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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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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명회는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세조의 즉위를 돕고 훈구파의 핵심 인물로 활약했다. 그는 계유정난에 참여하여 공신이 되었으며, 이후 영의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관직을 역임하며 권력을 장악했다. 그는 특히 북방 경략과 국방 강화에 힘썼으며, 오가작통법을 시행하는 등 치적을 남겼다. 그러나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을 좌절시키고, 권력 투쟁에서 승리하며 권세를 누린 행적은 후세에 비판을 받기도 했다. 말년에는 압구정을 짓고 은퇴를 시도했으나,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를 당하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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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회 - [인물]에 관한 문서
한명회

2. 생애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권신, 외척으로, 개국공신 한상질의 손자이며 예종의 비 장순왕후성종의 비 공혜왕후의 아버지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이 2,300여 건 등장할 정도로 당대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다.[6]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으며, 과거에 여러 차례 낙방하다가 1452년 38세의 나이에 문음으로 경덕궁직을 제수받으며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6] 친구 권람을 통해 수양대군을 만나 그의 핵심 참모가 되었고, 1453년 계유정난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수충위사협책정난공신(輸忠衛社協策靖難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는 데 기여하여 동덕좌익공신(同德左翼功臣) 1등이 되었으며, 세조로부터 '나의 장량'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깊은 신임을 얻었다.

1456년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을 사전에 적발하고 관련자들을 숙청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후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며 여진족 토벌과 북방 방어 강화에 공을 세웠으며, 1461년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에 봉해졌다. 1466년1469년 두 차례에 걸쳐 의정부 영의정을 지냈으며, 세조 사후에는 원상으로서 어린 예종을 보좌하고 남이의 옥 등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권력을 더욱 공고히 했다. 예종 사후에는 정희왕후와 협력하여 자신의 사위인 성종을 왕위에 올리는 데 핵심 역할을 수행했다.

성종 대에도 좌의정 등을 역임하며 정계의 원로로서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말년에는 명나라 사신을 사사로이 접대한 일로 탄핵받아 관직을 삭탈당하기도 했다. 1487년 향년 73세로 사망했으며, 사후 세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그러나 1504년 연산군갑자사화가 일어나자 폐비 윤씨 사사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했으나, 1506년 중종반정 이후 신원되어 복권되었다.

그는 오가작통법면리제(面里制)를 창시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으며, 그가 만든 행정 제도인 면리제는 이후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불교 승려이자 독립운동가한용운은 그의 동생 한명진의 후손이다.

2. 1. 출생과 가계

1415년(태종 15년) 음력 10월 25일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조선 태조 때 학사로서 명나라에 파견되어 '조선'이라는 국호를 받아온 개국공신 한상질(韓尙質)이다. 아버지는 사헌부 감찰을 지내고 사후 증 의정부 영의정추증한기(韓起)이며, 어머니는 이조참판 겸 예문관 직제학을 지낸 이적의 딸이자 대제학 이행의 외증손녀인 증 정경부인 여주 이씨이다.

한명회는 어머니 뱃속에 있은 지 7개월 만에 태어난 미숙아였기 때문에 '칠삭동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전설에 따르면, 그가 태어날 때 배에는 북두칠성 모양의 점이 있었다고 한다. 태어날 당시 몸이 매우 약하여 일찍 죽을 것으로 여겨졌으나, 집안의 늙은 여종이 그를 거두어 길렀다. 종조부인 한상덕은 그의 관상을 보고 "이 아이는 보통 아이가 아니니, 반드시 우리 가문을 일으킬 것이다"라고 예언했다고 전해진다.[6]

그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관계이름비고
고조부한공의
증조부한수
조부한상질(韓尙質)1350 ~ 1400. 개국공신. 명나라에서 조선 국호 수령.
조모창화군부인(昌化君夫人) 경주 이씨문하시중 월성부원군(月城府院君) 이성림(李成林)의 딸
조모창화부부인(昌化夫夫人) 청풍 송씨청풍도사(淸風都事) 송신의(宋臣議)의 딸 (한기의 생모)
아버지한기(韓起)1393 ~ 1429. 사헌부 감찰. 사후 영의정 추증.
어머니정경부인 여주 이씨예문관 대제학 이척(李逖, 1370 ~ 1419)의 딸.
동생한명진(韓明溍)서원군(西原君). 불교 승려이자 독립운동가인 만해 한용운의 선조.
제수안동 권씨문경공 권제(權踶)의 딸. 권람의 동생. 슬하 1남 1녀.



예종의 원비 장순왕후성종의 원비 공혜왕후는 모두 그의 딸이다.

2. 2. 유년기와 청년기

그는 고려 때 시중을 지낸 한강(韓康)의 후손으로, 세조의 사돈이었던 한확과는 9촌 숙질간이다. 한확은 한악(韓渥)의 넷째 아들 한방신의 증손이었고, 한명회는 한악의 둘째 아들 한공의의 4대손이었다.[4] 그가 태어난 지 얼마 뒤 동생 한명진이 태어났다.

한명회는 10개월도 채 되지 않아 태어나 병으로 위기를 넘기고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태어났을 때 몸이 온전치 못하고 병약하여 집안에서조차 거두려 하지 않았으나, 한 늙은 여종이 그를 솜털에 싸서 정성껏 보살펴 몇 달 만에 웃고 안아 볼 수 있을 정도로 자라났다. 또한 그가 태어날 때 배 위에 검은색 별 모양 점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5] 이는 훗날 그의 몸에 북두칠성이 새겨져 있었다는 소문의 근원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일찍 아버지와 어머니를 여의고 동생 명진과 함께 고아가 되었다. 한학을 배웠지만, 불우한 가계와 가난, 작은 체구 때문에 주변의 멸시와 놀림을 받으며 힘든 소년기를 보냈다. 그럼에도 한명회는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좋고 민첩하였으며, 그의 종조 할아버지 한상덕은 그를 보고 집안의 천리마가 될 것이라고 예견하기도 했다.

그는 종조 할아버지들인 한상경과 한상덕에게서 양육되었으며, 또 다른 종조 할아버지 한상환(韓尙桓)의 문하에서 공부하다가 나중에는 자망산으로 가서 류태재의 문하생이 되었다. 어린 시절 친구 권람 등을 만나 사귀었고, 강원도 자망산의 유학자 류태재 밑에서 공부하며 사가 서거정 등과도 교류하게 된다.

2. 3. 정치 활동

권람을 통해 수양대군의 측근이 되어 그의 책사로 활동했으며, 1453년 계유정난을 주도하여 정난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이 과정에서 정적들의 명단인 이른바 '살생부'를 작성하여 숙청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6] 정변 성공 후 사복시 소윤(1453년), 승정원 동부승지(1454년) 등으로 빠르게 승진하며 권력의 핵심에 진입했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좌익공신 1등에 책록되고 승정원 우부승지, 좌부승지를 거쳐 우승지에 올랐다.

