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다케다 고운사이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다케다 고운사이(1803-1864)는 미토 번의 무사로, 본래 아토베 가문의 슈고다이였으나 다케다 신겐의 후예를 칭하며 다케다 씨로 성을 바꾸었다. 그는 미토 번 정계에서 도쿠가와 나리아키를 보좌하며 존왕양이 운동을 지지했으나, 나리아키 사후 혼란 속에서 덴구토의 난을 이끌다 막부군에 항복하여 처형되었다. 그의 묘소는 미토시에 있으며, 가족들 또한 덴구토의 난과 관련된 혐의로 처형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다케다씨 - 다케다 노부토키
    다케다 노부토키는 가마쿠라 시대의 무장으로, 아키 슈고를 역임하고 1279년에 출가하여 코우카이로 불렸으며, 그의 증손인 다케다 노부타케가 가이 국 슈고를 계승하여 무로마치·센고쿠 시대까지 이어졌다.
  • 다케다씨 - 다케다 소카쿠
    다케다 소카쿠는 1859년 일본에서 태어난 무술가로, 대동류 합기유술을 창시하고 전국을 돌며 무술을 가르쳤으며, 그의 가르침은 현대 무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 막말 미토번 사람 - 도쿠가와 아키타케
    도쿠가와 아키타케는 미토 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아들로, 파리 만국 박람회에 일본 대표단을 이끌고 유럽을 순방하며 외교 활동을 펼쳤고, 메이지 유신 이후 미토 도쿠가와 가문의 당주가 되었으며, 육군 소위로 복무하다가 은퇴 후 사망했다.
  • 막말 미토번 사람 - 세리자와 가모
    세리자와 가모는 막부 말기 로시구미 출신으로 신선조를 창설하고 초대 국장을 지냈으며, 곤도 이사미와 함께 신선조를 결성했으나 내부 문제로 암살당했다.
다케다 고운사이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다케다 고운사이
별명히코쿠로
관위종5위하 이가노카미, 증정4위
출생교와 3년 ( 1803년 )
출생지히타치국 미토
사망겐지 2년 2월 4일 ( 1865년3월 1일 )
사망지에치젠국 쓰루가
활동도막 운동
소속덴구토
소속 번미토번
묘소묘운지
개인 정보
출생 연도1803년
사망 연도1865년 3월 1일
출생지미토번, 일본
사망지쓰루가시, 후쿠이현, 일본
아버지히지카타 요시아쓰
어머니에쓰
경력
소속미토번
전투미토의 난
기타 정보
가족 관계히지카타 요시아쓰 (아버지), 에쓰 (어머니)
동상 위치쓰루가시
로마자 표기Takeda Kōunsai
쓰루가에 있는 다케다 고운사이 동상
쓰루가에 있는 다케다 고운사이 동상

2. 가계

다케다 고운사이의 본래 가계는 아토베 씨였으나, 후에 스스로 다케다 신겐의 후예를 자처하며 다케다씨로 성을 바꾸었다. 1817년 아버지의 300 곡 영지를 상속받으면서 이름을 跡部彦九郎|아토베 히코쿠로일본어에서 武田正生|다케다 마사키일본어로 개명하였다.

2. 1. 본래 가계

다케다 고운사이의 본래 가계는 아토베 씨이다.[1][2] 아토베 씨는 세이와 겐지의 한 갈래인 가와치 겐지의 방계이자 가이 겐지에 속하지만, 다케다씨와는 달리 오가사와라씨에서 갈라져 나온 가문이다.[1][2] 무로마치 시대 후기에는 가이국의 슈고였던 다케다씨를 보좌하는 슈고다이를 역임했으며,[1][2] 센고쿠 시대에는 다케다 가문의 가신이 되거나 다케다 가문 멸망 후에도 존속한 일족도 있었다.[2]

고운사이는 인척 관계를 이유로 다케다 신겐의 후예를 자처하며 다케다(武田) 성씨로 바꾸었다.[1][2] 자신의 조상으로 여겨지는 아토베 가쓰스케가 역사서 《갑양군감》에서 간신(奸臣)으로 묘사된 것을 꺼려 아토베 성씨를 싫어했고,[1][2] 당시 번주였던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허락을 받아 다케다 성씨로 개성(改姓)하였다.[1][2]

2. 2. 다케다 가문으로의 개성

다케다 고운사이의 원래 가문은 아토베 씨이다. 아토베 씨는 세이와 겐지의 한 갈래인 가와치 겐지의 방계로, 가이 겐지의 피를 잇고 있지만 다케다 씨와는 다른 오가사와라 가문에서 갈라져 나온 가문이었다. 무로마치 시대 후기에는 가이국의 슈고였던 다케다 씨를 보좌하는 수호 대리(슈고다이)를 맡기도 했다.

