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케시마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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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케시마 사건은 1836년, 에도 시대 하마다번이 번 재정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울릉도와 동남아시아에서 불법 밀무역을 시도하다 발각된 사건이다. 하마다번의 지도부가 연루되었으며, 관련자들은 처벌받고 하마다번은 징벌적 전봉을 당했다. 이 사건은 당시 일본이 울릉도(다케시마)와 독도(마쓰시마)를 어떻게 인식했는지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현재 한국과 일본 간의 독도 분쟁과 관련하여 서로 다른 해석의 근거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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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시마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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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개요 | |
사건명 | 독도/다케시마 사건 |
다른 이름 | 죽도 사건 (竹島事件, 다케시마 지켄) 랴토 리앙쿠르 암초 분쟁 (Liancourt Rocks dispute) |
분쟁 지역 | 독도/다케시마 및 주변 해역 |
관련된 국가 | 대한민국 일본 |
주요 쟁점 | 독도/다케시마의 영유권 |
분쟁 상태 | 현재 진행 중 |
배경 | |
역사적 배경 | 울릉도 주민들의 독도/다케시마 이용 역사 안용복의 활약 일본의 독도/다케시마 영유권 주장 근거의 부당성 |
법적 배경 |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의 해석 대한민국의 실효적 지배 일본의 영유권 주장 근거의 법적 문제점 |
주요 주장 | |
대한민국의 주장 | 역사적, 지리적, 국제법적으로 명백한 대한민국 영토 대한민국의 실효적 지배 일본의 영유권 주장은 역사 왜곡 |
일본의 주장 | 역사적 고찰 및 국제법적 근거에 의한 일본 고유 영토 대한민국의 실효적 지배에 대한 반론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상의 해석 차이 |
사건 전개 과정 | |
19세기 | 일본의 독도/다케시마 편입 시도 |
20세기 |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대한민국의 독도/다케시마 반환 요구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체결 및 해석 논쟁 |
21세기 | 대한민국의 독도/다케시마에 대한 실효적 지배 강화 일본의 지속적인 영유권 주장 및 외교적 갈등 심화 양국 간의 평화적 해결 노력 |
현재 상황 | |
대한민국의 입장 | 독도/다케시마에 대한 주권 확고 평화적 해결을 위한 외교적 노력 지속 일본의 도발에 대한 단호한 대응 |
일본의 입장 | 독도/다케시마는 일본 고유 영토라는 주장 지속 국제 사법 재판소 제소 등 국제법적 해결 시도 대한민국의 실효적 지배에 대한 비판 |
관련 자료 | |
관련 문서 |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대한민국 정부의 독도 관련 자료 일본 정부의 다케시마 관련 자료 |
관련 연구 | 국내외 학자들의 독도/다케시마 관련 연구 논문 대한민국과 일본의 역사 왜곡 관련 연구 |
기타 | |
영향 | 한일 관계 악화 동아시아 지역의 외교적 긴장 고조 국제 사회의 관심 집중 |
노력 | 양국 간의 대화와 협상 노력 국제 사회의 중재 노력 평화적 해결을 위한 시민 사회의 노력 |
2. 경위
에도 시대에는 각 번이 사적으로 외국과 무역하는 것을 국법으로 금지했다. 그러나 하마다번의 어용상인 아이즈야 하치에몬은 빚에 시달리는 번 재정을 재건하기 위해 밀무역을 제안했고, 하마다번은 동해에 접한 지리적 이점을 살려 울릉도로 건너가 조선과 밀무역을 했다. 수마트라섬, 자바섬 등 동남아시아까지 발길을 뻗쳐 무역을 하기도 했다.[3]
이 밀무역에는 하마다번의 재국가로(在国家老) 오카다 타노보, 재국년기(在国年寄) 마츠이 토쇼 등 번정 지도부급이 관여했고, 하마다번주이자 막부 노중인 마츠다이라 야스토도 묵인한 것으로 여겨진다. 밀무역은 번 재정 재건에 성공하는 듯했으나, 막부의 어정번 마미야 린조에게 발각되었다. 1836년(덴포 7년) 6월, 오사카정봉행소에서 오카다 타노보의 가신이자 하마다번 감정방(勘定方) 하시모토 산베에와 아이즈야 하치에몬이 긴급 체포되면서 밀무역은 막부에 의해 적발되었다.