1456년에는 성삼문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을 사전에 적발하고 진압하는 데 핵심 역할을 수행하여 세조의 왕권을 공고히 했다. 이 공으로 승정원 좌승지를 거쳐 도승지로 승진했다. 1457년에는 이조 판서에 임명되고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졌으며, 1458년에는 병조 판서로 옮겨 여진족 토벌과 북방 수비 강화에 기여했다. 이러한 군사적 공로로 1461년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으로 진봉되었다.

세조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1462년 우의정, 1463년 좌의정을 거쳐 1466년 마침내 영의정에 올랐으나 병으로 잠시 물러났다. 그는 자신의 딸들을 각각 예종의 비(장순왕후)와 성종의 비(공혜왕후)로 들여보내 2대에 걸쳐 국왕의 장인이 되었고[8], 권람[7], 신숙주 등 공신들과 혼인 관계를 맺어[6] 정치적 영향력을 크게 확대했다.

1467년 이시애의 난에 연루되었다는 의심을 받아 잠시 투옥되기도 했으나 곧 풀려났다. 세조 사후 유언에 따라 1468년부터 원상(院相)으로서 어린 예종을 보좌하며 남이의 모반 사건 등을 처리하여 익대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1469년 다시 영의정에 올랐으나 같은 해 예종이 승하하자 정희왕후, 신숙주 등과 협력하여 자신의 사위인 자을산군을 왕위에 추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성종 즉위 후 병조 판서를 겸임하며 국정을 이끌었고, 1471년에는 성종 즉위를 지지한 공으로 좌리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또한 영춘추관사로서 최항, 신숙주와 함께 『세조실록』 편찬을 완료했다. 이후 1474년 좌의정에 재임명되었으나 1476년 사임하였다. 1484년 고령으로 성종에게서 지팡이와 의자를 하사받는 등 예우를 받다가 1487년 향년 73세로 사망했다. 사후 세조의 묘정인 종묘에 배향되었다.

그러나 1504년 연산군갑자사화가 일어나자, 생전에 폐비 윤씨 사사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했다. 그의 무덤이 파헤쳐지고 시신이 훼손되었으나,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된 후 신원되어 복권되었다.

한명회(韓明澮)의 서명

2. 3. 1. 수양대군의 측근이 되다

글을 읽어 학문적 성취는 있었으나 과거에 여러 번 실패하며 불우한 청소년기를 보냈다. 재상 황보인이 한명회를 높이 평가하여 사위로 삼으려 했으나, 한명회는 처가의 권세에 기대는 것을 원치 않는다며 거절했다.[5] 종조부인 참판 한상덕이 부귀영화를 위해 혼인을 권했지만 따르지 않았다.[5] 개성 영통사(靈通寺)의 한 노승은 그의 관상을 보고 장차 귀하게 될 것이라 예언했다고 한다.

두 종조부 사후 중추원사 민대생(閔大生)의 사위가 되었다. 부인 황려부부인 민씨에게서 1남 4녀를 두었는데, 셋째 딸은 예종의 비 장순왕후가 되었고 넷째 딸은 성종의 비 공혜왕후가 되었다.

과거 낙방이 계속되자 주변의 위로나 비웃음에도 "궁하고 통함은 때가 있는 법"이라며 개의치 않았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집안 형편도 어려워 개국공신 후손임에도 청년기 역시 불우했다. 자(字)는 자준(子濬)이다. 비슷한 처지의 친구 권람과 가까이 지내며 함께 책과 술을 싣고 전국을 유람하기도 했다.

권람의 소개로 신숙주를 알게 되었고, 이어 수양대군을 소개받았다.

친구 범옹 신숙주


한명회는 수양대군이 비범한 인물임을 알아보고 가깝게 지내며 그의 사람됨을 살폈다.

오랫동안 과거에 응시하지 않다가 뒤늦게 여러 번 도전했지만 계속 낙방하고 집안 사정도 어려워졌다. 1452년(문종 2년) 음서로 처음 관직에 나아가 송도(松都, 개성)의 경덕궁직(敬德宮直)이 되었다. 이때부터 수양대군과 자주 교류하며 그의 책사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경덕궁직으로 근무하며 무사 홍달손, 홍윤성, 양정 등과 사귀었다. 한명회는 이들 30여 명을 수양대군에게 적극적으로 추천했고, 이 인맥은 훗날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권람을 통해 수양대군의 눈에 들어 그의 총애를 받게 되면서, 한명회는 수양대군의 권력 장악 계획에 핵심적인 역할을 맡게 되었다.

2. 3. 2. 계유정난과 세조 즉위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가세가 빈한하여 개국공신의 후예임에도 불우한 청년기를 보냈다. 자는 자준(子濬)이라 하였으며, 비슷한 처지의 친구 권람 등과 어울려 지냈다. 글공부를 하였으나 여러 차례 과거 시험에 낙방하자, 1452년(문종 2년) 음보(蔭補)를 통해 관직에 나아가 개성의 경덕궁직(敬德宮直)이 되었다.

경덕궁직으로 근무하며 홍달손, 홍윤성, 양정 등 무사들과 교류하였고, 이들을 훗날 수양대군에게 천거하여 계유정난의 기반을 마련했다. 교리(校理)였던 친구 권람의 소개로 신숙주를 알게 되었고, 이어 수양대군을 소개받았다. 한명회는 수양대군이 비범한 인물임을 알아보고 가까이 지내며 그의 책사 역할을 자처하게 된다.[6]

문종이 승하하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여 김종서, 황보인 등 대신들이 실권을 잡자, 한명회는 권람을 통해 수양대군에게 접근하여 집권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당시 안평대군이 왕위를 넘보고 있으며, 이로 인해 나라에 혼란이 닥칠 것을 우려하며 강력한 군주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한명회는 수양대군이야말로 한 고조나 당 태종에 비견될 만한 영웅적 자질을 갖추었으며, 혼란을 수습하고 나라를 안정시킬 적임자라고 설득했다. 권람은 한명회를 관중(管仲), 악의(樂毅), 사마중달, 제갈공명과 같은 인물에 비유하며 수양대군에게 강력히 추천했다.

수양대군은 한명회를 만나 그의 비책을 듣고 처음에는 주저했으나, 결국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집권을 결심하고 거사를 준비하게 된다. 한명회는 수양대군의 핵심 참모로서 정변 계획을 구체화하고 인물과 재물을 동원하는 역할을 맡았다.

1453년(단종 1년) 군기감녹사(軍器監錄事)로 자리를 옮긴 한명회는 그해 10월, 수양대군과 함께 계유정난을 일으켰다. 거사 직전, 김종서와 황보인 제거 계획에 군사들이 동요하자 칼을 빼 들고 "사직(社稷)을 위해 죽는 것이 병들어 죽는 것보다 낫다! 감히 딴 마음을 품는 자는 베겠다!"고 외치며 군사들을 독려했다. 그날 밤, 한명회가 동원한 사병들과 홍윤성, 홍달손 등이 이끄는 군사들이 한성부를 장악하고 김종서와 황보인의 집을 습격하여 그 일파를 제거했다. 이 과정에서 한명회는 제거 대상의 명단인 이른바 '살생부'를 작성하여 숙청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6] 안평대군 역시 사사되었다.

