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대런던 계획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대런던 계획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런던의 주택 부족과 인구 과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44년에 발표된 도시 계획이다. 런던 지역을 내부 시가지, 교외 지대, 그린벨트, 주변 지대의 4개의 동심원 형태로 구분하고, 그린벨트 설정을 통해 개발을 억제하며, 뉴타운 건설을 통해 인구를 분산 수용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이 계획은 스티븐니지, 하로우 등의 뉴타운 건설에 영향을 미쳤으며, 1968년 대런던 개발 계획으로 재검토되었다. 대런던 계획은 일본의 수도권 정비 계획에도 영향을 미쳤지만, 일본의 그린벨트 정책은 개발 억제 효과가 미미했고, 뉴타운은 베드타운으로 전락하는 등 계획의 의도와 다른 결과를 낳기도 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런던의 역사 - 왕립 조폐국
    왕립 조폐국은 886년 앨프레드 대왕 시대에 설립되어 런던탑에서 500년 이상 운영되며 영국 주화 발행을 독점했던 영국의 주화 제조 기관으로, 현재는 로열민트 주식회사로서 영국 재무부 산하 상장 기업으로 운영되며 다양한 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 런던의 역사 - 1851년 만국 박람회
    1851년 만국 박람회는 영국에서 개최된 세계 최초의 만국 박람회로, 영국의 산업 기술과 디자인을 기념하고 산업 선도국으로서의 위상을 과시하기 위해 기획되었으며, 조셉 팩스턴이 설계한 크리스탈 팰리스를 중심으로 13,000여 점의 전시품과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대런던 계획
계획 개요
명칭대런던 계획
원어 명칭Greater London Plan
발표 연도1944년
계획 목표전후 런던 재건 및 개발
주관패트릭 아버크롬비
주요 내용
분산화런던 인구 및 산업의 분산
그린 벨트런던 주변의 그린 벨트 설정
신도시 건설8~10개의 신도시 건설
교통망 개선도로망 및 대중교통망 개선
추가 정보
관련 계획카운티 오브 런던 계획
영향전후 영국 도시 계획에 큰 영향

2. 배경

(내용 없음 - 하위 섹션에서 상세 내용을 다루므로 중복을 피하기 위해 생략)

2. 1.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런던의 상황

대런던 계획은 런던 지역을 동심원 형태로 내부 시가지, 교외 지대, 그린벨트, 주변 지대로 나누어 파악했다. 중심부의 기존 시가지에서는 높은 인구 밀도를 어느 정도 인정하되, 교외 지대에서는 인구 과밀을 억제했다. 도심에서 약 20km에서 30km 떨어진 권역은 그린벨트로 지정하여 개발을 억제하도록 했다. 런던 중심부에서 수용하기 어려운 인구는 외곽 주변 지대의 기존 도시를 확장하거나, 8곳의 신도시를 건설하여 분산시키고자 했다.

이 계획에 따라 스티브니지나 하로우 같은 뉴타운이 건설되었고, 그린벨트로 지정된 지역은 개발이 엄격히 제한되었다. 1968년에는 계획이 재검토되어 대런던 개발 계획이 새롭게 수립되었다.

3. 주요 내용

대런던 계획은 런던 지역을 동심원 형태로 내부 시가지, 교외 지대, 그린벨트, 주변 지대로 구분하여 관리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 계획의 핵심은 인구 과밀을 억제하고 도시의 무분별한 확산을 막기 위해 도심 주변에 그린벨트를 설정하여 개발을 엄격히 제한하는 것이었다. 또한, 런던 중심부에서 수용하기 어려운 인구를 분산시키기 위해 외곽 지역에 스티브니지, 하로우 등을 포함한 8곳의 뉴타운(신도시)을 건설했다. 이 계획은 이후 1968년 "대런던 개발 계획"으로 이어지며 런던 도시 계획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3. 1. 4개의 동심원 지역

급격한 인구 증가와 제2차 세계 대전 중 피난했던 많은 사람들의 귀환으로 인해 런던은 심각한 주택 부족과 높은 인구 밀도 문제에 직면했다. 1938년 당시 약 305.62km2 면적의 런던시 인구는 40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었다. 도시의 무분별한 확산을 막고 개발을 체계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대런던 계획은 런던 지역을 4개의 동심원 형태 지역으로 구분하여 관리 방안을 제시했다.[1]

이 계획은 런던 지역을 다음과 같은 네 개의 동심원 지역으로 나누었다.

