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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와 스케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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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가와 스케타다는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에 걸쳐 활약한 무장이다. 그는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겼으며, 다인으로서도 명성을 떨쳤다. 1595년 이요국 이마바리 7만 석 영지를 받았으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가담한 후 동군에 내응했음에도 개역되었다. 이후 교토에서 은거하다가 사망했으며, 그의 자손은 무사 단절되었지만, 후대에 가계가 부흥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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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와 스케타다
기본 정보
이름오가와 스케타다
본명오가와 무네우지
별명사헤이지
손이치로
도사노카미
사콘다유
가명사헤이지
손이치로
도사노카미
사콘다유
다른 이름오가와 무네우지
씨족오미 오가와 씨
시대센고쿠 시대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출생불명
사망게이초 6년 (1601년)
묘소조류지 (시가현다카시마시 이마즈초 하마분)
이요 고쿠분지 (에히메현이마바리시)
관위종5위하 도사노카미, 사콘다유
가계
아버지오가와 이키노카미
배우자정실: 게이슌 (이치야나기 나오타카의 딸)
자녀미쓰우지 (이키노카미)
스케시게 (요시우지)
미쓰노리
양자다다시 (손자부로, 고쿠료 무네히사의 아들)
이설만야 헤이우에몬 (센키쓰)
정치적, 군사적 정보
주군아자이 나가마사
오다 노부나가
아케치 미쓰히데
시바타 가쓰토요
도요토미 히데요시
히데요리
소속아케치 씨
시바타 씨
도요토미 씨
참여 전투단바 공략 (1578년)
야마자키 전투 (1582년)
시즈가타케 전투 (1583년)
시코쿠 정벌 (1585년)
세키가하라 전투 (1600년)

2. 생애

오가와 스케타다는 오다 노부나가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긴 무장이다.

겐키 원년(1570년), 혼간지의 겐뇨가 미요시 삼인중, 아사이, 아사쿠라 등과 동맹을 맺고 오다 노부나가에 대항하자, 스케타다는 오미의 잇코잇키 무리에 가담했다. 그러나 이듬해 오가와 성에 농성하던 중 인질을 내어 항복하고, 시바타 가쓰이에에 이끌려 노부나가를 배알하여 사면받았다.[4] 덴쇼 원년(1573년) 마키시마 공격에 종군했고, 덴쇼 7년(1579년)에는 아즈치성 축성에 참여하여 기와 봉행을 맡았다.[4] 덴쇼 10년(1582년) 혼노지의 변으로 노부나가가 죽자, 아케치 미츠히데를 따라 야마자키 전투에 참전했지만 패배하고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항복했다.

1595년(분로쿠 4년),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오와리 기요스 성으로 전봉되면서 이요 국 이마바리 7만 석을 받았다.[6] 1598년(게이초 3년)에는 고쿠분 성(고쿠분 산성, 후추 성)을 받아 성주가 되었다.[6] 같은 해 다이고의 꽃놀이에서는 세 번째 다실을 담당했고, 태합검지에도 관여했다.[6]

히데요시 사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가담했으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에 호응하여 와키자카 야스하루, 쿠츠키 모토츠나, 아카자 나오야스와 함께 동군으로 돌아섰다. 가신 오가와 젠스케의 낭당 카시이 마사노부(타헤에)가 히라츠카 타메히로를 쳐 죽이는 무공을 세웠고,[7] 전투 후, 사와야마 성 공략전에도 참가했다.[6] 그러나 전후, 도도 다카토라에게 약속했던 내응에 대한 상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영지를 몰수당하는 개역을 당했다.[6]

2. 1. 오가와 씨의 출자

오미 오가와 씨(小川氏)의 기원에는 여러 설이 있다. 스케타다(祐忠)의 오가와 씨는 후대의 계보에서 우다 겐지(宇多源氏) 사사키 씨 지류(佐々木氏支流)를 칭하지만, 『오미 나카하라 계도(江州中原氏系図)』에서는 덴무 천황의 아들 토네리 친왕의 자손, 나카하라노 나리토시의 현손, 코라노 나카타이라의 아들 미쓰히라를 오가와 씨의 시조(나카하라 성)로 하고 있다. 『오미 여지지(近江輿地誌)』에서는 후지와라 씨 히데사토(秀郷)류 시모카베 씨(下河辺氏)의 계통이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가신 시모카베노 유키히라의 후예가 오미 국 칸자키 군 오가와 촌에 정착하여 오가와 씨를 칭한 오가와 사쿄노진이 시조라고 한다.