세조 어진 초본


정변 성공 후, 한명회는 수충위사협책정난공신(輸忠衛社協策靖難功臣) 1등관에 책록되었다. 이후 군기시판관(軍器寺判官), 의금부도사를 거쳐 수양대군이 영의정부사가 되자 사복시소윤(司僕寺少尹)으로 발탁되었고, 1454년(단종 2년)에는 승정원동부승지(同副承旨)로 승진하며 권력의 핵심부로 진입했다.

1455년(단종 3년) 경연 참찬관(經筵參贊官) 겸 판사재감사(兼判司宰監事) 지예조사(知禮曹事)를 거쳐, 그해 6월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되었다. 같은 해 윤6월,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넘겨받아 즉위하자, 한명회는 승정원좌부승지(左副承旨)에 임명되고 동덕좌익공신(同德左翼功臣) 1등에 책록되었으며, 곧이어 그해 가을 승정원우승지에 올랐다.

2. 3. 3. 사육신의 의거 진압

1456년(세조 2) 2월, 성삼문을 비롯한 집현전 학사들이 세조와 그의 아들들을 연회장에서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운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6] 한명회는 세종대왕이 집현전 학사들에게 단종을 잘 보필하라는 유지를 남겼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이들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단종 복위 운동을 좌절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연회장에 별운검으로 임명된 성승, 김문기, 하위지 등을 의심하여 이들의 출입을 미리 막으려 했다.

사육신의 사당인 노량진 공원 의절사


1456년 5월에는 명나라 황제가 보낸 태감 윤봉을 통해 관복(冠服)을 하사받기도 했으나, 사육신에 대한 감시를 늦추지 않았다.

6월 1일, 명나라 사신이 한성부에 도착하자 예정대로 연회가 열렸고, 사육신 측은 운검(雲劒)을 동원하여 거사를 실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한명회는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광연루가 사신이 많아 자리가 좁다는 명분을 내세워, 세자는 연회에 참석하지 않도록 하고 홍달손홍윤성에게 병력을 동원하게 하여 운검들의 입시(入侍)를 막아야 한다고 세조에게 강력히 주청하였다. 세조는 이를 이상하게 여겼지만 결국 허락하였다.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이 운검을 차고 연회장에 들어오려 하자, 한명회는 운검은 들어올 필요가 없다며 제지했다. 거사 계획이 어그러질 것을 우려한 운검의 병력들이 한명회를 해치려 했으나, 그는 민첩하게 피했다.

1456년 초부터 한명회는 정창손에게 그의 사위 김질을 설득하도록 종용했다. 결국 6월 2일, 사육신과 함께 세조 암살 계획에 가담했던 김질이 장인 정창손의 설득으로 계획의 전모와 가담자 명단을 밀고했다. 이 밀고로 성삼문, 하위지, 김문기사육신의 핵심 인물들이 즉시 체포되었다. 한명회는 이들을 직접 국문한 뒤 처형했으며, 관련자 800여 명을 처형하고 수천 명을 유배 보내는 대규모 숙청을 단행했다. 사육신의 의거를 진압한 공으로 한명회는 승정원 좌승지를 거쳐 그해 겨울 도승지로 승진했고, 곧이어 이조판서가 되었다.

한편, 한명회의 서매제(사위의 형제)인 정보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았으나, 국문장에 끌려가 사육신은 의로운 사람들이라며 그들의 무죄를 주장했다. 그는 한명회를 찾아가 같은 주장을 펼쳤으나 거절당하자, 한명회를 향해 "천추의 악인"이라고 규탄했다. 이에 한명회는 1456년 12월, 정보(鄭保)를 난언죄(亂言罪)로 고발하여 죽음으로 몰아넣으려 했다.[22] 세조는 직접 정보(鄭保)를 신문했고, 정보(鄭保)는 "일찍이 성삼문, 박팽년 등을 정인군자(正人君子)라고 생각했기에 실제로 그런 말을 하였다"고 당당히 답했다. 세조는 처음에는 그에게 사지를 찢는 환열(轘裂) 형을 명했으나, 정보(鄭保)가 고려 충신 정몽주의 손자임을 감안하여 형을 감하여 연일(延日)로 유배보냈다.[22]

2. 3. 4. 군사 활동과 국방 강화

세조 집권 초반부터 한명회는 변방의 성곽 수축과 병력 양성을 건의하였다. 또한 해안가에도 성곽을 쌓고 병력을 보내 방비를 튼튼히 해야 하며, 가까운 미래에 있을 왜구와 여진족의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458년(세조 4년) 병조판서에 임명된 후, 평안도함경도에 병력을 이끌고 출정하여 변방에 출몰하는 여진족과 야인 부락을 토벌하였다. 북쪽 변방 지역을 수습한 뒤에는 축성하여 방어를 확실히 하고 돌아왔다. 이후 황해·평안·함길·강원도 도체찰사 등을 역임했다.

1459년(세조 5년)에는 황해도, 평안도, 함길도, 강원도 4도의 병권과 관할권을 가진 4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임명되었다. 이를 통해 당시 역할이 강화된 승정원육조, 변방 등에서 왕명 출납권과 인사권, 병권 및 감찰권 등을 한 손에 쥐게 되었다.[6] 그러나 1460년 그의 병권 장악을 경계한 세조는 평안도와 함길도, 강원도의 도체찰사 직을 신숙주에게 넘겼다.

한명회는 활쏘기에도 능했으며 문예보다는 병법과 병권 장악에 재능을 보였다. 오지였던 북방으로 파견을 나가는 일에도 망설임이 없었고, 북방의 야인들을 토벌한 뒤에는 경계를 견고하게 하는 데 남다른 공적을 쌓았다. 이 일로 세조의 신임을 더욱 얻어 1461년 특명으로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에 진봉되었다. 이후 판병조사(判兵曹事)와 병조판서 등을 겸임했으며, 1462년 의정부우의정이 되어서도 황해, 평안, 함길, 강원 4도 체찰사를 겸하였다. 1463년에는 의정부 좌의정에 올랐다.

2. 3. 5. 정치 활동과 권력 강화

권람을 통해 수양대군(훗날 세조)의 눈에 들어 그의 핵심 측근이 되었고, 왕위 찬탈 계획에 깊숙이 가담하였다. 1453년 계유정난 당시에는 자신이 포섭한 홍달손 등의 무사를 동원해 김종서를 제거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으며, 정적들의 생사를 가른 이른바 '살생부'를 작성하여 숙청을 주도했다.[6] 이러한 공으로 한명회는 정난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계유정난 성공 이후, 한명회는 빠르게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군기시 판관, 의금부 도사를 거쳐 수양대군이 영의정부사가 되자 사복시 소윤으로 발탁되었고, 1454년에는 승정원 동부승지로 승진했다. 1455년에는 경연 참찬관, 판사재감사, 지예조사 등을 거쳐 우부승지가 되었다.

