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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논쟁 (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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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논쟁은 1920년 할로 섀플리와 허버 커티스가 벌인 천문학 논쟁으로, 당시 우리 은하가 우주의 전부인지, 아니면 다른 은하가 존재하는지에 대한 격론을 벌였다. 섀플리는 우리 은하가 우주의 전부이며, 나선 성운은 우리 은하의 일부라고 주장했고, 커티스는 나선 성운이 독립된 은하인 "섬 우주"라고 주장했다. 이 논쟁은 에드윈 허블의 관측으로 안드로메다 은하가 우리 은하 밖에 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커티스의 승리로 결론 났지만, 우리 은하의 크기에 대한 섀플리의 주장이 더 정확한 면도 있었다. 대논쟁은 천문학의 근본적인 질문을 다루는 토론의 모범이 되었으며, 우주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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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논쟁 (천문학)
논쟁 개요
주제은하의 크기와 우주의 규모
주요 참가자할로 섀플리
히버 더스트 커티스
날짜1920년 4월 26일
장소미국 국립 과학 아카데미, 워싱턴 D.C.
주요 쟁점나선 성운은 우리 은하 내부에 있는가, 아니면 독립된 "섬 우주"인가?
우리 은하의 크기는 얼마나 큰가?
커티스의 주장나선 성운은 외부 은하이다.
우리 은하는 작고, 태양은 중심에 위치한다.
섀플리의 주장나선 성운은 우리 은하 내부에 있다.
우리 은하는 매우 크고, 태양은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논쟁의 결과논쟁은 명확한 결론 없이 끝났다.
이후의 연구를 통해 커티스의 주장이 대체로 옳았음이 밝혀졌다.
배경
당시의 우주관우리 은하가 우주의 전부라고 믿는 과학자들이 많았다.
나선 성운의 정체에 대한 논쟁이 활발했다.
논쟁의 증거
커티스의 증거나선 성운의 스펙트럼이 별과 유사하다.
나선 성운에서 신성이 발견된다.
나선 성운의 시선 속도가 매우 빠르다.
섀플리의 증거아드리안 판 마넨의 나선 성운 내부 운동 측정 결과 (이후 오류로 밝혀짐)
나선 성운이 우리 은하의 구성원이라는 다른 관측 증거들
논쟁 이후
에드윈 허블의 발견1920년대에 에드윈 허블이 나선 성운의 거리를 측정하여 외부 은하임을 증명했다.
현대 우주론현대 우주론은 우리 은하 외에 수많은 은하가 존재하며, 우주는 계속 팽창하고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2. 배경

18세기 윌리엄 허셜은 별이 우주 공간에 균일하게 분포한다는 가정하에 밤하늘의 별을 관측하여 1785년에 우주 지도를 발표했다.[11] 허셜이 생각한 우주는 원반형으로, 직경이 약 6000 광년, 두께가 최대 1100 광년이었다.[12]

19세기 후고 폰 젤리거는 별의 밝기가 한 등급 어두워질 때 지구에서 보이는 별의 수가 증가하는 정도를 조사하여 별의 공간 밀도를 구하고, 우주가 편평한 형태임을 정량적으로 밝혔다.[13] 야코부스 카프테인은 젤리거의 연구를 발전시켜 별의 공간 밀도 분포를 구했다. 카프테인의 연구는 1901년에 출판되었고, 상세한 분석 결과는 1922년에 발표되었다.[14] 카프테인이 제시한 우주 모델은 카프테인 우주(카프테인 모델)라고 불리며, 회전 타원체 형태로 장축의 길이는 16 킬로파섹(약 52,000 광년)이고 태양은 우주의 중심 부근에 위치했다.[15]

18세기 이마누엘 칸트 등은 나선 성운이 우리 은하 밖에 존재하는 또 다른 은하, 즉 "섬 우주"라는 개념을 제시했다.[3]

2. 1. 커티스와 섀플리의 등장

안드로메다 별자리의 "거대한 나선 성운" (1902년 사진). 이 "논쟁"은 이것이 가스와 먼지의 구름인지, 아니면 멀리 떨어진 은하인지에 대한 것이었다.