하지만, 오미 국에서는 코카 군 오가와 촌에 오가와 성을 쌓은 쓰루미 나가자네의 자손도 대대로 오가와 씨를 칭하고 있어 혼동하기 쉽다. 이 인물은 전 관백 고노에 이에모토를 섬기며 시가라키에 들어가 고노에 쓰라쓰구의 명령으로 고노에 가문의 장원을 지키기 위해 오가와 성을 세웠다. 자손은 시가라키 지토가 되어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섬기고 롯카쿠 씨의 가신이 되었다.

오닌의 난 이후, 미나미 오미에서 롯카쿠 씨와 쿄고쿠 씨가 대립하자, 이누카미 군을 지배하에 둔 롯카쿠 씨가 경계의 사와야마에 성을 쌓고, 가신 오가와 사콘 다유를 사와야마 성 성주로 삼았다고 하는데, 이것이 스케타다의 조부 혹은 증조부로 생각된다. 센고쿠 시대 후기에는 오미의 아사이 씨의 세력이 남하하고 있어, 오미의 코쿠슈 오가와 호키노카미는 2대 성주로서 사와야마 성을 이소노 카즈요시에게 넘겨주고 이후 아사이 씨에 속했다.

스케타다의 아버지는 이키노카미라는 수령명 밖에 알 수 없지만, 이것이 오가와 손사부로라는 인물이라면, 이키노카미의 선대인 이즈미노카미가 장남 손이치로(적남의 세습명)이고 호키노카미가 차남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으며, 이키노카미의 아버지가 이즈미노카미라고 한다면 호키노카미는 종조부일지도 모른다. 호키노카미에서 토사노카미까지의 경위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간논지 소동이 있던 에이로쿠 연간의 중반에는 오가와 토사노카미인 스케타다의 대가 되었다.

2. 2. 오다 가신 시대

겐키 원년(1570년) 9월, 혼간지의 겐뇨가 미요시 삼인중, 아사이, 아사쿠라 등과 동맹을 맺고 오다 노부나가에 대항하여 각지의 잇코슈 신도들에게 격문을 보내자, 오미의 잇코잇키 무리는 가나모리 고보를 중심으로 봉기했고, 스케타다도 이에 가담했다. 시가의 진 등으로 인해 남오미를 진압하지 못했던 노부나가는 이듬해 이소노 카즈마사가 항복하여 오미 출구가 열리자, 9월 1일 사쿠마 노부모리, 나카가와 시게마사, 시바타 가쓰이에, 니와 나가히데가 이끄는 군세를 보내 시무라 성(신무라 성)을 공략하고 670명의 목을 베었다. 오가와 성에 농성하던 스케타다는 인질 7명을 내어 항복하고, 가쓰이에에 이끌려 사와야마에서 노부나가를 배알하여 사면받고 영지도 그대로 보장받았다.[4]

덴쇼 원년(1573년), 마키시마 공격에 종군했다.

덴쇼 7년(1579년), 아즈치성 축성에 즈음하여 호리타 사나이, 아오야마 스케이치와 함께 기와 봉행을 명받았다.[4] 또한, 이때부터 노부나가에게 다회(茶会)를 허가받아 후년에 다인으로서도 명성을 떨쳤다.

덴쇼 9년(1581년)과 이듬해 2년 연속으로 정월 사기초에 오미 중(히라노 사다히사·타가 츠네노리·고토 타카하루·가모 우지사토·교고쿠 타카츠구·야마자키 켄이에·야마오카 카게무네·오가와 스케타다)으로서 폭죽을 휴대하고 출장했다.

덴쇼 10년(1582년), 혼노지의 변으로 노부나가가 횡사하자, 오미국을 제압한 아케치 미츠히데의 산하에 들어가 야마자키 전투에도 출진했지만 패배했다. 다른 오미 중과 마찬가지로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항복했다.