1455년 6월,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넘겨받아 즉위하자, 한명회는 승정원 좌부승지에 임명되고 동덕좌익공신 1등에 책록되었으며, 같은 해 가을에는 승정원 우승지로 승진했다. 이후 성삼문사육신이 추진한 단종 복위 운동을 사전에 파악하고 이를 저지했으며, 관련자들의 처형에 관여하여 세조의 왕권을 공고히 하는 데 기여했다.

한명회는 세조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승진을 거듭하여 요직을 두루 거쳤다. 1457년 이조 판서에 임명되고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졌으며, 1458년에는 병조 판서로 자리를 옮겼다. 1462년에는 우의정, 1463년에는 좌의정에 올랐고, 마침내 1466년에는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물러났다.

권력 기반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한명회는 혼인을 통한 정략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6] 그는 자신의 딸들을 각각 예종의 비(장순왕후)와 성종의 비(공혜왕후)로 들여보내 2대에 걸쳐 국왕의 장인이 되었다.[8] 또한, 권람[7], 신숙주 등 계유정난의 핵심 공신들과도 인척 관계를 맺었으며, 자신의 손자 한경침을 성종의 후궁 소생 서녀인 공신옹주와 혼인시켜 왕실과 3대에 걸친 겹사돈 관계를 형성했다. 이러한 혼인 관계는 그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지만, 한편으로는 친인척 중심의 인사 등용이라는 폐단을 낳아 조선의 정치 기강을 흐트러뜨리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1467년 이시애의 난 당시에는 반란군과 내통했다는 의심을 받아 잠시 투옥되기도 했으나 곧 풀려났다. 세조가 승하한 뒤에는 그의 유언에 따라 원상(院相)으로서 어린 예종의 국정을 보좌했으며, 남이의 모반 사건 등을 처리하며 정적을 제거하고 권력을 유지했다. 1469년 다시 영의정에 복귀했으나 같은 해 예종이 갑작스럽게 승하했다. 한명회는 정희왕후신숙주, 정창손 등과 협력하여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이자 자신의 사위인 자을산군을 왕위에 올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성종 즉위 후에는 병조 판서를 겸임하며 국정 운영에 깊이 관여했다.

1471년에는 영춘추관사로서 최항, 신숙주와 함께 『세조실록』 편찬을 완료하는 등 문치에도 관여했다. 이후에도 좌의정 등을 역임하며 정계의 원로로서 영향력을 행사하다 1487년 향년 73세로 사망했다. 사후 종묘에 세조의 배향공신으로 모셔졌다.

그러나 1504년 연산군 대에 이르러 갑자사화가 발생하자, 생전에 폐비 윤씨의 사사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부관참시(剖棺斬屍), 즉 무덤이 파헤쳐지고 시신이 능욕당하는 형벌을 받았다. 하지만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곧바로 신원되어 그의 지위와 명예는 회복되었다.

연도직책 및 사건비고
1453년계유정난 참여, 정난공신 1등 책록, 사복시 소윤 임명
1454년승정원 동부승지 임명
1455년우부승지, 좌부승지 임명, 좌익공신 1등 책록, 우승지 임명세조 즉위
1456년좌승지, 도승지 임명사육신 사건 관련
1457년이조 판서 임명, 상당군(上黨君) 봉작
1458년병조 판서 임명
1461년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진봉
1462년우의정 임명
1463년좌의정 임명
1466년영의정 임명
1467년영의정 사임, 이시애의 난 연루 의혹으로 투옥
1468년익대공신 1등 책록, 원상(院相)으로서 예종 보좌 시작세조 사망, 예종 즉위
1469년영의정 재임명 후 사임, 병조 판서 겸임예종 사망, 성종 즉위
1471년사리공신 1등 책록, 영춘추관사로서 『세조실록』 편찬 완료
1474년좌의정 재임명
1476년좌의정 사임
1487년사망 (향년 73세)
1504년갑자사화로 부관참시폐비 윤씨 사사 관련
1506년중종반정 후 신원 회복


2. 3. 6. 남이의 옥사

1468년 초, 혜성이 나타나자 한명회는 이를 천변(天變)의 징조로 보고 변고가 일어날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는 천변이 두렵다며 창덕궁의 성벽이 없고 방비가 허술하다는 점을 들어, 중신(重臣)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궁궐에 들어와 호위해야 한다고 예종에게 건의하였다.

같은 해, 남이 장군이 지은 시 구절이 문제가 되어 모반 사건으로 비화되었다. 유자광이 남이가 역모를 꾀한다고 고변하자, 한명회는 신숙주, 유자광 등과 함께 남이와 강순 등의 사형을 강력히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이는 세조 사후 원상(院相)으로서 어린 예종을 보좌하며 정국을 주도하던 한명회가 정치적 반대 세력을 제거한 사건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남이, 강순 등이 처형된 후, 한명회는 유자광, 신숙주 등과 함께 옥사를 다스린 공로를 인정받아 추충보사병기정난(推忠保社炳幾難) 익대공신(翊戴功臣) 1등 공신에 책록되었다(1468년 10월 20일). 이듬해인 1469년에는 다시 의정부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였다.

2. 3. 7. 성종의 추대와 원상

1469년 예종이 갑자기 사망하자, 한명회는 세조의 왕비였던 정희왕후 윤씨와 협력하여 예종의 조카이자 자신의 넷째 사위인 성종을 왕위에 추대하였다. 이는 당시 왕위 계승 서열상 유력했던 월산대군이나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 대신 이루어진 결정이었다.

성종이 즉위하자 한명회는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겸임하며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고, 성종 즉위를 지지한 공로로 1471년 3월 27일 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洪弘佐理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또한 1469년 춘추관 영사로서 최항, 신숙주 등과 함께 《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는 평소 자신이 은퇴하여 갈매기를 벗 삼아 지내겠다며 한성부 중심부에 압구정이라는 정자를 지었으나, 실제로는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지 못했다. 1471년에는 춘추관 영사(春秋館嶺事)가 되었고, 같은 해 대궐 동서쪽에 군영을 설치할 것을 건의하여 이를 성사시키고 자신이 직접 서영대장(西營大將)이 되어 군사를 지휘하기도 했다.

1472년에는 영춘추관사로서 최항, 신숙주 등과 함께 《세조실록》 편찬을 완료하였다. 또한 성종에게 학문을 장려하고 성균관의 서적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경서와 역사서 등 많은 책을 구해 기증하고 비치하도록 건의했으며, 명륜당 북쪽에 새로운 서고를 마련하는 일을 직접 감독하였다.