19세기 말, 미국의 리크 천문대에서 근무하던 천문학자 허버 다우스트 커티스는 카프테인과 비슷한 규모의 우주를 생각했다. 커티스는 성운에 주목했는데, 당시에는 안드로메다 은하와 같은 성운들의 정체와 지구로부터의 거리가 알려져 있지 않았다. 커티스는 리크 천문대의 Crossley telescope|크로슬리 망원경영어으로 촬영한 성운 사진을 분석하여, 대부분의 성운이 나선형임을 확인했다.[16] 그는 나선형 성운(현재의 나선 은하)이 회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관측에서는 회전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성운이 매우 멀리 떨어져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17] 커티스는 지속적인 자료 수집을 통해 이 성운들이 우리 은하 밖에 존재하는 다른 은하일 것이라는 생각을 굳혔다.[18] 이와 같이 우주에 우리 은하 외에 여러 은하가 있다는 생각은 커티스 이전에도 이마누엘 칸트 등에 의해 제창되었으며, 섬 우주설이라고 불렸다.[10][19]

NGC 6946


1917년 윌슨 산 천문대의 조지 윌리스 리치는 NGC 6946에서 신성을 발견했다. 이 신성은 기존에 알려진 신성 폭발에 비해 매우 어두웠다. 이를 계기로 커티스를 비롯한 천문학자들은 과거 사진과 현재 사진을 비교하며 성운 내 신성을 찾기 시작했다.[20] 그 결과, 나선 성운에서 다수의 신성이 발견되었고, 대부분 다른 곳에서 발견된 신성보다 평균 10등급 어둡다는 사실을 알아냈다.[20][21] 커티스는 이 사실을 바탕으로 성운 내 신성이 어둡게 보이는 것은 성운이 지구에서 매우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결론 내렸다.[22][23]

한편, 윌슨 산 천문대의 할로 섀플리는 구상 성단을 연구하며 우주의 크기를 측정하고자 했다. 섀플리는 헨리에타 스완 레빗이 발견한 세페이드 변광성의 광도와 변광 주기 사이의 관계에 주목했다. 레빗의 관측에 따르면, 세페이드 변광성은 변광 주기가 길수록 절대 광도가 크다. 섀플리는 이 관계를 이용하여 변광성까지의 거리를 측정했고, 일부 구상 성단이 카프테인 우주 밖에 있음을 알아냈다.[24] 또한 섀플리는 구상 성단의 수가 궁수자리 방향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24] 섀플리는 이를 바탕으로 은하계의 크기가 카프테인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크며, 직경이 30만 광년 정도이고, 중심은 궁수자리 방향이며, 태양은 은하계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발표했다.[25][26] 그는 구상 성단이 은하계 안에 있으며, 은하계 중심 주위에 구형 대칭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했다.[24]

섀플리의 주장은 은하계 크기뿐만 아니라 나선 성운의 거리에서도 커티스와 달랐다. 섀플리가 은하계 크기를 크게 확장했기 때문에, 커티스의 주장대로 성운이 우리 은하 밖에 있다면 지구에서 성운까지의 거리가 엄청나게 커지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27]

섀플리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듯, 1916년 윌슨 산 천문대의 아드리안 반 마넨은 나선형 성운 M101이 회전하고 있음을 검출했다고 발표했다.[28] 회전 운동의 크기는 연간 0.022이며, 회전 주기는 10만 년이었다. 만약 이 성운이 우리 은하 밖에 있다면 회전 속도가 광속 이상이 되어야 했다.[29] 실제 회전 속도는 베스토 슬라이퍼의 측정 결과 초당 약 200km였고, 이로부터 계산된 거리는 약 2,000 파섹(약 6,520 광년)으로 우리 은하계 안에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28]

이처럼 1920년 당시에는 은하계 크기와 성운까지의 거리에 대해 커티스와 섀플리의 두 가지 주장이 대립하고 있었다.

3. 논쟁의 주요 쟁점



대논쟁의 주요 쟁점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 우리 은하의 크기: 섀플리세페이드 변광성을 이용하여 우리 은하의 직경이 약 30만 광년이라고 주장한 반면, 커티스는 약 3만 광년으로 훨씬 작게 추정했다.
  • 나선 성운의 정체: 커티스는 나선 성운이 우리 은하 밖에 있는 독립적인 은하라고 주장한 반면, 섀플리는 우리 은하 내부에 있는 가스와 먼지 구름이라고 주장했다.
  • 반 마넨의 관측: 반 마넨은 바람개비 은하(M101)의 회전을 관측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섀플리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사용되었다. (만약 M101이 독립된 은하라면, 관측된 회전 속도는 광속을 초과하게 된다.)


