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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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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산국은 244년경에 처음 기록이 등장하며, 삼국사기에는 512년 신라 이사부 장군에 의해 복속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고대 국가이다. 우산국은 울릉도의 별칭으로 여겨지며, 고려 시대에는 고려에 복속되었고, 여진족의 침입으로 1022년에 멸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고문헌과 고지도에 나타나는 우산도를 독도로 해석하여, 우산국의 영역을 울릉도와 독도로 보고 있으며, 독도가 512년 이래 한국의 영토임을 주장하고 있다.

2. 역사

244년 왕기위궁을 토벌하러 옥저 동해안에 도착했을 때, 노인에게 동해에 사람이 사는지 물었다. 노인은 바다 동쪽에 섬이 있고 사람이 살고 있으나 여자만 있고 해마다 칠월이 되면 소녀를 가려 뽑아서 바다에 빠뜨린다고 하였다.[18] 그리고 섬에서 쓰는 언어가 옥저와 다르다고 설명했다.[19]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에는 왕기가 고구려동천왕을 정벌하기 위해 옥저에 왔을 때, 현지인에게 동해에 사람이 사는지 물으니, 그 사람은 동해에 섬이 있고 그 섬에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매년 7월에 처녀를 바다에 던진다고 대답했다고 기록되어 있다.[4][5]

1145년에 편찬된 한반도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문헌 자료인 『삼국사기』에는 삼국 시대512년신라이사부 장군의 계략으로 우산국이 복속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512년 6월, 이사부 장군은 나무 사자를 이용한 계략으로 우산국을 신라에 복속시켰다. 『삼국사기』에는 우산국이 신라에 귀복하여 매년 토산물을 바쳤다고 기록되어 있다.[6][7] 우산국은 울릉도라고도 불렸으며, 명주(현재의 강원특별자치도강릉시) 정동쪽 바다 가운데 있는 섬으로 지방은 100리였다.[10]

930년 우산국은 백길(白吉), 토두(土豆)를 보내 토산물을 바치면서 복속을 원했고 태조는 두 명에게 관직을 내렸다.[25]

1018년(현종 9년) 고려는 우산국이 동북여진족의 침략을 받아 농사를 못하게 되자, 이원구(李元龜)를 보내 농기구를 보냈다.[26] 1019년(현종 10년) 여진족으로부터 도망쳐온 자들을 모두 돌아가게 했다.[27] 1022년(현종 13년) 우산국 백성 중 여진족에게 노략질 당하여 망명온 자들을 예주에 거주하게 하고 호적에 편입되면서 우산국은 멸망하였다.[28]

2. 1. 역사서에 첫 등장

244년 왕기위궁을 토벌하러 옥저 동해안에 도착했을 때, 노인에게 동해에 사람이 사는지 물으니, 바다 동쪽에 섬이 있고 사람이 살고 있으나 여자만 있고 해마다 칠월이 되면 소녀를 가려 뽑아서 바다에 빠뜨린다고 하였다.[18] 그리고 섬에서 쓰는 언어가 옥저와 다르다고 설명한다.[19]

삼국사기에 나타난 가장 초기의 기록은 간접적으로 우산국의 존재를 증명하는데, "왕기(王頎)가 고구려동천왕을 정벌하기 위해 옥저에 왔을 때, 현지인에게 동해에 사람이 사는지 물으니, 그 사람은 동해에 섬이 있고 그 섬에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매년 7월에 처녀를 바다에 던진다고 대답했다."고 기록되어 있다.[4][5]

1145년에 편찬된 한반도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문헌 자료인 『삼국사기』에 따르면, 삼국 시대512년신라이사부 장군의 계략에 의해 복속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지증마립간 13년(512년) 여름 6월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2. 2. 신라 복속

512년 6월, 이사부 장군이 나무 사자를 이용한 계략으로 우산국을 신라에 복속시켰다. 『삼국사기』에는 우산국이 신라에 귀복하여 매년 토산물을 바쳤다고 기록되어 있다.[6][7] 우산국은 울릉도라고도 불렸으며, 명주(현재의 강원특별자치도강릉시) 정동쪽 바다 가운데 있는 섬으로 지방은 100리였다.[10]

이사부는 우산국 사람들이 어리석고 사나워 위엄으로 복종시키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나무로 사자 모양을 많이 만들어 전선에 나누어 싣고 우산국 해안에 이르러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이 맹수를 풀어 밟아 죽이겠다."라고 위협하였다. 이에 우산국 사람들은 두려워하여 항복하였다.[22]

삼국사기』의 기록은 우산국 사람들에 대한 차별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내용이라는 지적도 있다. 우산국은 고구려와 왜의 교역 항로에서 요충지였으며,[21] 이 시기는 신라가 북상하여 하슬라주를 설치하고 군주가 통치하는 시점이었다.[23]

2. 2. 1. 신라의 해상 통제

7세기에 신라고구려백제로 가는 해상 항로를 장악하여 승려의 통행만을 허락하였다.[24] 이로 인해 백제, 고구려, 왜국의 배가 자유롭게 신라 연안을 항해할 수 없게 되었다.[24]

