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마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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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마즈씨는 가마쿠라 시대부터 에도 시대까지 사쓰마, 오스미, 휴가 지역을 다스린 다이묘 가문이다. 미나모토 씨의 후손으로, 70만 석 이상의 영지를 소유하며 도자마 다이묘 중 가장 강력한 가문으로 성장했다. 가문의 기원은 시마즈 다다히사로 거슬러 올라가며, 가마쿠라 막부 시대부터 규슈 지역을 장악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남북조 시대에는 분열과 통합을 거치며 세력을 유지했고, 무로마치 시대에는 쇼군과의 관계 속에서 가문의 기반을 다졌다. 센고쿠 시대에는 규슈를 통일하고 임진왜란에 참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으며, 에도 시대에는 사쓰마 번을 다스리며 막부의 견제를 받기도 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근대화에 기여하며 화족으로 편입되었으며, 현대에도 사회 각 분야에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시마즈 가문은 십자 문양을 가문 문장으로 사용했으며, 주요 사찰과 관련된 문화적 유산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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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마즈씨 | |
|---|---|
| 지도 정보 | |
| 기본 정보 | |
| 가문 문장 | Maru ni Jū-monji (Kutsuwa) inverted.svg |
| 본성 | 惟宗忌寸流朝臣 |
| 자칭 | 清和源氏 |
| 가조 | 시마즈 다다히사 |
| 종별 | 무가 화족 (공작) |
| 근거지 | 사쓰마국 오스미국 휴가국 도쿄부 가고시마현 |
| 창건 년도 | 12세기 (약 1196년) |
| 해체 | 여전히 존재 |
| 통치 종료 | 1947년, 일본국 헌법으로 작위 폐지 |
| 최종 통치자 | 시마즈 다다시게 |
| 현재 당주 | 시마즈 노부히사 |
| 주요 인물 | |
| 인물 | 시마즈 히사츠네 시마즈 다다요시 시마즈 다카히사 시마즈 요시히사 시마즈 요시히로 시마즈 도키히사 시마즈 이에히사 시마즈 시게히데 히로다이인 시마즈 나리아키라 시마즈 히사미쓰 시마즈 다다요시 덴쇼인 구니히코 왕비 시게코 |
| 지류 | |
| 지류 | 다마자토 가문 (공작) 사도하라 가문 (무가, 백작) 시게토미 가문 (무가, 남작) 가지키 가문 (무가, 남작) 다루미즈 가문 (무가, 남작) 이마이즈미 가문 (무가, 남작) 히오키 가문 (무가, 남작) 미야코노조 가문 (기타고 씨) (무가, 남작) 미야노조 가문 (무가, 남작) 이주인 씨 니이로 씨 가와카미 씨 가쓰라 씨 사타 씨 사코미즈 씨 가바야마 씨 야마다 씨 기이레 씨 노노야마 씨 마치다 씨 |
| 기타 | |
| 통자 | '충(忠)'과 '히사(久)' 사용 |
2. 역사
미나모토 씨의 세이와 겐지 분파 후손인 시마즈 가문은 가마쿠라 시대부터 에도 시대까지 영지를 지켜온 다이묘 가문 중 하나로, 전성기에는 70만 석 이상의 영지를 소유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도자마 다이묘였다. 고야산에는 시마즈 가문의 묘가 있으며, 보신 전쟁(1868~1869) 시대 사쓰마 번 사무라이들의 모습은 사진으로 남아있다.
시마즈 다다히사(1227년 사망)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히키 요시카즈의 여동생 사이에서 태어났다. 하타 씨의 후손인 고레무네 히로노부의 딸과 결혼한 그는 처음에는 고레무네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1186년 시나노 국 시오다 영지를 받았고, 이후 사쓰마 국의 슈고로 임명되었다. 1189년 요리토모를 따라 무쓰 국 원정에 참가했으며, 1196년 사쓰마로 가서 휴가 국과 오스미 국을 정복하고 휴가 국에 성을 쌓아 시마즈 영지로 삼았다.
시마즈 요시히사(1533~1611)는 시마즈 가문의 16대 당주이자 시마즈 다카히사의 장남으로,[2] 1586년 규슈 전역을 통일했으나,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 이후 은퇴했다.
17대 당주 시마즈 요시히로(1535~1619)는 세키가하라 전투, 도쿠가와 막부 성립, 오사카 전투 당시의 다이묘였다.[3] 그의 조카이자 후계자인 시마즈 다다쓰네[4]는 17세기 초 20년 동안 상당한 권력을 행사했으며, 1609년 류큐 왕국(오늘날의 오키나와현) 침략을 조직했다. 쇼군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의 패배 이후 잠재적인 반란을 막기 위해 이를 허락했다.[5] 류큐 왕국과의 무역 이익과 외국을 통치하는 유일한 다이묘 가문이라는 정치적 위상은 시마즈 가문을 일본에서 가장 강력한 다이묘 가문 중 하나로 만들었다.
