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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원군 (왕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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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덕원군은 조선 세조와 근빈 박씨의 아들로 1449년에 태어났다. 세조의 총애를 받으며 덕원군에 봉해졌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세조를 극진히 보필했다. 예종 때 남이의 옥사를 평정하는 데 기여하여 공신에 책봉되었으며, 성종 때 종부시도제조를 역임하고 선원보를 관장했다. 1498년에 49세로 사망했으며, 묘소는 경기도 김포시에 있다. 그는 선운사 중창을 지원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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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원군 (왕족)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작위조선 세조의 왕자
이서(李曙)
배우자임천군부인 경주 김씨
봉산군부인 함안 윤씨
안성군부인 청주 양씨
창녕군부인 창녕 성씨
자녀10남 11녀
부친세조
모친근빈 박씨
출생일1449년 4월 7일
사망일1498년 8월 18일
능묘덕원군묘

2. 생애

조선 세조와 근빈 박씨 사이의 아들로 1449년(세종 31년) 3월 6일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1455년(단종 3년) 세조의 총애를 받으며 자랐다. 1458년 (세조 4년) 8월 10세에 덕원군에 봉해졌고, 1462년 (세조 8년) 14세에 혼인하여 사저(私邸) 60여 칸을 하사받고 출궁, 이때부터 궐 밖 건천동(乾川洞)에서 생활했다.

덕원군은 평소 효심이 지극하여 부왕을 정성껏 모셨으며 부왕이 거동할 때에는 항시 배행(陪行)하였다. 부왕의 온양온천 행차에 배종(陪從)하면서 진위군 종덕면 막금리(振威郡 宗德面 幕錦里, 현 경기도 평택시 고덕면 당현리)에 당도하니, 옛날 나라에서 지표(地標)를 묻어둔 곳(埋標處)인데, 덕원군이 세조의 어가 앞에 나아가 이 땅을 자신에게 내려주실 것을 엎드려 청하니, 세조가 쾌히 승낙하여 그 땅을 덕원군의 사패지 전지로 하사하였다.

후일 덕원군은 수구(水口)에 긴 뚝을 쌓고 안산(案山)에 작원당(作願堂)을 짓고 탑(塔)을 세우며 대로(大路)를 평택쪽으로 옮기니, 이곳이 훗날 덕원군의 묘소가 있는 사패지(賜牌地)이다. 이때부터 매표처동강종덕(埋標處東岡宗德)이라 하고 덕원군의 호 또한 종덕(宗德)에서 유래 하였으며 사시(賜諡)는 소간(昭簡)이다.

1468년(세조 14년) 덕원군의 나이 20세에 세조가 승하하고 이복 동생 예종이 즉위하였다. 예종조에는 국정을 돌보고 문충공 신숙주, 한명회, 유자광 등과 협력하여 남이의 옥사를 평정한 공으로, 수충보사정란익대공신(輸忠保社定難翊戴功臣)에 책훈(策勳)되었다.

성종조에는 종부시도제조(宗簿寺都提調)를 명받아 종실을 바로 살피고, 선원보를 관장하였으며, 선왕의 제향소(祭享所) 일을 맡아보았다. 연산군조에는 바른 말을 진언하여 잘못된 정사를 다소 시정케하였다. 덕원군은 세종대왕이 성리(性理)에 심취한 유지를 받들어 성현의 학문을 전수하고, 역(易), 례(禮)를 밝히니 일대의 유종(儒宗)이라 칭송을 받았다.

1498년(연산군 4년) 7월 22일 한성부 건천동(乾川洞) 자택에서 사망하니 향년 49세였다.

2. 1. 출생과 초기 생애

조선 세조와 근빈 박씨 사이의 아들로 1449년 (세종 31년) 3월 6일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1455년(단종 3년) 세조의 총애를 받으며 자랐다.

1458년 (세조 4년) 8월 10세에 덕원군에 봉해졌고, 1462년 (세조 8년) 14세에 혼인하여 사저(私邸) 60여 칸을 하사받고 출궁, 이때부터 궐 밖 건천동(乾川洞)에서 생활했다.

덕원군은 평소 효심이 지극하여 부왕을 정성껏 모셨으며 부왕이 거동할 때에는 항시 배행(陪行)하였다. 부왕의 온양온천 행차에 배종(陪從)하면서 진위군 종덕면 막금리(振威郡 宗德面 幕錦里, 현 경기도 평택시 고덕면 당현리)에 당도하니, 옛날 나라에서 지표(地標)를 묻어둔 곳(埋標處)인데, 덕원군이 세조의 어가 앞에 나아가 이 땅을 자신에게 내려주실 것을 엎드려 청하니, 세조가 쾌히 승낙하여 그 땅을 덕원군의 사패지 전지로 하사하였다.

후일 덕원군은 수구(水口)에 긴 뚝을 쌓고 안산(案山)에 작원당(作願堂)을 짓고 탑(塔)을 세우며 대로(大路)를 평택쪽으로 옮기니, 이곳이 훗날 공(公)의 묘소가 있는 사패지(賜牌地)이다. 이때부터 매표처동강종덕(埋標處東岡宗德)이라 하고 공(公)의 호 또한 종덕(宗德)에서 유래 하였으며 사시(賜諡)는 소간(昭簡)이다.

