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다 미쓰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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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다 미쓰히사는 마쓰모토번의 번주였으며, 에도 시대 말기와 메이지 시대에 걸쳐 활동했다. 그는 1828년에 태어나 1845년 아버지의 은퇴로 번주가 되었고, 막부 말기에는 가즈노미야의 에도 행렬 경비를 맡는 등 여러 임무를 수행했다. 보신 전쟁 이후 신정부에 협력하여 나가오카 정벌과 아이즈 정벌에 참전했으며, 도쿠가와 씨족과의 관계를 끊기 위해 성씨와 가문의 문장을 변경했다. 1869년에는 판적 봉환으로 마쓰모토 번 지사가 되었으며, 폐불훼석 운동을 강력하게 지지했다. 1881년 은퇴 후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1892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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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다 미쓰히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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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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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마쓰다이라 미쓰노리 / 도다 미쓰노리 |
출생 | 문정(文政) 11년 7월 27일 ( 1828년9월 6일) |
사망 | 메이지 25년 (1892년) 12월 30일 |
묘소 | 도쿄도도시마구고마고메의 소메이 묘원 |
초기 이름 | 마쓰다이라 미쓰히데 |
씨족 | 도다 마쓰다이라 가문 → 도다 가문 |
관직 | |
관위 | 종5위 하, 탄정소필, 단바노카미 |
막부/정부 | 에도 막부 → 메이지 정부 |
주군 | 徳川家慶 → 家定 → 家茂 → 慶喜 → 메이지 천황 |
번 | 시나노마쓰모토 번 번주 → 마쓰모토 번 지사 |
가족 관계 | |
아버지 | 마쓰다이라 미쓰쓰네 |
어머니 | 요시노 씨 |
형제 | 小笠原長国, 미쓰노리, 内藤政恒, 戸田光芬, 戸田光遠, 野々山義比, 松平康載(板倉勝観), 사다, 효 등 |
아내 | 시게 (溝口直諒의 딸) |
자녀 | 戸田康泰 (장남), 戸田氏懿 (3남), 戸田光祐 (4남), 시마코 (戸田忠恕의 아내), 가야코 (松平忠興의 아내), 교코 (相馬誠胤의 아내), 료코 (小笠原貞孚의 아내), 게이코 (石川重之의 아내) |
다이묘로서의 정보 | |
전임자 | 마쓰다이라 미쓰쓰네 |
후임자 | 폐번치현 |
직책 | 마쓰모토 번 번주 (도다 마쓰다이라 가문) |
대수 | 9 |
임기 | 1845년 ~ 1871년 |
2. 생애
분세이 11년(1828년), 마쓰모토번의 8대 번주가 되는 마쓰다이라 미쓰쓰네의 차남으로 태어났다.[1] 덴포 13년(1842년) 5월 25일, 전년에 사망한 양자인 미쓰히로를 대신하여 미쓰쓰네의 후계자가 되었다. 같은 해 10월 1일, 쇼군 도쿠가와 이에요시를 알현하였다.[1] 같은 해 10월 29일, 종5위하·탄정소보에 서임되었다. 고카 2년(1845년) 10월 22일, 아버지 미쓰쓰네가 은퇴하면서 가독을 상속받아 마쓰모토번의 번주가 되었다.[1]
분큐 원년(1861년) 가즈노미야가 에도로 가는 길에 나카센도의 모토야마주쿠에서 시모스와주쿠까지 연도 수비를 담당했다.[1] 분큐 2년(1862년), 도젠지 경비 임무를 맡았지만, 번사 이토 군베가 일으킨 제2차 도젠지 사건으로 인해 처벌을 받았다.[1] 이듬해 사가미 국우라가의 경비 임무를 맡았다.[1]
겐지 원년(1864년), 덴구당의 난 진압을 위해 나카센도 와다 고개에 파병되었지만 패퇴하였다. 금문의 변이 일어나자, 친척에 해당하는 오기마치산조 사네아이 저택에 번사를 파견하여 경비를 맡게 했다. 조슈 정벌에도 막부 측으로 참전했다.
왕정 복고 후 게이오 4년(1868년) 1월 2일, 전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도바·후시미 전투를 일으킨 것을 받아 신정부는 요시노부 추토령을 내렸고, 요시노부는 역적이 되었다. 미쓰노리는 칙령에 따라 마쓰다이라 성을 폐기하고 도다로 복성했다. 또한 가문의 아오이 문도 폐기했다.
그 후, 관군에 참가하여 나가오카 정벌과 아이즈 정벌에 종군했다. 그 당시의 전공으로 다음 해 메이지 2년(1869년)에 상전록 3000석을 하사받았다. 그 후 같은 해 6월 19일에 판적 봉환으로 마쓰모토 번 지사에 임명됨과 동시에 화족에 열하고, 메이지 4년(1871년) 7월 14일의 폐번치현까지 번 지사를 맡았다.
