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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노동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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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노동운동은 1945년 8·15 광복 이후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전평) 결성을 시작으로 태동했다. 전평은 좌경화되면서 미군정의 지원을 받은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 (대한노총)과 대립했고, 이후 대한노총은 이승만 정권의 어용 단체로 변질되었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한국노동조합총연맹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나 5·16 군사정변으로 해산되었다. 군사정권 하에서 노동운동은 제한적인 역할을 했지만, 전태일의 분신 사건은 노동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노동운동의 전환점이 되었다. 1980년대 이후 민주화 운동과 함께 노동운동이 발전했으며, 구로공단 노동자 연대투쟁, 6월 항쟁을 거치며 노동자들의 권익 신장을 위한 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96년에는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민주노총)이 결성되어 한국노동조합총연맹 (한국노총)과 함께 양대 노총 체제를 이루며 현재까지 노동자 권익 보호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2. 해방 직후 노동운동의 태동과 시련 (1945~1960)

8·15광복과 함께 위축되었던 노동운동은 전환기를 맞았다. 1945년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가 조직되었는데, 이는 남로당의 전위행동대로서 남한의 정치 및 사회질서를 혼란시키는 데 주력했다. 전평은 8시간 노동, 최저임금제 확립 등을 강령으로 내걸었으나, 처음에는 과격한 투쟁을 억제하는 중도적 태도를 보였다.[1]

그러나 신탁통치의 찬반을 둘러싼 당시의 정치상황은 노동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1946년 3월에는 미군정의 지원하에 극좌계 노동단체인 전평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대한노총)이 결성되었다.[1]

2. 1.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의 결성과 좌절

8·15광복과 더불어 위축되었던 노동운동은 전환기를 맞았다. 1945년 남로당의 전위행동대로서 남한의 정치 및 사회질서를 혼란시키는 데 주력했던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가 조직되었다. 1945년 11월 결성된 전평은 8시간 노동, 최저임금제 확립 등을 강령으로 내걸었으나, 처음에는 과격한 투쟁을 억제하는 중도적 태도를 견지하였다.[1]

그러나 신탁통치의 찬반을 둘러싼 당시의 정치상황이 노동운동에도 반영되어, 1946년 3월 미군정의 지원하에 극좌계 노동단체인 전평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대한노총)이 결성되었다.[1]

2. 2.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대한노총)의 어용화와 노동운동의 위축

이승만 정권과 이전의 동맹 세력이었던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대한노총)의 대립은 이승만이 자신의 반대파인 당시 위원장 전진한을 몰아내고 자신의 재선을 지지하는 세력에게 대한노총을 넘김으로써 일단락되었고, 대한노총은 어용화되었다.[1] 그러나, 상부층의 어용화에도 불구하고 단위노동조합들은 임금 인상 및 노동운동 보장을 요구하며 지속적인 투쟁을 전개하였다.[1] 1953년 노동조합법·노동쟁의조정법, 1954년 근로기준법 등이 제정, 시행되어 노동운동의 법률적 기초가 마련되었다.[1] 1959년에는 대한노총의 어용성 탈피와 민주적인 노동운동의 전개를 목적으로 전국 37개 노동조합연합체 중 23개 단체 대표 32명이 모여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국노협)를 설립하였다.[1]

3. 군사독재 정권하의 노동운동 (1961~1979)

5.16 군사 쿠데타 이후 노동조합 활동이 다시 보장되었으나, 군사독재 정권은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 등을 제정하여 단체교섭권 등을 억압하고, 1973년 12월 노동조합법 등을 개정하는 등 노동운동을 통제하려 했다.[1] 이로 인해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은 노동자들의 자주적인 목소리를 대변하는 데 한계를 가졌다.

3. 1.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의 결성과 한계

4·19 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자, 그해 5월 9일 대한노총은 어용단체화된 것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지고 간부들이 총사퇴했다.[1] 1960년 11월 25일 대한노총은 명칭을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으로 고쳤으나, 5·16 쿠데타로 해산되었다.[1] 이후 군사독재정부에서도 노동조합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1961년 8월 노동조합 활동을 다시 보장해 주었다.[1] 1961년 8월 4일 한국노동단체 재건 조직위원회를 조직했고, 같은 해 10월 30일에는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을 결성하여 처음으로 전국 단위의 산별노조 체제를 갖추었다.[1]

그러나 군사정부는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 등을 제정하여 단체교섭권 등을 억압했고, 1973년 12월 노동조합법 등을 개정하는 등 노동운동을 통제하려 했다.[1] 이는 한국노총이 노동자들의 자주적인 목소리를 대변하는 데 한계를 갖게 만들었다.