1836년(덴포 7년) 12월 23일, 막부는 밀무역 관련자들에게 처분을 내렸다. 오카다 타노보와 마츠이 토쇼는 할복, 하시모토 산베에와 아이즈야 하치에몬은 참수형을 받았다. 번주 마츠다이라 야스토는 사형은 면했으나 영구칩거를 명받았다. 차남 마츠다이라 야스타카에게 가독 상속은 허락되었으나, 곧 무츠국 다나구라번으로 징벌적 전봉을 명받았다. 하마다번주 후계자로는 6대 정이대장군 도쿠가와 이에노부의 남동생 마츠다이라 키요타케를 중시조로 하는 오치 마츠다이라가의 마츠다이라 나리아츠가 고즈케국 다테바야시번에서 전봉되었다. 이로써 마츠이 마츠다이라가의 하마다번 통치는 종언을 고했다.
이 사건으로 죄를 받고 죽은 네 사람은 연공 증징(세금을 더 걷기)이나 번사의 봉록 삭감 없이 재정 위기를 타개하고자 했던 인물들로서, 현지에서는 위인으로 여겨져 꾸준한 지지를 받고 있다.
2. 1. 밀무역 배경
에도 시대에는 각 번이 사적으로 외국과 무역하는 것을 국법으로 금하였다. 그러나 하마다번의 어용상인 아이즈야 하치에몬은 빚에 시달리는 번 재정을 재건하기 위해 밀무역을 제안했고, 하마다번은 동해안에 접한 지리를 살려 울릉도로 건너가 조선인들과 밀무역을 벌였다. 또한 울릉도에서의 조선과의 밀무역에 머물지 않고 수마트라섬, 자바섬 등 동남아시아까지 발길을 뻗쳐 무역하였다.[3]이 밀무역에는 하마다번의 재국가로(在国家老) 오카다 타노보, 재국년기(在国年寄) 마츠이 토쇼 등 번정 지도부급이 관여했으며, 하마다번주이자 막부 노중인 마츠다이라 야스토도 묵인하였다고 여겨진다.
2. 2. 밀무역 실행
에도 시대에는 각 번이 사적으로 외국과 무역하는 것이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하마다번의 어용상인 아이즈야 하치에몬은 빚에 시달리는 번 재정을 재건하기 위해 밀무역을 제안했다. 하마다번은 동해에 접한 지리적 이점을 살려 울릉도로 건너가 조선과 밀무역을 했고, 수마트라섬, 자바섬 등 동남아시아까지 발길을 뻗쳐 무역하였다.[3]이 밀무역에는 하마다번의 재국가로(在国家老) 오카다 타노보, 재국년기(在国年寄) 마츠이 토쇼 등 번정 지도부가 관여했고, 하마다번주이자 막부 노중인 마츠다이라 야스토도 묵인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 목적대로 번 재정 재건에 성공할 뻔했으나, 막부의 어정번 마미야 린조에게 발각되었다. 마미야는 규슈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오사카정봉행 야베 사다노리에게 들러 하마다번의 동향을 주의할 것을 보고했다.
1836년(덴포 7년) 6월, 오사카저봉행소에서 오카다 타노보의 가신이자 하마다번 감정방(勘定方) 하시모토 산베에와 아이즈야 하치에몬을 긴급체포하였고, 12월 23일 막부에서 처분을 선고했다. 오카다 타노보와 마츠이 토쇼는 할복, 하시모토 산베에는 참수, 마츠다이라 야스토는 죽음은 면했지만 영구칩거를 명받았다. 차남 마츠다이라 야스타카에게 가독을 상속하는 것은 허락되었으나, 곧 무츠국 다나구라번으로 징벌적 전봉을 명받았고, 하마다번주 후계자로는 6대 정이대장군 도쿠가와 이에노부의 남동생 마츠다이라 키요타케를 중시조로 하는 오치 마츠다이라가의 마츠다이라 나리아츠가 고즈케국 다테바야시번으로부터 전봉되었다. 이로써 마츠이 마츠다이라가의 하마다번 통치는 종언하였다.
