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제5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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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제5공화국은 1981년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출범한 정부이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사망 이후 신군부 세력이 12·12 쿠데타를 통해 실권을 장악하고, 5·17 쿠데타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무력 진압을 거쳐 수립되었다. 전두환 정부는 7년 단임 대통령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을 제정하고, 형식적인 민주주의를 표방했으나, 야당 탄압과 관제 야당 운영으로 일당 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1980년대 중반 야당의 성장과 민주화 요구가 거세지면서 1987년 6·29 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약속하고, 1988년 노태우 정부 출범과 함께 종식되었다. 제5공화국은 경제 성장과 사회 변화를 이끌었지만, 군사 반란과 민주화 운동 탄압으로 인한 부정적인 평가도 받는다.

대한민국 제5공화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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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1984–1988)
공식 명칭대한민국
한자 표기大韓民國
로마자 표기Daehan Minguk
시대냉전 시대
존속 기간1981년 – 1988년
정치 체제단일 반대통령제 공화국, 권위주의 군부 독재
수도서울
공용어한국어
국가 표어정의사회구현
국가애국가
애국가
애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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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장 (1984–1988)
국가 인장image_file: Seal of the Republic of Korea (1963–1999).svg
국새
국새한국어
정치
대통령전두환
대통령 재임 기간1981년 – 1988년
국무총리남덕우 (1981년 – 1982년)
유창순 (1982년)
김상협 (1982년 – 1983년)
진의종 (1983년 – 1984년)
노신영 (1985년 – 1987년)
이한기 (대행, 1987년)
김정렬 (1987년 – 1988년)
입법부국회
역사
이전 국가제4공화국
이후 국가제6공화국
시작 사건1981년 2월 25일
종료 사건최초의 민주적 선거 (1987년 12월 16일)
이후 사건제6공화국 수립 (1988년 2월 25일)
기타 정보
통화대한민국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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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립 배경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암살당하면서 한국 사회는 큰 혼란에 빠졌다.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으나, 전두환, 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은 12·12 군사 반란을 일으켜 실권을 장악했다.

신군부는 1980년 3월, K-공작 계획을 통해 민주화 여론을 억누르고 군부의 정치 개입을 정당화하려 했다. 1980년 4월, 보안사령관 전두환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임하며 정보기관을 장악했다.

1980년 5월, 신군부는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내리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하여 정권을 장악했다. 1980년 9월 1일, 전두환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80년 10월 27일, 제8차 헌법 개정이 이루어져 7년 단임의 대통령제가 도입되었고, 1981년 2월 25일 전두환은 대통령 선거인단에 의해 제12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3. 정치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사망 이후,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였으나, 전두환, 노태우를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 세력이 12·12 군사 반란으로 실권을 장악했다. 1980년 3월, 국군기무사령부는 K-공작 계획을 실시하여 민주화 여론을 잠재우고 군부의 정치 개입을 정당화하려 했다. 같은 해 4월,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중앙정보부장 서리가 되어 국내 정보 기관을 장악했다.

1980년 5월, 신군부 세력은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내리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폭력적으로 진압한 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해 정권을 장악했다. 1980년 9월 1일, 전두환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간선제에 따라 제11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0월 27일에는 7년 단임 대통령제 등을 골자로 하는 제8차 헌법 개정이 이루어졌고, 1981년 2월 25일 대통령 선거인단에 의해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전두환박정희 정부를 부정하고, "5·16 혁명정신" 관련 사항을 삭제하며, 하나회에 부정적인 민주공화당 실세들을 제거하면서 박정희 시대를 부정부패와 비리의 시대로 규정하고 제5공화국은 '정의사회구현'을 추구한다고 선언했다. 박정희에 대한 공식적인 추모식은 금지되었고, 1987년에야 재개되었다.

제5공화국은 형식상 민주주의를 지향하여 대통령 임기를 7년 단임으로 하고, 대통령의 법관 임명권과 국회의원 임명권을 삭제했으며, 국회 권한을 강화했다. 그러나 통일주체국민회의를 변형한 대통령 선거인단을 통한 간선제를 유지하여 민주주의를 제한했다.

