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다 가쓰시게
1. 개요
도다 가쓰시게는 출신이 불분명하며, 처음에는 니와 나가히데를 섬기며 여러 전투에 참여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으로 활동하며, 규슈 평정, 오다와라 정벌 등 주요 전투에 참여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시다 미쓰나리 편에 서서 분전했으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 등으로 인해 전사했다. 그의 아들 또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사망하여 도다 가문은 몰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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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 미상 -
손니 알리
손니 알리는 송가이 제국의 군주로서 니제르 강 유역을 장악한 후 팀북투와 젠네를 정복하고 군사력을 강화하여 제국을 확장했으며, 전통 신앙과 이슬람교 조화, 법에 의한 국가 통제, 무역 확립 등 내치에도 힘썼다. -
생년 미상 -
김조국
김조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2019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겸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다이묘 -
오다 나가마스
오다 나가마스는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 다이묘이자 오다 노부나가의 동생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겼으며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센노 리큐에게 다도를 배워 유라쿠류를 창시한 다인으로도 유명하며, 그의 호 유라쿠는 도쿄도 유라쿠초 지명의 유래 설이 있다.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다이묘 -
사나다 노부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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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고쿠 무장 -
오다 나가마스
오다 나가마스는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 다이묘이자 오다 노부나가의 동생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겼으며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센노 리큐에게 다도를 배워 유라쿠류를 창시한 다인으로도 유명하며, 그의 호 유라쿠는 도쿄도 유라쿠초 지명의 유래 설이 있다. -
센고쿠 무장 -
사나다 노부시게
2. 생애
도다 가쓰시게는 니와 나가히데를 섬기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이 되었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가담하여 전사한 인물이다.
처음에는 니와 나가히데를 섬겼으며, 1582년 나가히데 휘하로 야마자키 전투에 참가했다.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 이후에는 나가히데를 따라 에치젠국 침공에 가담, 나가쓰카 마사이에 등과 함께 시바타 가쓰이에 세력을 기타노쇼 성으로 몰아넣었다. 나가히데가 에치젠 국으로 이봉되자 요시다군 마쓰오카 성 2만 5,000석을 받았다. 1584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는 니와 군 선봉장으로 1,000명을 이끌었다.
1585년, 니와 가문에 내분이 일어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이 되었다. 히데요시 휘하에서 에치젠국 아스와군 아이고성 성주가 되었다. 1587년 규슈 정벌, 1590년 오다와라 정벌에 참전했으며, 1592년 분로쿠의 역 때는 히젠국 나고야성에 주둔했다. 1594년 후시미성 축성에 참여했고, 당시 1만 석의 영지를 다스렸다. 1598년 히데요시 사후 금 5매를 받았고, 1599년 1만 석이 추가되어 총 2만 석을 다스렸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이시다 미쓰나리 측 서군에 가담했다. 초기에는 북국 입구를 수비했으나, 동군이 접근하자 오타니 요시쓰구 휘하로 미노 방면으로 이동했다. 오가키성 회의에서 야전이 결정되자 여러 장수들을 격려했고, 본 전투에서 히라쓰카 다메히로 등과 함께 오타니 부대에 소속되어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 공격을 일시 격퇴하는 등 분전했다. 그러나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 4부대의 배신으로 협공당해 궤멸되었다. 혼란 속에서 오다 나가마스의 장남 오다 나가타카 부대(혹은 쓰다 노부나리)와 교전 중 전사했다. 적남 나이키도 전사하여 도다 가문은 몰락했다.
2.1. 출신 배경
도다 가쓰시게의 출신은 불분명하다. 시바 료타로는 『가도를 가다』에서 가쓰시게가 "미노 도다 씨의 지류가 아닐까"라고 추측했다. 『니와 역대 연보 부록』의 가신전에서는 "출생지 미상"이라 하면서 "도다 무사노카미 후지와라 가쓰나리"라고 하여, 후지와라 성으로 되어 있다. 형으로는 도다 가쓰타카가 있다.