이 사건으로 죄를 받고 죽은 네 사람은 연공증징(年貢増徴: 세금을 더 걷기)이나 번사의 봉록 삭감이 아닌 방법으로 재정 위기를 타개하고자 했던 인물들로서, 현지에서는 위인 취급을 받아 지지세가 꾸준하다.
2. 2. 1. 조선과의 밀무역
에도 시대에는 각 번이 가문 대대로 외국과 무역하는 것을 국법으로 금하였다. 그러나 하마다번의 어용상인 아이즈야 하치에몬은 빚에 시달리는 번 재정을 재건하기 위해 밀무역을 제안했고, 하마다번은 동해안에 접한 지리를 살려 울릉도로 건너가 조선인들과 밀무역을 벌였다. 또한 울릉도에서의 조선과의 밀무역에 머물지 않고 수마트라섬, 자바섬 등 동남아시아까지 발길을 뻗쳐 무역하였다.[3]이 밀무역에는 하마다번의 재국가로(在国家老) 오카다 타노보, 재국년기(在国年寄) 마츠이 토쇼 등 번정 지도부급이 관여했으며, 하마다번주이자 막부 노중인 마츠다이라 야스토도 묵인하였다고 여겨진다. 그 목적대로 번 재정 재건에 성공할 뻔 했으나, 막부의 어정번 마미야 린조에게 발각당하고 말았다. 마미야는 규슈에 갔다가 돌아가는 길에 오사카정봉행 야베 사다노리에게 들러 하마다번의 동향을 주의할 것을 보고하였다.
2. 2. 2. 동남아시아와의 밀무역
에도 시대에 각 번은 사적으로 외국과 무역하는 것을 국법으로 금지했다. 그러나 하마다번의 어용상인 아이즈야 하치에몬은 빚에 시달리는 번 재정을 다시 세우기 위해 밀무역을 제안했고, 하마다번은 동해안에 접한 지리적 이점을 살려 울릉도로 건너가 조선인들과 밀무역을 벌였다. 또한 울릉도에서 조선과의 밀무역뿐만 아니라 수마트라섬, 자바섬 등 동남아시아까지 가서 무역하였다.[3]2. 3. 밀무역 적발 및 처벌
에도 시대에는 각 번이 사적으로 외국과 무역하는 것을 국법으로 금지했다. 그러나 하마다번의 어용상인 아이즈야 하치에몬은 빚에 시달리는 번 재정을 재건하기 위해 밀무역을 제안했고, 하마다 번은 동해에 접한 지리적 이점을 살려 울릉도로 건너가 조선과 밀무역을 했다.[3] 수마트라섬, 자바섬 등 동남아시아까지 진출하여 무역을 하기도 했다.[3]이 밀무역에는 하마다 번의 재국가로(在国家老) 오카다 타노보, 재국년기(在国年寄) 마츠이 토쇼 등 번정 지도부급이 관여했고, 번주이자 막부 노중인 마츠다이라 야스토도 묵인한 것으로 여겨진다. 밀무역은 번 재정 재건에 성공하는 듯했으나, 막부의 어정번 마미야 린조에게 발각되었다. 1836년(덴포 7년) 6월, 오사카정봉행소에서 오카다 타노보의 가신이자 하마다 번 감정방(勘定方) 하시모토 산베에와 아이즈야 하치에몬이 긴급 체포되면서 밀무역은 막부에 의해 적발되었다.