그러나 고운사이는 인척 관계 등의 이유로 스스로 다케다 신겐의 후예를 자처하며 다케다라는 성씨로 바꾸었다. 또한 자신의 조상 중 한 명인 아토베 가쓰스케가 《갑양군감》에서 간신으로 묘사된 것을 싫어하여 아토베라는 성씨를 꺼렸다고도 전해진다. 결국 당시 번주였던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허락을 받아 다케다 씨로 성을 바꾸는 개성을 하였다.

3. 생애

다케다 고운사이는 에도 시대 말기의 미토번사이다. 교와 3년(1803년) 미토번사 아토베 마사쓰구의 아들로 태어나 아토베 가문의 종가 아토베 마사후사의 양자로 들어갔으며, 분카 14년(1817년) 가독을 승계하며 다케다(武田) 성씨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도다 주다유, 후지타 도코와 함께 水戸の三田|미토노산덴일본어(미토의 삼전)으로 불리며 명성을 얻었다.

도쿠가와 나리아키가 번주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도왔으며, 그 공로로 덴포 11년(1840년) 번의 정계에 참여하여 나리아키의 개혁 정책과 존왕양이 운동을 지지했다. 고카 원년(1844년) 나리아키가 막부에 의해 은거 근신 처분을 받자, 이를 비판하다 연좌되어 함께 근신 처분을 받기도 했다. 가에이 2년(1849년) 나리아키가 복귀하면서 다시 번정에 참여하였고, 안세이 3년(1856년)에는 집정의 자리에 올랐다.

만엔 원년(1860년) 나리아키가 병사한 후 미토 번 내의 정치적 혼란이 극심해지자, 고운사이 역시 점차 정치 중심에서 멀어졌다. 겐지 원년(1864년) 후지타 고시로가 이끄는 덴구토가 거병하자, 처음에는 만류했으나 결국 요청을 받아들여 수령이 되었다. 그는 덴구토를 이끌고 교토를 향해 진군했으나, 에치젠국 쓰루가에서 막부군에 항복하였고 이듬해인 1865년 처형되었다. 그의 나이 향년 63세였다. 막부의 탄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아, 그의 아내와 자녀, 손자들까지 모두 미토에서 처형되는 비극을 겪었다.

고운사이는 나리아키의 영향을 받은 존왕양이파였으나, 과격한 양이 행동에는 비교적 소극적인 입장이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덴구토의 수령이 되었을 때는 이미 죽음을 각오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묘소는 미토시의 묘운사와, 그와 함께 처형된 덴구토 대원들이 묻힌 후쿠이현 쓰루가시의 다케다 코운사이 등 묘에 있다.

3. 1. 초기 생애

교와 3년(1803년) 미토번사 아토베 마사쓰구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아토베 가문의 종가인 아토베 마사후사의 양자로 들어갔다. 분카 14년(1817년)에는 아버지의 300곡 영지를 상속받으며 가독을 승계하였고, 이때 자신의 성을 기존의 아토베 히코쿠로(跡部彦九郎)에서 다케다 마사키(武田正生)로 변경하였다.

그는 스스로 가이국의 명문가인 다케다 씨족의 후손이라고 주장하였으나, 실제 직계 조상은 다케다 가문의 가신이었던 아토베 가쓰스케로 알려져 있어, 다케다 씨족 본가와의 직접적인 혈연관계는 다소 미미했다. 이후 도다 주다유, 후지타 도코와 함께 水戸の三田|미토노산덴일본어(미토의 삼전)으로 불리며 명성을 얻었다.

