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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사 이치조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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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사 이치조 씨는 오닌의 난을 피해 도사국으로 내려간 이치조 노리후사를 시작으로, 센고쿠 시대에 도사 지역에서 세력을 떨쳤던 씨족이다. 나카무라 고쇼를 중심으로 '작은 교토'라 불릴 정도로 번영을 누렸으며, 도사 칠웅 중 맹주적인 존재였다. 4대 당주 이치조 가네사다 대에 조소카베 모토치카에게 멸망했다. 메이지 시대에 이치조 사네모토가 남작 작위를 받으면서 잠시 재흥되었으나 단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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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사 이치조 씨
기본 정보
가명도사 이치조 씨(土佐一条氏)
가문이치조 후지(一条藤)
본성후지와라 북가(藤原北家) 구조 류(九条流) 이치조 가(一条家)의 서류
가조이치조 노리후사(一条教房)
종별공가(公家), 화족(華族, 남작)
출신지야마시로국(山城国) 아타고 군(愛宕郡) 이치조도리(一条通) 무로마치도리(室町通)
근거지도사국(土佐国) 하타 군(幡多郡) 나카무라 시(中村市)
도쿄 시(東京市) 麻布区
출신 저명인물이치조 후사이(一条房家)
이치조 가네사다(一条兼定)
도이 소잔(土居宗珊, 이치조 이에타다(一条家忠))
지류 및 분가도이 이마키 씨(土居今城氏, 가로(家老))
히가시코지 씨(東小路氏)
니시코지 씨(西小路氏)
이치조 후지(一条藤)
이치조 후지(一条藤)

2. 역사

센고쿠 시대 도사국(土佐国)에 정착한 구게(公家) 이치조 가(一条家)의 한 분파이다. 오닌 2년(1468년) 전 간파쿠(関白) 이치조 노리후사(一条教房)가 도사 고쿠진(土佐国人) 오히라 씨(大平氏) 등의 원조로 집안 소유 영지인 하타 장(幡多荘) 나카무라(中村)로 내려간 것을 시작으로, 초대 이치조 후사이에(一条房家)부터 후사후유(房冬), 후사모토(房基), 가네사다(兼定), 다다마사(内政)까지 5대에 걸쳐 이어졌다.

처음에는 집안 소유 영지 회복을 추구했으나, 호소카와씨(細川氏)의 슈고 령국제(守護領国制)가 붕괴된 뒤 파격적인 집안 위격을 활용, 고쿠진들 사이의 분쟁 조정 등을 행하는 세력으로 확대되었다. 후사모토 대에는 동쪽 다카오카 군(高岡郡) 남부도 손에 넣고 분고국(豊後国) 오토모 씨(大友氏)와 연계하여 이요국(伊予国) 남부를 침입하는 등 세를 과시했다.

도사 이치조 씨는 지방에 「재국」(在国)하면서 구게로서 높은 관위를 가지고 도사 국 최남단부 하타 군 및 다카오카 군(고치현 서부)을 지배한 「지역 권력」이었다. 「센고쿠 구게 다이묘」(戦国公家大名)라고도 불리나, 이는 애매한 개념으로 교토 구게였던 이치조 씨가 무가화(化)한 존재라도 센고쿠 다이묘(戦国大名)는 아니라고 논의된다.[31][32] 이치조 노리후사가 도사 이치조 씨가 대대로 도사 고쿠시(国司)를 지냈다는 설이 있고,[33] 『아시카가키세이키(足利季世記)』에 도사 이치조 씨를 삼국사가(三国司家) 중 하나로 꼽지만, 확실한 사료에는 증명되지 않는다.[34]

센고쿠 시대에도 이치조 종가와 관계는 유지되어 양자연조(養子縁組)를 맺거나 교토 이치조 가 종가 당주가 후견역을 맡기도 했다. 도사 이치조 씨 역대 당주 관위는 정2위(正二位)나 종3위(従三位)로 높아 고셋케(五摂家)와 혈연이라는 귀종성(貴種性)도 영지 통치에 큰 역할을 했다. 도사 국 주요 7고쿠진 ("도사 칠웅(土佐七雄)") 맹주와 같은 위치였다.

1468년 (오닌 2년) 9월, 오닌의 난으로 교토를 떠나 피난했던 이치조 노리후사는 나라(奈良)에서 집안 소유 장원(荘園)인 도사 국 하타 장원(幡多荘)으로 내려갔다. 하타 장원은 가마쿠라 시대부터 이치조 씨가 경영하던 장원으로 경영과 지배 안정, 강화를 위해 내려간 것이다.[36][37] 즉 피난 목적이 아니라 장원 경영 강화가 목적이었다.

노리후사는 하타 군 중심 현지 고쿠진 영주들 지지를 얻고, 분메이 연간 거점으로 「나카무라 관」(中村館)을 지었다.[38] 이 저택은 이후 「'''나카무라 고쇼'''」('''中村御所''')로 불렸다. 노리후사와 함께 구게나 무사, 직인(職人)들도 하타 장으로 내려와[39] 훗날 ‘작은 교토’로 불릴 나카무라 번영 기초를 쌓았다.

