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헌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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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당 헌종은 당 순종의 장남으로, 778년에 태어나 820년에 사망한 당나라의 황제이다. 805년에 즉위하여 환관 세력을 견제하고 중앙집권화를 강화하려 노력했으며, 지방 절도사 세력을 통제하고 번진 세력을 평정하여 원화중흥을 이끌었다. 말년에는 불교와 도교에 심취하여 금단을 복용하고 환관들의 횡포로 인해 암살당했다. 곽씨와 정씨를 황후로 두었으며, 당 목종과 당 선종을 비롯한 많은 자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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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헌종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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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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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계 | 당나라의 황제 |
재위 기간 | 805년 9월 5일 – 820년 2월 14일 |
이전 | 순종 |
계승 | 목종 |
출생일 | 778년 3월 4일 ~ 778년 4월 1일 |
사망일 | 820년 2월 14일 (41세) |
매장지 | 경릉 (景陵) |
성 | 이(李) |
이름 | 춘 (淳), 후에 순 (純)으로 변경 (805년) |
묘호 | 헌종 (憲宗) |
시호 | 장무황제 (章武皇帝) (약칭), 소문장무대성지신효황제 (昭文章武大聖至神孝皇帝) (전칭) |
연호 | 원화 (元和) |
재위 기간 (연호) | 806년 1월 25일 – 820년 2월 14일 |
아버지 | 순종 |
어머니 | 장헌황후 |
배우자 | 의안황후 (793–820), 효명황후 (–820) |
자녀 | |
아들 | 이녕 이윤 이항 이총 이흔 이오 이계 이경 이월 이심 이의 이인 이침 이협 이탄 이충 이추이 이체 이탄 이책 |
딸 | 양혜강공주 영가공주 선성공주 정문의공주 기양장숙공주 진류공주 진녕공주 남강공주 임진공주 진원공주 영순공주 안평공주 영안공주 정안공주 |
통치 | |
연호 | 원화 (元和) |
시대 | 원화중흥 |
2. 생애
순종의 장남으로 778년 장안(長安)의 동내(東內)에서 태어났다. 805년 순종이 즉위한 뒤 태자로 세워졌고, 같은 해 8월 병약한 아버지에게서 황제 자리를 물려받았다.
헌종은 성격이 곧고 과단성이 있어 즉위 후 환관 세력에 맞서고, 당 조정에서 벗어나 반독립적인 권력을 행사하던 지방 절도사 세력을 통제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두황상을 재상으로 등용하고, 유학자 출신 번수(藩帥)를 등용하고, 감사 임무를 맡은 감군(監軍)에 환관을 임명하는 등 절도사들의 동태를 감시하는 제도를 시작했다. 무원형, 이길보 등 명신을 등용하고 군비를 확장한 금군(禁軍)을 활용하여 807년 진해절도사(鎭海節度使) 이기를 정벌하고, 813년 위박절도사(魏博節度使) 전홍정이 항복했으며, 성덕절도사(成德節度使) 왕승종에게 공세를 가했다. 815년부터 817년까지 회서절도사(淮西節度使) 오원제를 토벌하여 평정하고, 818년부터 고구려 유민 출신 치청절도사(淄淸節度使) 이사도를 공격하여 이듬해 평정했다. 안록산의 난 이후 당 왕조에 반항적이었던 하삭삼진도 충성을 맹세하여 당은 일시적으로 중흥기를 맞이했는데, 이를 원화중흥(元和中興)이라 한다.