2.2. 니와 가문 가신 시대
도다 가쓰시게는 니와 나가히데를 섬겼다. 1582년 야마자키 전투에 참가했으며,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 후에는 나가히데를 따라 에치젠국을 침공했다. 이때 나가쓰카 마사이에, 무라카미 요시아키, 구와야마 시게하루 등과 함께 시바타 가쓰이에 군을 격파하고 기타노쇼 성으로 후퇴시켰다. 나가히데가 에치젠 국으로 이봉되자, 요시다군 마쓰오카성 2만 5천 석에 봉해졌다.
1584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는 니와 군의 선봉을 맡아 1천 명을 이끌었다. 1585년, 니와 가문에 내분이 일어나 가신들이 대거 이탈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이 되었다고 한다.
2.3. 도요토미 가문 가신 시대
니와 나가히데를 섬겼으며, 1582년 야마자키 전투에 나가히데 휘하로 참가했다.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 후, 나가히데를 따라 에치젠국으로 침공했다. 같은 해 4월 21일, 나가쓰카 마사이에, 무라카미 요시아키(타다카츠), 구와야마 시게하루 등과 함께 시바타 가쓰이에 군을 격파하고 기타노쇼 성으로 퇴각시켰다. 나가히데가 에치젠 국으로 이봉되자, 요시다 군 마쓰오카 성 2만 5,000석에 봉해졌다. 1584년 나가쿠테 전투에서는 니와 군의 선봉장으로 1,000명을 이끌었다.
1585년, 니와 나가시게 대에 니와 가문 내 분열로 가신들이 대거 이탈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이 되었다. 같은 해 도야마의 역 직전, 니와 가신 나리타 도토쿠가 사사 나리마사와 내통했다고 밀고한 것은 가쓰나리와 나가쓰카 마사이에였다고 『니와 가보』, 『엣토산슈시』는 전한다.
히데요시의 가신으로서 에치젠국 아스와 군 아이고성 성주가 되었다.
1587년 규슈 정벌에 종군했다. 1590년 오다와라 정벌에서는 히데요시 본진의 측면 수비대로 300기를 이끌었다. 1592년 분로쿠의 역에서는 히젠국 나고야성에 주둔, 히데요시 본진의 예비대로 300명을 이끌었다.
1594년 후시미성 축성에 참여했다. 당시 영지는 1만 석이었다.
1598년 8월, 히데요시 사망으로 금 5매를 받았다. 1599년 1만 석이 추가되어 총 2만 석을 다스렸다.
2.4. 세키가하라 전투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이시다 미쓰나리를 지지하여 서군에 가담했다. 처음에는 북국 입구를 수비하고 있었으나, 동군이 접근해 오자 오타니 요시쓰구 휘하에서 미노 방면으로 이동했다.