국가안전기획부는 김영삼, 김대중 등 주요 야당 인사들의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민주한국당, 한국국민당 등 관제 야당을 내세워 1당 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비판과 재야인사들의 저항이 계속되었고, 1983년 5월 18일 김영삼은 광주 민주화 운동 3주기를 맞아 전두환 정권의 탄압에 저항하며 23일간 단식투쟁을 했다.

3.1. 야당의 성장과 분열

1980년대 중반, 정치활동 금지가 해제된 인사들을 중심으로 신한민주당이 창당되어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다.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은 돌풍을 일으키며 지역구 50석과 전국구 17석을 차지하여 제1야당으로 부상했다. 이는 여당인 민주정의당이 과반수 의석을 차지했지만, 지역구에서 제1당이었던 민정당에 전국구 의석 중 2/3을 배분한 결과로 사실상 민정당이 패배한 선거였다. 전두환은 이러한 신민당의 선전에 격노하였고, 잘못된 선거 분석을 내놓은 노신영 안기부장을 질책 후 사실상 경질하였다.

1986년, 신민당은 전두환에 대한 야당의 강도에 대한 내부 이념 갈등을 겪었고, 1987년 김영삼의 계파는 분당하여 통일민주당을 창당했다.

3.2. 몰락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학생 시위가 시작되었고, 시위 도중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자, 분노한 시민들과 학생들에 의해 6월 항쟁이 일어나 전두환 정권은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4월 13일, 정부는 '5공 헌법에 의한 대권이양'을 내용으로 하는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여 개헌 요구를 부정하였다. 그러나 야권, 재야, 학계, 종교계 등에서 반대하는 시국선언과 농성이 이어졌다. 5월 27일에는 '민주화추진 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되어 '군사통치 종식'과 '민주정부 수립'을 목표로 대정권투쟁에 돌입했고, 국민운동본부는 '6·10 민주화 장정대회'를 개최하여 6월 항쟁의 막을 올렸다.

1987년 6월 10일, 민주정의당은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지만, 같은 날 전국에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 정부는 이를 불법집회로 규정하고 공권력을 투입하여 원천봉쇄를 시도했으나, 서울, 부산, 광주, 인천 등 전국 18개 도시에서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고 시민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결국 전두환 대통령은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 겸 총재 노태우를 통해 시국수습방안을 발표하게 하였고, 이를 통해 제5공화국 헌법이 개정되었다. 6.29 선언으로 1987년 12월 16일, 16년 만에 국민의 직접선거로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지만, 민주화 세력의 분열 속에서 5공 주역이었던 노태우가 제13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88년 2월 25일 노태우가 제13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제5공화국은 종식되었으나, 사실상 1993년까지 연장되었다.

4. 경제

1980년대 초반, 대한민국 제5공화국은 1960년대와 1970년대 경제 개발의 후유증으로 외채 문제에 직면했다. 장영자 사건, 명성그룹 사건, 국제그룹 해체 등 대규모 경제 스캔들이 발생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이후, 정부의 긴축 정책과 국제 유가 하락, 달러 가치 하락, 금리 하락 등의 3저 호황으로 물가가 안정되고 수출이 호조를 보였다. 특히, 부가가치가 높은 자동차, 전자, 반도체 등 첨단 산업이 빠르게 성장했다.

1986년 현대자동차포니엑셀이 미국에 수출되면서, 한국 자동차 산업은 국제 경쟁력을 갖추게 되었다.

대한민국의 최초 대량생산 자동차인 현대 포니는 제5공화국 시절부터 수출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의 최초 대량생산 자동차인 현대 포니는 제5공화국 시절부터 수출되기 시작했다.

