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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당고김씨부인묘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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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당고김씨부인묘명은 1954년 중국 시안시에서 발견된 묘지명으로, 864년 사망한 김씨 부인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다. 묘지명에는 김씨 부인의 가계와 더불어 김씨의 시조를 소호금천씨, 먼 조상을 흉노 출신 김일제로 묘사하고 있다. 이 묘지명은 신라 김씨의 뿌리를 중국 전설과 흉노족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김유신 비문 및 문무왕 비문과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당시 신라인들의 조상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묘지명의 내용이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는지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하며, 김일제와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관념적인 측면이 강하다는 평가가 있다.

2. 묘지명 출토

1954년 중국 산시성(섬서성) 시안시 교외에서 출토되어 현재 시안시 비림(碑林)박물관에 소장 중이다.[1] 덮개돌(43.5×44cm)과 지석(46.5×45.5cm)이 함께 발견되었는데, 덮개돌에는 전서체로 3행에 걸쳐 '대당고김씨부인묘명'이라고 새겨져 있었고, 지석에는 23행에 최대 27자씩, 총 593자의 예서체 명문이 기록되어 있었다.

3. 묘지명의 내용

묘지명에는 함통 5년(864년) 5월 29일, 32세로 사망한 김씨 부인에 대한 자세한 사항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김씨의 유래, 김씨 부인의 선조, 부인의 품행과 생활상, 죽음과 후사 등이 포함된다. 김씨 부인은 재당 신라인 김충의(金忠義)의 손녀이자 김공량(金公亮)의 딸이다.[2]

김씨 부인의 가문은 스스로를 소호금천(少昊氏金天)의 후손으로 인식했으며, 흉노 출신으로 서한(西漢)에 투항하여 무제(武帝)에게 벼슬을 받은 일제(日磾)를 먼 조상으로 언급하고 있다. 한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김씨 가문은 요동(遼東)으로 이주하여 숨어 살게 되었다.[3]

3. 1. 신라 김씨의 시조 인식

묘지명에서 주목을 끄는 부분은 김씨의 시조에 대한 서술이다.[2] 김씨 부인의 가문은 스스로를 소호금천(少昊氏金天)의 후손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묘지명에는 "태상천자(太上天子)께서 나라를 태평하게 하시고 집안을 열어 드러내셨으니 이름하여 소호씨금천이라 하니, 이분이 곧 우리 집안이 성씨를 받게 된 세조(世祖)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2]

또한 묘지명에는 먼 조상으로 일제(日磾)를 언급하고 있다. 김일제흉노 출신으로 서한(西漢)에 투항하여 무제(武帝)에게 벼슬을 받았으며, 투정후(秺亭侯)에 봉해졌다. 묘지명에는 김일제 이후 7대에 걸쳐 벼슬하며 활약한 내용과 경조군(京兆郡)에 정착하게 된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2]

한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김씨 가문은 곡식을 싸들고 나라를 떠나 요동(遼東)으로 이주하여 숨어 살게 되었다.[3] 묘지명에는 공자의 말을 인용하며, 비록 오랑캐의 모습을 했으나 도(道)를 행하여 요동에서 다시 번성하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2]

4. 비문 원문 전문



前知桂陽監將仕郞侍御史內供奉李璆夫人京兆金氏墓誌銘幷序

향공진사 최희고(崔希古)가 짓고, 한림대조(翰林待詔) 승봉랑(承奉郞) 수건주장사(守建州長史) 동함(董咸)이 쓰고 새기다.