도사에서 태어난 최초의 당주인 '''후사이에'''(노리후사의 차남)는 교토로 돌아가지 않고 하타 장에 눌러앉아 재지 영주가 되었고, 나카무라 고쇼를 거점으로 나카무라에 교토를 본뜬 거리를 조성했다. 에이쇼 13년(1516년) 12월에는 상경해 조정으로부터 곤노다이나곤(権大納言) 관직을 받았다.

후사이에 대에 도사 이치조 씨는 도사 슈고를 겸하고 있던 간레이 호소카와 씨와 도사를 양분하는 세력[40]이 되었고, 공가로서의 권위도 유지하면서 도사에서 세력을 가지고 존재감을 높였다. 후사이에의 적남 후사후유의 정실은 종친 후시미노미야 구니타카 친왕의 딸, 측실은 스오의 센고쿠 다이묘 오우치 요시오키의 딸을 각각 맞이하였으며, 딸을 이요국의 사이온지 긴노부에게 시집보내는 등 공가와 무가 양쪽의 유력자들과 혼인을 통해 도사 이치조 씨의 안정을 도모했다. 또한, 후사이에의 차남 후사미치는 큰삼촌 후유요시의 사위 양자가 되어 간파쿠로 승진하기까지 했다.

1507년 (에이쇼 4년) 에이쇼 착란으로 호소카와 씨가 중앙으로 불려 가면서 도사에서의 영향력이 깎이고, 도사 국은 도사 칠웅이라 불리는 일곱 고쿠진 세력이 할거하는 상태가 되었다. 도사 이치조 씨도 그 칠웅에 속했으며, 그 상위에 있는[41] 맹주적 존재였다.

'''도사 칠웅 일람''' (『조겐 이야기』에서, 1관은 1~2석)

씨족영지관(貫)
도사 이치조 씨하타 군16,000
모토야마 씨나가오카 군5,000
기라 씨아가와 군5,000
아키 씨아키 군5,000
쓰노 씨다카오카 군5,000
고소카베 씨가미 군4,000
오히라 씨다카오카 군4,000
조소카베 씨나가오카 군3,000



이 밖에 에도 시대의 군담소설인 『도사 이야기』에는 야마다 씨, 가타오카 씨를 더 포함해 아홉 씨족이 유력 호족으로 기록되어 있다.

1508년 (에이쇼 5년) 조소카베 가네쓰구가 모토야마 씨 등에 의해 공격당해 죽었을 때, 후사이에는 그의 아들 지오마루를 보호하여 그 재흥을 도왔다고 한다.

2대 당주 '''후사후유''' 이후 도사 이치조 씨는 공가보다 주변의 유력 다이묘들과의 혼인을 중시하게 되었고, 후사후유의 적남 후사모토는 오토모 요시아키의 딸을 아내로 맞아 태어난 아키타를 이토 요시마스에게 시집보내고, 후사모토의 적남 가네사다도 처음에는 우쓰노미야 도요쓰나의 딸, 이어 오토모 요시시게의 딸을 아내로 하여 인근 여러 구니들과의 동맹을 강화하려 애썼다.[40] 후사후유는 아버지가 사망하고 2년 뒤인 1541년(덴분 10년) 11월 6일에 병으로 사망했다.[42]

3대 '''후사모토'''는 1542년(덴분 11년)에 모반한 쓰노 모토타카(후사이에의 사위)를 쳐서 1546년(덴분 15년) 쓰노 씨의 항복을 받아냈다. 같은 시기 오히라 씨의 본거지였던 하스이케 성을 빼앗고 다카오카 군 일대를 지배하에 두었다. 또한 이요 남부로 진출을 도모하는 등 세력을 확대하였다. 그러나 이치조 후사모토는 1549년(덴분 18년) 4월 사망한다. 자해했다고 하지만 암살당했을 가능성도 지적되고 있다.[43]

7세로 가독(4대)을 이은 '''가네사다'''(후사모토의 적남)는 아버지 후사모토가 사망하고 이치조 후사미치의 유자(猶子)가 되어 상경하였다. 다시 도사로 내려간 것은 1556년(고지 2년)부터 1557년(고지 3년) 사이의 일이다.

조소카베 모토치카(구니치카의 아들)가 하타로 쳐들어 오자 도사 이치조 씨 가신들은 앞다투어 모토치카에게 항복했고, 가네사다는 분고국으로 물러났다. 이에 대해서는 모토치카와 교토 이치조 다다모토 간 협의, 또는 이치조 다다모토의 승인에 의해 모토치카가 가네사다를 추방한 것이라 여겨진다.[44][45][46][47]

1575년(덴쇼 3년) 이치조 가네사다는 큰아버지이자 장인인 오토모 소린의 지원하에 복권을 도모하여 도사로 쳐들어 갔으나, 시만토 강 전투에서 조소카베에게 패하고 몰락하고 만다. 훗날 가네사다는 이요 우와지마 앞바다의 도지마에 은거하였다. 가네사다는 그 뒤에도 이요나 도사에 남은 친이치조 세력과의 연계 제휴를 도모하는 등 1585년(덴쇼 13년) 급서할 때까지 계속해서 재기를 도모하였다고 한다.[48]

가네사다가 은거한 뒤 가독(5대)을 이은 '''다다마사'''(가네사다의 적남)는 조소카베 모토치카에 의해 형식적인 도사 국주(土佐国主)가 되었다. 이로 하여 모토치카가 도사 국내의 실효 지배를 행하였다는 이른바 고쇼 체제(御所体制)로 설명하는 의론도 있는데,[49] 이 고쇼 체제라는 개념을 의문시하는 지적도 있다. 그 뒤 조소카베 가신 하카와 겐바의 모반에 가담했다는 의심을 사서 다다마사는 이요로 쫓겨나고 말았다.