그러나 황태자였던 장남 이녕(혜소태자)이 19세에 요절하자, 헌종은 슬픔에 빠져 불교와 도교에 심취했다. 법문사의 불사리를 장안으로 가져오는 것을 계획하고, 한유의 「논불골표」에 따른 간언을 물리치고, 막대한 국고를 낭비하여 공양하였다.[25] 단약을 남용하고 환관을 학대하는 등 정신 이상을 보이기도 했다. 결국 820년 환관 왕수정과 진홍지에게 암살되어 43세로 생을 마감했다.[27][28]
2. 1. 즉위 전
순종의 장남으로, 778년 장안(長安) 동내(東內)에서 태어났다. 순종이 황태자였을 때 광릉군왕(廣陵郡王)에 봉해졌다.[8] 793년에는 대종(代宗)의 딸인 승평공주(升平公主)와 장군 국애(郭曖) 사이에서 태어난 딸 국씨(郭氏)를 황후로 맞이했다.[10][11]804년, 아버지 순종이 중풍으로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12] 805년 봄, 덕종 사후 환관들이 다른 사람을 황제로 옹립하려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순종이 즉위했다. 이 과정에서 헌종의 즉위 가능성도 언급되었다.[1]
순종의 병세가 깊어지자 환관 이충언(李忠言), 후궁 규빈(牛貴妃), 왕숙문(王叔文) 등이 권력을 잡았다. 이들은 헌종을 견제하여 황태자 책봉을 미뤘다. 그러나 덕종의 총애를 잃은 환관 구문진(俱文珍) 등은 신하들을 불러 순종에게 헌종을 황태자로 책봉하는 칙서를 작성하게 했다. 순종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고, 805년 늦봄 헌종은 황태자에 책봉되고 이름이 淳에서 純으로 바뀌었다.[1]
805년 여름, 왕숙문과 갈등하던 절도사들이 순종에게 헌종을 섭정으로 삼을 것을 요청했다. 8월 26일, 순종은 헌종을 섭정으로 삼는 칙령을 발표했다. 8월 31일, 순종은 헌종에게 양위하고 상황제(太上皇帝)가 되었으며, 헌종의 어머니 왕씨(王氏)는 상황태후(太上皇太后)가 되었다. 9월 5일, 헌종이 즉위했다.[13][1]
2. 2. 원화중흥
순종의 장남으로 778년 장안(長安)의 동내(東內)에서 태어났다. 805년 4월, 순종이 즉위한 뒤 태자로 세워지고, 4개월만인 8월에 병약한 아버지로부터 양위받아 즉위하였다.성격이 곧고 과단성이 있었던 헌종은 즉위 후 환관 세력에 맞서고자 두황상을 재상으로 등용하였으며, 당 조정의 간섭에서 벗어나 반독립적인 권력을 행사하던 지방 절도사 세력의 통제에 나섰다. 번진(藩鎭) 세력에 맞서 그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시책으로서 헌종은 유학자 출신의 번수(藩帥)를 등용하고 감사 임무를 주관하는 감군(監軍)에 환관을 임명하는 등 절도사들의 동태를 감시하는 제도를 시작했다. 당대 명신(名臣)으로 평가받던 무원형이나 이길보 등도 등용되어 군비를 확장시킨 금군(禁軍)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결과, 807년 진해절도사(鎭海節度使) 이기를 정벌한 것을 시작으로 813년에 위박절도사(魏博節度使) 전흥(田興, 후의 전홍정)의 귀복을 받아내고, 당조에 저항적이었던 성덕절도사(成德節度使) 왕승종에 대해서도 공세를 가했으며, 815년부터 817년까지, 헌종은 회서절도사(淮西節度使) 오원제를 토벌해 평정하고(오원제 평정 이후 전국의 번진들은 각자 거느리고 있던 땅을 떼어 바치며 당조에 귀복), 818년부터는 고구려 유민 출신의 치청절도사(淄淸節度使) 이사도에 대한 공략에도 힘을 기울여 이듬해에 그를 평정하는데 성공한다. 안록산의 난 이래 당 왕조에 반항적이던 번진인 하삭삼진도 당 왕조에 충성을 맹세하여, 쇠퇴하던 당은 일시적으로 중흥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것을 역사에서는 원화중흥(元和中興)이라 부른다.[1]
헌종은 즉위 직후 왕숙문(王叔文)과 왕피(王丕)의 측근들을 정계에서 숙청하고 유배 보냈다. 후대의 일부 사학자들은 순종이 자연사하지 않았고 헌종의 즉위를 지지했던 환관들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14][15]