지역 구분주요 내용 및 목표
내부 도시 지역 (Inner Urban Ring)이미 인구 밀도가 높은 도심 지역으로, 추가적인 주택이나 산업 시설 건설을 제한했다. 대신 전쟁 등으로 손상된 건물은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하여 재건축하도록 했다. 일정 수준의 높은 인구 밀도는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교외 지역 (Suburban Ring)주택과 경공업 시설을 균형 있게 배치하여, 특정 지역이 단순히 잠만 자는 비효율적인 베드타운으로 변하는 것을 막고자 했다. 인구 과밀화를 억제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린벨트 (Green Belt Ring)런던 도심으로부터 약 20km에서 30km 떨어진 지역에 설정되었다. 공원과 같은 녹지 및 휴양 공간 조성을 장려했으며, 기존에 형성된 마을 내에서의 제한적인 개발을 제외하고는 모든 종류의 신규 개발을 엄격히 금지했다. 이는 도시의 무분별한 팽창을 막는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외곽 농촌 지역 (Outer Country Ring)농업 지역을 보호하고 지원하는 한편, 런던 중심부의 과밀 인구를 분산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여러 위성도시 건설을 계획했다. 이 계획에 따라 런던 외곽에 8곳의 신도시(뉴타운)를 건설하여 런던 중심부에서 수용하기 어려운 인구를 이전시키고자 했다.



이러한 계획의 실행은 스티브니지나 하로우와 같은 뉴타운의 탄생으로 이어졌으며, 그린벨트로 지정된 구역에서는 개발 행위가 엄격하게 규제되었다. 이후 1968년에는 기존 계획을 재검토하여 "대런던 개발 계획"이 새롭게 수립되면서 런던의 도시 계획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3. 2. 주택

새로운 주택 개발은 주로 제2차 세계 대전 중 공습으로 피해를 입은 지역, 교외 지역 및 새로운 위성 도시에 집중될 예정이었다. 애버크롬비는 런던 내 기존 공동체의 위치를 파악하고, 핵심 지역을 중심으로 이러한 공동체를 성장 지역으로 개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주택 개발은 다양한 직업, 가족 규모 및 사회 경제적 집단을 포함하여 이러한 공동체를 육성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특히 '자신의 집 갖기' 계획은 주택 공유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로, 1931년 당시 런던 가구의 63.5%가 겪었던 주택 공유 상황을 개선하고자 했다. 대런던 계획에 따라 아파트와 단독 주택 형태의 저렴한 주거 공간이 건설될 예정이었다. 또한, 미적으로 쾌적한 가로 경관을 조성하기 위해 모든 신규 개발 지역에 특정 건축 양식을 적용하기로 했다.

3. 3. 고용 및 산업

지역 중심지를 강화하여 다양한 상업적 기회를 창출하고 지역 서비스를 보완하도록 했다. 고용 기회는 노동력을 쉽게 확보할 수 있도록 주거지와 가까운 곳에 두되, 주민들에게 불편을 주지 않도록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도록 계획되었다. 주요 제조업은 혼잡한 도심에서 벗어나, 전문 인력을 갖춘 '신도시'로 이전하도록 유도했다. 특정 산업은 철도역이나 템스강처럼 필요한 자원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지역에 배치하도록 했다. 서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산업들은 원자재 공유나 기술 교류 등의 이점을 살릴 수 있도록 함께 모여 산업 클러스터를 형성하도록 권장되었다.[1]

3. 4. 레크리에이션

대런던 계획에서 열린 공간 개발은 애버크롬비에게 매우 중요한 사항이었으며, 휴식은 삶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간주되었다. 모든 열린 공간은 유지되어야 했고, 특히 '그린 벨트' 개발이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도시 광장, 정식 정원부터 자연미를 살린 공원까지 다양한 형태의 열린 공간 조성이 계획되었다. 주민들이 교통 방해 없이 주요 열린 공간 사이를 걸어 다닐 수 있도록 일련의 공원 도로(parkway) 건설이 제안되었다.

도시 주민 1,000명당 4acre의 접근 가능한 열린 공간 확보를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1944년 당시 일부 자치구는 주민 1,000명당 0.1acre의 열린 공간만 확보하고 있는 실정이었다.[2] 애버크롬비는 런던이 모든 주민에게 충분한 열린 공간을 제공하기에는 너무 밀집되어 있음을 인정하고, 개선된 교통 수단을 통해 모든 주민이 거주지 인근 외곽의 휴양 지역까지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3. 5. 교통

런던 내에서는 주거 공간, 산업 공간, 레크리에이션 공간이 모두 교통망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효율적인 교통 수준을 적절하게 유지하는 것은 대런던 계획의 핵심 목표 중 하나였다. 20세기 동안 교통 수단은 빠르게 변화했지만, 도로망은 이러한 변화를 따라가지 못했다. 영국의 자동차 수는 1910년 143,877대에서 1940년 3,084,896대로 크게 증가했으며,[2] 이는 심각한 교통 체증과 교통 관련 사고 증가를 유발했다.