오가키성 회의에서 야전이 결정되자 여러 장수들을 격려했고, 본 전투에서도 히라쓰카 다메히로 등과 함께 오타니 부대에 소속되어 마쓰오야마 진지에서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배반하여 공격해 온 것을 일시적으로 격퇴하는 등 분전했다. 그러나 같은 북국 출신인 와키자카 야스하루, 구키 모토쓰나, 아카자 나오야스, 오가와 스케타다의 4부대가 배반하여 측면에서 공격해왔기 때문에 협공당해 궤멸되었다. 혼란 속에서 가쓰시게는 오다 나가마스의 장남인 오다 나가타카 부대에 포착되어 (혹은 미쓰나리의 본진으로 향하려다 오다 나가타카 부대의 앞을 가로질러) 전투가 벌어져 나가타카의 창에 머리를 맞아 죽었다. 일설에는 나가타카가 아니라 쓰다 노부나리였다는 설도 있다. 『무가사기』에서는 나가타카가 창을 겨루고 가신 야타 다이헤이가 가쓰시게의 왼쪽 등자를 빼앗아 말에서 끌어내어 엎드리게 하고, 다른 나가타카 가신 야마자키 겐타로가 가쓰시게의 목을 베려 하자, 노부나리의 가신 다마키 고에몬이 끼어들어 목을 빼앗으려 하여 두 사람은 싸움이 벌어졌지만, 노부나리가 서로 죽이는 것이라고 말해 싸움을 멈추게 했다고 한다. 나가타카와 노부나리는 친구 사이였다. 나가타카는 야타, 야마자키 두 사람 모두 많은 머리를 가지고 운반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여, 가쓰시게의 목은 나가타카 가신 하급무사가 운반하여 이에야스의 곁에서 검시를 받았다고 한다. 또한, 아락, 노부나리는 모두 가쓰시게의 친구였다고 한다. 3년 전인 게이초 2년 4월 22일, 세 사람은 이에야스 저택에서 함께 자리하고 있다. 『무공잡기』에 따르면, 가쓰시게는 동군의 여러 다이묘들과도 친분이 있는 자가 많아, 그의 죽음을 듣고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세키가하라에서 적남인 우치키(일설에는 시게노리)도 전사했으므로, 도다 가문은 단절되었다.
2.5. 최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시다 미쓰나리 편에 서서 서군에 가담했다. 처음에는 북국 입구를 수비했지만, 동군이 접근하자 오타니 요시쓰구 휘하에서 미노 방면으로 이동했다.
오가키성 회의에서 야전이 결정되자 여러 장수들을 격려했고, 본 전투에서는 히라쓰카 타메히로 등과 함께 오타니 부대에 소속되어 마쓰오 산에서 배신한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공격을 일시적으로 격퇴하는 등 분전했다. 그러나 와키자카 야스하루, 구키 모토쓰나, 아카자 나오야스, 오가와 스케타다 등 4부대가 배신하여 측면을 공격해 옴으로써 협공당해 궤멸되었다. 혼란 속에서 가쓰시게는 오다 나가마스의 장남 오다 나가타카 부대에 붙잡혔고(혹은 미쓰나리의 본진으로 향하던 중 오다 나가타카 부대의 앞을 가로질렀다) 전투가 벌어져 나가타카의 창에 머리를 맞아 전사했다. 일설에는 쓰다 노부나리에게 죽었다고도 한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적남인 나이키(일설에는 시게노리)도 전사했기 때문에 도다 가문은 몰락했다.
3. 일화
*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오다 나가타카(그리고 그의 아버지 오다 나가마스(우라쿠사이))는 가쓰시게를 죽이는 공을 세웠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앞에서 상을 논하는 자리에서 나가타카가 가쓰시게를 죽일 때 사용한 창이 공개되었는데, 이에야스의 가신이 실수로 창을 떨어뜨려 이에야스는 손가락을 다쳤다. 이에야스는 "이 창은 예사 창이 아니다. 제작자는 무라마사인가?"라고 물었고, 우라쿠는 "무라마사"의 작품이라고 답했다. 퇴장한 우라쿠는 측근으로부터 도쿠가와 가문과 무라마사의 인연을 듣고 "내부(이에야스)의 아군인 내가 무라마사를 쓰는 것은 옳지 않다"며 창을 산산조각냈다. 이 이야기는 요도 등으로 불리며, 도쿠가와 가문에 재앙을 가져온다고 전해지는 무라마사 전설 중 하나가 되었다.
* 쇼와 10년(1935년)에 쓰여진 하시모토 히로시의 『대무감』에 따르면, 도다 무사시노카미는 오다 노부나가로부터 "하얀 하늘을 찌르는 붉은 깃발"의 주모를 허락받았고, 36비장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에도 시대의 서적인 『소켄코 무감』에 근거한 것이지만, 도다의 생존 당시부터 그렇게 불린 것은 아니며, 후세의 창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