태상천자(太上天子)가 나라를 다스리니, 종족(宗族)의 묘호(廟號)는 소호씨(少昊氏)이고, 김천(金天)은 곧 우리 종족이 성씨를 받은 근본이다. 세조(世祖)의 후손으로부터 갈라져 나와 번성하여 온 천하에 퍼졌으니, 또한 많고도 많다. 먼 조상의 이름은 일제(日磾)인데, 용정(龍庭)으로부터 서한(西漢)에 귀순하여 무제(武帝)를 섬겼다. 명절(名節)을 삼가 지키고 벼슬이 시중상시(侍中常侍)에 이르렀으며, 투정후(秺亭侯)에 봉해졌다. 투정(秺亭)으로부터 7대에 걸쳐 벼슬이 혁혁하게 빛났으니, 이로 말미암아 경조군(京兆郡)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사적(史籍)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니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반드시 어진 이를 낳은 후에야 징험이 있다는 것은 한(漢)나라에서는 보이지 않고,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 백성이 병들자, 곡식을 쥐고 나라를 떠나 시대를 피해 멀리 갔다. 그러므로 우리 종족은 요동(遼東)에서 다르게 번성하였다. 문선왕(文宣王)은 말하기를, "말은 충성스럽고 미덥게 하며, 행동은 독실하고 공손하게 하면 비록 오랑캐 땅에 가더라도 그 도가 행해질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지금 다시 우리 종족이 요동에서 번창하였다. 부인의 증조 이름은 원득(原得)으로 황제로부터 공부상서(工部尙書)에 추증되었고, 할아버지 이름은 충의(忠義)로 황제 한림대조(翰林待詔) 검교좌산기상시(檢校左散騎常侍) 소부감(少府監) 내중상사(內中尙使)를 지냈다. 아버지 이름은 공량(公亮)으로 황제 한림대조(翰林待詔) 장작감승(將作監承) 충내작판관(充內作判官)을 지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문무(文武)의 재능이 뛰어나 평자(平子)의 천문 관측과 공수(公輸)의 신묘한 기계를 연구하였으며, 재주와 기예를 바쳐 금문(金門)에서 6조(六朝)를 섬기며 벼슬과 지위가 있었고, 처음과 끝을 잘 마무리하였다. 선부인(先夫人)은 농서(隴西) 이씨(李氏)로, 훌륭한 집안 출신이다. 부인은 곧 판관(判官)의 둘째 딸로, 유순하고 곧으며, 천성을 그대로 받아 여공(女工)과 부도(婦道)에 힘써 옛것을 구하였다. 이씨(李氏) 집안에 시집와서는 내외 친척들이 모두 어진 부인이라고 칭송하였다. 부인은 후사가 없어 앞 부인이 낳은 아들 셋을 자기 자식보다 더 잘 보살폈다. 장차 선행을 쌓아 좋은 결과를 얻으려 하였으나, 어찌 천명(天命)이 정해져 있어 수명이 짧을 줄 알았겠는가. 병에 걸려 무당과 편작(扁鵲)도 고치지 못하고, 함통(咸通) 5년(864) 5월 29일에 영표(嶺表)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33세였다. 단공(端公)은 평생을 함께 한 부인을 그리워하며, 산과 강을 평지처럼 여기고, 검소함을 피하지 않고 굳은 마음으로 관을 따라 세상에 돌아왔다. 맏아들 경현(敬玄), 둘째 아들 경모(敬謨), 셋째 아들 경원(敬元)은 모두 슬퍼하며 멀리서 영구(靈柩)를 모시고 돌아와 한없이 슬퍼하였다. 경현(敬玄) 등은 쇠약해진 몸으로 숨을 헐떡이며 예를 갖추어 함통(咸通) 5년(864) 12월 7일에 만년현(萬年縣) 창천향(滻川鄕) 상부촌(上傅村)으로 옮겨 선영(先塋)에 장사지냈다. 부인의 친숙(親叔) 한림대조(翰林待詔) 전소왕부(前昭王傅)와 친형 수석청도솔부병조참군(守石淸道率府兵曹參軍)은 금문(金門)에서 함께 벼슬하며 가업을 이었으니, 희고(希古)는 부인의 형과 오랜 친분이 있어 슬퍼하며 명(銘)을 짓고 써 주기를 청하였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하늘과 땅은 어질지 않아, 도균(陶鈞)보다 먼저 죽으니,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멀고 가까움이 없네.

쌓은 행실을 누리지 못하고, 큰 명(命)을 늘리지 못하니,

어찌 이 훌륭하고 어진 이가, 또한 짧은 삶을 만났는가.

어진 성인도, 짧은 삶을 만나니,

저승으로 가 진(秦)나라와 끊어지네.

대도(大道)는 이미 다했고, 만물은 한 줌 흙으로 돌아가네.

5. 평가

대당고김씨부인묘명은 신라 김씨의 기원에 대해 소호금천씨와 김일제를 언급하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금석문이다.[4] 그러나 이 묘비명의 내용이 실제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는지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5. 1. 긍정적 평가

부산외대 권덕영 교수는 이 묘비명에 대해 "으로 이주한 후에도 오래도록 자신의 시조 의식을 그대로 유지하던 재당 신라인의 사고체계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라고 평가했다.[5] 이는 김유신 비문, 신라 문무왕 비문의 내용과도 연관성을 갖는다.

5. 2. 비판적 평가

부산외대 권덕영 교수는 이 묘비명에 대해 "으로 이주한 후에도 오래도록 자신의 시조 의식을 그대로 유지하던 재당 신라인의 사고 체계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라고 평가했다.[5] 하지만 권덕영 교수는 이런 신라 김씨의 뿌리 의식은 관념상일 뿐 실제 김일제에게서 비롯됐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평가했다.

김성회는 김씨의 뿌리에 네 가지 설이 있는데, 이 중 중국 삼황오제의 하나인 소호금천씨의 후손이라는 설과 삼국사기삼국유사의 기록대로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설은 과학적으로 볼 때 신빙성이 높지 않다고 평가했다. 나머지 두 설 가운데 대당고김씨부인묘명과 신라 문무왕 비문에 기록된 흉노족 출신 투후 김일제의 후손이라는 설은 어느 정도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지만, 당시 역사적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평가했다. 김성회는 신라 초기 왕들이 성을 사용하지 않다가 신라 중기 이후에 김씨 성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왕권이 확립된 신라 진흥왕 이후에 비로소 김씨 성을 사용한 것으로 보는 설이 타당하다고 주장했다.[6]

결국 대당고김씨부인묘명의 기록은 당시 신라인들의 조상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가 될 수는 있으나, 그 기록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고 평가하고 있다.

참조

[1] 뉴스 '신라김씨 뿌리는 흉노' 기록 신라인 묘지명 첫 확인 http://news.khan.co.[...] 경향신문 2009-04-22
[2] 뉴스 재당 신라인 대당고김씨부인묘명 전문 http://www.yonhapnew[...] 연합뉴스 2009-04-22
[3] 문서 여기서 요동(遼東)이란 오늘날 중국의 [[랴오둥반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문맥상 [[신라]](新羅)를 말하는 것으로서, '넓은 의미의 요동' 즉 해동(海東)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4] 뉴스 '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6> 김씨의 기원 http://www.segye.com[...] 세계일보 2011-04-12
[5] 문서 부산외대 권덕영 교수는 2009년 5월 9일 대전 한밭대에서 열린 한국고대사학회 제108회 정기발표회에서 이 묘비명에 대한 자세한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6] 뉴스 '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7> 김씨의 거짓과 진실 http://www.segye.com[...] 세계일보 2011-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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