유피는 위고가 통치했던 서천절도사(西川, 현재 쓰촨성 청두에 위치)의 권력을 장악하고, 헌종이 파견한 후임 원자(袁滋)를 거부했다. 두황창(杜黄裳)의 제안에 따라 헌종은 장군 고충문(高崇文)에게 장군 이원익(李元奕)과 엄려(嚴礪)의 지원을 받아 유피를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806년 가을, 고충문은 서천의 수도인 청두를 함락시키고 유피를 장안(長安)으로 압송하여 처형했다.[6]
808년, 헌종은 특별 과거 시험에서 하급 관리들에게 정부에 대한 솔직한 의견을 제출하도록 명령했는데, 여러 응시자들—뉴승루(牛僧孺), 리종민(李宗閔), 그리고 황부식(皇甫湜)—이 당시의 통치에 대한 문제점을 은폐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지적했다. 그러나 승상 리지부(李吉甫)는 이것을 자신에 대한 심각한 비판으로 여기고 울면서 심사관인 한림학사 배계(裴垍)와 왕야(王涯)에게 이해관계의 충돌을 주장했다. 리지부의 고발로 인해 왕야, 배계, 양어릉, 위관지는 모두 강등되었다.[6]
809년, 성덕절도사(成德, 현재 허베이성 석가장에 위치)의 왕시진이 죽은 후, 왕성종이 약속을 어기자 헌종은 환관 토토성취(吐突承璀)에게 황제의 군대를 지휘하여 성덕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6][19] 810년 여름, 토토성취가 연회에서 루충사를 체포하고 황제의 장군 맹원양(孟元陽)이 조의를 장악하도록 허락하자, 왕성종은 황실 정부와의 관계를 방해한 것이 루충사라고 주장하며 헌종에게 공식적으로 복종했다. 헌종은 전쟁이 진전되지 않고 있음을 알고 전쟁을 끝내고 왕성종을 성덕절도사로 임명했다.[19]
2. 3. 불교 및 도교 심취와 최후
황태자였던 장남 등왕 이녕(혜소태자)이 19세에 요절하자, 헌종은 슬픔에 빠져 불교와 도교에 심취하게 되었다. 법문사의 불사리를 장안으로 가져오는 것을 계획하고, 한유의 「논불골표」에 따른 간언을 물리치고, 막대한 국고를 낭비하여 공양하였다.[25] 단약을 남용하고 환관을 학대하는 등 정신 이상을 보이기도 했다. 결국 820년 환관 왕수정과 진홍지에게 암살되어 43세로 생을 마감했다.[27][28]3. 가족 관계
봉호(시호) | 별칭 | 이름(성씨) | 생몰년도 | 비고 |
---|---|---|---|---|
현비(賢妃) | 왕씨(王氏) | |||
비(妃) | 기씨(紀氏) | |||
소의(昭儀) | 하씨(何氏) | |||
태의(太儀) | 허씨(許氏) | |||
태의(太儀) | 설씨(薛氏) | |||
태의(太儀) | 양씨(楊氏) | |||
첩여(婕妤) | 맹씨(孟氏) | |||
미인(美人) | 기씨(紀氏) | |||
미인(美人) | 허씨(許氏) | |||
재인(才人) | 윤씨(尹氏) | |||
재인(才人) | 단씨(段氏) | |||
재인(才人) | 곽씨(郭氏) | |||
두씨(杜氏) | ||||
조씨(趙氏) | ||||
정씨(鄭氏) |
헌종은 여러 후궁을 두었다.
- '''태의 양씨(太儀 楊氏):''' 옹왕 이열을 낳았다.
- '''미인 기씨(美人 紀氏):''' 혜조황태자 이녕을 낳았다.
- '''궁인 두씨(杜氏):''' 면왕 이순을 낳았다.
- '''궁인 조씨(趙氏):''' 무왕 이음을 낳았다.
- '''정씨(鄭氏):''' 정온의공주를 낳았다.
3. 1. 황후
봉호 | 시호 | 이름(성씨) | 별칭 | 재위년도 | 생몰년도 | 국구(장인/장모) | 능묘 | 비고 |
---|---|---|---|---|---|---|---|---|
귀비(貴妃) | 의안황후 (懿安皇后) | 곽씨(郭氏) | (추존) | ? ~ 851년 | 대국공(代國公) 곽애 제국소의공주 이씨(李氏) | 경릉(景陵) | [26] | |
궁인(宮人) | 효명황후 (孝明皇后) | 정씨(鄭氏) | (추존) | ? ~ 865년 | 정우 | [28] |
- '''의안황후 곽씨(懿安皇后 郭氏):''' 헌종의 황후이자 목종의 어머니이다. 곽자의의 손녀이자 승평공주의 딸이다.[10][11] 793년, 당시 황태자였던 순종(이송)은 곽씨를 황후로 맞이했다.
- '''효명황후 정씨(孝明皇后 鄭氏):''' 헌종의 후궁이자 선종의 어머니이다.