이는 한국이 자동차 산업에서 선진국과 경쟁하게 된 중요한 사건이었다. 한편, 선진국의 시장 개방 압력이 거세지면서 공산품뿐만 아니라 농축산물 수입도 자유화되어, 1986년에는 수입 자유화율이 91.5%에 달했다. 외국 자본의 투자 비율도 점차 확대되어 100%까지 허용되었다.

정부의 시장 개방 정책은 대기업에 유리한 환경을 제공했지만, 값싼 외국산 농축산물 수입으로 인해 농촌 경제는 큰 타격을 입었다. 양곡 자급률은 1970년 86%에서 1985년 48.4%로 낮아졌다. 이로 인해 한국인의 밥상에는 외국산 농축산물이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10대 대기업이 국민 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979년 33%에서 1989년 54%로 증가했고, 30대 대기업의 계열 기업 수는 1970년 126개, 1979년 429개, 1989년 513개로 늘어났다. 반면 농촌 인구는 급격히 감소했고, 도시로 이주한 농민들은 대부분 도시 빈민층을 형성하여 막노동, 산업 노동자, 서비스업 등에 종사했다.

수출 호조에 힘입어 국민총생산은 연평균 10% 내외로 성장했으며, 1인당 GNP는 1987년 기준 3000USD를 넘어서며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1980년부터 컬러 TV 방송이 시작된 것도 경제 성장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군사 쿠데타와 시민 학살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정부는 민심을 달래기 위해 2200000ton이 넘는 쌀을 수입했다. 이듬해부터 통일벼 계열에 대한 권장 정책은 사실상 중단되었고, 1984년에는 농민들이 자유롭게 품종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1989년 무렵에는 통일벼 계열 품종이 한국 농토에서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정부의 집중적인 중화학공업 지원 정책은 단기간에 중화학공업을 육성하는 데 성공했고, 1970년대 중반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2020년 국내총생산에서 중화학공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22.2%였으며, 제조업 전체 비중(27.2%)을 고려하면 매우 큰 비중을 차지했다. 전두환 신군부는 자동차, 발전 산업의 신규 진입을 금지하고, 기존 업체의 사업 부문 정리를 강제했다.

5. 사회

제5공화국은 사회 정책 면에서 규제 완화를 추진했다. 야간 통행금지 해제, 중고등학교 교복 자율화, 프로야구, 프로축구, 프로씨름 등 스포츠 산업을 활성화했다. 컬러 텔레비전 보급과 컬러TV 방송도 이때 이루어졌다. 서울 아시안 게임서울 올림픽을 유치하고 개최 준비도 성공적으로 진행했다. 이러한 정책들은 3S 정책으로 불리기도 한다.

삼청교육대를 통해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나, 경찰의 일률적인 할당량 채우기 등으로 인해 인권 유린 논란이 일었다.

1977년부터 이앙기가 농촌에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1985년에는 TV 방송에 기계를 이용한 모내기가 등장했다.

전두환 정부는 노인복지법(1981년), 아동복지법(1981년), 장애인복지법(1981년), 유아교육진흥법(1982년) 등 여러 사회복지 관련 법안을 제정했다. 1984년 5월에는 만 65세 이상 노인을 위한 지하철 무임승차 제도를 도입했다.

5.1. 피해자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사망한 박종철(1964년 4월 1일 ~ 1987년 1월 14일)과,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이한열(1966년 8월 29일 ~ 1987년 7월 5일)은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1987년 1월 16일 검찰은 부랑아 수용소였던 부산 형제복지원의 원장실을 압수 수색했는데, 이때 원장 책상 서랍 안에서 전두환 대통령의 친필 서신이 발견되었다. 이 서신에는 거리의 부랑아를 소탕하라는 지시 사항이 담겨 있었다. 당시 담당 검사는 형제복지원의 운영 주체가 박인근 원장이 아닌 전두환 정권이었다고 증언했다.