1869년, 미쓰히사는 폐불훼석 운동을 강력히 지지하여, 그의 영토 내의 많은 불교 사찰을 파괴했으며, 가문의 사당을 포함하여, 그의 가신들에게 앞으로 국가 신토 의식에 따라 장례를 치르도록 요구했다.[1] 그는 이름을 도다 미쓰히사(戸田 光則)로 변경하고, 패배한 도쿠가와 씨족으로부터 더욱 거리를 두기 위해 가문의 문장을 바꿨다.[1]
1881년, 아들 도다 야스히로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퇴했다.[1] 1884년, 화족령에 따라 자작(시샤쿠) 작위를 받았다.[1] 1892년, 사망하여 도쿄 소메이 묘지에 묻혔다.[1]
2. 1. 초기 생애와 가독 상속
분세이 11년(1828년), 마쓰모토번의 8대 번주가 되는 마쓰다이라 미쓰쓰네의 차남으로 태어났다.[1] 덴포 13년(1842년) 5월 25일, 전년에 사망한 양자인 미쓰히로를 대신하여 미쓰쓰네의 후계자가 되었다. 같은 해 10월 1일, 쇼군 도쿠가와 이에요시를 알현하였다.[1] 같은 해 10월 29일, 종5위하·탄정소보에 서임되었다. 고카 2년(1845년) 10월 22일, 아버지 미쓰쓰네가 은퇴하면서 가독을 상속받아 마쓰모토번의 번주가 되었다.[1]분큐 원년(1861년)에는 가즈노미야가 에도로 가는 길에 나카센도의 모토야마주쿠에서 시모스와주쿠까지 연도 수비를 담당했다.[1] 분큐 2년(1862년), 도젠지 경비 임무를 맡았지만, 번사 이토 군베가 일으킨 제2차 도젠지 사건으로 인해 처벌을 받았다.[1] 이듬해 사가미 국우라가의 경비 임무를 맡았다.[1]
겐지 원년(1864년), 덴구당의 난 진압을 위해 나카센도 와다 고개에 파병되었지만 패퇴하였다. 금문의 변이 일어나자, 친척에 해당하는 오기마치산조 사네아이 저택에 번사를 파견하여 경비를 맡게 했다. 조슈 정벌에도 막부 측으로 참전했다.
왕정 복고 후 게이오 4년(1868년) 1월 2일, 전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도바·후시미 전투를 일으킨 것을 받아 신정부는 요시노부 추토령을 내렸고, 요시노부는 역적이 되었다. 미쓰노리는 칙령에 따라 마쓰다이라 성을 폐기하고 도다로 복성했다. 또한 가문의 아오이 문도 폐기했다.
2. 2. 에도 막부 말기의 활동
분큐 원년(1861년), 가즈노미야가 에도로 향할 때, 나카센도의 모토야마주쿠에서 시모스와주쿠까지의 경로 경비를 담당했다.[1] 분큐 2년(1862년)에는 도젠지 경비를 맡았으나, 번사 이토 군베가 제2차 도젠지 사건에 연루되어 처벌받았다.[1] 이후 사가미 국 우라가의 경비 임무를 맡았다.[1][2]겐지 원년(1864년), 덴구당의 난 진압을 위해 나카센도 와다 고개에 파병되었으나 패배했다.[1] 같은 해 금문의 변에서는 오기마치산조 사네아이 저택 경비를 맡았다.[1] 조슈 정벌에는 막부 측으로 참전했다.[1]
2. 3. 메이지 유신과 번정 개혁
1868년, 보신 전쟁에서 신정부군에 항복하고, 이후 나가오카 정벌과 아이즈 정벌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1] 도쿠가와 요시노부 추토령에 따라 마쓰다이라 성을 버리고 도다로 복성했다.[2]1869년, 판적봉환으로 마쓰모토번지사가 되었고, 1871년 폐번치현까지 번정을 이끌었다.[1] 폐불훼석 운동을 강력히 지지하여, 그의 영토 내의 많은 불교 사찰을 파괴했으며, 가문의 사당을 포함하여, 그의 가신들에게 앞으로 국가 신토 의식에 따라 장례를 치르도록 요구했다.[1]
겐지 원년(1864년), 덴구당의 난 진압을 위해 나카센도 와다 고개에 파병했지만 패퇴했다. 금문의 변이 일어나자, 친척에 해당하는 오기마치산조 사네아이 저택에 번사를 파견하여 경비를 맡게 했다. 조슈 정벌에도 막부 측으로 참전했다.
분큐 원년(1861년) 가즈노미야 강가에서는 나카센도모토야마주쿠에서 시모스와주쿠까지 연도 수위를 담당했다. 분큐 2년(1862년), 막부의 명령에 따라 도젠지 경위역을 맡았지만, 번사 이토 군베가 일으킨 제2차 도젠지 사건으로 인해 미쓰노리는 차단되었고, 이듬해 사가미 국우라가의 경비역을 명받았다.