다다마사가 쫓겨난 뒤 가독(6대)을 이은 것은 '''마사치카'''(다다마사의 아들)였다. 마사치카는 외할아버지 모토치카의 가신인 구레타 사다유키에게서 양육되었으므로 '구레타 고쇼'라고도 불렸다. 마사치카는 헤쓰기가와 전투 뒤에 셋쓰카미(摂津守)로 임관되었으나, 조소카베 씨가 멸망한 뒤 교토 또는 야마토국으로 물러났다고 전하며, 그 뒤 소식을 알 수 없게 되었다. 도사 이치조 씨는 여기에서 잠시 단절된다.

메이지 시대(明治時代)에 이치조 종가에서 이치조 사네모토(一条実基)를 당주로 하는 도사 이치조 가(土佐一条家)가 다시 세워졌다. 이치조 공작가의 분가로써 남작(男爵) 가문에 포함되었으나 아들은 없었다.[35]

메이지 시대 공작 이치조 사네테루(一条実輝)의 장남 이치조 사네모토(一条実基)는 이미 이치조 공작가에 구조 공작가에서 양자가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이치조 공작가를 이을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이미 대가 끊겼던 도사 이치조 가를 다시 일으키는 형태로 분가하게 되었다. 1902년(메이지 35년) 2월에 이치조 사네테루 공작, 구조 미치타카(九条道孝) 공작, 고노에 도쿠마로(近衛篤麿) 공작이 연명으로 "이치조 사네모토 수작 원서"를 일본 궁내성에 제출하였다. 구조 미치타카의 동생 다다요시(忠善)가 쓰루도노 가(鶴殿家), 구가 다케미치(久我建通)의 넷째 아들 미치시로(通城)가 기타바타케 가(北畠家)를 다시 일으켜 각자 남작 작위를 일본 조정으로부터 받은 선례에 따라, 도사 이치조 가를 다시 일으킨 사네모토에게도 작위를 주도록 청원하였다. 이 청원은 그 달 26일에 메이지 덴노의 재가를 얻어 3월 10일 자로 사네모토는 남작 작위를 받았다.

도사 이치조 남작가의 저택은 일본 도쿄 시(東京市) 아자부구(麻布区) 신류도 정(新龍土町)에 있었다.

2. 1. 성립 배경

센고쿠 시대 도사국(土佐国)에 정착한 구게(公家) 이치조 가(一条家)의 한 분파이다. 오닌 2년(1468년) 전 간파쿠(関白) 이치조 노리후사(一条教房)가 도사 고쿠진(土佐国人) 오히라 씨(大平氏) 등의 원조로 집안 소유 영지인 하타 장(幡多荘) 나카무라(中村)로 내려간 것을 시작으로 한다. 초대 이치조 후사이에(一条房家)부터 후사후유(房冬), 후사모토(房基), 가네사다(兼定), 다다마사(内政)까지 5대에 걸쳐 이어졌다.

처음에는 집안 소유 영지 회복을 추구했으나, 호소카와씨(細川氏)의 슈고 령국제(守護領国制)가 붕괴된 뒤 파격적인 집안 위격을 활용, 고쿠진들 사이의 분쟁 조정 등을 행하는 세력으로 확대되었다. 후사모토 대에는 동쪽 다카오카 군(高岡郡) 남부도 손에 넣고 분고국(豊後国) 오토모 씨(大友氏)와 연계하여 이요국(伊予国) 남부를 침입하는 등 세를 과시했다.

도사 이치조 씨는 지방에 「재국」(在国)하면서 구게로서 높은 관위를 가지고 도사 국 최남단부 하타 군 및 다카오카 군(고치현 서부)을 지배한 「지역 권력」이었다. 「센고쿠 구게 다이묘」(戦国公家大名)라고도 불리나, 이는 애매한 개념으로 교토 구게였던 이치조 씨가 무가화(化)한 존재라도 센고쿠 다이묘(戦国大名)는 아니라고 논의된다.[31][32] 이치조 노리후사가 도사 이치조 씨가 대대로 도사 고쿠시(国司)를 지냈다는 설이 있고,[33] 『아시카가키세이키(足利季世記)』에 도사 이치조 씨를 삼국사가(三国司家) 중 하나로 꼽지만, 확실한 사료에는 증명되지 않는다.[34]

센고쿠 시대에도 이치조 종가와 관계는 유지되어 양자연조(養子縁組)를 맺거나 교토 이치조 가 종가 당주가 후견역을 맡기도 했다. 도사 이치조 씨 역대 당주 관위는 정2위(正二位)나 종3위(従三位)로 높아 고셋케(五摂家)와 혈연이라는 귀종성(貴種性)도 영지 통치에 큰 역할을 했다. 도사 국 주요 7고쿠진 ("도사 칠웅(土佐七雄)") 맹주와 같은 위치였다.