2. 3. 고려 복속과 여진족 침입

930년 우산국은 백길(白吉), 토두(土豆)를 보내 토산물을 바치면서 복속을 원했고 태조는 두 명에게 관직을 내렸다.[25]

1018년(현종 9년) 고려는 우산국이 동북여진족의 침략을 받아 농사를 못하게 되자, 이원구(李元龜)를 보내 농기구를 보냈다.[26] 1019년(현종 10년) 여진족으로부터 도망쳐온 자들을 모두 돌아가게 했다.[27] 1022년(현종 13년) 우산국 백성 중 여진족에게 노략질 당하여 망명온 자들을 예주에 거주하게 하고 호적에 편입되면서 우산국은 멸망하였다.[28]

3. 우산국의 영역과 "우산도"

1145년에 편찬된 한반도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문헌 자료인 『삼국사기』에는 이사부 장군이 512년에 우산국을 신라에 복속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고문헌이나 고지도에 등장하는 "우산도"를 현재의 독도로 해석하고 있으며, 『삼국사기』의 기술에 있는 "우산국"의 영역을 울릉도독도로 보고 있다.[12]

1808년에 간행된 조선 국왕이 국가 통치에 참고했던 『만기요람』에는 "여지지에 이르기를, 울릉도와 우산도는 모두 우산국의 땅이며, 우산도는 왜인이 말하는 송도이다."라는 내용이 있다.[13] 이는 한국에서는 우산도가 "독도"임을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라고 받아들여지고 있다.[13]

한국 정부가 "독도"를 한국 영토로 하는 유력한 근거로 제시해 온 것은 『세종실록』 "지리지"(1454년 편찬)였다.[14] 1953년 9월 9일 "한국 정부 견해 1"에서는 "우산과 무릉의 두 섬이 울진현의 정동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두 섬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 날씨가 좋은 날에는 서로 볼 수 있다"는 "지리지"의 기재를 중시했다.[14]

지도제작 연도비고
1530년울릉도 서쪽에 "우산도"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1737년~1776년울릉도 동쪽에 "소위 우산"이라고 표시된 작은 섬을 확인할 수 있다.
1861년울릉도 동쪽에 우산도가 표기되어 있다.
『대한지지』의 "대한전도"
1899년울릉도와 우산도가 표기되어 있다.


3. 1. 삼국사기와 고려사의 기록

1145년에 편찬된, 한반도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문헌 자료인 『삼국사기』에는 이사부 장군이 512년에 나무 사자를 이용해 우산국을 신라의 속국으로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6][7] 삼국사기에는 우산국이 울릉도라고도 불렸으며, 명주(현재의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동쪽 바다에 있는 섬으로, 지방은 100리였다고 기록되어 있다.[10]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지증마립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 13년(512년) 여름 6월, '''우산국'''이 귀복(歸服)하여, 해마다 토산물을 바쳤다. '''우산국'''은 명주(溟州) 정동쪽 바다 가운데 있는 섬에 있는데, 혹 울릉도(鬱陵島)라고도 한다. 지방은 100리이다. 험준함을 믿고 복종하지 않으므로, 이찬(伊飡) 이사부(異斯夫)가 하슬라주(何瑟羅州) 군주가 되어 우산국 사람들이 어리석고 사나워 위엄으로 복종시키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나무로 사자(獅子) 모양을 많이 만들어 전선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 해안에 이르러 속여 말하기를 "만약 너희가 복종하지 않으면 이 맹수를 풀어 밟아 죽이겠다."라고 하니,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항복하였다.

고려사에는 930년에 우산국이 백길(百吉)과 도두(都豆)를 보내 고려에 귀속되기를 요청했다는 기록이 있다.[8] 1018년에는 우산국이 여진족의 침입으로 큰 피해를 입자, 고려 국왕이 이원구(李元龜)를 파견하여 농기구를 지원하고, 침략을 피해 도망간 우산국 주민들이 고향으로 돌아오도록 했다.[9] 1022년에는 우산국이 완전히 폐지되어 예주 지역으로 모든 우산국 난민들이 정착하면서 완전히 편입되었다.[9]

3. 2. 조선시대 고지도와 문헌

대한민국에서는 고문헌이나 고지도에 등장하는 "우산도"를 현재의 독도로 해석하고 있으며, 『삼국사기』의 기술에 있는 "우산국"의 영역을 울릉도독도로 보고 있다.[12]

1808년에 간행된 백과사전과 같은, 조선 국왕이 국가 통치에 참고했던 『만기요람』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 여지지에 이르기를, 울릉도와 우산도는 모두 우산국의 땅이며, 우산도는 왜인이 말하는 송도이다.[13]

이는 한국에서는 우산도가 "독도"임을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라고 받아들여지고 있다.[13]

한국 정부가 "독도"를 한국 영토로 하는 유력한 근거로 제시해 온 것은 『세종실록』 "지리지"(1454년 편찬)였다.[14] 1953년 9월 9일 "한국 정부 견해 1"에서는 "우산과 무릉의 두 섬이 울진현의 정동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두 섬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 날씨가 좋은 날에는 서로 볼 수 있다"는 "지리지"의 기재를 중시했다.[14]

지도제작 연도비고
1530년울릉도 서쪽에 "우산도"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1737년~1776년울릉도 동쪽에 "소위 우산"이라고 표시된 작은 섬을 확인할 수 있다.
1861년울릉도 동쪽에 우산도가 표기되어 있다.
1899년울릉도와 우산도가 표기되어 있다.