계획을 입안한 애버크롬비는 도시 전반에 걸쳐 다양한 교통 수단을 여러 수준에서 분리하여 교통 흐름을 개선하고자 했다. 주요 간선 도로와 순환 도로를 건설하여 도로 사용자가 혼잡한 구간을 우회할 수 있도록 계획했다. 런던의 철도 교통은 여객 및 상업 네트워크로 분리될 예정이었으나, 당시 철도는 사유 재산이었기 때문에 계획 관련 법규가 철도 회사의 운영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기 어려운 한계가 있었다. 한편, 템스강은 도시의 중심점으로 재정의되었으며, 무역 및 교통 자원으로서의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방안이 모색되었다.[1]

4. 결과 및 영향

대런던 계획은 런던 지역을 내부 시가지, 교외 지대, 그린벨트, 주변 지대의 동심원 구조로 파악하고 인구 분산을 목표로 하였다. 중심 시가지는 일정 수준의 인구 밀도를 유지하되, 교외 지대의 과밀은 억제하고, 도심에서 20km~30km 권역은 그린벨트로 지정하여 개발을 억제하고자 했다. 수용하지 못하는 인구는 외곽 기존 도시 확장 및 8곳의 뉴타운 건설을 통해 분산시킬 계획이었다.

이 계획의 직접적인 결과로 스티브니지나 하로우와 같은 뉴타운이 실제로 건설되었으며, 그린벨트로 지정된 지역에서는 개발이 엄격하게 규제되었다. 물리적인 건설 성과와는 별개로, 이 계획은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지친 런던 시민들에게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과 문명 부활의 희망을 제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계획의 모든 목표가 완전히 실현되지는 못했으며, 이는 주로 전후 영국의 어려운 경제 상황 때문이었다. 결국 1968년에는 계획을 재검토하여 "대런던 개발 계획"이 수립되기도 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한계 문단 참고)

4. 1. 한계

대런던 계획은 당시 런던이 직면한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포괄적인 시도였지만, 계획 전체가 완전히 실현되지는 못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영국의 어려운 경제 상황은 패트릭 애버크롬비가 제안한 대규모 기반 시설 개발을 추진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점진적인 패트릭 게디스식 접근 방식이 제안되었음에도, 애버크롬비는 런던처럼 오래되고 복잡하며 계속 성장하는 도시에 단 한 명의 계획가가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이 제한적일 수 있다는 점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 건설 결과와 관계없이, 대런던 계획은 전쟁의 참화 속에서 런던 시민들에게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과 문명 부활의 희망을 제시하는 데에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계획은 스티브니지나 하로우 같은 뉴타운 건설로 이어졌고, 그린벨트로 지정된 지역에서는 개발이 엄격하게 규제되었다. 그러나 계획의 모든 부분이 의도대로 작동한 것은 아니며, 1968년에는 계획을 재검토하여 "대런던 개발 계획"이 수립되기도 했다.

한편, 1950년대 일본의 수도권 정비 계획은 대런던 계획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이 계획 역시 도쿄 도심의 과밀화를 억제하고 주변에 그린벨트를 설정하여 인구와 산업을 위성 도시로 분산시키려는 목표를 가졌다. 하지만 일본의 그린벨트는 영국처럼 개발을 엄격히 금지하는 방식이 아니라, 건폐율을 낮게 설정하여 녹지를 남기는 소극적인 방식이었다. 이는 개발을 효과적으로 억제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불법 건축물이 늘어나는 문제를 낳았다. 이러한 경험은 1968년 도시 계획법 제정 당시 도시 계획 구역을 시가지화 구역과 시가지화 조정 구역으로 나누는 방식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일본의 대표적인 신도시인 오사카의 센리 뉴타운이나 도쿄의 다마 뉴타운은 대런던 계획의 핵심 원칙을 제대로 따르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런던 계획은 위성 도시 주변에 그린벨트를 두어 도시들이 스프롤 현상으로 연결되는 것을 막고, 직주 근접, 즉 도시 내에서 일자리를 창출하여 독립적인 생활 공간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일본의 뉴타운들은 이러한 원칙을 지키지 못하고 단순히 도심으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을 위한 베드타운으로 기능하는 데 그쳤다. 이는 대런던 계획의 본래 이념에 비추어 볼 때 한계를 드러낸 사례로 볼 수 있다.

4. 2. 한국에 미친 영향

(작성할 내용 없음)

참조

[1] 서적 Greater London Plan University of London Press 1944
[2] 서적 London in the 20th Century: A city and its People. Random House 2008
[3] 서적 The County of London Plan Penguin Books 1945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