1468년 (오닌 2년) 9월, 오닌의 난으로 교토를 떠나 피난했던 이치조 노리후사는 나라(奈良)에서 집안 소유 장원(荘園)인 도사 국 하타 장원(幡多荘)으로 내려간다. 하타 장원은 가마쿠라 시대부터 이치조 씨가 경영하던 장원으로 경영과 지배 안정, 강화를 위해 내려간 것이다.[36][37] 즉 피난 목적이 아니라 장원 경영 강화가 목적이었다.

노리후사는 하타 군 중심 현지 고쿠진 영주들 지지를 얻고, 분메이 연간 거점으로 「나카무라 관」(中村館)을 지었다.[38] 이 저택은 이후 「'''나카무라 고쇼'''」('''中村御所''')로 불렸다. 노리후사와 함께 구게나 무사, 직인(職人)들도 하타 장으로 내려와[39] 훗날 ‘작은 교토’로 불릴 나카무라 번영 기초를 쌓았다.

2. 2. 센고쿠 시대의 발전과 쇠퇴

센고쿠 시대도사에 정착한 구게(공가) 이치조 씨의 한 갈래이다. 오닌 2년(1468년) 전 간파쿠(관백) 이치조 노리후사가 도사 고쿠진(국인) 오히라 씨 등의 원조로 영지인 하타 장 나카무라로 내려간 것을 시작으로, 초대 이치조 후사이에로부터 후사후유, 후사모토, 가네사다, 다다마사까지 5대에 걸쳐 이어졌다. 당초에는 영지 회복을 꾀했으나, 호소카와 씨의 슈고(수호)령국제가 붕괴된 후에는 그 파격적인 가문의 위세를 활용하여 고쿠진들 간의 분쟁 조정 등을 행하는 세력으로 확대되었다. 후사모토 대에는 동쪽의 다카오카 군 남부도 손에 넣고, 분고국의 오토모 씨와 연계하여 이요국 남부를 침략하는 등 세력을 떨쳤다.

도사 이치조 씨는 지방에 있으면서도 공가로서 높은 관위를 가지고 있었고, 도사국 최남단부에 위치한 하타 군 및 다카오카 군(고치현 서부)을 지배한 "지역 권력"이었다. "센고쿠 공가 다이묘"라고도 불리지만, 이는 매우 애매한 개념으로, 원래 교토의 공가였던 이치조 씨가 무가화(武家化)된 존재라고 해도 센고쿠 다이묘라고는 할 수 없다는 논의가 있다.[31][32]

또한, 이치조 노리후사를 시작으로 도사 이치조 씨가 대대로 도사의 고쿠시(국사)를 지냈다는 설이 있고,[33] 『아시카가 계세기』에는 도사 이치조 씨를 삼국사가의 하나로 꼽고 있지만, 확실한 사료에서는 도사 이치조 씨가 고쿠시를 지냈다는 것이 증명되지 않고 있다.[34]

센고쿠 시대에도 이치조 종가와의 관계는 유지되었고, 양자 결연을 맺거나 교토 이치조 가의 종가 당주가 후견인 등을 맡기도 했다. 도사 이치조 씨 역대 당주들의 관위는 정2위나 종3위로 상당히 높았으며, 고셋케(오섭가)와의 혈연이라는 귀족적 성격도 영지를 다스리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도사 국의 주요 7개 고쿠진, 즉 도사 칠웅의 맹주와 같은 위치에 도사 이치조 씨가 있었다.

이후 세력을 키운 조소카베 씨에 의해 멸망당하였다.

메이지 시대에 이르러 이치조 종가로부터 이치조 사네모토를 당주로 하는 도사 이치조 가(土佐一条家)가 다시 세워졌으며, 이치조 공작가(一条公爵家)의 분가로서 남작 반열에 들었으나 아들은 없었다.[35]

도사에서 태어난 최초의 당주인 '''후사이에'''(노리후사의 차남)는 교토로 돌아가지 않고 하타 장에 눌러앉아 재지 영주가 되었고, 나카무라 고쇼를 거점으로 나카무라에 교토를 본뜬 거리를 조성했다. 에이쇼 13년(1516년) 12월에는 상경해 조정으로부터 곤노다이나곤(権大納言) 관직을 받았다.