3. 2. 도쿠가와 나리아키 시대

도쿠가와 나리아키번주의 자리에 오르는 데 힘썼으며, 토다 츄타유, 후지타 도코와 함께 미토의 삼전(水戸の三田일본어)이라 불리며 명성을 얻었다. 이러한 공적으로 덴포 11년(1840년) 번의 정계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는 나리아키의 선임 고문으로서, 나리아키가 추진하려던 도쿠가와 막부의 행정 및 정책 개혁 수립을 도왔다. 여기에는 막부의 군사력 강화와 일본 영해를 침범하며 쇄국 정책을 위협하는 외국 군함에 대한 강경한 대응책 마련 등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고카 원년(1844년), 나리아키가 막부로부터 은거 근신 처분을 받자, 고운사이는 이를 강하게 비판하다가 연좌되어 함께 근신 처분을 받았다. 가에이 2년(1849년), 나리아키가 정계에 복귀하면서 고운사이도 다시 번정에 참여하였고, 안세이 3년(1856년)에는 집정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나리아키의 존왕양이 운동을 적극 지지하며 그의 활동을 뒷받침했다.

만엔 원년(1860년) 나리아키가 병사하자 미토번 내부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고, 고운사이 역시 번의 정치 중심에서 점차 멀어졌다. 그는 나리아키 사후의 혼란을 수습하고자 각 파벌 간의 조정을 시도했으나, 상황을 안정시키지는 못했다. 이 시기 고운사이는 미토번 내에서 점차 과격해지는 존왕양이파의 지도자로 부상하여, 일본 내 외국인에 대한 테러 공격과 막부 관리 암살 등을 주도하게 된다. 이러한 움직임은 겐지 원년(1864년) 5월부터 이듬해 초까지 이어진 미토의 난으로 격화되었다.

3. 3. 나리아키 사후와 덴구토의 난

1860년 도쿠가와 나리아키가 병사하자 미토번의 정계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고, 다케다 고운사이 역시 번의 정치 중심에서 점차 멀어졌다. 그는 나리아키 사후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여러 파벌 간의 조정을 시도했지만, 상황을 안정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이 시기 미토 번 내에서는 존왕양이를 외치는 세력이 점점 더 과격해져 외국인에 대한 테러 공격이나 막부를 지지하는 관리들을 암살하는 움직임까지 나타났다.

겐지 원년(1864년) 5월, 후지타 도코의 넷째 아들인 후지타 고시로가 덴구토를 이끌고 무력으로 거병했다. 고운사이는 처음에는 고시로의 행동이 너무 성급하다고 만류했으나, 나리아키 시절의 공신이었던 그에게 고시로가 덴구토의 수령이 되어 달라고 간절히 요청하자 이를 거절하지 못하고 수락했다. 이때 그는 이미 죽음을 각오했던 것으로 보인다.

덴구토의 목표는 당시 교토에 머물고 있던 나리아키의 아들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새로운 미토 번주로 옹립하고, 존왕양이 사상을 천황에게 직접 호소하는 것이었다. 고운사이가 이끄는 덴구토 약 800명은 나카센도를 따라 교토를 향해 진군했다. 이 과정에서 쓰쿠바 산, 나카미나토 등지에서 막부군과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에치젠국 쓰루가에 이르렀을 때, 막부의 추토군에 의해 포위되어 항복하고 말았다.

항복한 덴구토 대원들은 혹독한 겨울 날씨 속에 쓰루가 항구 근처의 열악한 청어 창고 16곳에 구금되었고, 많은 이들이 추위와 굶주림, 질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이듬해인 1865년, 간단한 조사를 마친 후 고운사이(향년 63세)와 후지타 고시로를 포함한 생존자 353명은 쓰루가의 라이코지(来迎寺)라는 절로 끌려가 집단으로 참수당했다.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막부 당국은 미토에 남아있던 고운사이의 아내와 첩, 두 아들, 그리고 어린 손자들까지 모두 체포하여 처형했다. 특히 세 살배기 아들 金吾|카네요시일본어가 참수될 때 울면서 어머니에게 매달리자, 망설이는 사형 집행인을 대신해 요리키(與力, 막부의 하급 관리) 篠島 左太郎|시노지마 사타로일본어가 직접 단도로 찔러 죽였다는 비극적인 일화가 전해진다.