그러나 1474년 그의 딸이자 성종의 왕비였던 공혜왕후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권세도 점차 약화되기 시작했다. 같은 해 좌의정에 다시 임명되었으나 이는 영의정을 지낸 인물이 하위 직책에 임명된 이례적인 경우였으며, 1476년 좌의정에서 물러났다. 1484년에는 고령을 이유로 성종에게서 특별히 지팡이와 의자를 하사받았다.

한명회는 1487년 향년 73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세조의 묘정(종묘)에 배향되었다. 하지만 사후 1504년 연산군 대에 갑자사화가 일어나면서 폐비 윤씨 사사 사건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그의 무덤이 파헤쳐지고 시신이 훼손되었으나,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된 후 곧바로 신원되어 복권되었다.

2. 4. 생애 후반

세조 집권 초반부터 변방의 성곽 수축과 병력 양성을 건의하였고, 해안 방비 강화를 주장하며 왜구와 여진족의 침입에 대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1456년부터 노산군과 금성대군을 처형할 것을 주장했으나 세조는 처음에는 듣지 않았다. 1457년 초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진하고 이조판서 겸 판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겸하며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졌다. 같은 해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의 모의를 적발하여 처형시켰다. 그해 겨울, 해양대군의 왕세자 책봉을 명나라에 주청(奏請)하기 위한 주청사로 연경에 다녀왔다.

1458년 봄 귀국하여 병조판서가 되었다. 그해 여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3도에 흉년이 들자 3도 순찰사(巡察使)로 임명되어 구호 활동을 벌였다. 병조판서 재직 중에는 평안도함경도에 출정하여 여진족 부락을 토벌하고 북방 방비를 강화했다. 이후 황해·평안·함길·강원도 도체찰사 등을 역임하며 군사적 역량을 발휘했다. 1458년 숭록대부(崇祿大夫)를 거쳐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로 승진했다.

1459년에는 황해, 평안, 함길, 강원 4도의 병권을 관할하는 4도 도체찰사(都體察使)에 임명되어 승정원, 육조, 변방 등에서 왕명 출납권, 인사권, 병권, 감찰권 등을 장악했으나,[6] 1460년 그의 병권 장악을 경계한 세조에 의해 일부 도체찰사 직은 신숙주에게 넘어갔다. 한명회는 활쏘기에도 능했으며, 문예보다는 병법과 군사 지휘에 재능을 보였다. 북방 파견과 야인 토벌, 경계 강화 등에서 공을 세워 세조의 신임을 더욱 얻었고, 1461년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에 진봉되었다. 이후 판병조사(判兵曹事)와 병조판서, 판의금부사를 겸임하다가 1462년 여름 대광 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우의정에 올랐고, 4도 체찰사를 겸하였다. 1463년에는 의정부좌의정이 되었다.

1464년 평안북도 변방의 방비 강화를 위해 의주 하류에 인산진(麟山鎭)을 신설하고, 희천과 영흥 사이에 영원군(寧遠郡)을 설치할 것을 건의하여 관철시켰으며, 직접 공사를 감독했다. 1466년에는 영의정에 올라 영예문관 홍문관 춘추관 관상감사(領藝文館弘文館春秋館觀象監事)와 세자사(世子師)를 겸임했으나, 병으로 잠시 사직했다. 이후 신숙주, 정인지 등과 함께 《신제대전 (新制大典)》 편찬에 참여하여 1467년 초 초안을 완성시켰다.

1467년 함경북도에서 이시애가 일으킨 반란 중, 이시애가 한명회와 신숙주가 반란을 모의했다고 모함하여 투옥되었다. 이시애는 그들이 함길도 절제사 강효문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고 주장했다.[8] 세조는 이시애의 보고를 믿고 이들을 의금부에 가두었으나,[8] 뚜렷한 혐의가 없었고 이시애의 장계가 거짓임이 밝혀지면서 석방되었다. 당시 한명회가 옥에 갇혔다는 소식에 나라 사람들이 통쾌하게 여겼다는 기록도 있다.[9]

1468년(예종 즉위년)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하자, 세조의 유언에 따라 신숙주, 홍윤성, 정인지 등과 함께 공동 원상(院相)의 한사람으로 예종 즉위 초, 승정원에서 서정(庶政)을 맡아보았다. 이때 그는 승정원에서 숙직하면서 업무를 처결하였다. 그는 수양대군의 측근이 된 이후 계속 책사이자 최측근으로 활동했고, 수양의 왕위찬탈 이후 성종조까지 고관요직을 역임, 군국대사에 많이 참여하였는데, 수양은 특히 그를 총애하여 "나의 장량(張良)" 이라고까지 하였다. 또한 가난한 환경에서 어렵게 성장했지만 스스로 정난공신, 좌익공신, 익대공신, 좌리공신 등 4차례나 공신으로 책록되어 가세를 일으키고, 많은 토지노비를 상으로 받아 말년에는 권력과 함께 호부(豪富)를 누렸다.

1481년(성종 11년)에 새 왕비가 된 정현왕후의 책봉 고명과 궁각(弓角)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책봉 주청사(奏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황제로부터 충성정직(忠成正直)으로 표창받고 돌아왔다. 1484년(성종 15년) 봄, 나이 70으로 벼슬에서 물러나려 했으나 성종은 "나라의 으뜸 공로자이며 덕 있는 노인이고 사직의 기둥과 같은 존재"라며 만류하였다.

2. 4. 1. 좌의정 재임명과 해임

1474년(성종 5년) 5월 15일, 이미 영의정을 지냈음에도 이례적으로 다시 의정부 좌의정에 임명되었다. 1475년 초에는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의 수도 연경(燕京, 현재의 베이징)에 다녀왔다.

같은 해 조정에서는 평안남도 병마절도사를 폐지하자는 논의가 일었다. 성종이 회의를 소집했을 때 대부분의 신하들이 폐지에 찬성했으나, 한명회는 이를 듣고 급히 돌아와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는 평안남도 병영이 평안북도를 지원하기 위해 설치된 것이며, 만약 이시애의 난 당시에 남도 병영이 제대로 기능했다면 난을 쉽게 진압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세조가 남도 병영을 신설한 깊은 뜻이 있을 것이라며 폐지 논의는 옳지 않다고 강조했다. 그의 강력한 반대로 평안남도 병영 폐지 논의는 결국 무산되었다.

1476년(성종 7년), 자신에 대한 탄핵이 계속되고 병을 이유로 여러 차례 사직을 청했다. 성종은 처음에는 만류했으나, 계속되는 요청에 결국 그해 3월 29일 사직을 수락하여 한명회는 좌의정 자리에서 물러났다. 좌의정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이자 국가 원로로서 조정 회의에 참여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했으나, 유자광을 비롯한 대간들의 비판과 공격은 계속되었다.