후사이에 대에 도사 이치조 씨는 도사 슈고를 겸하고 있던 간레이 호소카와 씨와 도사를 양분하는 세력[40]이 되었고, 공가로서의 권위도 유지하면서 도사에서 세력을 가지고 존재감을 높였다. 후사이에의 적남 후사후유의 정실은 종친 후시미노미야 구니타카 친왕의 딸, 측실은 스오의 센고쿠 다이묘 오우치 요시오키의 딸을 각각 맞이하였으며, 딸을 이요국의 사이온지 긴노부에게 시집보내는 등 공가와 무가 양쪽의 유력자들과 혼인을 통해 도사 이치조 씨의 안정을 도모했다. 또한, 후사이에의 차남 후사미치는 큰삼촌 후유요시의 사위 양자가 되어 간파쿠로 승진하기까지 했다.

에이쇼 4년(1507년) 에이쇼 착란으로 호소카와 씨가 중앙으로 불려 가면서 도사에서의 영향력이 깎이고, 도사 국은 도사 칠웅이라 불리는 일곱 고쿠진 세력이 할거하는 상태가 되었다. 도사 이치조 씨도 그 칠웅에 속했으며, 그 상위에 있는[41] 맹주적 존재였다.

'''도사 칠웅 일람''' (『조겐 이야기』에서, 1관은 1~2석)

씨족영지관(貫)
도사 이치조 씨하타 군16,000
모토야마 씨나가오카 군5,000
기라 씨아가와 군5,000
아키 씨아키 군5,000
쓰노 씨다카오카 군5,000
고소카베 씨가미 군4,000
오히라 씨다카오카 군4,000
조소카베 씨나가오카 군3,000



이 밖에 에도 시대의 군담소설인 『도사 이야기』에는 야마다 씨, 가타오카 씨를 더 포함해 아홉 씨족이 유력 호족으로 기록되어 있다.

에이쇼 5년(1508년) 조소카베 가네쓰구가 모토야마 씨 등에 의해 공격당해 죽었을 때, 후사이에는 그의 아들 지오마루를 보호하여 그 재흥을 도왔다고 한다.

2대 당주 '''후사후유''' 이후 도사 이치조 씨는 공가보다 주변의 유력 다이묘들과의 혼인을 중시하게 되었고, 후사후유의 적남 후사모토는 오토모 요시아키의 딸을 아내로 맞아 태어난 아키타를 이토 요시마스에게 시집보내고, 후사모토의 적남 가네사다도 처음에는 우쓰노미야 도요쓰나의 딸, 이어 오토모 요시시게의 딸을 아내로 하여 인근 여러 구니들과의 동맹을 강화하려 애썼다.[40] 후사후유는 아버지가 사망하고 2년 뒤인 덴분 10년(1541년) 11월 6일에 병으로 사망했다.[42]

3대 '''후사모토'''는 덴분 11년(1542년)에 모반한 쓰노 모토타카(후사이에의 사위)를 쳐서 덴분 15년(1546년) 쓰노 씨의 항복을 받아냈다. 같은 시기 오히라 씨의 본거지였던 하스이케 성을 빼앗고 다카오카 군 일대를 지배하에 두었다. 또한 이요 남부로 진출을 도모하는 등 세력을 확대하였다. 그러나 이치조 후사모토는 덴분 18년(1549년) 4월 사망한다. 자해했다고 하지만 암살당했을 가능성도 지적되고 있다.[43]

7세로 가독(4대)을 이은 '''가네사다'''(후사모토의 적남)는 아버지 후사모토가 사망하고 이치조 후사미치의 유자(猶子)가 되어 상경하였다. 다시 도사로 내려간 것은 고지 2년(1556년)부터 3년(1557년) 사이의 일이다.

조소카베 모토치카(구니치카의 아들)가 하타로 쳐들어 오자 도사 이치조 씨 가신들은 앞다투어 모토치카에게 항복했고, 가네사다는 분고국으로 물러났다. 이에 대해서는 모토치카와 교토 이치조 다다모토 간 협의, 또는 이치조 다다모토의 승인에 의해 모토치카가 가네사다를 추방한 것이라 여겨진다.[44][45][46][47]

덴쇼 3년(1575년) 이치조 가네사다는 큰아버지이자 장인인 오토모 소린의 지원하에 복권을 도모하여 도사로 쳐들어 갔으나, 시만토 강 전투에서 조소카베에게 패하고 몰락하고 만다. 훗날 가네사다는 이요 우와지마 앞바다의 도지마에 은거하였다. 가네사다는 그 뒤에도 이요나 도사에 남은 친이치조 세력과의 연계 제휴를 도모하는 등 덴쇼 13년(1585년) 급서할 때까지 계속해서 재기를 도모하였다고 한다.[48]

가네사다가 은거한 뒤 가독(5대)을 이은 '''다다마사'''(가네사다의 적남)는 조소카베 모토치카에 의해 형식적인 도사 국주(土佐国主)가 되었다. 이로 하여 모토치카가 도사 국내의 실효 지배를 행하였다는 이른바 고쇼 체제(御所体制)로 설명하는 의론도 있는데,[49] 이 고쇼 체제라는 개념을 의문시하는 지적도 있다. 그 뒤 조소카베 가신 하카와 겐바의 모반에 가담했다는 의심을 사서 다다마사는 이요로 쫓겨나고 말았다.