섀플리는 우리 은하가 우주의 전부이며,[2] 안드로메다 은하와 같은 나선 성운은 우리 은하의 일부라고 주장했다. 그는 안드로메다 은하가 우리 은하의 일부가 아니라면 그 거리가 108 광년 정도가 되어야 하는데, 이는 당시 대부분의 천문학자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거리였다고 주장했다. 또한, 섀플리는 반 마넨의 바람개비 은하 회전 관측[2]과 안드로메다 "성운"에서 발생한 신성이 성운 전체보다 더 밝게 빛났다는 관측을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제시했다.

반면 커티스는 안드로메다 은하와 다른 "성운"들이 독립적인 은하, 즉 "섬 우주"라고 주장했다.[3] 그는 안드로메다 은하에 우리 은하보다 더 많은 신성이 있다는 점, 나선 성운의 큰 시선 속도[3], 그리고 암흑대가 다른 은하에도 존재한다는 점을 들어 회피대를 설명했다.[3]

커티스는 반 마넨의 바람개비 은하 회전 관측이 맞다면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후 반 마넨의 관측은 틀린 것으로 밝혀졌고,[88] 에드윈 허블의 연구 덕분에 나선 성운들이 외부 은하라는 것이 밝혀져, 이 쟁점에 대해서는 커티스가 더 정확한 주장을 한 셈이 되었다.[88]

하지만 우리 은하의 크기에 대해서는 두 사람 모두 정확하지 않았다. 실제 우리 은하의 크기는 두 사람이 제시한 값 사이에 있으며, 태양계는 커티스의 주장과 달리 우리 은하의 중심이 아닌, 섀플리의 주장처럼 바깥쪽에 위치한다.[88]

3. 1. 논쟁의 진행 (1920년)

천문학자 조지 헤일은 죽은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1914년부터 매년 헤일 강연이라 불리는 강연을 주최했다. 그 강연에서는 과학자들의 흥미를 끄는 주제들을 다루었다.[30] 1920년, 헤일은 미국 과학 아카데미의 연례 총회에서 이 강연을 열려고 생각하고 아카데미에 제안했다.[31]

강연 주제에 대해 헤일은 당시 화제가 되었던 상대성 이론과 섬 우주설 두 가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카데미 회원 찰스 애보트는 상대성 이론은 너무 어렵다며, "과학이 발전하여 상대성 이론을 4차원을 넘어선 공간으로 보내 다시 우리를 괴롭히는 일이 없도록 신에게 기도합니다"라고 말하며 기각했다.[32] 섬 우주설 쪽도 듣는 사람이 흥미를 느끼지 못할 것이라고 난색을 표했다.[33] 대신 애보트는 빙하기의 원인에 대한 주제나 동물학 또는 생물학에 관한 주제를 제안했지만, 최종적으로 헤일의 판단에 따라 우주의 크기에 대한 토론회를 열기로 결정했다.[32][34]

토론회 참가자는 섀플리와 커티스로 결정되었다. 당시 섀플리는 35세, 커티스는 47세였다. 섀플리가 관측 결과로부터 추론과 때로는 직관에 의존하여 새로운 이론을 구축해 나가는 성격인 반면, 커티스는 관측 결과를 중시하고 신중하게 논의를 전개하는 타입으로, 성격 면에서도 대조적인 두 사람이었다.[35]

토론 방식에 대해서는 두 사람 사이에 의견 차이가 있었다. 커티스는 공개 토론을 통해 양측의 의견을 철저하게 대결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섀플리는 그 안을 반기지 않았다.[36] 섀플리는 그 당시 차기 하버드 대학교 천문대장 자리에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토론에서 실패할 수는 없다는 사정이 있었다고 지적된다.[37][38] 섀플리는 헤일에게 두 사람이 같은 주제로 각각 강연하는 스타일을 제안했고, 받아들여졌다.[38] 강연 시간은 섀플리가 각 35분, 커티스가 각 45분을 주장했고, 결국 각 40분으로 결정되었다.[38] 또한 강연 후 총괄 논의(일반 토론) 시간을 갖기로 했다.[38][39]

토론회 전, 섀플리와 커티스는 우연히 워싱턴으로 향하는 같은 열차를 탔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는 의제에 대해 논의하는 것을 자제하기로 결정하고, 두 사람은 꽃과 고전 문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39] 1920년 미국 국립 과학 아카데미는 4월 26일부터 3일간 열렸으며, 섀플리와 커티스의 토론은 첫날 마지막 시간에 편성되었다.[40] 토론 전에 시상식이 있었고, 모나코 공국의 왕자 등이 표창을 받았다.[41] 또한 섀플리의 회상에 따르면, 회장에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있었고, 동석자에게 "영원에 대한 새로운 이론을 생각해 냈어"라고 속삭였다고 하지만, 아인슈타인이 처음 미국을 방문한 것은 다음 해의 일이므로, 이는 섀플리의 기억 착오일 가능성이 높다.[42]