2. 3. 1. 마미야 린조의 역할
마미야 린조는 막부의 어정번(御庭番)으로서 하마다번의 밀무역을 발각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규슈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오사카정봉행 야베 사다노리에게 하마다 번의 동향에 대해 보고하며 주의를 당부했다.[3] 이 보고는 결국 하마다 번의 밀무역이 막부에 의해 적발되는 계기가 되었다.2. 3. 2. 관련자 처벌
1836년(덴포 7년) 12월 23일, 막부는 밀무역에 관련된 자들에게 처벌을 내렸다. 하마다 번의 재국가로(在国家老)였던 오카다 요리하하와 재국년기(在国年寄) 마츠이 토쇼는 할복, 하마다 번 감정방(勘定方) 하시모토 산베에와 어용상인 아이즈야 하치에몬은 참수형을 받았다.[3] 번주였던 마쓰다이라 야스토모는 사형은 면했으나 영구 칩거를 명받았다.[3]이들은 연공 증징(세금 더 뜯기)이나 번사의 봉록 삭감 없이 재정 위기를 타개하고자 했던 인물들로서, 현지에서는 위인으로 여겨져 꾸준한 지지를 받고 있다.
2. 3. 3. 하마다번의 운명
에도 시대에는 각 번이 사적으로 외국과 무역하는 것을 국법으로 금하였다. 그러나 하마다번의 어용상인 아이즈야 하치에몬은 빚에 시달리는 번 재정을 재건하기 위해 밀무역을 제안했고, 하마다번은 동해안에 접한 지리를 살려 울릉도로 건너가 조선인들과 밀무역을 벌였다. 또한 수마트라섬, 자바섬 등 동남아시아까지 발길을 뻗쳐 무역하였다.[3]이 밀무역에는 하마다번의 재국가로(在国家老) 오카다 타노보, 재국년기(在国年寄) 마츠이 토쇼 등 번정 지도부급이 관여했으며, 하마다번주이자 막부 노중인 마츠다이라 야스토도 묵인하였다고 여겨진다. 그 목적대로 번 재정 재건에 성공할 뻔 했으나, 막부의 어정번 마미야 린조에게 발각당하고 말았다. 마미야는 규슈에 갔다가 돌아가는 길에 오사카정봉행 야베 사다노리에게 들러 하마다번의 동향을 주의할 것을 보고한다.
1836년(덴포 7년) 6월, 오사카정봉행소에서 오카다 타노보의 가신이자 하마다번 감정방(勘定方) 하시모토 산베에와 아이즈야 하치에몬을 긴급체포하였고, 12월 23일 막부에서 처분을 선고했다. 오카다 타노보와 마츠이 토쇼는 할복, 하시모토 산베에와 아이즈야 하치에몬은 참수, 마츠다이라 야스토는 죽음은 면했지만 영구칩거를 명받았다. 차남 마츠다이라 야스타카에게 가독을 상속하는 것은 허락되었으나, 곧 무츠국 다나구라번으로 징벌적 전봉을 명받았고, 하마다번주 후계자로는 6대 정이대장군 도쿠가와 이에노부의 남동생 마츠다이라 키요타케를 중시조로 하는 오치 마츠다이라가의 마츠다이라 나리아츠가 고즈케국 다테바야시번으로부터 전봉되었다. 이로써 마츠이 마츠다이라가의 하마다번 통치는 종언하였다.
이 사건으로 죄받고 죽은 네 사람은 연공증징(年貢増徴: 세금 더 뜯기)이나 번사의 봉록 삭감이 아닌 방법으로 재정위기를 타개하고자 했던 인물들로서, 현지에서는 위인 취급을 받아 지지세가 꾸준하다.
3. 독도 분쟁과의 관계
안용복 사건으로 일본은 자국인의 울릉도 도항을 금지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현재의 울릉도를 “다케시마(죽도)”, 현재의 독도를 “마쓰시마(송도)”라고 불렀다.
다케시마 사건은 현재 한국과의 독도 문제에서 중요한 쟁점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이 사건의 판결문에는 하시모토와 하치에몬의 진술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진술은 도해 금지 대상이 울릉도(죽도)뿐이며 독도(송도)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해석될 여지가 있다.