3. 2. 자녀
헌종은 여러 명의 황자와 황녀를 두었다. 다음은 헌종의 자녀 목록이다.봉호 | 이름 | 생몰년도 | 생모 | 비고 |
---|---|---|---|---|
혜소황태자 | 이녕(李寧) | 793년 ~ 812년 | 기씨 미인 | [29], [30] |
예왕 | 이운(李惲) | 794년 ~ 820년 | 미상 | 3남[31], [32] |
황태자 (목종) | 이항(李恒) | 795년 ~ 824년 | 의안황후 곽씨 | 9남 8녀[33], 제12대 황제 |
심왕 | 이종(李悰) | ? | 미상 | 2남[34] |
강왕 | 이오(李悟) | ? ~ 827년 | 미상 | 2남 1녀[35] |
양왕 | 이흔(李忻) | 801년 ~ 828년 | 미상 | 1남[36] |
건왕 | 이각(李恪) | 805년 ~ 821년 | 미상 | 1남[37] |
부왕 | 이경(李憬) | ? ~ 839년 | 미상 | 1남 |
경왕 | 이열(李悅) | ? ~ 840년 | 태의 양씨 | 2남 |
면왕 | 이순(李恂) | 808년 ~ 844년 | 궁인 두씨 | 1남 |
무왕 | 이역(李懌) | ? | 미상 | 1남 |
무왕 | 이음(李愔) | 809년 ~ 853년 | 궁인 조씨 | 1남 |
황태숙 (선종) | 이침(李忱) | 810년 ~ 859년 | 효명황후 정씨 | 12남 11녀[38], 제16대 황제 |
치왕 | 이협(李恊) | ? ~ 836년 | 미상 | 3남 |
형왕 | 이담(李憺) | ? | 미상 | 1남 |
전왕 | 이충(李㤝) | ? | 미상 | 1남 |
체왕 | 이췌(李惴) | ? ~ 862년 | 미상 | |
팽왕 | 이척(李惕) | ? ~ 897년 | 미상 | |
신왕 | 이탄(李憻) | ? ~ 867년 | 미상 | |
영왕 | 이책(李㥽) | 815년 ~ 880년 | 미상 | |
양혜강공주 | ? | 미상 | 807년 우적(于績)의 넷째 아들인 하남 우계우(河南 於季友)와 결혼 | |
진녕공주 | ? | 미상 | 806년 하동 설홍(河東 薛翃)과 결혼 | |
정온의공주 | ? | 정씨 | 816년 위랑(韋讓)과 결혼, 자녀 있음(아들 넷, 딸 셋) | |
정안공주 | ? | 미상 | 821년 위구르 카간국의 4. 평가
헌종은 쇠퇴하던 당나라를 일시적으로 부흥시킨 중흥 군주로 평가받기도 하지만, 불교와 도교에 지나치게 심취하여 국고를 낭비하고 정치를 소홀히 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4. 1. 긍정적 평가헌종은 쇠퇴하던 당나라를 일시적으로 부흥시킨 중흥 군주로 평가받는다. 즉위 직후 순종의 측근 세력을 숙청하고, 안사의 난 이후 약화된 황권을 강화하며 중앙집권화를 추진하여 국가의 기강을 바로 세웠다.[1]유피, 리기, 오소성(吳少誠), 왕승종(王承宗), 리사도(李師道) 등 절도사들의 난립으로 혼란스러웠던 당나라의 상황을 안정시키고, 이들을 차례로 제압하여 황제의 권위를 높였다.[6][19][22][4] 특히 이소(李愬)가 무원기(武元衡)를 사로잡아 처형하고, 유무(劉悟)가 리사도를 처형한 사건은 헌종의 중앙집권 정책의 성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22][4] 이러한 일련의 군사적 성공을 통해 헌종은 당나라의 쇠퇴를 막고 일시적인 중흥을 이끌어냈다. 4. 2. 부정적 평가헌종은 불교와 도교에 지나치게 심취하여 국고를 낭비하고 정치를 소홀히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819년 봄, 헌종은 봉상(현재의 산시성 보지)의 사찰에서 석가모니의 손가락뼈를 장엄한 의식을 통해 궁궐로 호송하고 3일 동안 궁궐에 보관하며 백성들에게 이를 숭배하고 사찰에 기부할 것을 장려했다. 이에 관리 한유가 비판하자, 한유는 조주(현재의 광둥성 차오저우) 태수로 유배되었다.[22]헌종은 연금술사 유비(柳泌)가 만든, 황제에게 불로불사를 가져다 줄 수 있다고 주장한 약을 복용하여 갈증과 짜증이 점점 심해졌다고 한다. 그는 쉽게 화를 내어 그를 시중드는 환관들은 사소한 잘못으로도 처벌받거나 처형당했고, 그를 두려워했다. 820년 봄, 헌종은 환관 천홍지(陳弘志)에게 암살당했다고 여겨지나, 천홍지의 동료 환관들은 헌종이 복용한 약으로 인한 연금술 독극물 중독으로 사망했다고 주장했다.[4] 5. 한국과의 관계
헌종 재위 기간 동안 신라와 발해는 당나라와 비교적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발해는 헌종에게 사신을 보내 조공을 하고, 당나라 문화를 받아들이는 등 적극적인 외교 관계를 맺었다. 신라 역시 헌종의 즉위를 축하하는 사신을 보내는 등 당나라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22] 참조
[1]
서적
Zizhi Tongj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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