토론은 섀플리, 커티스 순으로 진행되었다. 토론 내용에 대한 공식 기록이나 청중의 반응은 거의 남아 있지 않으므로, 다음 내용은 주로 연사가 남긴 메모 등을 참고하고 있다.[42] 섀플리의 강연은 그가 쓴 원고가 남아있어 거기에서 내용을 알 수 있다.[42]

먼저 섀플리는 천문학의 기초적인 설명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은하계의 구성, 항성, 성운 등에 대해 망원경으로 찍은 슬라이드 사진을 보여주면서 해설했다.[43] 또한, "광년"이라는 용어의 의미에 대해서도 설명했다.[43]

이어, 구상 성단까지의 거리를 구하는 방법에 대해 언급했다. 여기서 섀플리가 설명한 방법은, 지금까지 자신이 주로 연구해왔던 세페이드 변광성을 사용한 방법이 아니라, B형 청색 거성을 사용한 방법이었다. 당시 B형 청색 거성은 태양계 근처에서도, 구상 성단 안에서도 발견되었으며, 태양계 근처의 청색 거성은 태양의 200배 밝기를 가지고 있었다.[44] 섀플리는, 구상 성단 내에 있는 B형 청색 거성도 실제 밝기는 이와 동등하다고 가정하여 구상 성단까지의 거리를 계산하여, 헤라클레스자리에 있는 성단까지의 거리를 3만 5000광년으로 추산했다.[45] 또한, 이 성단의 밝기와 비교하여 다른 성단의 거리도 구했다. 그리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은하의 크기는 약 30만 광년이며, 어둡게 보이는 성단은 이 은하의 가장자리에 있고, 태양은 은하의 중심에서 떨어진 위치에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이 결과는, 자신에 의한 세페이드 변광성의 조사에서 얻은 결과와 동일하다.[45]

섀플리가 강연에서 세페이드 변광성의 조사 결과가 아닌, B형 청색 거성의 연구 결과를 택한 이유는, 당시, 섀플리에 의한 세페이드 변광성의 연구에 비판이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원래 리비트가 발견한 세페이드 변광성의 광도와 변광 주기의 관계는, 소마젤란운에 있는, 변광 주기가 며칠인 변광성으로부터 구한 것이었다. 이것을 섀플리는 구상 성단에 있는 변광성에 적용했는데, 구상 성단 내에 있는 변광성의 주기는 수 시간으로, 소마젤란운 내의 것과는 달랐다.[46] 따라서, 이 관계를 그대로 적용해도 되는지에 대해서는, 당사자인 섀플리 자신도 신경 쓰고 있었다.[46]

섀플리는 강연 중에서, 만약 세페이드 변광성을 사용하는 방법을 포기하더라도, B형 청색 거성을 사용하면, 성단까지의 거리와 은하의 크기에 대해 같은 값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47]

섀플리는 강연의 마지막 부분에서, 나선 성운에 대해 간단히 언급했다. 거기에서는 반 마넨의 측정 결과를 소개하며, 은하가 섀플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크기라면, 나선 성운이 은하와는 다른 은하라고 생각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48] 마지막으로 섀플리는, 은하계 밖에 있는 항성 집단에 대해, 이러한 은하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말했다.[49]

커티스의 강연용 원고는 토론회 직후 분실되었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34] 그러나 슬라이드가 몇 장 남아있어, 거기에서 강연 내용을 추측할 수 있다.[50][51]

먼저 커티스는 은하의 크기에 대해 섀플리가 주장한 것을 부정했다. 커티스는 세페이드 변광성을 사용한 섀플리의 계산은, 앞서 언급한 변광 주기의 차이 문제도 있고, 또한 계산에 사용한 별의 데이터가 적었다는 점도 있어 인정하지 않았다.[52][53] B형 청색 거성을 사용한 측정 방법에 대해서도 납득하지 않았다. 커티스는 청색 거성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너무 적다고 말했다. 그리고 대신 태양과 같은 황백색 별을 기준으로, 구상 성단 내의 별까지의 거리를 구한 결과를 소개했다.[53][54] 그 거리는 섀플리의 계산 결과보다 훨씬 짧았고, 그 결과로 미루어볼 때 우리 은하의 크기는 지름 3만 광년이라고 주장했다.[54]