시마즈 가문은 센고쿠 시대에 가신과 장교들의 충성심으로 유명했다. 이주인 씨와 시라카와 씨 같은 일부 가신 가문은 시마즈 가문의 권력 확장을 위해 노력했다. 일본에서 처음으로 전투에서 데포(조총, 특히 마치록 아르케뷰스)를 사용하고 무기 국내 생산을 시작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시마즈의 전투 전술은 1580년대 규슈 정벌에서 더 큰 적군을 물리치는 데 매우 성공적이었다. 조총 부대를 이용해 양측에서 매복하여 적을 유인하고 공황과 혼란을 야기한 후, 중앙군을 배치하여 적을 격파하는 방식이었다. 이를 통해 이토 씨, 류조지 씨, 오토모 씨 등 더 큰 가문을 물리쳤다.
시마즈 가문은 국내 생산, 효율적인 정부 및 군대 조직, 가신들의 충성심, 혼슈로부터의 고립 등으로 강력한 경제력을 가진 가문이었다. 1789년, 시마즈 시게히데(1745~1833)의 딸이 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아내가 되었고, 1856년에는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양녀(덴쇼인)가 1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아내가 되었다.[6]
시마즈 히사미쓰(1817~1887)는 다다요시의 섭정이었으며, 사쓰마 번이 주도적인 역할을 한 보신 전쟁과 메이지 유신 당시 다이묘였다.[7] 막말 시기, 사쓰마 번은 조슈 번과 함께 막부 타도 운동의 중심 세력이 되어 메이지 유신의 원동력이 되었다.
2. 1. 기원 및 가마쿠라 막부 시대
시마즈 다다히사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겐랴쿠 2년( 1185년)에 당시 일본 최대의 쇼엔인 시마즈 쇼의 지토로 임명했다. 당시 다다히사의 나이는 불과 6세였다.[22] 이후 사쓰마 국, 오스미 국, 휴가 국의 슈고직을 맡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에치젠 국의 슈고직도 추가로 맡게 되었다. 분지 5년( 1189년)에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이끄는 가마쿠라 막부군의 오슈 정벌에 10세의 나이로 동북 원정에 참여했다. 다다히사는 가마쿠라 막부 내에서 특별한 고케닌이었지만, 겐닌 3년( 1203년) 요리토모 사후 발생한 히키 요시카즈의 변에 연좌되어 일시적으로 슈고직을 잃었으나, 이후 사쓰마, 오스미, 휴가의 슈고직을 회복했다.다다히사의 장남인 시마즈 다다토키는 조큐의 난에서 가마쿠라 막부 측의 유력 무장으로 상당한 군공을 세운 것으로 보이며, 사쓰마 국, 오스미 국, 휴가 국 외에도 와카사 국 슈고직과 이가, 사누키, 이즈미, 에치젠, 오미 국 등 각지의 지토직을 얻어 가마쿠라 막부에서도 거대한 고케닌이 되었다. 조큐의 난 당시 타다토키가 사용한 타치는 ‘쓰나키리’라고 불리며, 원씨의 백기, 시조 타다히사가 애용했던 오요로이와 함께 시마즈 종가 당주가 소장해야 할 가전 삼종의 중보로 전승되었다 (『서번야사』). 난 이후 타다히사는 에치젠 국 슈고직에 보임되어 총 5개국을 소유하는 등 가마쿠라 막부 내에서도 굴지의 슈고가 되었다. 1227년( 안테이 원년) 타다히사의 사망으로 적자인 타다토키가 시마즈씨 제2대 당주 자리를 계승하고 직책을 상속받았지만, 에치젠 국 슈고직은 곧 고토 씨에게 교체되었다.
타다히사 이후의 시마즈 씨는 막부의 유력한 고케닌의 관례대로 당주는 가마쿠라에 거주하고, 현지의 실제 운영은 일족·가신을 파견하여 처리했다. 그러나 3대 시마즈 히사쓰네가 원구를 계기로 하향한 이후로 일족의 지방 정착이 본격화되었고, 4대 시마즈 타다무네는 시마즈 씨로서는 처음으로 사쓰마 땅에서 사망했다.