다다마사가 쫓겨난 뒤 가독(6대)을 이은 것은 '''마사치카'''(다다마사의 아들)였다. 마사치카는 외할아버지 모토치카의 가신인 구레타 사다유키에게서 양육되었으므로 '구레타 고쇼'라고도 불렸다. 마사치카는 헤쓰기가와 전투 뒤에 셋쓰카미(摂津守)로 임관되었으나, 조소카베 씨가 멸망한 뒤 교토 또는 야마토국으로 물러났다고 전하며, 그 뒤 소식을 알 수 없게 되었다. 도사 이치조 씨는 여기에서 잠시 단절된다.

2. 3. 메이지 시대의 재흥과 단절

메이지 시대(明治時代)에 이치조 종가에서 이치조 사네모토(一条実基)를 당주로 하는 도사 이치조 가(土佐一条家)가 다시 세워졌다. 이치조 공작가의 분가로써 남작(男爵) 가문에 포함되었으나 아들은 없었다.[35]

메이지 시대(明治時代) 공작 이치조 사네테루(一条実輝)의 장남 이치조 사네모토(一条実基)는 이미 이치조 공작가에 구조 공작가에서 양자가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이치조 공작가를 이을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이미 대가 끊겼던 도사 이치조 가를 다시 일으키는 형태로 분가하게 되었다. 1902년(메이지 35년) 2월에 이치조 사네테루 공작, 구조 미치타카(九条道孝) 공작, 고노에 도쿠마로(近衛篤麿) 공작이 연명으로 "이치조 사네모토 수작 원서"를 일본 궁내성에 제출하였다. 구조 미치타카의 동생 다다요시(忠善)가 쓰루도노 가(鶴殿家), 구가 다케미치(久我建通)의 넷째 아들 미치시로(通城)가 기타바타케 가(北畠家)를 다시 일으켜 각자 남작 작위를 일본 조정으로부터 받은 선례에 따라, 도사 이치조 가를 다시 일으킨 사네모토에게도 작위를 주도록 청원하였다. 이 청원은 그 달 26일에 메이지 덴노의 재가를 얻어 3월 10일 자로 사네모토는 남작 작위를 받았다.

도사 이치조 남작가의 저택은 일본 도쿄 시(東京市) 아자부구(麻布区) 신류도 정(新龍土町)에 있었다.

3. 문화

도사 이치조 씨는 센고쿠 시대도사국(土佐国)에 정착한 구게(公家) 이치조 가(一条家)의 한 유파이다. 1468년 전임 간파쿠(関白)였던 이치조 노리후사(一条教房)가 고쿠진(土佐国人) 오히라 씨(大平氏) 등의 원조를 받아 하타 장(幡多荘) 나카무라(中村)로 내려간 것을 시작으로, 이치조 후사이에(一条房家)로부터 후사후유(房冬), 후사모토(房基), 가네사다(兼定), 다다마사(内政)까지 5대에 걸쳐 이어졌다.

도사 이치조 씨는 지방에 있으면서도 구게로서 높은 관위를 유지했으며, 고셋케(五摂家)와의 혈연이라는 귀종성(貴種性)을 바탕으로 도사 국 최남단 하타 군 및 다카오카 군(高岡郡)을 지배하는 "지역 권력"이었다. 이들은 도사 국의 주요 고쿠진(国人) 세력인 도사 칠웅(土佐七雄)의 맹주와 같은 위치에 있었다.

이치조 씨는 직접적인 군사력은 크지 않았지만, 교역 등을 통해 영내 재지 영주층의 이익을 옹호하여 고쿠진(国人)·토호(土豪)로부터 지지를 얻음으로써 세력을 유지·확대하였다.[23]

메이지(明治) 시대에 이르러 이치조 종가로부터 이치조 사네모토(一条実基)를 당주로 하는 도사 이치조 가(土佐一条家)가 다시 세워졌으며, 남작(男爵) 작위를 받았으나 아들은 없었다.[35]

3. 1. 작은 교토, 나카무라

교토에서 비롯되어 일본 열도 전체를 휩쓴 전국적인 대란을 피해 교토를 떠나 있던 이치조 노리후사는 1468년 9월, 피난해 있던 나라에서 집안 소유의 장원(荘園)인 도사국 하타 장으로 내려갔다.[36][37] 하타 장은 가마쿠라 시대 이후 이치조 씨가 경영하고 있던 장원으로, 그 경영과 지배의 안정과 강화를 위해 내려간 것이었다. 즉, 처음부터 피난 목적이 아니라 장원 경영 강화가 목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노리후사는 하타 군을 중심으로 하는 현지 고쿠진 영주들로부터 지지를 얻는데 성공했고, 분메이(文明) 연간에는 그 거점으로써 「나카무라 관」(中村館)을 지었으며,[38] 이 저택은 이후 「'''나카무라 고쇼'''」('''中村御所''')라 불리게 되었다. 또한 노리후사와 함께 구게(귀족)나 무사, 직인(職人)들도 하타 장으로 내려왔고,[39] 이들이 훗날 ‘작은 교토’라고까지 불리게 될 나카무라 번영의 기초를 쌓게 된다.