고운사이는 스승 나리아키의 영향을 받아 존왕양이 사상을 신봉했지만, 극단적인 양이 행동에는 비교적 소극적인 입장이었다.

묘운사(미토시)에 있는 다케다 고운사이의 묘


고운사이의 묘소는 미토시에 있는 묘운사에 있다. 또한, 그와 함께 처형된 덴구토 단원 353명이 매장된 분묘가 후쿠이현 쓰루가시 마쓰시마정에 있으며, 이는 '다케다 코운사이 등 묘'라는 명칭으로 일본의 국사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3. 4. 최후

겐지 원년(1864년) 후지타 고시로가 덴구토를 이끌고 거병하자, 다케다 고운사이는 처음에는 성급한 행동이라며 만류했으나, 도쿠가와 나리아키 시대의 공신이었던 그에게 고시로가 덴구토의 수령이 되어달라고 간청하자 이를 받아들였다.

덴구토는 나리아키의 아들로 당시 교토에 머물고 있던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새로운 미토 번주로 옹립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고운사이는 약 8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나카센도를 따라 교토로 향했지만, 에치젠국 쓰루가 신보(新保)에서 막부 추토군의 공격을 받고 항복하였다. 이때 남은 인원은 823명이었다.

항복한 덴구토 일행은 추운 겨울에 쓰루가 항구 근처의 청어 보관 창고 16곳에 분산 수용되었는데, 열악한 환경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듬해인 1865년, 고운사이를 포함한 생존자 353명은 인근의 사찰인 来迎寺|라이코지일본어로 끌려가 집단 처형되었다. 고운사이는 간단한 조사를 받은 뒤 후지타 고시로와 함께 참수되었으며, 이때 그의 나이는 향년 63세였다.

막부의 탄압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의 아내와 두 아들(유아 포함), 그리고 네 명의 손자(소녀 및 유아 포함) 역시 미토에서 참수형에 처해졌다. 특히 세 살배기 아들 金吾|카네요시일본어가 처형될 때 울면서 어머니에게 매달리자 사형 집행인이 망설였는데, 이때 요리키였던 篠島 左太郎|시노지마 사타로일본어가 책임을 지겠다며 나서서 아이를 무릎 사이에 끼우고 단도로 직접 살해했다고 전해진다.

고운사이는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영향을 받아 존왕양이 사상을 따랐으나, 과격한 방식의 양이에는 소극적인 입장이었다. 덴구토의 수령이 되었을 때 이미 죽음을 각오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묘소는 미토시에 있는 묘운사에 마련되어 있다. 또한, 쓰루가에서 처형된 덴구토 당원 353명과 함께 묻힌 분묘가 후쿠이현 쓰루가시 마쓰시마정에 있으며, 이 묘역은 '다케다 고운사이 등 묘'라는 명칭으로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4. 묘소

미토시에 있는 묘운사에 다케다 고운사이의 개인 묘소가 있다.

또한 후쿠이현 쓰루가시 마쓰시마정에는 텐구당 봉기 당시 참수된 텐구당원 353명과 함께 매장된 집단 분묘가 있다. 이 묘역이 있는 곳은 원래 라이코지(Raikō-ji)라는 사찰이었으나, 메이지 유신 이후 신사인 마츠바라 신사(Matsubara Jinja)가 되었다. 마츠바라 신사에서는 쓰루가에서 사망한 텐구당 관련자 411명(감옥에서 사망한 사람 포함)을 ''가미''로 모시고 있다.

다케다 고운사이와 그의 추종자 353명의 집단 묘는 원래 옛 라이코지 경내의 5개 언덕에 나뉘어 있었으나, 1868년 메이지 정부는 이 언덕들을 하나로 합쳐 가로 30m, 세로 4m 크기의 단일 분묘로 정비했다. 이때 미토에서 가져온 돌로 만든 15개의 묘비를 'U'자 형태로 배치했다.

1954년, 텐구당 봉기 90주년을 기념하여 당시 사용되던 청어 창고 중 하나를 마츠바라 신사 부지로 옮겨와 '''미토 열사 기념관'''(水戸烈士記念館)으로 개관했다.