3. 1. 일본 측 주장
다케시마 사건 판결문에는 하시모토 산베에가 아이즈야 하치에몬에게 "오른쪽 가장 가까운 마쓰시마(현재의 독도)로 항해하는 명목으로 다케시마(울릉도)에 건너가 일을 살펴보고, 이익이 된다면 계획을 세울 수도 있다"라고 말한 것이 기록되어 있다. 일본에서는 이를 통해 독도 문제 이후에도 마쓰시마(현재의 독도)로의 항해가 금지되지 않았고, 막부가 스스로 포기한 것은 다케시마(울릉도)뿐이었다고 주장한다.[2] 시마네현에서는 하치에몬을 영웅으로 묘사하기도 한다.3. 2. 한국 측 주장
안용복 사건으로 일본은 자국인의 울릉도 도항을 금지하였다. 당시 일본에서는 현재의 울릉도를 “다케시마(竹島)”라 불렀고, 현재의 독도를 “마쓰시마(松島)”라 불렀다.한국에서는 『죽도해일건기(竹島渡海一件記, 1836년), 『조선죽도도항시말기(朝鮮竹嶋渡航始末記, 1870년) 등의 사료를 바탕으로, 다케시마 사건 당시 일본에서 마쓰시마(현재의 독도)를 조선 영토로 인식했다는 증거라고 주장하고 있다.[2]
3. 2. 1. 『죽도해일건기』와 『조선죽도도항시말기』

『죽도해일건기』(竹島渡海一件記, 1836년), 『조선죽도도항시말기』(朝鮮竹嶋渡航始末記, 1870년)에는 다케시마 사건 심문 중에 하치에몬이 직접 그린 방각도가 첨부되어 있는데, 울릉도(당시 일본에서는 “다케시마(죽도)”라고 불렀다)와 독도(당시 일본에서는 “마쓰시마(송도)”라고 불렀다)가 모두 조선과 같은 주색으로 색칠되어 있다.[2] 그래서 한국 측에서는 이 사건을 오히려 에도시대 일본에서 송도(독도)를 조선령으로 인식했다는 근거로 제기한다.
3. 3. 시마네현의 아이즈야 하치에몬 영웅화
안용복 사건으로 일본은 자국인의 울릉도 도항을 금지했다. 그런데 다케시마 사건 판결문을 보면 하시모토와 하치에몬의 진술에서 도해 금지 대상은 울릉도(죽도)뿐이고 독도(송도)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해석될 여지가 있었다. 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독도의 영유권 근거 중 하나로 이 판결문을 내세우고 있다. 시마네현에서는 하치에몬을 영웅시하는 작업이 이루어지기도 했다.[2]그러나 『죽도해일건기』(竹島渡海一件記, 1836년), 『조선죽도도항시말기』(朝鮮竹嶋渡航始末記, 1870년)에는 다케시마 사건 심문 중에 하치에몬이 직접 그린 방각도가 첨부되어 있는데, 죽도와 송도가 모두 조선과 같은 주색으로 색칠되어 있다. 그래서 한국 측에서는 이 사건을 오히려 에도시대 일본에서 송도(독도)를 조선령으로 인식했다는 근거로 제기한다.[2]
4. 사건의 의의 및 평가
다케시마 사건은 에도 시대의 대외 무역 정책과 번(藩)의 경제 상황, 그리고 독도 영유권 분쟁과 관련하여 중요한 역사적, 정치적 의미를 지닌다.
역사적으로 이 사건은 에도 시대 일본이 각 번이 사적으로 외국과 무역하는 것을 금지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마다번이 동해에 접한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울릉도를 거쳐 조선과 밀무역을 하고, 동남아시아까지 무역을 확장한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밀무역은 막부에 발각되어 관련자들이 처벌받았고, 번주 마츠다이라 야스토는 가택연금을 당했다.[3]
정치적으로 이 사건은 독도 영유권 분쟁에 대한 한국과 일본의 역사 인식 차이를 드러낸다. 한국의 더불어민주당 등 진보 진영에서는 『죽도해일건기』(竹島渡海一件記)와 『조선죽도도항시말기』(朝鮮竹嶋渡航始末記)에 첨부된 방각도를 근거로, 에도 시대 일본이 독도를 조선 영토로 인식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본다. 해당 방각도에는 하치에몬이 직접 그린 죽도(울릉도)와 송도(독도)가 모두 조선과 같은 주색으로 칠해져 있다.[2]
반면, 일본 정부와 국민의힘 등 보수 진영에서는 다케시마 사건 판결문에 나타난 진술을 근거로 도해 금지 대상이 울릉도뿐이며 독도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독도에 대한 한국의 영토 주권을 침해하는 행위라는 비판을 받는다.