2. 2. 남북조 시대
시마즈 사다히사는 남북조 시대의 동란에 참여하여 활약하였다. 남북조 시대의 혼란 속에 시마즈 가문은 소슈 가문과 오슈 가문으로 분열되었다.| 형계(兄系) 시마즈씨 (소슈가(総州家)) | 동생계(弟系) 시마즈씨 (오슈가(奥州家)) | ||||
|---|---|---|---|---|---|
| 대수 | 이름 | 비고 | 대수 | 이름 | 비고 |
| 6 | 시마즈 모로히사 | 사츠마 슈고. 사다히사의 3남. 형계 시마즈씨 (소슈가 (総州家) 초대 당주 | 6 | 시마즈 우지히사 | 오스미・휴가・치쿠고 슈고. 사다히사의 4남. 동생계 시마즈씨 (오슈가 (奥州家)) 초대당주 |
| 7 | 시마즈 고레히사 | 사츠마 슈고. 형계 시마즈씨 (소슈가 (総州家) 2대 당주. 대대로 내려온 가보를 모토히사에게 양도. | 7 | 시마즈 모토히사 | 초명 「타카히사 (孝久)」. 사츠마・오스미・휴가 슈고. 동생계 시마즈씨 (오슈가 (奥州家)) 2대 당주. 가독을 통일함. |
이후 시마즈 가문은 시마즈 모토히사에 의해 재통합되었다.
2. 3. 무로마치 시대
무로마치 막부 시대에 시마즈 가문은 슈고 다이묘로서 성장하여 안정적인 기반을 다졌다. 오닌의 난에서 시마즈 가문은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지만, 이 시기부터 시마즈 가문 내부의 결속력이 약화되기 시작했다. 무로마치 시대 후기에는 혼란이 가중되면서 시마즈 가문의 세력도 점차 쇠퇴하였다.2. 4. 센고쿠 시대부터 아즈치모모야마 시대까지
센고쿠 시대에 시마즈 가문은 종가에서 서자 계통인 '''이자쿠가'''(伊作家)로 당주 자리가 옮겨졌으며, 사쓰마 번주 가문도 이 계통에 해당된다.시마즈 요시히사(1533~1611)는 시마즈 다카히사(島津貴久)의 장남이자 시마즈 가문의 16대 당주였다.[2] 1586년 규슈 전역을 통일하고 지배하는 데 성공했으나,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 이후 은퇴했다.
17대 당주 시마즈 요시히로(1535~1619)는 세키가하라 전투, 도쿠가와 막부 성립, 오사카 전투 당시의 다이묘였다.[3] 그의 조카이자 후계자인 시마즈 다다쓰네[4]는 17세기 초 20년 동안 상당한 권력을 행사했으며, 1609년 류큐 왕국(오늘날의 오키나와현) 침략을 조직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한 후 잠재적인 반란을 막기 위해 쇼군은 시마즈 가문을 달래고자 이를 허락했다.[5]
시마즈 가문은 특히 센고쿠 시대에 가신과 장교들의 충성심으로 유명했다. 이주인 씨와 시라카와 씨 같은 일부 가신 가문은 시마즈 가문의 권력 확장을 돕기 위해 어떠한 반대에도 승리할 결심을 했다. 시마즈 가문은 일본에서 처음으로 전투에서 데포(조총, 특히 마치록 아르케뷰스)를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며, 무기의 국내 생산도 시작했다. 시마즈의 전투 전술은 1580년대 규슈 정벌 과정에서 더 큰 적군을 물리치는 데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전술에는 조총 부대를 이용해 양측에서 매복하여 적을 유인하고 공황과 혼란을 야기하는 것이 포함되었다. 그 후 중앙군이 배치되어 적을 격파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시마즈 가문은 이토 씨, 류조지 씨, 오토모 씨와 같은 훨씬 더 큰 가문을 물리칠 수 있었다.
2. 5. 에도 시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시마즈 가문은 서군에 속해 패했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시마즈 가문의 영지를 그대로 인정하였다. 이로써 시마즈 가문은 에도 시대에 77만 석이라는, 다른 도자마 다이묘들을 압도하는 유력한 가문이 되었다.시마즈 요시히로(1535~1619)는 세키가하라 전투, 도쿠가와 막부 성립, 오사카 전투 당시의 다이묘였다.[3] 그의 조카이자 후계자인 시마즈 다다쓰네[4]는 17세기 초 20년 동안 상당한 권력을 행사했으며, 1609년 류큐 왕국(오늘날의 오키나와현) 침략을 주도했다. 쇼군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의 패배 이후 잠재적인 반란을 막기 위해 시마즈 가문을 달래고자 이를 허락했다.[5] 이 침략으로 류큐 왕국은 시마즈 가문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아마미 군도 역시 시마즈 가문의 영토에 편입되었다. 류큐 왕국과의 무역을 통해 얻은 이익과, 외국을 통치하는 유일한 다이묘 가문이라는 정치적 위상은 시마즈 가문을 당시 일본에서 가장 강력한 다이묘 가문 중 하나로 만들었다.