2. 4. 메이지 시대와 말년
마쓰다이라 미쓰쓰네의 차남으로 태어난 마쓰다이라 미쓰히사는 1842년 5월에 후계자로 선언되었으며, 같은 해 쇼군 도쿠가와 이에요시를 공식 알현했다.[1] 1845년 그의 아버지가 은퇴하면서 마쓰모토번의 다이묘가 되었다.[1]분큐 원년(1861년)의 가즈노미야 강가에서는 나카센도모토야마주쿠에서 시모스와주쿠까지 연도 수위를 담당했다.[1] 분큐 2년(1862년), 막부의 명령에 따라 도젠지 경위역을 맡았지만, 번사 이토 군베가 일으킨 제2차 도젠지 사건으로 인해 미쓰노리는 차단되었고, 이듬해 사가미 국우라가의 경비역을 명받았다.
겐지 원년(1864년), 덴구당의 난 진압을 위해 나카센도 와다 고개에 파병했지만 패퇴한다. 금문의 변이 일어나자, 친척에 해당하는 오기마치산조 사네아이 저택에 번사를 파견하여 경비를 맡게 했다. 조슈 정벌에도 막부 측으로 참전했다.
왕정 복고 후의 게이오 4년(1868년) 1월 2일에 전 장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도바·후시미 전투를 일으킨 것을 받아 신정부는 1월 10일에 요시노부 추토령을 내렸고, 요시노부는 조적이 되었다. 1월 27일에는 "도쿠가와 요시노부 반역에 대해 마쓰다이라의 성을 칭하고 있는 자는 (생략) 속히 각 본성으로 복귀"할 것을 명하는 칙명이 내려졌다. 미쓰노리는 칙령에 순종하여 마쓰다이라 성을 폐기하고 도다로 복성했다. 또한 가문의 아오이 문도 폐기했고, 메이지 이후의 도다가는 육요 문을 사용했다.
그 후, 관군에 참가하여 나가오카 정벌과 아이즈 정벌에 종군했다. 그 당시의 전공으로 다음 해 메이지 2년(1869년)에 상전록 3000석을 하사받았다. 그 후 같은 해 6월 19일에 판적 봉환으로 마쓰모토 번 지사에 임명됨과 동시에 화족에 열하고, 메이지 4년(1871년) 7월 14일의 폐번치현까지 번 지사를 맡았다.
1869년, 미쓰히사는 폐불훼석 운동을 강력히 지지하여, 그의 영토 내의 많은 불교 사찰을 파괴했으며, 가문의 사당을 포함하여, 그의 가신들에게 앞으로 국가 신토 의식에 따라 장례를 치르도록 요구했다.[1] 그는 이름을 도다 미쓰히사(戸田 光則)로 변경하고, 패배한 도쿠가와 씨족으로부터 더욱 거리를 두기 위해 가문의 문장을 바꿨다.[1]
1881년, 아들 도다 야스히로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퇴했다.[1] 1884년, 화족령에 따라 자작(시샤쿠) 작위를 받았다.[1] 1885년 (메이지 18년) 7월 13일 - 훈5등 쌍광욱일장을 수여받았다.[4] 1892년, 사망하여 도쿄 소메이 묘지에 묻혔다.[1]
3. 가족 관계
- 마쓰다이라 미쓰쓰네 (아버지)
- 요시노 씨 - 측실 (어머니)
- 시게 - 미조구치 나오사다의 딸
- 도다 야스야스 (장남)
- 도다 우지노리 (3남)
- 도다 미쓰스케 (4남)
- 시마코 - 도다 타다히로의 아내
- 치요코 - 마쓰다이라 타다오키의 아내
- 교코 - 소마 사네타네의 아내
- 료코 - 오가사와라 사다히로의 아내
- 게이코 - 이시카와 시게유키의 아내
4. 평가
도다 미쓰히사는 보신 전쟁 당시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메이지 유신 이후 신정부에 적극 협력하며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특히 폐불훼석을 강력하게 추진하여 자신의 영지 내 불교 사찰들을 파괴하고 가신들에게 국가 신토 의식에 따른 장례를 치르도록 하는 등 종교 정책에서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1868년 보신 전쟁 중 황제군이 마쓰모토번에 도착하기 직전 번은 항복하고 황제 측으로 전향하였으며, 이후 마쓰모토번 출신 병력은 호쿠에츠 전투와 아이즈 전투에서 메이지 정부를 위해 싸웠다. 그러나 메이지 정부 지원에 늦은 점을 이유로 영지 고쿠다카에서 3000 코쿠를 잃는 처벌을 받았다.
5. 등장 작품
5. 1. 텔레비전 드라마
야나미 잇키가 아츠히메에서 도다 미쓰히사를 연기했다.참조
[1]
서적
松本藩 (シリーズ藩物語)
Gensai Shokan
2007
[2]
Kotobank
2022-11-21
[3]
서적
明治華族名鑑
https://dl.ndl.go.jp[...]
深沢堅二
1881
[4]
간행물
官報 第610号「賞勲叙任」
1885-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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