강연 후반부에서는 나선 성운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선 성운이 우리 은하와는 별개의 은하라는 근거를 몇 가지 제시[52]했으며, 그중 하나로 베스토 슬라이퍼가 1917년에 발표한 나선 성운의 이동 속도 연구를 언급했다. 슬라이퍼의 관측에 따르면, 나선 성운은 평균 초속 500킬로미터, 가장 빠른 것은 초속 1100킬로미터의 속도로 이동하고 있다.[55] 이는 우리 은하 내에 있는 다른 항성 등과 비교해 매우 빠르다. 따라서 이러한 속도로 움직이는 천체가 우리 은하 은하계 안에 존재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55]

커티스는 마지막으로, 나선 성운이 발견되는 장소에 편향이 있다는 점을 언급했다. 나선 성운은 원반 모양을 한 우리 은하의 상하 방향에 집중되어 있고, 원반 부분(은하면)에서는 발견되지 않았으며, 성운이 없는 공간은 성운 결여 영역이라고 불렸다. 커티스는, 이 영역에서 성운이 발견되지 않는 것은 우리 은하에 있는 우주 먼지에 가로막혀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56]

질의응답 시간 동안 섀플리의 스승인 헨리 노리스 러셀이 발언하여 섀플리의 설을 강력하게 지지했다. 또한 이에 대해 섬 우주설의 옹호자도 응수했다.

섀플리는 나중에 이 토론에 대해 "나는 할당된 주제의 관점에서 보면 논쟁에서 이겼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한 "커티스는 꽤 훌륭했다고 생각한다. 이론은 틀렸지만 논술이 훌륭했다"고도 말했다. 한편 커티스는 "워싱턴에서의 토론은 성공했다. 나는 적절한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라고 가족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토론 2개월 후 섀플리에게 "제 강의는 너무 전문적이었던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러셀은 이 토론회에 대해 헤일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 제자는 말솜씨를 더 향상시켜야 한다"고 썼다. 또한 하버드 대학교 천문대장 선임에 관여했던 조지 아가시는 섀플리의 강연을 평가하지 않고, 하버드 대학교 총장 로웰에게 "성숙감이나 힘이 부족하고, 그 지위에 어울리는 인물이라는 인상을 받지 못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토론 1년 후, 두 사람의 주장은 《미국 연구 평의회보》에 게재되었다. 당초에는 토론회에서의 강연 내용을 두 사람에게 10페이지씩 써 달라고 할 예정이었지만, 커티스는 10페이지에 담기 위해서는 전보와 같은 방식으로 써야 한다며 10페이지를 더 늘려 달라고 요청했다. 섀플리는 반론의 기회를 얻기 위해 사전에 두 사람의 논문을 서로 교환해야 하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섀플리는 이 안을 "제가 앞으로 나아가 총탄을 한꺼번에 쏟아부으면, 당신은 곤봉(혹은 망치)을 휘두를 것입니다. 그러면 저는 당신 뒤로 몰래 돌아가서 뿔로 만든 손잡이의 칼로 쿡 찌르겠습니다"라고 표현했다. 커티스도 이에 동의하여 논문의 내용에 대해 사전에 두 사람 사이에 의견이 오갔고, 최종적으로 각각 24페이지의 논문이 되어 잡지에 게재되었다.

4. 논쟁 이후

1920년 미국 국립 과학 아카데미에서 열린 셰플리와 커티스의 토론은 공식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주로 연사들의 메모를 참고한다.[42] 커티스의 강연 원고는 분실되었지만, 슬라이드가 남아있어 강연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34][50][51]

커티스는 셰플리의 세페이드 변광성 계산과 B형 청색 거성 측정 방법에 의문을 제기하고, 태양과 같은 황백색 별을 기준으로 구상 성단 내 별까지의 거리를 측정하여 은하수의 크기가 지름 3만 광년이라고 주장했다.[52][53][54] 그는 베스토 슬라이퍼의 나선 성운 이동 속도 연구를 언급하며, 나선 성운이 매우 빠른 속도로 이동하므로 은하수 내에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55] 또한 나선 성운이 은하면에서 발견되지 않는 것은 은하수 내 우주 먼지에 가려져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56]

질의응답 시간에는 셰플리의 스승인 헨리 노리스 러셀이 셰플리를 지지했고, 섬 우주설 옹호자도 이에 응수했다. 셰플리는 자신이 논쟁에서 이겼다고 생각하며 커티스의 논술은 훌륭했지만 이론이 틀렸다고 평가했다. 커티스는 토론이 성공적이었다고 보고했지만, 후에 자신의 강연이 너무 전문적이었다고 말했다. 러셀은 셰플리의 말솜씨를 지적했고, 조지 아가시는 셰플리가 성숙함과 힘이 부족하다고 평가했다.

