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하시 모토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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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카하시 모토타네는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까지 활동한 무장으로, 아키즈키 다네자네의 차남으로 태어나 다카하시 아키타네의 양자가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 이후 휴가 아가타를 다스렸으며, 임진왜란에 참전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형과 함께 서군에 속했으나, 동군에 내응하여 영지를 유지했다. 이후 노베오카성 축성 등 번정의 기초를 다졌으나, 1613년 가이에키를 당하고 이듬해 다나구라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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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카하시 모토타네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씨명 | 아키즈키씨(秋月氏) → 다카하시씨 |
| 이름 | 다카하시 모토타네 |
| 원어 이름 | 高橋 元種 |
| 가명 | 구로(九郎) |
| 통칭 | 우콘다이후 |
| 별명 | 지하쿠(知白), 유키나가(種直), 나가유키(長行) |
| 계명 | 지하쿠소신거사(知伯宗信居士) |
| 묘소 | 후쿠시마현히가시시라카와군다나구라정 조류지(常隆寺) |
| 시대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 에도 시대 초기 |
| 출생 | 1571년 |
| 사망 | 1614년 11월 10일 |
| 관직 | |
| 관위 | 종5위하우콘다이후 |
| 가문 | |
| 가문 | Mon Akizuki.jpg |
| 가문 설명 | 셋패랭이꽃 |
| 주군 및 번 | |
| 막부 | 에도 막부 |
| 주군 | 도쿠가와 이에야스 → 도쿠가와 히데타다 |
| 번 | 휴가아가타번주(日向縣藩) |
| 가족 관계 | |
| 아버지 | 아키즈키 다네자네 |
| 어머니 | 다하라 지카히로의 딸 |
| 양아버지 | 다카하시 아키타네 |
| 형제 | 아키즈키 다네나가 등 |
| 배우자 | 우키타 다다이에의 딸 |
| 자녀 | 사쿄, 나가유키, 오카네 |
2. 생애
겐키 2년(1571년) 지쿠젠의 센고쿠 다이묘 아키즈키 다네자네의 차남으로 태어나, 덴쇼 6년(1578년)에 다카하시 아키타네의 양자가 되었다. 덴쇼 15년(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 때 항복하여 휴가국 노베오카 지역에 5만여 석의 영지를 받았다. 1592년부터 시작된 임진왜란에도 참전하여 조선 침략에 가담하였다.
게이초 5년(1600년)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처음 서군에 가담했으나, 형 아키즈키 다네나가를 따라 동군으로 돌아서면서 영지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후 노베오카성을 축성하는 등 노베오카번 통치의 기초를 다지는 데 힘썼다.
그러나 게이초 18년(1613년), 사카자키 나오모리의 조카가 도주한 사건에 연루되어 막부로부터 가이에키(영지 몰수) 처분을 받았다.[3] 이후 무쓰 다나구라의 다치바나 무네시게에게 맡겨졌으며,[4] 게이초 19년(1614년) 10월 9일 그곳에서 향년 44세로 사망했다.
2. 1. 출생과 가독 상속
겐키 2년(1571년) 지쿠젠의 센고쿠 다이묘였던 아키즈키 다네자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덴쇼 6년(1578년)에는 다카하시 아키타네의 양자로 들어가게 되었다.2. 2. 도요토미 정권
덴쇼 15년(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 때 항복하여, 휴가국 아가타(현재의 노베오카시) 지역을 받았다. 같은 해 8월 5일 히데요시가 휴가국의 다이묘들을 재배치하면서 모토타네에게는 도모치인(土持院) 300정(町) 등 총 1,787정의 토지가 할당되었다. 11월에는 부젠국 고슈가쿠 성(香春岳城)에서 마쓰오 성으로 거처를 옮겼다.덴쇼 19년(1591년) 9월 27일에는 나카야마성을 거점으로 삼고 있던 미타이 친타케를 가로(家老) 카이 소세쓰의 협력을 얻어 정복하고, 다카치호 지방까지 지배 영역을 넓혔다. 이어서 이와토 오오노하라 가메야마 성(岩戸大野原亀山城)과 고우치 키토산 성(河内鬼頭山城)도 함락시켰다.
분로쿠 원년(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분로쿠의 역)에 참전하였다. 4월 12일, 모리 가쓰노부가 이끄는 제4군(1만 4,000명) 소속으로 조선의 김해에 상륙하였다. 같은 날 시마즈 요시히로(1만 명), 모토타네(625명)를 포함한 휴가국의 여러 다이묘 병력(총 2,000명)은 한성까지 침략해 들어갔다.