2. 3. 도요토미 가신 시대

1595년(분로쿠 4년),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오와리 기요스 성으로 전봉되면서 이요 국 이마바리 7만 석을 받았다.[6]

1598년(게이초 3년), 조선 안골포에 체류 중 객사한 이케다 카게오(히데오)를 이어 그의 유령(이요 국 오치 군 2만 석)에서 고쿠분 성(고쿠분 산성, 후추 성)을 받아 성주가 되었다.[6] 같은 해 스케타다는 은거하여 스케시게(요시우지)에게 가독을 잇게 했다.[6]

같은 해 3월 다이고의 꽃놀이에서는 세 번째 다실을 세우고, 다실 내에는 가노 산라쿠나 하세가와 소닌 등 당대 일류 화가에게 말, 매 등을 그린 병풍 그림을 그리게 했다.[6] 태합검지에도 관여하여 7월 24일에 세이쇼 죠다이로부터 에치젠의 검지가 완료되었고, 총봉행인 나가츠카 마사이에 이하의 봉행들이 상경한 것에 관한 서찰 "세이쇼 화상 문안"을 받았다.[6] 8월에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유물로 미하라(도검)을 하사받았다.[6]

1600년(게이초 5년), 세키가하라 전투가 일어나자 서군에 가담하여 호쿠리쿠 방어를 맡았다.[6] 이후 오타니 요시츠구 등 호쿠리쿠 세력과 함께 미노로를 내려가 세키가하라 근처의 야마나카무라에 진을 쳤다.[6] 이 기간 동안 친족인 이치야나기 나오모리에게 가신 이나바 세이로쿠를 파견하여 서군으로의 권유를 하였으나 거절당했다.[6] 세키가하라 본전에서는 와키자카 야스하루, 쿠츠키 모토츠나, 아카자 나오야스와 함께 이미 동군과 내통하고 있었으며,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에 호응하여 배신했다.[6] 본전에서는 가신 오가와 젠스케의 낭당 카시이 마사노부(타헤에)가 히라츠카 타메히로를 쳐 죽이는 등 무공을 세웠다.[6] 전투 후, 사와야마 성 공략전에도 참가했다.[6]

그러나 도도 다카토라에게 약속되었던 내응에 대한 상은 없었고, 통관을 명확히 하지 않은 것을 오히려 책잡혀 신병은 동군으로서 전공이 있던 이치야나기 나오모리에게 맡겨졌다. 그의 탄원에 의해 사형 일등이 감해졌으나, 내응에 응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역되었다.[6] 개역의 이유에 대해 『야사』는 본인의 자질 부족과 영내 악정을 들고, 스케타다·스케시게 부자가 함께 이시다 미츠나리와 친밀했음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싫어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6] 또한 소령을 몰수당한 이유로서, 스케타다가 항상 약자를 버리고 강자에게 붙는다는 것을 여러 사람들이 호소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7] 다만, 개역된 후에 가독을 이은 아들 미츠우지는 곧바로 다이묘로 세워졌으며(후술), 실제로는 감봉이었을 가능성도 있다.[6]

2. 4. 이요 국 다이묘 시대와 개역

1595년(분로쿠 4년),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오와리 기요스 성으로 전봉되면서 오가와 스케타다는 이요 국 이마바리 7만 석을 받았다.[6]

게이초 3년(1598년), 조선 안골포에 체류 중 객사한 이케다 카게오(히데오)의 유령(이요 국 오치 군 2만 석)에서 고쿠분 성(고쿠분 산성, 후추 성)을 받아 성주가 되었다.[1] 같은 해 3월 다이고의 꽃놀이에서는 세 번째 다실을 세웠고, 다실 내에는 가노 산라쿠나 하세가와 소닌 등 당대 일류 화가에게 말, 매 등을 그린 병풍 그림을 그리게 했다. 태합검지에도 관여하여 7월 24일에 세이쇼 죠다이로부터 에치젠의 검지가 완료되었고, 총봉행인 나가츠카 마사이에 이하의 봉행들이 상경한 것에 관한 서찰 "세이쇼 화상 문안"을 받았다. 8월에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유물로 미하라(도검)를 하사받았다.