2. 4. 2. 은퇴와 죽음

1480년(성종 10년) 가을, 한명회는 부원군직을 사임하려 했으나 성종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어찰(御札)을 보내 만류하였다. 성종은 "국가의 공적이 여러 세대에 이르고 재주와 식견은 한 세대를 앞서 갈 만큼 밝으며 충성으로 임금을 섬기고, 나라 근심으로 염려하여 논의하면 반드시 적중하였다. 원로가 조정에 있음은 나라의 영광이며, 믿는 신하가 힘을 다함은 임금에게 힘과 의지가 되는도다. 아무리 오래도록 병에 시달리더라도 많은 약을 내리니 힘써 치료하여 내 뜻에 부응하라. 그러면 경도 노년에 편안함이 있고 나도 옛 것을 버리고 허물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라며 그의 사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483년에는 경상도에 저수지를 만들어 가뭄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은퇴를 염두에 둔 한명회는 서울 한강 남쪽에 압구정이라는 정자를 지었다. 그는 정자 이름을 '물새들이 희롱하는 정자'라는 뜻으로 지었는데,[9] 이는 오늘날 압구정동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 한명회는 자신이 권력보다는 자연을 좋아하는 인물임을 드러내고 싶어 했으며,[9] 스스로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 젊어서는 종묘와 사직을 위하여 몸을 바치고 (靑春扶社稷)

> 늙어서 머리가 하얗게 되면 강가에 누워 세상을 관조한다 (白首臥江湖)

조정의 많은 문사들이 그의 정자를 찾아와 예찬하는 시를 수백 편 지었으나, 이는 권력에 아부하는 이들이었고 일반 백성들은 그의 행태를 비웃었다.[9] 포의 선비 이윤종(李尹宗)은 다음과 같은 시로 풍자하기도 했다.

> 정자를 지어놓고 돌아가지 않았으니 (有亭不歸去)

> 이 인간 참으로 갓 씌운 원숭이일세 (人間眞沐侯)[9]

자연을 벗 삼겠다 했지만, 실제로는 화려한 정자와 별장을 짓고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모습으로 비춰져 시중의 학자들에게 조롱받았다.

1484년(성종 14년)에는 70세가 되어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그해 자신의 정자인 압구정명나라일본 사신들을 초청하여 구경시키려 할 때, 궁중에서만 사용하는 용봉차일(龍鳳遮日)을 쳐서 화려하게 꾸미려 하였다. 그러나 성종이 이를 허락하지 않자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고, 이 일로 대간사헌부로부터 무례하다는 탄핵을 받아 외지로 유배될 뻔했으나 가는 도중 사면되어 풀려났다.

1485년(성종 15년)에는 병을 이유로 치사(致仕,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남)를 청했으나 성종은 윤허하지 않고 오히려 지팡이와 의자를 하사했다. 그러나 같은 해, 압구정명나라 사신들을 사사로이 불러 접대한 일이 다시 문제가 되어 탄핵받고 모든 관직에서 삭탈되었다.

야사에서는 이 탄핵이 유자광의 사주를 받은 언관들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전하며, 삭탈관직되자 분을 이기지 못한 한명회가 도끼로 자신의 정강이나 집 대들보를 내리찍었다고도 한다.

그는 왕실과 이중 인척 관계를 맺어 권세를 누렸으나, 예종의 비가 된 셋째 딸 장순왕후성종의 비가 된 넷째 딸 공혜왕후는 모두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다.

1487년(성종 17년) 한명회가 병석에 눕자 성종은 특별히 내의를 보내 치료하게 하고 매일 문병하게 하였다. 병세가 위독해지자 승지를 보내 유언을 물었고, 그는 임종 직전 "처음에는 부지런하고 나중에는 게으른 것이 사람의 상정이니 원컨대 나중을 삼가기를 처음처럼 하소서"라는 말을 남겼다. 그해 음력 11월 14일, 향년 73세로 사망하였다. 사후 종묘의 세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1504년 연산군갑자사화가 일어나자,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의 사사에 관여했다는 죄목으로 부관참시(剖棺斬屍, 무덤을 파헤쳐 시신의 목을 벰)를 당했다. 그러나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고 중종이 즉위하자 곧바로 신원이 회복되었다.

2. 4. 3. 추탈과 복관

1487년 향년 73세로 사망하였다. 그는 관향인 충청북도 청주에 안장되기를 희망하였고, 사후 처음에는 청원군 장명리(長命里)에 안장되었으나 곧 충청남도 천안시 수신면 속창리로 이장되었다. 1488년(성종 19년) 이곳에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졌다.[10] 사후 세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그러나 연산군 대인 1504년(연산군 10년)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면서 시련을 겪게 된다. 폐비 윤씨의 폐위 및 사사(賜死)에 관여했거나 이를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11] 정창손 등과 함께 연산군에 의해 12명의 간신 중 한 사람으로 지목되었다. 이로 인해 관작을 모두 추탈당하고, 무덤이 파헤쳐져 시신이 꺼내지는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했다. 그의 시신은 토막 난 뒤 목이 잘려 한양 네거리에 내걸리는 참혹한 일을 겪었다.[11] 부관참시를 집행하던 날, 갑자기 날씨가 흐려지고 비가 내리자 병사들이 집행을 주저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1506년(연산군 12년) 중종 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고 중종이 즉위하자 상황은 다시 바뀌었다. 한명회는 곧바로 신원(伸寃)되어 모든 관작이 회복(복관)되었다. 1507년(중종 1년) 10월에는 조정에서 예관(禮官)을 보내 그의 묘를 다시 정비하고 장사를 지내주었으며, 세조의 묘정에도 다시 배향되었다. 이후 충청남도 천안시의 충성사(忠誠祠) 등에 제향되었다.

중종의 왕명으로 매설된 분청사기 지석 (분청사기에 행장을 새긴 지석).

3. 사상과 치적

수양대군의 핵심 책사로서 계유정난을 성공시키고 세조를 왕위에 올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 공로로 수충위사협책정난공신(輸忠衛社協策靖難功臣) 1등과 동덕좌익공신(同德左翼功臣) 1등에 책록되었으며, 세조로부터 "나의 장량"이라 불릴 정도로 깊은 신임을 얻었다. 1456년에는 사육신 등이 주도한 단종 복위 운동을 사전에 파악하고 이를 진압하는 데 관여했으며, 관련자 처벌에도 적극적이었다.[6]

두 차례(1466년~1467년, 1469년) 의정부영의정을 지냈고, 1457년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진 뒤 1461년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으로 진봉되었다. 예종의 비 장순왕후성종의 비 공혜왕후를 배출한 외척으로서 만년에는 막강한 권력을 누렸으나, 명나라 사신을 사적인 연회에 초대한 일로 비판받아 관직이 삭탈되기도 했다. 사후에는 세조의 묘정에 배향되어 종묘배향공신이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그의 이름이 2,300여 건이나 기록되어 있어 당대 정치에 미친 그의 큰 영향력을 짐작하게 한다.