토론 1년 후, 두 사람의 주장은 《미국 연구 평의회보》에 게재되었다. 커티스는 분량 확대를 요청했고, 셰플리는 사전 논문 교환을 제안하여 토론 내용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은 후 각각 24페이지의 논문이 게재되었다.

4. 1. 에드윈 허블의 관측과 반 마넨 관측의 오류

1923년, 에드윈 허블은 윌슨산 천문대의 망원경으로 나선 성운인 M31(안드로메다 은하)M33을 관측하여, 이들 나선 성운 안에서 세페이드 변광성을 발견했다.[64][65] 허블은 변광성까지의 거리를 구함으로써 지구에서 두 성운까지의 거리를 약 90만 광년으로 유도했다.[64] 이 수치는 할로 섀플리가 생각한 우리 은하의 크기인 30만 광년보다 큰 값이며, 따라서 두 성운은 은하계 밖에 있다고 할 수 있다.[66] 허블의 연구 결과는 1924년 12월에 처음 발표되었다.[64]

섀플리는 허블의 연구 결과를 전하는 편지를 읽고 "이 편지가 나의 우주를 깨부쉈어"라고 말했다고 한다.[67] (다만, 이 발언을 한 정확한 날짜는 불분명하다.[68]) 그러나 이 허블의 연구로 은하계의 크기에 관한 문제가 모두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세페이드 변광성을 사용한 거리 측정법에 대해서는 천문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고, 허블의 연구 결과는 아드리안 반 마넨의 나선 성운 회전에 대한 관측 결과와 모순되었다.[69]

1935년, 허블은 반 마넨이 측정한 나선 성운 중 4개를 재측정하여 고유 운동은 검출되지 않았다고 발표했다.[70] 반 마넨 자신도 같은 해에 재측정하여, 자신이 이전에 발표한 정도의 고유 운동은 검출되지 않았음을 확인했다.[71] 그 후의 분석에 따르면, 반 마넨이 발견한 고유 운동은 측정 시의 개인 오차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된다.[71] 또한, 세페이드 변광성을 이용한 허블의 안드로메다 은하까지의 거리 측정에 대해서는, 후에, 해당 은하 내에 있는 세페이드 변광성의 주기와 광도의 관계가 허블이 계산에 사용한 것과는 다른 종족의 것이었음이 밝혀졌다. 게다가 별의 측광 표준의 개정 등도 있어서,[72] 현재는 안드로메다 은하까지의 거리는 약 230만 광년으로 추정된다.[73]

4. 2. 섀플리와 커티스 주장의 진실

에드윈 허블의 연구로 나선 성운들이 외부 은하 중 하나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이 논쟁에서 커티스가 더 사실에 가까운 주장을 한 셈이 되었다.[88] 섀플리가 언급한 신성은 실제로 초신성이었다.[88]

우리 은하의 크기에 대해서는 섀플리와 커티스 모두 정확하지 않았다.[88] 실제 우리 은하의 크기는 두 사람이 제안한 값 사이에 있다.[88] 섀플리는 우리 은하의 크기를 30만 광년으로 추정했지만, 이는 성간 물질에 의한 빛의 흡수를 고려하지 않아 실제보다 크게 측정된 값이었다.[75][76] 현재 우리 은하의 크기는 약 15만 광년으로 알려져 있다.[75]

태양의 위치에 대해서는 섀플리의 주장이 옳았다.[88] 커티스는 태양이 우리 은하의 중심에 있다고 주장했지만, 섀플리는 태양이 은하의 외곽에 있다고 정확히 예측했다.[8] 현재 태양계는 우리 은하 중심에서 2만 8000광년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75] 섀플리는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 아님을 보여준 점에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에 비유되기도 한다.[75][77]

결론적으로, 두 사람의 주장은 부분적으로는 옳고 부분적으로는 틀린 결과였다.[70][78][79]

5. 논쟁의 평가 및 영향

대논쟁의 형식은 이후 천문학의 근본적인 질문을 논하는 데 사용되어 왔다. 최초의 "대논쟁"을 기리기 위해 스미소니언 협회는 네 차례의 행사를 더 개최했다.[9]

미국 과학 아카데미


조지 헤일은 죽은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1914년부터 매년 헤일 강연을 주최했다. 1920년, 헤일은 미국 과학 아카데미 연례 총회에서 이 강연을 열려고 아카데미에 제안했다.[31]