분로쿠 3년(1594년) 이시다 미쓰나리가 휴가국, 오스미국, 사쓰마국에서 검지(토지 조사)를 실시한 결과, 다카하시 모토타네의 영지는 5만 3,000석으로 확정되었다.[3]
게이초 3년(1598년) 정유재란(게이초의 역)에도 참전하였다. 노베오카 병력 600명을 포함한 휴가국 전체 병력 2,000명은 구로다 나가마사가 지휘하는 제3군에 편성되었다.
2. 3. 에도 막부
게이초 5년(1600년)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형 아키즈키 다네나가와 함께 행동하여 오가키성에 농성하며 서군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9월 15일 본 전투에서 서군이 패배하자, 미즈노 카츠나리의 권유로 동군에 내응한 형을 따랐다. 이때 같은 성에 농성하고 있던 소우라 요리후사, 쿠마가이 나오모리, 카키미 나오이치, 키무라 요시노부·키무라 토요스다 부자 등을 성 안에서 살해하고, 23일에는 성주 후쿠하라 나가타카를 항복시켰다. 이 공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영지를 안도받았다.이후 게이초 6년(1601년) 현 성(縣城, 현재의 노베오카 성) 건설을 시작하여 게이초 8년(1603년) 가을에 완성시키는 등 번의 통치 기반을 다지는 데 힘썼다. 또한 성 아래 마을 건설에도 착수하여 현재까지 이어지는 노베오카 마을의 원형을 만들었다.
게이초 14년(1609년) 8월에는 영내에 잠복해 있던 이노쿠마 교토시를 체포하여 교토로 호송하였다(이노쿠마 사건).
그러나 게이초 18년(1613년) 10월 24일[3], 막부의 명령에 따라 가이에키되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토미타 노부타카와 사카자키 나오모리의 대립에 휘말렸을 때, 나오모리의 조카인 사카자키 사에몬(우키타 사에몬, 미즈마 칸베에)이 도주한 것을 숨겨주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모토타네의 신병은 장남 사쿄와 함께 무쓰 다나구라 번주 다치바나 무네시게[4]에게 맡겨지는 처분이 내려졌다. 이후, 게이초 18년(1613년) 12월부터 동 19년(1614년) 7월 사이 노베오카 번은 막부 직할령이 되어, 막부의 명을 받은 분고 우스키 번 이나바 가문과 히고 히토요시 번 사가라 가문의 관리 하에 놓였다.
게이초 19년(1614년) 10월 9일, 다나구라에서 향년 44세로 사망했다.
3. 가계
- '''아버지''': 아키즈키 다네자네 (秋月種実, 1548? ~ 1596)
- '''어머니''': 타하라 치카히로 (田原親宏)의 딸
- '''양아버지''': 다카하시 아키타네 (高橋鑑種, 1529? ~ 1579)
- '''정실''': 우키타 다다이에 (宇喜多忠家)의 딸
- '''자녀''' (생모 불명)
- * '''장남''': 다카하시 잇사이 (高橋一斎, ? ~ 1684) - 처음 이름은 사쿄(左京)였으나 후에 잇사이(一斎)로 개명했다. 처음에는 다나구라번의 다치바나씨를 섬겼고, 이후 무쓰 니혼마쓰번의 니와씨를 섬겼다. 그의 자손들도 대대로 니와 가문을 섬겼다. 조쿄(貞享) 원년(1684년) 5월 23일, 8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묘소는 진언종 마니보산(摩尼寳山) 헨조지(遍照寺)에 있으며, 법명은 만휴종은대거사(萬休宗誾大居士)이다.
- * '''차남''': 다카하시 다네나오 (高橋種直, 1607 ~ ?) - 아명은 조키치(長吉), 통칭은 시치로에몬(七郎右衛門)이다. 유수 가로(留守家老)인 하나다 유키히데(花田備後守行栄)와 도시 쓰네쓰구(土師七左衛門経次)와 함께 사쓰마국의 시마즈씨에게 의탁하여 가신이 되었다. 이후 가고시마 다카하시 가문의 시조가 되었다.
- * '''딸''': 카네(かね) - 혼다 구라노스케(本多内蔵介)의 아내. 카네는 다치바나 무네시게의 하타모토인 혼다 구라노스케에게 시집가 두 아이를 낳았으나 이혼했다. 이후 다치바나 무네시게의 양녀가 되어 가신 야지마 시게타케(사마노스케(左馬助), 야지마 시게나리의 차남)와 재혼했다.
참조
[1]
서적
高鍋藩史話
鉱脈社
[2]
서적
津和野町史
(정보 없음)
1976-00-00
[3]
서적
徳川大名改易録
崙書房出版
1998-00-00
[4]
문서
(제목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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