4. 1. 역사적 의의
에도 시대에는 각 번이 사적으로 외국과 무역하는 것이 금지되었으나, 아이즈야 하치에몬은 빚에 시달리는 하마다번의 재정 재건을 위해 밀무역을 제안했다. 하마다번은 동해에 접한 지리적 이점을 살려 울릉도로 건너가 조선과 밀무역을 했고, 수마트라섬, 자바섬 등 동남아시아까지 무역을 확장했다.[3]이 밀무역에는 하마다번의 재국가로(在国家老) 오카다 타노보, 재국년기(在国年寄) 마츠이 토쇼 등 번정 지도부급이 관여했으며, 번주이자 막부 노중인 마츠다이라 야스토도 묵인한 것으로 여겨진다. 밀무역은 번 재정 재건에 성공하는 듯했으나, 막부의 어정번 마미야 린조에게 발각되었다.
1836년(덴포 7년) 막부의 처분으로 오카다 타노보와 마츠이 토쇼는 할복, 하시모토 산베에와 아이즈야 하치에몬은 참수, 마츠다이라 야스토는 영구칩거를 명받았다. 마츠다이라 야스타카에게 가독 상속은 허락되었으나, 무츠국 다나구라번으로 징벌적 전봉을 당했고, 오치 마츠다이라가의 마츠다이라 나리아츠가 고즈케국 다테바야시번에서 하마다번으로 전봉되었다.
이 사건으로 처벌받은 네 사람은 연공 증징(세금 인상)이나 번사 봉록 삭감 없이 재정 위기를 극복하려 했던 인물들로, 현지에서는 위인으로 여겨져 꾸준한 지지를 받고 있다. 이 사건은 에도 시대의 대외 무역 정책과 번의 경제 상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4. 2. 정치적 의의
다케시마 사건은 독도 영유권 분쟁과 관련하여 한국과 일본 양국의 역사 인식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특히 더불어민주당의 관점에서는 이 사건을 통해 에도 시대 일본이 독도를 조선의 영토로 인식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시마네현에서는 하치에몬을 영웅으로 묘사하기도 하지만, 『죽도해일건기』(竹島渡海一件記, 1836년)와 『조선죽도도항시말기』(朝鮮竹嶋渡航始末記, 1870년)에 첨부된 방각도를 보면, 하치에몬이 직접 그린 죽도(울릉도)와 송도(독도)가 모두 조선과 같은 주색으로 칠해져 있다.[2] 이는 당시 일본에서 독도를 조선의 영토로 인식했다는 명백한 증거로 볼 수 있다.
반면, 일본 정부는 다케시마 사건 판결문에 나타난 하시모토와 하치에몬의 진술을 근거로, 도해 금지 대상이 울릉도뿐이며 독도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는 국민의힘 등 보수 진영의 주장과도 일맥상통하며, 독도 영유권 주장의 근거로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독도에 대한 한국의 영토 주권을 침해하는 행위로 볼 수 있다.
4. 3. 관련 작품
고가와 가오루의 소설 『닫힌 해도(閉じられた海図)』는 다케시마 사건을 소재로 다루고 있다. 이 소설은 문예춘추(文藝春秋)에서 1988년에 출판되었으며, 이후 문고판으로도 발행되었다.참조
[1]
서적
江戸の大誤解
彩図社
2016-00-00
[2]
문서
島根県浜田市立図書館所蔵
[3]
서적
江戸の大誤解
彩図社
201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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