3. 1. 오가작통법과 면리제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지방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주민 자치 조직 형태를 빌린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창시하였다. 이 오가작통법은 (面)과 (里)라는 행정 구역 편제의 기반이 되었으며, 이는 후대의 면리제로 이어졌다.

1485년(성종 16년) 한명회의 제안으로 채택되어 《경국대전》에도 실렸다.[19] 《경국대전》에 따르면, 한성부에서는 방(坊) 아래에 다섯 을 묶어 1통(統)으로 삼고 통주(統主)를 두었으며, 방에는 관령(管領)을 배치했다.[19] 지방에서는 다섯 집을 1통으로, 5개의 통을 묶어 1리(里)로 삼았으며, 여러 리를 모아 면(面)을 구성하고 면에는 권농관(勸農官)을 두었다. 이 제도는 호구 파악, 범죄자 색출, 세금 징수, 부역 동원 등 통치 효율성을 높이고, 이웃 간 상호 감시를 통한 자치를 명분으로 시행되었다.[19]

면의 책임자인 권농관은 명예직이었으며, 면리제군현제에 비해 실제 행정 장악력은 다소 떨어졌으나, 조선의 다른 지방 제도와 달리 20세기까지 그 형태가 유지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3. 2. 북방 경략과 방어

세조 집권 초반부터 한명회는 변방의 성곽 수축과 병력 양성을 건의하며 국방 강화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특히 해안가에도 성곽을 쌓고 병력을 보내 방비를 튼튼히 하여, 가까운 미래에 있을 왜구와 여진족의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정치적으로는 1456년부터 노산군과 금성대군의 처형을 주장했으나 세조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457년(세조 2년) 초,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진하며 이조판서, 판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겸임하고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졌다. 같은 해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의 모의 사건을 적발하여 관련자들을 처형하는 데 관여했다.

1458년 봄, 명나라에서 해양대군의 왕세자 책봉을 성사시키고 귀국한 뒤 병조판서가 되었다. 그해 여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3도에 흉년이 들자 3도 순찰사(巡察使)로 특별히 임명되어 구호물자를 가지고 해당 지역을 순시하며 백성들을 구휼했다.

병조판서 재직 중에는 직접 병력을 이끌고 평안도함경도로 출정하여 변방에 출몰하는 여진족 부락을 토벌하고 북방 지역을 안정시켰다. 이후 북쪽에 성을 쌓아 방어를 강화하고 돌아왔다. 이 공로로 황해·평안·함길·강원도 도체찰사 등을 역임했으며, 1458년(세조 3년) 숭록대부(崇祿大夫)를 거쳐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로 승진했다.

1459년에는 황해, 평안, 함길, 강원 4도의 군사 지휘권과 행정 관할권을 가진 4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임명되었다. 이를 통해 그는 당시 역할이 강화된 승정원육조, 변방 등에서 왕명 출납권, 인사권, 병권 및 감찰권 등을 장악하며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다.[6] 그러나 1460년, 그의 병권 장악을 경계한 세조는 평안도와 함길도, 강원도의 도체찰사 직을 신숙주에게 넘기도록 조치했다.

한명회는 문예보다는 활쏘기와 병법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오지로 여겨지던 북방으로의 파견을 망설이지 않았다. 북방의 야인들을 토벌한 뒤에는 국경 경계를 견고히 하는 데 큰 공을 세웠고, 이는 세조의 깊은 신임을 얻는 계기가 되었다. 1461년에는 이 공로를 인정받아 특명으로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에 진봉되었다. 이후 보국숭록대부 상당부원군으로서 판병조사(判兵曹事), 병조판서, 판의금부사를 겸임하다가 1462년(세조 7년) 여름 대광 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우의정이 되었고, 동시에 황해, 평안, 함길, 강원 4도 체찰사를 다시 겸하게 되었다. 1463년에는 의정부 좌의정의 자리에 올랐다.

성종 대에도 북방 문제에 대한 그의 영향력은 계속되었다. 1479년(성종 10년) 늦가을, 명나라가 건주위(建州衛) 여진족 토벌을 위해 조선에 후원을 요청하자 어유소(魚有沼)를 보내 참전하게 했다. 그러나 강이 얼지 않고 폭설로 길이 험해 지원군은 퇴각했다. 그럼에도 한명회는 명나라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다시 파병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조선에서는 고대부터 지성으로 중국에 사대(事大)하였고 중국에서도 더없이 대우하고 있는데, 지금 달려가서 도와주지 아니하면 비단 우리가 울타리로서 야인들의 노략질을 막아주는 뜻을 잃을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뒷말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다시 중장(重將)을 보내서 다시 참전을 강행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성종이 다시 군신회의를 소집하자 재상들은 모두 추위와 어려움을 이유로 파병이 불가하다고 하였으나 한명회는 그래도 파병해야 한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의논하는 자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안녕만 도모하기 때문이고, 노신(老臣)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국가의 대체(大體)입니다. 군왕의 적개(敵愾)에도 의당 급히 서둘러야지 늦출 수는 없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유념하소서.'라며 굽히지 않았다. 결국 논의가 계속되다가 그의 듯이 관철되어 성종의정부좌의정 윤필상(尹弼商)에게 가서 정벌하라고 명하여 다시 군사를 파병, 크게 이기고 돌아왔다. 성종은 '경의 강한 계책 덕에 거병하여 성공하니, 내가 매우 가상히 여긴다,'며 그를 칭찬하였다.

또한 그는 두만강압록강에 장성을 쌓을 것을 건의하였다. '조종조(祖宗朝)에 압록강 연안에 위아래로 장성(長城)을 쌓으려고 하다가 일이 커서 이루지 못하였는데, 신의 생각에는 다시 그 일을 거행해야 한다고 여깁니다.'하니, 성종의정부좌의정 홍응(洪應)을 파견하여 성곽의 수축, 개보수를 감독하게 했다.

병조판서와 도체찰사 재직 중 직접 병력을 이끌고 평안북도함경북도의 두만강, 압록강변을 월경하는 야인들을 체포하여 처결하고, 변방에 축성과 요충지를 건설하였으며, 야인의 소굴에 직접 들어가 야인의 토벌에 앞장섰다.

1464년(세조 10년)에는 평안북도 의주의 하류에 진보(鎭堡)가 설치된 곳이 없는 점과 희천(熙川)과 영흥(永興) 사이의 거리가 너무 먼 점을 들어 의주에 새로이 진을 설치하고, 희천과 영흥 사이에는 새 군을 설치할 것을 건의하여 인산진(麟山鎭)과 훗날의 영원군(寧遠郡)을 설치하게 했다. 또한 성종 즉위 초, 두만강과 압록강변에 성곽을 쌓을 것을 건의하여 성사시켰다.

