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시
1. 개요
담시는 400년경 고구려 광개토대왕 5년에 동진에서 불교 경전과 율장을 가지고 귀국하여 요동 지방을 교화한 승려이다. 중국인으로, 발이 얼굴보다 하얗고 진흙을 밟아도 얼룩이 생기지 않아 '백족화상'으로 불렸다. 396년경 요동에 이르러 교화에 종사하다 405년경 관중으로 돌아갔으며, 해동고승전은 담시의 활동을 "고구려, 문도(聞道)의 시작"이라고 평가했다. 1976년 덕흥리 고분에서 발견된 묘지명을 통해 고구려로 망명한 중국인 귀족 진이 독실한 불교 신자였음이 밝혀졌으며, 담시가 가져온 불교는 고구려의 고유 신앙과 습합되어 단기간에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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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거주한 한국인 -
여운형
여운형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 독립운동 단체 활동, 임시정부 참여,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 노력으로 알려졌으나 해방 후 암살당했고 그의 삶과 죽음은 친일 논란과 암살 배후에 대한 논쟁을 낳고 있다. -
중국에 거주한 한국인 -
김구
김구는 한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 통일운동가로서, 동학 입교, 치하포 사건,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여, 한인애국단 조직, 한국광복군 창설 등의 활동을 전개하다 안두희에게 암살당했다. -
생몰년 미상 -
유급
유급은 전한 말기에 신양후에 봉해졌으나, 전한 멸망으로 작위를 잃은 유영의 아들이다. -
생몰년 미상 -
야스케
야스케는 16세기 일본에 기록된 최초의 아프리카인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으로 특별한 대우를 받았으며, 혼노지의 변에서 함께 싸웠으나 이후 행적은 불확실하고,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에서 소재로 활용된다. -
고구려의 승려 -
보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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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승려 -
혜자
혜자는 고구려 출신의 승려로서 일본 아스카 시대 불교 발전에 기여하고,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되었으며, 621년 쇼토쿠 태자의 죽음을 슬퍼하며 다음 해 죽음을 예언하고 실제로 사망했다.
2. 생애
담시는 400년경 고구려 광개토대왕 5년에 동진(東晋)에서 불교 경장과 율장 수십 부를 가지고 귀국하여 요동(遼東) 지방을 교화시킨 승려이다. 여러 이적(異蹟)을 행하였고, '백족화상'(白足和尙)이라고도 불렸다.
해동고승전(海東高僧伝)은 담시의 고구려 개교(開教) 사적을 중국 측 교단 전승 사료로서 주목하며, "고구려, 문도(聞道)의 시작"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통일 신라의 문인 최치원은 중국 불교의 초전자인 가섭마등을 예로 들어 담시를 칭송하였다.
1976년 북한 평안남도 남포특별시 덕흥리 고분에서 발견된 묘지명을 통해, 408년에 사망한, 고구려로 망명한 중국인 귀족 진이 불교 신자였음이 밝혀졌다. 다무라 엔초는 진이 彌勒下生經중국어을 믿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으며, 이는 385년 장안에서 번역된 彌勒下生經중국어이 396년에 담시에 의해 고구려에 전해져 신봉자를 얻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추정으로 이어진다.
2.1. 주요 활동
담시는 관중 사람으로, 396년경 경률 수십 부를 가지고 요동에서 10년 동안 포교 활동을 했다. 405년경 중국으로 돌아갔다. 418년 하의 혁련발발이 관중을 점령하여 백성을 학살했을 때, 이들을 보호하는 활동을 했다.
담시가 가져온 불교는 고구려의 고유 신앙과 쉽게 융합될 수 있는 주술적이고 영이적(靈異的)인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기 때문에, 짧은 시간에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고 평가된다.
2.2. 백족화상(白足和尙)
담시는 발이 얼굴보다 희고 진흙을 밟아도 더러워지지 않아 '백족화상'(白足和尙)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이러한 신이한 모습은 백성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을 것으로 보인다.
3. 담시의 불교 전파와 그 영향
담시는 '백족화상'이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신이한 승려였다. 담시가 가져온 불교는 고구려의 고유 신앙과 쉽게 융합될 수 있는 주술적이고 영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이러한 특징은 불교가 단기간에 널리 퍼지는 데 크게 기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3.1. 덕흥리 고분과의 관련성
1976년 북한의 평안남도 남포특별시에서 발견된 덕흥리 고분은 408년에 사망한 고구려 귀족 '진'의 무덤으로, 묘지명이 발견되었다. 묘지명에는 '진'이 "석가문불제자"라고 기록되어 있어, 그가 독실한 불교 신자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담시가 가져온 초기 불교의 영향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이다. 다무라 엔초는 '석가문불'이라는 표현이 384년에서 385년 사이에 번역된 『미륵하생경』에 따른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385년 장안에서 번역된 『미륵하생경』이 396년 담시에 의해 고구려에 전해졌고, 408년 사망한 '진'과 같은 신봉자를 얻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