3. 3. 독도 영유권 문제

대한민국에서는 고문헌과 옛 지도에 나오는 "우산도"를 현재의 독도로 해석하고 있으며, 삼국사기에 기록된 "우산국"의 영역을 울릉도독도로 보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512년에 우산국이 신라에 복속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한국 정부는 독도가 울릉도와 함께 512년부터 한국 영토였다고 주장한다.[12]

1808년에 간행된 만기요람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이는 한국에서 우산도가 독도임을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석된다.[13] 당시 일본에서는 현재의 독도를 "송도"라고 불렀기 때문에, 한국 정부는 독도(=송도)가 우산이고, 우산이 우산국의 일부인 이상, 조선 영토였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

한국 정부는 세종실록 "지리지"(1454년 편찬)의 기록도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보여주는 근거로 제시한다.[14] 1953년 9월 9일 "한국 정부 견해 1"에서는 "우산과 무릉의 두 섬이 울진현의 정동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두 섬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 날씨가 좋은 날에는 서로 볼 수 있다"는 "지리지"의 기록을 중요하게 다루었다.[14] 이 견해는 현대 한국 정부에도 이어지고 있다.[12][13]

이에 대해 일본은 1950년대 외무 관료 가와카미 겐조가 옛 문헌과 지도를 상세히 비교 분석하여 당시 "우산국"에서의 우산·울릉 2도설은 실제 지식에 근거하지 않은 관념적인 것이라는 비판을 제기하여, 한일 간의 영유권 논쟁에 큰 영향을 미쳤다.[13]

참조

[1] 뉴스 General Isabu of Silla Kingdom Incorporated Dokdo into Korean History https://world.kbs.co[...] KBS World 2024-03-12
[2] 웹사이트 The Alleged Title over the Island of Takeshima Invoked by the Republic of Korea https://www2.jiia.or[...] 2023-07-28
[3] 웹사이트 The National Assembly of the Republic of Korea https://korea.assemb[...]
[4] 문서 Records of the Three Kingdoms
[5] 서적 Biography of Isabu and historical implications of his activities. The review of Isabu and east sea 2010
[6] 문서 Samguk Sagi
[7] 서적 A Study on the Legality of the Conquest over Usanguk by General Isabu of Shilla in International Law. The review of Isabu and east sea 2010
[8] 문서 Goryeosa
[9] 문서 Goryeosa
[10] 문서 "#池内|池内(2016)pp.7-8"
[11] 문서 "#池内|池内(2016)pp.8-10"
[12] 웹사이트 韓国外務省 "Dokdo, Korean terittory" pp.5-6 http://www.korea.net[...]
[13] 문서 "#金|金 (2007)pp.121-123"
[14] 웹사이트 朴炳渉「韓日両国の独島/竹島固有領土論の争点」(2018) http://www.kr-jp.net[...]
[15] 웹인용 「우해왕과 풍미녀의 전설」 http://ulleung.grand[...] 2017-12-13
[16] 웹인용 동북아역사넷 사료라이브러리 > 사료로 보는 독도 > 三國史記 > 우산국을 정벌하다 http://contents.nahf[...] 동북아역사재단 2022-10-23
[17] 웹인용 울릉군 > 독도 > 독도역사 > 수토정책 http://www.ulleung.g[...] 울릉군청 2022-10-23
[18] 서적 三國志 2017-06-06
[19] 뉴스 고고학 > 발굴 보고서 > <고적 38> 울릉도(재보고) https://www.museum.g[...] 국립중앙박물관 2008-10-31
[20] 웹인용 우산국-우해왕과 풍미녀 이야기 http://www.grandcult[...] 한국학중앙연구원 2024-01-03
[21] 웹인용 우리역사넷 재미있는 초등역사 > 이사부, 우산국을 정복하다 http://contents.hist[...] 국사편찬위원회 2022-10-27
[22] 서적 三國史記 2017-08-05
[23] 간행물 고대 동해안 지역의 정치적 동향과 우산국 https://dsilla.com/p[...] 동국대학교 WISE(와이즈)캠퍼스 신라문화연구소 2012
[24] 간행물 7세기 동아시아의 국제 관계 : 수의 등장 이후 백제 멸망까지를 중심으로 http://hanilhis.or.k[...] 한일관계사학회 2007
[25] 서적 高麗史 2017-12-13
[26] 서적 高麗史 2017-12-13
[27] 서적 高麗史 2017-12-13
[28] 서적 高麗史 2017-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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