쓰루가의 집단 분묘는 '''다케다 고운사이 등의 묘'''(武田耕雲斎等墓)라는 명칭으로 1976년에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5. 가족

미토의 난 실패 후, 다케다 고운사이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들 역시 막부의 탄압을 피하지 못했다. 막부 당국은 고운사이의 부인, 두 아들(장남 히코에몬, 차남 카이케), 세 손자(손사부로, 킨시로, 쿠마고로), 그리고 첩까지 체포하여 처형했다. 특히 3살 된 칠남 金吾|킨고일본어가 처형될 때의 일화는 당시의 참혹함을 보여준다.

고운사이의 주요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

이름관계주요 정보 및 최후향년/사망 연도비고 (야스쿠니 신사 합사 등)
부인 (히토미 성) | 게이오 원년(1865년) 3월 25일, 미토에서 참수[4] | 향년 40세 | 야스쿠니 신사 합사
장남 (휘 마사카츠) | 미토 번사 (500석). 미토의 난 가담 후 서상(西上), 게이오 원년(1865년) 2월 4일, 에치젠국 쓰루가에서 참수[4] | 향년 44세 | 종4위 추증, 야스쿠니 신사 합사
장남 히코에몬의 부인 (후지타 씨) | 후지타 도코의 여동생. 게이오 원년(1865년) 9월 24일, 미토 옥중에서 단식 사망[4] | 향년 43세 | 야스쿠니 신사 합사
장남 히코에몬의 삼남 | 게이오 원년(1865년) 3월 25일, 미토에서 참수[4] | - | 야스쿠니 신사 합사
다케다 킨지로 | 장남 히코에몬의 사남 | 게이오 원년(1865년) 3월 25일, 미토에서 참수[7] | - | 야스쿠니 신사 합사
장남 히코에몬의 딸 | 게이오 원년(1865년) 3월 25일, 미토에서 참수[7] | 향년 11세 | 야스쿠니 신사 합사
장남 히코에몬의 오남 | 게이오 원년(1865년) 3월 25일, 미토에서 참수[7] | - | 야스쿠니 신사 합사
차남 (휘 마사요시) | 고카 연간(1844년~1847년)부터 국사에 관여. 미토의 난 가담 후 서상(西上), 게이오 원년(1865년) 2월 4일, 에치젠국 쓰루가에서 참수[7] | - | 종4위 추증, 야스쿠니 신사 합사
육남 | 게이오 원년(1865년) 3월 25일, 미토에서 참수[7] | 향년 9세 | 야스쿠니 신사 합사
칠남 | 게이오 원년(1865년) 3월 25일, 미토에서 참수[7] | 향년 3세 | 야스쿠니 신사 합사
첩 | 게이오 원년(1865년) 3월 25일, 미토에서 참수[7] | - | 야스쿠니 신사 합사
첩 카요와의 딸 | 오쿠보 도시미치 암살범 시마다 이치로의 부인. 이후 생활고로 절도 및 사기 혐의로 체포됨[8] | - | -



고운사이의 손자이자 히코에몬의 아들인 다케다 킨지로도 있다. (표의 '장남 히코에몬의 사남' 항목 참조)

6. 등장 작품


  • 천황의 세기 (텔레비전 드라마, 아사히 방송, 1971년, 연기: 가토 요시)
  • 도쿠가와 요시노부 (NHK 대하 드라마, 1998년, 연기: 카네우치 키쿠오)
  • 푸른 하늘을 꿰뚫어라 (NHK 대하 드라마, 2021년, 연기: 츠다 칸지)

참조

[1] 서적 The Mito Ideology: Discourse, Reform, and Insurrection in Late Tokugawa Japan, 1790-1864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21-05-28
[2] 서적 (国指定史跡事典) National Historic Site Encyclopedia 学生社 2012
[3] 웹사이트 武田耕雲斎等墓 http://bunka.nii.ac.[...] Agency for Cultural Affairs
[4] 문서 幕末維新全殉難者名鑑1 新人物往来社 1986
[5] 문화유산 武田耕雲斎等墓
[6] 웹사이트 武田耕雲斎等墓 http://info.pref.fuk[...] 福井県の文化財 2016-12-10
[7] 문서 新人物往来社 1986
[8] 뉴스 新聞集成明治編年史. 第十四卷 https://dl.ndl.go.jp[...]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