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와 나가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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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니와 나가시게는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 니와 나가히데의 장남으로, 시즈가타케 전투와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 참전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마에다 도시나가를 감시하라는 밀명을 받았으며,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가담했다가 영지를 몰수당했다. 이후 다이묘로 복귀하여 히타치, 무쓰 등 여러 지역을 다스렸으며, 시라카와 번의 초대 번주가 되어 시라카와 성을 축성했다. 만년에는 도쿠가와 히데타다와 이에미쓰의 측근으로 중용되었으며, 67세에 사망했다.
| 이름 | 니와 나가시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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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이름 | 고로자에몬 (통칭), 고마쓰 지주, 고마쓰 사이쇼, 하시바 마쓰토모 지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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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1571년 5월 1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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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망 | 1637년 4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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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적 | 일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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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업 | 다이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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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위 | 종3위, 참의, 가가노카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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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위 | 시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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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주 | 다나구라 번 영주 (1622년 ~ 1637년), 시라카와 번 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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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나구라 영주 임기 시작 | 162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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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나구라 영주 임기 종료 | 163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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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나구라 이전 영주 | 다치바나 무네시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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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나구라 다음 영주 | 니와 미쓰시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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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 | 니와 나가히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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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 | 계봉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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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우자 | 호-오닌, 보은원 (오다 노부나가의 딸), 류코인 (야마가타 씨), 센가 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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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녀 | 니와 미쓰시게, 사카이 다다마사 정실, 오시마 요시타다 정실, 아사노 나가나오 정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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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제자매 | 니와 나가마사, 도도 다카요시, 하치야 나오마사, 니와 나가토시, 니와 나가쓰구, 겟코인, 게키린인, 조코인, 나가키요인, 엔코인, 에이키인, 이기 다다쓰구의 아내, 다네하시 나리아키라의 아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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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 이름 | 나베마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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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칭 | 고로자에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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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 | 고마쓰 시종, 고마쓰 재상, 하시바 마쓰토모 시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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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명 | 다이린지덴 마에 산기 산본 겟슌 조에이 다이코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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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소 | 후쿠시마현시라카와시 엔메이지의 시라카와 번 다이묘 가문 묘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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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오다 노부나가의 중신이었던 니와 나가히데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나가히데가 사망한 후 1585년 에치젠국, 와카사국, 가가국에 걸친 123만 석의 영지를 상속받았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영지를 몰수당하고 다이묘에서 몰락하였다가 다시 복귀하기를 반복했다.
1603년 히타치 훗토 번 1만 석 영지를 수여받으면서 다이묘로 복귀하였고, 오사카 전투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1619년 히타치 에도사키 번 2만 석, 1622년 무쓰 다나구라번 5만 석, 1627년 10만 7백 석으로 시라카와번의 초대 번주가 되어 시라카와 성(白河城)을 축성하였다. 나가시게는 축성의 명수였다고 하며, 그가 무쓰 국으로 부임한 것도 무쓰 요충지의 조카마치 정비와 수비 체제 확립을 위함이었다고도 한다.
만년에는 쇼군 히데타다, 이에미쓰의 오토기슈로서 중용되었다.
1637년 음력 윤3월 6일 향년 67세(65세라고도 한다)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장차남 모두 일찍 죽은 관계로 삼남 미쓰시게가 그 뒤를 이었다.
2.1. 오다·도요토미 가신 시대
오다 노부나가의 중신인 니와 나가히데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583년 아버지 나가히데와 함께 시즈가타케 전투에 참전하였다. 1584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 때는 병중인 아버지를 대신하여 출전하였다. 1585년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에치젠국, 와카사국, 가가국에 걸친 123만 석 영지를 상속받았으나, 그해 엣추 정벌에 종군하였을 때 가신 중에 삿사 나리마사에 내응한 자가 있다는 의심을 받아 하시바 히데요시에 의해 에치젠, 가가의 영지를 몰수당하고 와카사 15만 석만 보유하게 되었다. 또한 중신이었던 나쓰카 마사이에, 미조구치 히데카쓰, 무라카미 요리카쓰 등도 소환되었다. 1587년 규슈 정벌 때 가신의 낭자함을 이유로 와카사 영지마저 거두어졌고, 겨우 가가 마쓰토(松任일본어)의 4만 석 영지를 보유한 소다이묘로 격하되었다. 이후 오다와라 정벌에 종군한 공으로 가가 고마쓰(지금의 이시카와현 고마쓰시) 12만 석으로 승진 전봉되었다. 이때 종3위 참의(参議)·가가노카미(加賀守)에 서임되면서 고마쓰지주(小松侍従일본어)라 불리게 되었다.
1598년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마에다 도시나가를 감시하라는 밀명을 받았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때 서군에 가담하여 동군인 마에다 도시나가와 아사이나와테 전투(浅井畷の戦い)를 벌였기 때문에, 전쟁이 끝난 뒤 일단 영지를 몰수당하였다.