강연 주제로 헤일은 당시 화제가 되었던 상대성 이론과 섬 우주설 두 가지를 생각했다. 그러나 아카데미 회원 찰스 애보트는 상대성 이론은 너무 어렵다며 기각했고, 섬 우주설도 청중의 흥미를 끌지 못할 것이라고 난색을 표했다.[32][33] 대신 애보트는 빙하기의 원인, 동물학, 생물학 관련 주제를 제안했지만, 헤일은 우주의 크기에 대한 토론회를 열기로 결정했다.[32][34]

토론회 참가자는 섀플리와 커티스로 결정되었다. 섀플리는 관측 결과로부터 추론과 직관에 의존해 새로운 이론을 구축하는 성격이었고, 커티스는 관측 결과를 중시하고 신중하게 논의를 전개하는 타입으로, 성격 면에서도 대조적이었다.[35]

토론 방식에 대해 커티스는 공개 토론을 통해 양측 의견을 철저하게 대결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섀플리는 반대했다.[36] 섀플리는 하버드 대학교 천문대장 자리에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토론에서 실패할 수 없다는 사정이 있었다고 지적된다.[37][38] 섀플리는 헤일에게 두 사람이 같은 주제로 각각 강연하는 스타일을 제안했고, 받아들여졌다.[38] 강연 시간은 각 40분으로 결정되었고, 강연 후 총괄 논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38][39]

토론회 전, 섀플리와 커티스는 워싱턴행 열차를 같이 탔지만, 의제에 대해 논의하지 않고 꽃과 고전 문학에 대해 이야기했다.[39] 질의응답 시간에는 섀플리의 스승 헨리 노리스 러셀이 섀플리를 지지했고, 섬 우주설 옹호자도 응수했다.

섀플리는 "할당된 주제의 관점에서 보면 논쟁에서 이겼다", "커티스는 훌륭했지만 이론은 틀렸다"고 말했다. 커티스는 가족에게 "워싱턴 토론은 성공했고, 적절한 평가를 받았을 것"이라고 보고했지만, 2개월 후 섀플리에게 "제 강의는 너무 전문적이었던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러셀은 헤일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 제자는 말솜씨를 더 향상시켜야 한다"고 썼다. 하버드 대학교 천문대장 선임에 관여했던 조지 아가시는 섀플리의 강연을 평가하지 않고, 총장에게 "성숙감이나 힘이 부족하고, 그 지위에 어울리는 인물이라는 인상을 받지 못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토론 1년 후, 두 사람의 주장은 《미국 연구 평의회보》에 게재되었다. 커티스는 분량 확대를, 섀플리는 사전 논문 교환을 제안했다. 두 사람은 논문 내용에 대해 사전에 의견을 교환했고, 최종적으로 각각 24페이지의 논문이 게재되었다.

이 토론회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서로 맞지 않아 뚜렷한 결론 없이 끝났다. 섀플리는 일반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초보적인 이야기를, 커티스는 더 전문적인 이야기를 주로 다루었다.

5. 1. 과학적, 철학적 의의



1920년 당시에는 은하계의 크기와 성운까지의 거리에 대해 커티스와 섀플리의 두 가지 설이 존재했다.[28] 이 토론회는 뚜렷한 결론 없이 끝났지만, 인류의 우주관 변천이라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주목받고 있다.[39]

토론의 주제는 "우주의 크기"였지만, 섀플리는 우주를 은하수에 한정했던 반면, 커티스는 나선 성운을 포함한, 관측 가능한 모든 범위를 생각했다는 점에서 양측의 인식 차이가 있었다.[39]

토론회는 당시 일반 사회에서는 그다지 화제가 되지 않았고, 학계에서도 주목받지 못했다. 신문에 짧은 기사가 실리는 정도였으며, 미국 국내 및 국외의 유명 잡지나 과학 잡지에서도 크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토론의 중요성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했던 것과, 원래 과학 잡지가 다루는 것은 연구 논문이 주였던 것 등이 이유로 꼽힌다.[39]

하지만 1년 후 두 사람이 잡지에 발표한 논문과 그 논문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논의가 깊어졌다. 그리고 후에 이 토론의 중요성이 인식되면서 "대논쟁"으로 불리게 되었다. 현재는 이 토론회의 내용이 역사적으로 볼 때 인류의 우주관 변천이라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으며, 우주가 어떤 것이고, 어느 정도 크기인지와 같은, 당시에는 잘 알 수 없었던 사항에 대해 논의했다는 점에서 철학적, 과학적으로 중요한 것이었다고 여겨진다.[39]