센고쿠 시대 토사국에 정착한 공가 이치조 씨는 오닌 2년(1468년) 이치조 노리후사가 토사의 국인 오오히라 씨등의 원조를 받아 영지 하타장 나카무라로 내려간 것을 시작으로 한다.

도사 이치조 씨 시대 나카무라는 "도사의 교토"(土佐の京都) 또는 "작은 교토"(小京都)로 불릴[50] 정도로 번영을 누렸다. 나카무라의 옛 거리(町並み) 자체는 1946년 난카이 지진으로 피해를 입어 거의 남지 않게 되었지만, 교토와 비슷한 지형을 지녔던 나카무라에는 여전히 많은 옛 지명들이 남아 전해지고 있다.

  • 나카무라도 교토처럼 동, 북, 서 세 방향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이 트여 있다.
  • 시만토강을 교토의 가쓰라 강, 지류인 아토 강을 교토의 가모 강에 빗댈 수 있다(아토 강 상류에 가모 강이라는 지명이 있다).
  • 아토 강 동쪽으로 뻗어 이어지는 산맥은 교토 히가시야마의 모습과 닮아 있다(지명도 히가시야마이다).
  • 북쪽의 이와미데라 산은 교토 히에이 산과 닮아 있고, 산 중턱에 엔랴쿠지를 모방한 이시미지(石身寺)가 세워졌다.
  • 교토처럼 거리가 바둑판 모양으로 구획되어 있다.
  • 많은 지샤(사찰과 신사)가 권진(勧進) 또는 건립되어 있다.

이치조 신사


후와 하치만구

  • 이치조 신사 - 나카무라 고쇼 터에 세워진 신사이다. 도사 이치조 씨의 조신(祖神) 및 역대 당주들을 모시고 있다.
  • 후와 하치만구 - 이치조 씨의 수호신으로써 노리후사에 의해 이와시미즈 하치만구로부터 권청을 받았다.

나카무라의 옛 거리(나카무라 성에서 촬영)

3. 2. 대외 교역

도사 이치조 씨는 지리적 조건을 활용하여 해상 교통 및 대외 무역에도 관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1537년 혼간지 쇼뇨가 후사후유의 '당선'(唐船) 건조 및 운영에 협력했다는 기록이 『덴분 일기』[51]에 남아있다. 이를 통해 류큐이나 조선과의 사무역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으며, 감합무역 이외의 교역로를 이용한 과의 무역이나 동남아시아 방면과의 무역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40]

오우치 씨(大内氏), 오토모 씨(大友氏), 이토 씨(伊東氏)와 같이 대외 무역에 적극적이었던 가문들과의 혼인 역시 무역로 확보를 위한 측면이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40] 이치조 씨는 직접적인 군사력은 보유하지 않았지만, 교역 등을 통해 영내 재지 영주층의 이익을 옹호함으로써 고쿠진(国人) ・ 토호(土豪)들로부터 지지를 얻었고, 이를 통해 세력을 유지, 확대할 군사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52]

4. 가신

고이치몬(御一門)



고이치몬(御一門)·가로(家老)



가로격(家老格)



산가로(三家老)



니이다 오닌슈(仁井田五人衆)



그 외 씨족 출신 가신



그 외의 공가(公家) 출신 가신[28][29]



이 외에 "이치조 덴슈(一条殿衆)"라고 불리는 53명의 가신단이 있었다고 한다.(『토사 이야기(土佐物語)』)

5. 역대 당주

# 후사이에 - 정2위, 곤대납언

# 후사후유 - 정2위, 좌근위대장

# 후사모토 - 종3위, 우근위중장, 비참의

# 가네사다 - 종3위, 곤중납언

# 다다마사 - 종4위하, 좌근위중장

# 마사치카 - 종4위하, 우에몬사, 셋츠[34]

6. 계보

센고쿠 시대 도사에 정착한 구게(공가) 이치조 가의 한 분파이다. 오닌 2년(1468년) 전임 간파쿠(관백) 이치조 노리후사가 도사 고쿠진(국인) 오히라 씨 등의 원조로 영지 하타 장 나카무라로 내려간 것을 시작으로, 초대 이치조 후사이에로부터 후사후유, 후사모토, 가네사다, 다다마사까지 5대에 걸쳐 이어졌다.

도사 이치조 씨 역대 당주들의 관계는 정2위(正二位)나 종3위(従三位)로 상당히 높았으며 고셋케(오섭가)와의 혈연이라는 귀종성(貴種性)도 영지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 큰 역할을 하였다. 도사 국의 주요 고쿠진(국인) 즉 도사 7웅의 맹주와도 같은 위치에 도사 이치조 씨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후 세력을 키운 조소카베씨(장종아부씨)에 의해 멸망당하였다.

메이지 시대에 이르러 이치조 종가로부터 이치조 사네모토를 당주로 하는 도사 이치조 가(土佐一条家)가 다시 세워졌으며, 이치조 공작가의 분가로써 남작 반열에[35] 들었으나 아들은 없었다.