2.2. 세키가하라 전투와 에도 시대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니와 나가시게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마에다 도시나가를 감시하라는 밀명을 받았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때 서군에 가담하여 동군인 마에다 도시나가와 아사이나와테 전투를 벌였기 때문에, 전쟁이 끝난 뒤 일단 영지를 몰수당하였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니와 군 3천 명이 서군에 가담하여 마에다 군 2만 5천여 명의 동군인 마에다 도시나가와 싸웠다. 아사이나와테 전투에서 니와 나가시게가 쾌승했다. 당시 에도성에 입성해 있던 호슌인(마에다 도시이에의 아내)은 마에다 가문의 100만 석을 걸고 필사적으로 탄원하여 "마에다 가문의 호슌인 전하께서는 할복을 사양하지 않으셨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도쿠가와 히데타다 두 군께서는 진지한 표정으로 니와 나가시게에게 근신을 명하셨다"고 한다. "니와 가문의 전투 준비는 훌륭하다" (출전: 『이시카와현사』)라고 하여, 니와 가문은 전투 후에 한 번 개역되었다.
1603년, 히타치 훗토 번 1만 석 영지를 수여받으면서 다이묘로 복귀하였고, 오사카 전투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아버지 나가히데 이래 오다 노부나가 가문과의 혈연 관계, 도쿠가와 히데타다와 마에다 도시나가와의 친척 관계, 특이한 전투 준비와 아버지 나가히데에게 물려받은 축성 기술을 높이 평가받은 것이 다이묘 복귀라는 드문 결과로 이어졌다.
1614년부터의 오사카의 진에서는 무공을 세웠기 때문에 1617년, 에도 막부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오토기슈로 호소카와 오키모토, 사쿠마 야스마사, 다치바나 무네시게 등과 함께 발탁되었다.
1619년에는 히타치 에도사키 번 2만 석, 1622년에는 무쓰 다나구라번 5만 석으로 각각 가증 이봉되었다. 나가시게의 출세를 알고, 각지로 흩어졌던 옛 니와 가문의 가신들이 나가시게에게 돌아왔다. 나가시게는 다치바나 무네시게가 거성으로 삼았던 아카타테 성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새로운 성을 축성하기로 결정하고, 그 남쪽에 있는 치카츠 묘진의 경내에 새로운 성을 축성하기로 결심했다. 이 치카츠 묘진을 옮기는 과정에서 주민들과의 분쟁이 발생했지만, 나가시게는 별당의 타카마츠 일족에서 타카마츠 요시노리를 가신으로 등용하고, 그의 주도로 묘진의 천궁 및 성의 축성을 진행했다. 이 성이 나중에 타나구라 성이 된다.
1627년 아이즈 번의 가모 다다사토가 적자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여 가모 씨는 개역된다. 그 영지에 가토 요시아키와 나가시게가 옮겨가고, 나가시게는 시라카와 10만 700석이 되었다. 결국 축성 중이었던 타나구라 성은 방치되고, 그 후 옮겨온 나이토 노부테루에 의해 완성되었다. 시라카와에 들어가서도, 각지로 흩어져 있던 니와 가문의 옛 신하들이 더욱 모여들었고, 더불어 가모 가문의 옛 신하들까지 고용하게 되어, 시라카와 고미네 성을 축성한 것으로 인해, 니와 가문의 재정은 압박을 받았다고 한다.
만년에는 쇼군 히데타다, 이에미쓰의 오토기슈로서 중용되었다.
1637년 음력 윤3월 6일 향년 6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65세라고도 한다)
3. 인물 및 평가
니와 나가시게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영토를 잃은 다이묘(영주)들 중 몇 안 되는, 재기에 성공한 무장이었다. 10만 석 이상을 영유한 것은 나가시게와 다치바나 무네시게뿐으로, 이는 특별히 언급할 만하다.
나가시게는 축성 기술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가 축성한 다나쿠라성과 시라카와 고미네성은 모두 성으로서의 질이 높았다. 다나쿠라성은 서쪽이 험준한 절벽이라 방어에 적합했다. 시라카와 고미네성은 총 석재로 지어진 성으로, 도호쿠 지방에서는 드문 구조였다. 막부 측에서도 이러한 축성 기술을 높이 사 무쓰의 입구인 요충지에 나가시게에게 영지를 하사했다.
나가시게는 사망에 즈음하여 아들과 가신들에게 "쇼군(장군)의 은혜를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막료들과 원만하게 지내며, 도쿠가와 막부에 충성을 다하라. 그러나, 임기응변을 너무 부리거나 아첨하는 것은 좋지 않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가와이 아쓰시는 이 유언에서 나가시게의 견실하고 성실한 인품이 드러난다고 평가했다.
아사이나와테 전투 이후 강화 조약을 위해 마에다 씨로부터 마에다 도시쓰네가 인질로 보내졌다. 도시쓰네는 마에다 도시이에의 아들이었지만, 다른 형제들과 달리 신분이 낮은 측실 소생의 서자였다. 고마쓰성에 억류되어 있던 도시쓰네에게 나가시게가 직접 배를 깎아 준 적이 있었다. 도시쓰네는 만년까지 배를 먹을 때마다 이 추억을 이야기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5. 가신
니와 나가시게를 섬긴 가신은 다음과 같다.
6. 관련 작품
* 세키가하라 (시바 료타로)
* 우츠로야 군사 (미노와 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