6. 외교

제5공화국은 반공을 기치로 내걸고 미국, 일본과의 삼각 동맹을 강화했다. 미국과의 관계는 '혈맹'으로 지칭될 만큼 긴밀했으나,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미국의 개입 의혹으로 반미주의 운동이 확산되기도 했다. 일본의 역사교과서 문제, 재일 한국인 지문 날인 제도 등으로 한일 관계는 갈등을 겪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한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과거사에 대한 한국의 책임론을 언급하기도 했다.

북한과는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과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했으나, 아웅산 묘역 테러 사건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등으로 관계가 악화되었다. 1984년 9월, 북한이 대홍수로 인한 남한의 피해에 대해 쌀 5만 석(7,200톤) 등의 지원을 제안했고, 전두환 대통령은 아웅산 묘역 테러 사건에도 불구하고 이를 수용하여 남북 관계 개선의 계기가 마련되기도 했다. 1985년에는 이산가족 상호 방문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서유럽 국가들과는 경제·통상 부문에 집중하여 관계를 강화했다. 소련과의 관계는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으로 인해 긴장 상태를 유지했다. 아프리카, 아시아, 중동 국가들과의 외교 관계를 확대했다.

7. 개각

1980년 9월 1일 전두환은 취임식을 갖고 남덕우 국무총리를 필두로 신병현 부총리 및 11개 부처 장관을 임명하며 제1차 전두환 정부를 조각했다. 이후 전두환 정부는 여러 차례 개각을 단행하여 국정 쇄신을 시도했다.

7.1. 제1차 전두환 정부(조각)

1980년 9월 1일 전두환은 취임식을 갖고 남덕우 국무총리를 필두로 신병현 부총리 및 11개 부처 장관을 임명했다.

7.2. 제2차 전두환 정부

1981년 2월 25일 전두환은 대한민국 제5공화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3월 10일 교통부 장관과 체신부 장관을 임명했다.

7.2.1. 제1기 내각(제12대 대통령 당선과 조각)

1981년 2월 25일 대한민국 제5공화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된 전두환은 3월 10일 교통부 장관과 체신부 장관을 임명했다.

7.2.2. 제2기 내각(제1차 개각)

1981년 4월 8일, 노동부 장관과 정무 제1장관직을 신설했다.

7.2.3. 제3기 내각(제2차 개각)

1982년 1월 3일 경제 부처를 중심으로 개각을 단행했다.

7.2.4. 제4기 내각(제3차 개각)

1982년 5월 21일, 11개 부처 장관이 교체되었다.

7.2.5. 제5기 내각(제4차 개각)

{{lang 국무총리와 {{lang 외무부 장관, {{lang 법무부 장관, {{lang 내무부 장관이 임명되었다.

7.2.6. 제6기 내각(제5차 개각)

아웅산 묘소 테러사건으로 생긴 공백을 메우기 위해 1983년 10월 14일 개각이 발표되었다.

7.2.7. 제7기 내각(제6차 개각)

1985년 2월 18일 총선에서 신민당이 약진하자 쇄신 차원에서 12개 부처 장관을 경질했다.

7.2.8. 제8기 내각(제7차 개각)

1986년 1월 7일, 8개 부처 장관이 교체되었다.

7.2.9. 제9기 내각(제8차 개각)

민정당의 당직 개편에 따라 1986년 8월 26일 10개 부처 장관을 새로 임명하였다.

7.2.10. 제10기 내각(제9차 개각)

1987년 5월 26일 국무총리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3개 부처 장관을 교체하는 중규모 개각이 시행되었다.

7.2.11. 제11기 내각(제10차 개각)

6.29 민주화 선언으로 전두환이 민정당 총재직에서 물러난 1987년 7월 14일, 국무총리와 8개 부처 장관을 교체하는 마지막 개각이 단행되었다.

8. 평가

장태완 전 수도경비 사령관은 "군인 본연의 임무를 수행해 군사반란을 진압하던 사람들은 강제로 전역을 당해 비참한 삶을 살고, 반란군에 가담한 군인들은 수경사령관, 보안사령관, 군사령관, 참모총장을 다 해먹었으니 이렇게 불공평한 세상이 어디 있어요?"라고 제5공화국을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