2. 2. 세조와의 관계

조선 세조와 근빈 박씨 사이의 아들로 1449년 3월 6일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1455년 세조의 총애를 받으며 자랐다.[1]

1458년 8월, 10세에 덕원군에 봉해졌고 1462년 14세에 혼인하여 60여 칸의 사저(私邸)를 하사받고 궁궐 밖 건천동(乾川洞)에서 살았다.[1]

덕원군은 평소 효심이 지극하여 부왕인 세조를 정성껏 모셨으며, 세조가 움직일 때에는 항상 함께 다녔다. 세조의 온양온천 행차에 따라가던 중 진위군 종덕면 막금리(현 경기도 평택시 고덕면 당현리)에 이르렀는데, 이곳은 옛날 나라에서 지표(地標)를 묻어둔 곳이었다. 덕원군이 세조 앞에 나아가 이 땅을 자신에게 내려줄 것을 청하니, 세조가 흔쾌히 승낙하여 그 땅을 덕원군의 사패지 전지로 하사하였다.[1]

훗날 덕원군은 수구(水口)에 긴 뚝을 쌓고 안산(案山)에 작원당(作願堂)을 짓고 탑을 세웠으며, 큰길을 평택쪽으로 옮겼는데, 이곳이 훗날 덕원군의 묘소가 있는 사패지(賜牌地)가 되었다. 이때부터 매표처동강종덕(埋標處東岡宗德)이라 하였고, 덕원군의 호 또한 종덕(宗德)에서 유래하였으며, 시호(諡號)는 소간(昭簡)이다.[1]

1568년 덕원군의 나이 20세에 세조가 세상을 떠나고 이복 동생 예종이 즉위하였다.[1]

2. 3. 정치 활동

세조와 근빈 박씨 사이의 아들로 1458년(세조 4년) 10세에 덕원군에 봉해졌다. 1462년(세조 8년) 14세에 혼인하여 사저 60여 칸을 하사받고 출궁, 이때부터 궐 밖 건천동에서 생활했다.[1]

덕원군은 평소 효심이 지극하여 부왕을 정성껏 모셨으며 부왕이 거동할 때에는 항시 배행하였다. 부왕의 온양온천 행차에 배종하면서 진위군 종덕면 막금리(현 경기도 평택시 고덕면 당현리)에 당도했는데, 이곳은 옛날 나라에서 지표를 묻어둔 곳이었다. 덕원군이 세조의 어가 앞에 나아가 이 땅을 자신에게 내려주실 것을 엎드려 청하니, 세조가 쾌히 승낙하여 그 땅을 덕원군의 사패지 전지로 하사하였다.[1]

훗날 덕원군은 수구에 긴 뚝을 쌓고 안산에 작원당을 짓고 탑을 세우며 대로를 평택쪽으로 옮겼다. 이곳이 훗날 덕원군의 묘소가 있는 사패지이다. 이때부터 매표처동강종덕이라 하고 덕원군의 호 또한 종덕에서 유래 하였으며 사시는 소간이다.[1]

1468년(세조 14년) 덕원군의 나이 20세에 세조가 승하하고 이복 동생 예종이 즉위하였다.[1]

예종조에는 국정을 돌보고 문충공 신숙주, 한명회, 유자광 등과 협력하여 남이의 옥사를 평정한 공으로, 수충보사정란익대공신에 책훈되었다. 성종조에는 종부시도제조를 명받아 종실을 바로 살피고, 선원보를 관장하였으며, 선왕의 제향소 일을 맡아보았다. 연산조에는 바른 말을 진언하여 잘못된 정사를 다소 시정케하였다. 덕원군은 세종대왕이 성리에 심취한 유지를 받들어 성현의 학문을 전수하고 역(易), 예(禮)를 밝히니 일대의 유종이라 칭송을 받았다.[1]

1498년(연산군 4년) 7월 22일 한성부 건천동 자택에서 사망하니 향년 49세였다.[1]

2. 4. 사망

己巳年|기사년중국어(1449년) 3월 6일 한성부에서 세조와 근빈 박씨 사이의 아들로 태어난 덕원군은, 평소 효심이 지극하여 부왕을 정성껏 모셨으며[1] 부왕이 거동할 때에는 항시 배행(陪行)하였다.[1] 세조의 온양온천 행차에 배종(陪從)하기도 했다.[1]

연산군 4년(1498년) 7월 22일 한성부 건천동(乾川洞) 자택에서 사망하였으며, 향년 49세였다.[1]

2. 5. 사후

묘소는 경기도 평택군 고덕면 당현리(현 평택시 고덕면) 산60-3번지 간좌에 안장되었다. 당시 왕자가 사망하면 나라에서 예장(禮葬)을 내렸는데, 덕원군이 생전에 예장을 받지 말라는 유언을 남겨 예장을 받지 않고 간소하게 장례를 치렀다. 다른 왕자의 묘소보다 초라하여 근세(近世)에 후손들이 비석과 석물, 곡장 등을 설치하였다. 묘소는 현재 후손들이 이장하여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송마리 50-4번지에 안장되었다.