세키가하라 전투가 일어나자 서군에 가담하여 호쿠리쿠 방어를 맡았다.[2] 이후 오타니 요시츠구 등 호쿠리쿠 세력과 함께 미노로를 내려가 세키가하라 근처의 야마나카무라에 진을 쳤다. 와키자카 야스하루, 쿠츠키 모토츠나, 아카자 나오야스와 함께 이미 동군과 내통하고 있었으며,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에 호응하여 배신했다. 본전에서는 가신 오가와 젠스케의 낭당 카시이 마사노부(타헤에)가 히라츠카 타메히로를 쳐 죽이는 등 무공을 세웠다.[7] 전투 후, 사와야마 성 공략전에도 참가했다.

그러나, 도도 다카토라에게 약속되었던 내응에 대한 상은 없었고, 통관을 명확히 하지 않은 것을 오히려 책잡혀 신병은 동군으로서 전공이 있던 이치야나기 나오모리에게 맡겨졌고, 그의 탄원에 의해 사형 일등이 감해졌으나, 내응에 응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역되었다.[3][4]
각주[1] 『국령계도』에서는 12만 석으로 하지만, 『세키가하라 전투 자료집』(후지이 지자에몬)이 15만 석이라고 하는 것 외에는 이를 뒷받침할 사료가 없으므로 성주의 변경만으로 석고는 7만 석 그대로였을지도 모른다. 오하시 킨조는 12만 석이 아니라 7만의 오류일 것이라고 보고 있다.

[2] 『우에다 군기』에서는 사마노스케(스케시게를 말함)와 함께 2,500명의 군세를 이끌었다고 한다.

[3] 개역의 이유에 대해, 『야사』는 본인의 자질 부족과 영내 악정을 들고있다.

[4] 스케타다·스케시게 부자가 함께 이시다 미츠나리와 친밀했음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싫어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또한 소령을 몰수당한 이유로서, 스케타다가 항상 약자를 버리고 강자에게 붙는다는 것을 여러 사람들이 호소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당대기』).

3. 자손

오가와 스케타다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지만, 스케타다·유시가 개역된 후에는 죄를 면한 미쓰우지(光氏)가 뒤를 이어 일단 히타번주에 봉해져 재흥했지만, 후사가 없어 단절되어 다시 영지를 몰수당했다. 스케타다의 사촌동생인 하타모토 오가와 마타자에몬(小川又左衛門일본어)과 오가와 도자에몬(小川藤左衛門일본어)이 후에 그곳의 대관이 되었지만, 간분 5년(1665년)에 자손이 농민 소송을 당해 이 또한 개역되었다. 후년에 일족 오가와 가쓰지(小川勝次일본어)가 유서를 내고 막부에 그 자손을 주장하고 있으나, 그 중에서도 '오가와 이에노(小川家の) 단절'이라 하여 족보는 끊겼다.

단절되어 있던 오가와 집안은, 에도 시대에 시바타 가쓰토요(柴田勝豊일본어)의 고아(자손)를 칭하는 사람이 상속되어 있었지만, 덴포 연간에 시바타성에서 오가와성으로 바꾸어 재흥했다.

또, 오가와 스케타다의 아들을 자칭한 만야 헤이에몬(萬屋平右衛門일본어) 이외에도, 오가와씨의 동족을 칭한 가계는 몇 개 정도 있어, 코이시카와 양생소의 개조·오가와 쇼센을 배출한 오가와씨도 그 중 하나로, 오미에서 에도로 나와, 에도 막부 말기까지 대대로 양생소 주전을 맡았다. 이 오가와 집에는 의술의 길로 가는 사람이 많아, 후지사와 숙소에서도 별가가 의사가 되어 향토사에 이름을 남겼다.

참조

[1] 서적 Sekigahara 1600: The Final Struggle for Power https://books.google[...] Osprey Publishing
[2] 문서 石清水社僧記』『國領系圖
[3] 서적 姓氏家系大辞典 https://dl.ndl.go.jp[...] 国民社
[4] 문서 安土日記
[5] 문서 谷口
[6] 서적 大日本人名辞書 https://dl.ndl.go.jp[...] 大日本人名辞書刊行会
[7] 서적 関ケ原合戦―戦国のいちばん長い日― 中央公論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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