3. 2. 전태일 분신과 노동운동의 전환점

1960년대에는 최소한의 근로조건(근로기준법)조차 지켜지지 않았다. 이에 분노를 느낀 전태일은 1969년 평화시장의 최초 노동 조합을 결성하고 근로 실태를 조사, 개선 요구를 하였으나 자본가와 국가의 방해로 좌절되었다. 결국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 화형식과 더불어 분신 자살하게 되었고, 이 사건이 기사화되면서 사회에 알려지게 되었다.[1]

이 사건으로 지식인, 종교계는 전태일의 죽음을 애도하며 시위와 개신교, 천주교가 같이 집례한 추모 및 종교 의식을 거행하였다. 전태일을 모방하는 자살도 이어지게 되면서 열악한 노동 조건 문제가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고, 언론사의 후속 기사로 은폐되었던 현실이 드러나게 되었다.[1] 이는 억압받던 노동계가 본격적으로 노동 운동에 나서게 되는 시발점이 되었으며, 당시 신민당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이 '전태일 정신의 구현'을 공약으로 내세우는 등 정치계가 노동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됨으로써 사회에 막대한 반향을 일으켰다.[1]

3. 3. 1970년대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

1970년대에 들어 여성 노동자들은 노동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이는 당시 여성 노동자들이 전체 노동자의 많은 수(역사학연구소에 따르면 1970년 노동자의 90%가 여성 노동자였으며, 경공업에 종사했다.)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2] 여성 노동자들은 노동 조건 개선 및 사회적 지위 향상을 위해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노동법 교육을 하였다. 권위적인 군사독재 정권과 가부장주의에 젖어 있던 자본가들은 민주 노조 운동을 '아버지'같은 사장에게 대드는 것으로 여겨 탄압하였다. 군사 독재 정권도 노동조합이 경제 성장을 가로막는다거나, 사회적 질병이라거나, 빨갱이라고 하는 악선전을 하면서 민주 노조 운동을 억압하였다.[2] 그럼에도 여성 노동자들은 굴하지 않고 노동운동을 하여 자신들의 처지를 바꾸어갔다. 저임금생활임금으로, 열악한 급식은 먹을 만한 급식으로 바뀌었고, 환풍기를 설치하여 경공업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먼지를 마시지 않게 했다. 멸시와 천대를 받던 노동자들이 민주 노조 운동으로써 노동 조건 및 사회적 지위를 개선해 간 것이다.[2]

4. 민주화 이후 노동운동의 발전과 과제 (1980~현재)

1980년대 민주화 운동과 함께 노동운동은 급격하게 성장하였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은 노동자들의 권익 신장을 위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4. 1. 구로동맹파업과 민주노조 운동의 확산

1980년대 초 제5공화국 출범과 함께 민주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었으나, 1983년부터 다소 완화되면서 전 산업에 걸쳐 20여 개의 민주노조가 결성되었다. 1985년 6월 구로공단 노동자 연대투쟁은 대우어패럴 노조에 대한 탄압에 대응하여 구로공단 내 6개 업체가 동조 농성에 들어간 사건으로, 노동운동이 경제적 이익을 넘어 구속자 석방, 노동3권 보장 등을 요구하는 정치적 성향을 나타냈다는 점과 1970년대 기업별 노조 운동의 틀을 넘어 노조 연대의 가능성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사건으로 평가된다.[1]

이를 계기로 정치 투쟁을 중요 과제로 설정한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이 결성되었으나, 올바른 목표와 방향을 제시하지 못한 채 1년 만에 해체되었다.[1]

4. 2. 1987년 노동자 대투쟁과 노동운동의 새로운 국면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은 6월 항쟁과 6·29 선언 직후인 7월과 8월, 두 달 동안 약 3000여 건의 쟁의가 발생하며 그동안 쌓였던 노동문제가 한꺼번에 터져 나온 사건이다. 이는 6.25 전쟁 이후 최대 규모의 노동 쟁의로 평가되며, 이를 계기로 한국의 노동운동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1]

4. 3.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의 출범과 현재

1996년 11월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이 만들어져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과 함께 양대 노총 체제가 확립되었다. 민주노총은 공인노무사의 노동 상담, 노동법 교육, 노동 인권 앱인 "노동자 권리찾기" 앱(플레이스토어에서 내려받기 가능) 배포 등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일하고 있다.

참조

[1] 간행물 한국의 노동운동 글로벌 세계 대백과
[2] 서적 교실밖의 국사여행 사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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