 초빙하는 기한을 연기하는 문제로 막부의 로주(老中)인 松平 定信의 자문에 응하기도 하였다.[1] 78세(1796년)와 80세(1798년)에는 에도로 가서 막부에 통신사(通信使) 초빙에 대해 자문하였다.[1]4. 저작
다이텐 겐조는 오규 소라이에서 시작되어 도쿠가와 시대에 흥성했던 유교 고학(古學)의 일파인 고문사파(古文辞派)의 영향을 받았다. 와카에 대한 소양도 깊어, 와카의 요소를 한시에 도입하려 시도했다. 그의 작풍은 불교적인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우면서 대담한 것이 특징이다.[1] 또한 고문사파에 얽매이지 않고 평이하고 뜻이 잘 통하는 시문으로 알려졌으며,[1] 특히 한문 문법의 정확성으로 시문 작법서나 당시의 주석에 대한 평가가 높다.[1]
4. 1. 시집
다이텐 겐조는 오규 소라이에서 시작되어 도쿠가와 시대에 흥성했던 유교 고학(古學)의 일파인 고문사파(古文辞派) 시인들의 독특한 시풍을 따랐다. 그는 일본 고유의 정형시인 와카에 대한 소양도 깊어, 와카의 요소를 한시에 도입하려 시도했다. 그의 작풍은 불교적인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우면서 대담한 것이 특징이다.[1] 다이텐 겐조는 다수의 시집을 펴냈으며, 오늘날에도 그의 시를 읽고 감상하는 사람들이 많다.
참조
[1]
서적
日本古典文学大辞典
岩波書店
1984-07
[2]
문서
시가현
[3]
문서
히가시오미시
[4]
간행물
18세기 일본 지식인 조선을 엿보다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13-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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