도사 이치조 씨 역대 당주
대수이름비고
1이치조 후사이에이치조 노리후사의 아들
2이치조 후사후유
3이치조 후사모토
4이치조 가네사다
5이치조 다다마사조소카베 모토치카에 의해 옹립
재흥이치조 사네모토메이지 시대, 남작


참조

[1] 웹사이트 中世土佐一条氏関係の史料収集および遺跡調査とその基礎的研究 (KAKENHI-PROJECT-14510365) https://kaken.nii.ac[...] 2021-08-21
[2] 간행물 戦国末期土佐一条氏家臣『康政』の地位と権限(上) 土佐史談
[3] 논문 戦国期一条氏の家領維持政策に見る福原荘と幡多荘 赤松氏研究会
[4] 서적 中村市史 正編 中村市史編纂室編
[5] 서적 中村市史 正編 中村市史編纂室編
[6] 문서 人事興信録14版い194
[7] 간행물 『雑事記』に見る前関白「畑下向云々(上)」 土佐史談
[8] 간행물 『雑事記』に見る前関白「畑下向云々(下)」 土佐史談
[9] 문서 『大乗院寺社雑事記』文明3年正月1日条
[10] 문서 『大乗院寺社雑事記』文明元年5月25日条
[11] 서적 中世土佐の世界と一条氏 高志書院
[12] 웹사이트 長宗我部元親と土佐の戦国時代・土佐の七雄 https://www.pref.koc[...] 2021-08-21
[13] 간행물 土佐一条房冬と禁裏・古岳(嶽)宗亘の関係をめぐって 岩田書院
[14] 간행물 戦国都市中村の実像と土佐一条氏
[15] 간행물 天正時代初期の土佐一条氏(上) 土佐史談
[16] 간행물 天正時代初期の土佐一条氏(中) 土佐史談
[17] 간행물 天正時代初期の土佐一条氏(下) 土佐史談
[18] 간행물 天正時代初期の土佐一条氏―いわゆる渡川合戦―(下の2) 土佐史談
[19] 서적 中世土佐の世界と一条氏 高志書院 2010
[20] 간행물 織豊期長宗我部氏の一側面―土佐一条家との関係(御所体制)をめぐって― 土佐史談
[21] 서적 中村市史 正編 中村市史編纂室編
[22] 문서 『天文日記』天文6年12月24日、同7年正月17日・2月5日各条
[23] 서적 中世土佐の世界と一条氏 高志書院 2010
[24] 문서 教房の養子。
[25] 문서 冬良(宗家当主)の養子。
[26] 문서 大内義隆の養子。房家の四男とする記述もある。
[27] 문서 房通(宗家当主)の猶子。
[28] 논문 永禄六年の『補略』について : 戦国期の所謂「公家大名(在国公家領主)」に関する記載を中心に https://saigaku.repo[...] 埼玉学園大学 2011-12
[29] 서적 中世土佐の世界と一条氏 高志書院 2010-08
[30] 웹인용 KAKEN — 研究課題をさがす https://kaken.nii.ac[...] 2021-08-21
[31] 간행물 戦国末期土佐一条氏家臣『康政』の地位と権限(上) 土佐史談
[32] 간행물 戦国期一条氏の家領維持政策に見る福原荘と幡多荘
[33] 서적 中村市史 正編 中村市史編纂室編
[34] 서적 中村市史 正編 中村市史編纂室編
[35] 문서 人事興信録14版い194
[36] 간행물 『雑事記』に見る前関白「畑下向云々(上)」 『土佐史談』192号 1993
[37] 간행물 『雑事記』に見る前関白「畑下向云々(下)」 『土佐史談』193号 1993
[38] 서적 『大乗院寺社雑事記』文明3年正月1日条
[39] 서적 『大乗院寺社雑事記』文明元年5月25日条
[40] 서적 中世土佐の世界と一条氏 高志書院 2010
[41] 웹인용 長宗我部元親と土佐の戦国時代・土佐の七雄 {{!}} 高知県庁ホームページ https://www.pref.koc[...] 2021-08-21
[42] 논문 土佐一条房冬と禁裏・古岳(嶽)宗亘の関係をめぐって 日本史史料研究会編『日本史のまめまめしい知識』第2巻、岩田書院 2017
[43] 간행물 戦国都市中村の実像と土佐一条氏 『西南四国歴史文化論叢よど』10号 2009
[44] 간행물 天正時代初期の土佐一条氏(上) 『土佐史談』166号 1984
[45] 간행물 天正時代初期の土佐一条氏(中) 『土佐史談』167号 1985
[46] 간행물 天正時代初期の土佐一条氏(下) 『土佐史談』172号 1986
[47] 간행물 天正時代初期の土佐一条氏―いわゆる渡川合戦―(下の2) 『土佐史談』175号 1987
[48] 서적 中世土佐の世界と一条氏 高志書院 2010
[49] 간행물 織豊期長宗我部氏の一側面―土佐一条家との関係(御所体制)をめぐって― 『土佐史談』215号 2000
[50] 서적 中村市史 正編 1969
[51] 서적 『天文日記』 天文6年 12月 24日、同7年 正月 17日 ・ 2月 5日 각 조
[52] 서적 中世土佐の世界と一条氏 高志書院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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