5. 2. 후대에 미친 영향

"대논쟁"은 이후 천문학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논쟁은 더 정밀한 관측과 이론 개발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이후 천문학 연구의 방향을 제시했다.[9]

1920년대 후반, 에드윈 허블세페이드 변광성을 이용하여 안드로메다 은하가 우리 은하 밖에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는 커티스의 주장이 옳았음을 보여주는 결과였다.[4] 현재 우리 은하는 관측 가능한 우주에 있는 수많은 은하 중 하나일 뿐이며, 그 수는 2,000억 개에서 2조 개 이상으로 추정된다.[5][6][7]

대논쟁은 천문학의 근본적인 질문을 논하는 데 사용되는 형식으로 자리 잡았다. 스미소니언 협회는 최초의 "대논쟁"을 기념하기 위해 네 차례의 행사를 더 개최했다.[9]

이 토론회는 당시 일반 사회나 학계에서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신문에 짧은 기사가 실리는 정도였고, 과학 잡지에서도 크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1년 후 두 사람이 발표한 논문과 그 과정에서의 논의가 깊어지면서, "대논쟁"으로 불리며 중요성이 인식되었다.

오늘날 이 토론회는 인류의 우주관 변천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우주의 크기와 구조에 대한 논의는 당시에는 알 수 없었던 사실들을 밝혀내는 데 기여했으며, 철학적, 과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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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적 Measuring the Universe: The Cosmological Distance Ladder https://books.google[...] Springer Science & Business Media 1999
[3] 논문 Novae in Spiral Nebulae and the Island Universe Theory 1988-01
[4] 웹사이트 The Great Debate - 100 years later https://astronomy.co[...] 2020-04-25
[5] 논문 A Map of the Universe
[6] 논문 The Evolution of Galaxy Number Density at z < 8 and its Implications
[7] 뉴스 Two Trillion Galaxies, at the Very Least https://www.nytimes.[...] 201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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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웹사이트 Great Debates in Astronomy http://apod.nasa.gov[...]
[10] 문서 岡村(1999) p.1
[11] 문서 岡村(1999) pp.2-3
[12] 문서 岡村(1999) pp.3-4
[13] 문서 岡村(1999) pp.8-9
[14] 문서 岡村(1999) p.9
[15] 문서 岡村(1999) p.10
[16] 문서 バトゥーシャク(2011)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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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문서 バトゥーシャク(2011) pp.114-115
[19] 문서 吉田(2007) pp.16-17
[20] 문서 バトゥーシャク(2011)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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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문서 ジョンソン(2007) p.81
[24] 문서 岡村(1999) p.11
[25] 문서 ジョンソン(2007) p.89
[26] 문서 岡村(1999) pp.11-12
[27] 문서 岡村(1999) pp.12-13
[28] 문서 岡村(1999) p.13
[29] 문서 ジョンソン(2007) p.90
[30] 문서 バトゥーシャク(2011) pp.238-239
[31] 문서 ジョンソン(2007) p.93
[32] 문서 バトゥーシャク(2011)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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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문서 バトゥーシャク(2011) pp.239-240
[36] 서적 バトゥーシャク(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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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서적 吉田(2007)
[50] 서적 ジョンソン(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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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서적 岡村(1999)
[65] 서적 科学朝日編(1999)
[66] 서적 中村・岡村(1999)
[67] 서적 吉田(2007)
[68] 서적 ジョンソン(2007)
[69] 서적 岡村(1999)
[70] 서적 科学朝日編(1999)
[71] 서적 岡村(1999) p.18
[72] 서적 科学朝日編(1999) pp.52-53
[73] 서적 『理科年表』(平成25年) p.134
[74] 서적 吉田(2007) pp.22-23
[75] 서적 科学朝日編(1999) p.47
[76] 서적 吉田(2007) pp.19-20
[77] 서적 小暮(2015) pp.402-403
[78] 서적 吉田(2007) p.18
[79] 서적 ベレンゼン他(1980) p.37
[80] 서적 小暮(2015) p.409
[81] 서적 ベレンゼン他(1980)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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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서적 バトゥーシャク(2011) p.238
[84] 서적 科学朝日編(1999) p.45
[85] 서적 ベレンゼン他(1980) p.34
[86] 웹사이트 http://apod.nasa.gov[...]
[87] 저널 Preliminary evidence of internal motion in the spiral nebula Messier 101. https://archive.org/[...]
[88] 웹인용 Why the 'Great Debate' was important http://antwrp.gsfc.n[...] NASA/Goddard Space Flight Center 2009-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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