정부인인 임천군부인 경주 김씨도 합장되었다. 계부인인 봉산군부인 함안 윤씨와 안성군부인 청주 양씨는 양주시 광사동 산98번지에 있으며, 덕원군의 생모인 근빈 박씨의 묘는 우강(右岡) 간좌(艮坐)에 상하장(上下葬)으로 모셨다. 넷째 부인 창녕군부인 창녕 성씨의 묘는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직천리 산97-17호 건좌(乾坐)에 안장되었다.

3. 가족 관계

관계이름출생 - 사망비고
아버지세조1417년 ~ 1468년조선 제7대 왕
어머니근빈 박씨1425년 ~ ?
동생창원군1458년 ~ 1484년
정부인임천군부인 경주 김씨1447년 ~ 1481년증좌찬성 김종직[1]의 딸
장남연성군 이적1464년 ~ 1525년
차남덕진군 이활삼촌 창원군의 후사로 출계
장녀여산 송씨현감 송유의 처
계부인봉산군부인 함안 윤씨1450년 ~ ?함안군 윤말손의 딸
6남순정수 이찬1416년 ~ ?
7남덕성수 이염1424년 ~ ?
8남풍창수 이한1421년 ~ ?
2계부인안성군부인 청주 양씨1451년 ~ 1504년참지 증찬성 양일원의 딸
3남영천도정 이감1478년 ~ 1534년
5남동산도정 이심1489년 ~ 1521년
3계부인창녕군부인 창녕 성씨1453년 ~ 1515년수찬 성노풍의 딸[2]
4남숭선군1428년 ~ 1544년
9남기성도정 이란1400년 ~ ?
10남청부군 이번1494년 ~ 1545년
양민 출신
차녀이경지1417년 ~ ?초계 정씨 현감 정숭년에게 출가
4녀이열지1423년 ~ ?칠원 윤씨 윤사형에게 출가
5녀이신지1425년 ~ ?군수 신빈에게 출가
7녀이혜지1428년 ~ ?진주 강씨 전적 강은에게 출가
9녀이탁문1434년 ~ ?죽산 안씨 군수 안수금에게 출가
노비 출신
3녀이영지1419년 ~ ?청풍 김씨 첨지 김담에게 출가
6녀이정지1426년 ~ ?신평 이씨 참봉 이시정에게 출가
8녀이계지1430년 ~ ?안동 권씨 참봉 권수균에게 출가
9녀이수지1432년 ~ ?광주 노씨 현감 노식에게 출가
10녀이순지1434년 ~ ?해주 오씨 봉교 오팽세에게 출가
11녀이옥지1437년 ~ ?죽산 최씨 현감 최충좌에게 출가


4. 기타

덕원군은 전라북도 고창 선운사 중창을 지원했다. 성종 4년 행호선사(幸浩禪師)가 한양에 올라와 사찰 중수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사찰이 중수되면 매년 법회를 열어 왕실과 열성조의 명복을 기원하겠다고 하자, 덕원군은 이를 승낙하고 지원했다.[1]

4. 1. 선운사 중창 지원

덕원군은 전라북도 고창 선운사를 중창하는데 지원했다. 고창 도솔산 선운사(禪雲寺)는 신라 진지왕 원년(576년) 진흥왕이 물러난 뒤에 창건되었으나, 천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사찰이 퇴락하여 폐찰이 되었다. 성종 4년(1473년) 행호선사(幸浩禪師)가 한양에 올라가 이 사찰의 형세와 천년고찰 중수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사찰이 중수되면 매년 법회를 열어 왕실과 열성조(列聖朝)의 명복을 기원하겠다고 덕원군에게 말하자 덕원군은 이를 승낙하고 선운사 중건을 지원한 뒤, 발원문(發願文)과 선왕(先王)의 선가혼기(仙駕魂記)를 썼다.

성종 4년(1473년)에 착공하여 11년 후인 성종 14년(1483년)에 완공되었다. 어실(御室)과 이층 장육전(丈六殿), 관음전(觀音殿), 천불대광명전(千佛大光明殿), 지장전(地藏殿), 동상실(東上室), 금당(金堂), 능인전(能仁殿) 등 전각 건물 백팔(百八) 칸, 요사채 아홉 동을 옛 그대로 복구하여 대가람(大伽藍)이 되었으며, 매년 어실(御室)에서 수륙법회(水陸法會)를 열어 왕실과 열성조의 명복을 기원하였다.

그 뒤 선운사는 정유재란으로 불길에 휩싸여 많은 문화유산과 전각 건물이 소실되고, 1층 어실의 덕원군이 직접 쓴 발원문(發願文)과 선가혼기(仙駕魂記) 등의 기록만이 선운사에 지금까지 보존되어 전해오고 있다.

참조

[1] 문서 선산김씨 김종직과는 동명이인이다.
[2] 웹인용 전주이씨대동종약원 http://www.rfo.co.kr[...] 2018-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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