4. 평가와 비판

서거정이 그의 묘비문을 썼는데, 그는 한명회의 동문이자 오랜 친구였다. 생전에는 활달하고 호쾌하며 솔직한 성격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세조 말기부터 공신들을 견제할 목적으로 등용된 김종직과 그의 제자인 사림파들이 세조 이후 정치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면서, 한명회는 '간신', 특히 '가장 위대했던 간신'으로 평가가 크게 떨어졌다. 성종 때 이후 사림이 정계에 진출하면서 도학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이 과정에서 그가 계유정난과 세조 반정을 주도했다는 점이 집중적으로 부각되어 비판과 질타의 대상이 되었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가담하고, 이후 권력 투쟁에서 승리하며 오랫동안 권력의 중심에 머물면서 권세를 누렸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에게는 대체로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하다[1]. 하지만 세조의 통치 철학을 계승하고 젊은 왕들을 보필한 정치가였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2].

대한제국이 멸망한 1910년 이후에도 오랫동안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왔으나, 이 시기부터 그에 대한 전기와 전설, 관련 작품들이 나오기 시작했으며, 1990년대에 이르러서는 재평가와 재조명 여론이 나타나기도 했다.

한편, 그는 한강 남쪽에 자신의 호를 따서 압구정이라는 정자를 지었다. “압구정(狎鷗)”이라는 이름에는 “명예와 이익을 버리고 갈매기와 벗하며 풍류를 즐긴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현재 이 정자가 있던 압구정동 부근은 서울 강남의 대표적인 고급 쇼핑 및 상업 지역으로 변모했다.

그의 삶을 다룬 작품으로는 신봉승의 소설과, 이를 원작으로 하여 1992년 KBS에서 방영된 텔레비전 드라마 「한명회」가 있다.

5. 가족 관계

조선 태조 때 학사로 명나라에서 조선 국호를 받아온 개국공신 한상질(韓尙質)의 손자이며, 증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 한기(韓起)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이조참판과 직제학을 지낸 여주 이씨 이적의 딸이자 대제학 이행의 외손녀이다.

장인 민대생(閔大生, 1372 ~ 1467)은 단종의 비 정순왕후의 외조부인 민소생의 형이다. 장모는 양천 허씨로 허선(許選)의 딸이다.

정실 부인인 황려부부인(黃驪府夫人) 여흥 민씨(驪興 閔氏, ? ~ 1479년)는 단종비 정순왕후의 어머니 여흥부부인 민씨와 사촌지간이다. 또한, 세조의 비 정희왕후의 친척이자 성종의 비 정현왕후의 증조부인 윤곤은 한명회의 고모부였다.[14] 사육신 중 한 명인 성삼문은 그의 당숙모의 조카뻘이 되는 인척 관계였다.

한명회는 정실 부인 민씨 외에 여러 첩을 두었으며, 그중 네 명의 존재가 확인된다. 첩인 연일 정씨 정씨(정종화의 딸)와 전주 이씨 이씨(선천 공조의 딸)는 세조가 특별히 정경부인에 봉작하여 정식 부인과 같이 대우받았다.

아래는 한명회의 자녀 및 손자녀 관계이다.

'''정실 황려부부인 민씨 소생'''

구분이름 (작호)생몰년배우자자녀비고
장남한보 (낭성군)1447년 ~ 1522년한산 이씨 (한성군 이훈(李塤)의 딸)6남 3녀
(한경기[15], 한경종, 한경침, 한경환, 한경순, 한경함, 이광 처, 조은량 처, 이경손 처)
손자 한경침은 성종의 딸 공신옹주와 혼인하여 청녕위(淸寧尉)가 됨
장녀한씨?신주(申澍)[16]?시아버지 신숙주
차녀한씨?윤반(尹磻)[17] (영천군)2남 5녀시아버지 윤사로, 시할아버지 윤곤
삼녀장순왕후1445년 ~ 1461년예종인성대군예종의 정비
사녀공혜왕후1456년 ~ 1474년성종-성종의 정비



'''첩실 소생'''

첩실구분이름배우자비고
연일 정씨
(정종화(鄭宗和)의 딸)
차남한복(韓福)흥덕 장씨정몽주의 서손녀. 세조정경부인으로 봉작.
삼남한임(韓林)전주 이씨 (이한기(李漢奇)의 딸)
사남한수(韓壽)안동 권씨
전주 이씨
(선천 공조(李氏 恭人)의 딸)
오남한목(韓睦)?세조정경부인으로 봉작.
육남한석(韓碩)?
칠남한서(韓恕)?
팔남한우(韓佑)?
구남한온(韓瘟)?
오녀한씨강희건(姜希蹇)
육녀한씨신승손(申承孫)
칠녀한씨홍갑생(洪甲生)
연일 정씨 (정종성(鄭宗誠)의 서녀)--정몽주의 서손녀, 정보의 서매
창녕 성씨 (성수량(成守良)의 서녀)--



한명회는 세조 및 그의 아들들과 복잡한 이중 사돈 관계를 형성했다. 예종은 셋째 사위였고, 성종(의경세자의 아들)은 넷째 사위가 되었다. 이로 인해 그의 딸인 장순왕후공혜왕후는 자매이면서 동시에 시가 기준으로 시숙모와 조카며느리 관계가 되었다.

또한 폐비 윤씨와도 먼 인척 관계였다. 한명회의 장녀 사위인 신주(申澍)의 아버지 신숙주폐비 윤씨의 외당숙이다. 즉, 폐비 윤씨의 어머니인 신씨 부인은 신숙주의 사촌 동생으로, 한명회의 사돈인 신숙주의 당고모가 된다. 이러한 혼인 관계는 한명회가 조선 전기 정치사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반이 되었다.

6. 관련 문화재

참조

[1] 웹사이트 狎鴎亭と伴鴎亭の話 http://www.sjchp.co.[...]
[2] 서적 새로나온 인명사전 민중書館 2006
[3] 일반텍스트
[4] 일반텍스트
[5] 뉴스 한명회, 황보인 사위 될 뻔했다? https://www.yna.co.k[...] 연합뉴스 2009-06-10
[6] 서적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들녘 1998
[7] 일반텍스트
[8] 서적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들녘 1998
[9] 서적 사화로 보는 조선 역사 석필 2005
[10] 일반텍스트
[11] 웹인용 한명회의 시체를 저자에 매달게 하다 https://sillok.histo[...] 연산군일기 53권, 연산 10년 5월 11일 경자 3번째기사
[12] 웹사이트 한명회 지석 http://cheonan.grand[...]
[13] 뉴스 청주한씨 종친회, '한명회 지석' 천안 박물관에 기탁 https://news.naver.c[...] 뉴시스 2009-12-21
[14] 일반텍스트
[15] 일반텍스트
[16] 일반텍스트
[17] 일반텍스트
[18] 일반텍스트
[19] 웹사이트 네이버:오가작통법 http://100.naver.com[...]
[20] 서적 선비 바움 2004
[21] 서적 야사로 보는 조선의 역사 가람기획 2003
[22] 웹사이트 정보(鄭保) http://www.sugmo-j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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