1789년, 시마즈 시게히데(1745~1833)의 딸이 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아내가 되었다.[14] 1856년에는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양녀(덴쇼인)가 1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아내가 되는[6] 등 시마즈 가문은 도쿠가와 쇼군 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기도 했다.
시마즈 히사미쓰(1817~1887)는 다다요시의 섭정이었으며, 사쓰마 번이 주도적인 역할을 한 보신 전쟁과 메이지 유신 당시 다이묘였다.[7]
막말 시기, 사쓰마 번은 조슈 번과 함께 막부 타도 운동의 중심 세력이 되어 메이지 유신의 원동력이 되었다.
2. 6. 메이지 유신 이후


마지막 사쓰마번 번주 시마즈 타다요시(島津忠義)는 메이지 유신 이후 1869년 판적봉환으로 가고시마 현령이 되었고, 화족에 포함되었다.[7] 보신 전쟁에서의 공으로 타다요시와 그의 아버지 시마즈 히사미쓰에게 10만 석의 상전록이 주어졌다. 이는 최고액으로, 시마즈 가문과 모리 가문만이 받은 은상이었다. 1871년 폐번치현까지 현령을 지냈다.
1884년 화족령에 따라 타다요시는 최고위인 공작에 봉해졌다. 원래 후작에 해당했지만, 유신에 대한 공적이 커서 공작이 되었다. 타다요시는 종일위 훈일등을 받았다.
타다요시는 외국을 싫어했지만, 1891년 러시아 황태자 니콜라이(후의 니콜라이 2세)를 가고시마 저택(센간엔)에 초대하여 환대했다. 니콜라이와 시마즈 가문은 이후 수년간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타다요시의 딸들은 황족과 결혼했다. 특히 7녀는 고준 황후의 생모가 되어, 이후 천황들은 그녀의 자손이 되었다.[34]
1897년 타다요시가 사망하자 국장이 치러졌다. 아버지 히사미쓰도 1887년 사망 당시 국장이 치러졌다. 구 다이묘 중 국장이 허락된 것은 이들 부자뿐이었다. 장남 시마즈 타다시게(島津忠重)가 작위를 계승했다. 그는 해군 군인으로, 영국 대사관 부무관 등을 역임했다.
타다시게는 1917년 서양식 저택을 완공했다. 이 저택은 다이쇼 천황 부부의 방문을 받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은행에 매각되었고, 현재는 청산여자대학 교사로 사용되며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타다시게는 가마쿠라시와 가와구치호에도 별장을 소유했다.
타다시게의 장남은 수산학자였다.
시마즈 종가에서는 1871년 히사미쓰를 조상으로 하는 타마사토 시마즈가(공작가)가 분가했고, 1893년과 1896년에는 타다요시의 아들들을 조상으로 하는 남작가가 2개 분가했다.
3. 역대 당주
| 대수 | 초상화 | 이름 | 선대와의 관계 | 관위 | 비고 |
|---|---|---|---|---|---|
| 1 | ![]() | 시마즈 다다히사 | 코레무네노 히로코토의 아들(?) | 종5위하 | 사쓰마, 오스미, 휴가, 에치젠 등의 슈고. |
| 2 | 시마즈 다다토키 | 선대의 아들 | 초명 「타다요시(忠義)」. | ||
| 3 | ![]() | 시마즈 히사쓰네 | 선대의 차남 | 증정3위 | 초명 「히사토키(久時)」. |
| 4 | -- | 시마즈 다다무네 | 선대의 아들 | 사쓰마 슈고. | |
| 5 | -- | 시마즈 사다히사 | 선대의 아들 | 사쓰마, 오스미, 휴가 슈고. |
| 형계(兄系) 시마즈씨 (소슈가(総州家)) | 동생계(弟系) 시마즈씨 (오슈가(奥州家)) | ||||||||||
|---|---|---|---|---|---|---|---|---|---|---|---|
| 대수 | 초상화 | 이름 | 선대와의 관계 | 관위 | 비고 | 대수 | 초상화 | 이름 | 선대와의 관계 | 관위 | 비고 |
| 6 | -- | 시마즈 모로히사 | 사다히사의 3남 | 사쓰마 슈고. | 6 | -- | 시마즈 우지히사 | 사다히사의 4남 | 오스미, 휴가, 치쿠고 슈고. | ||
| 7 | -- | 시마즈 고레히사 | 선대의 장남 | 사쓰마 슈고. | 7 | ![]() | 시마즈 모토히사 | 선대의 장남 | 초명 「타카히사 (孝久)」. |
| 대수 | 초상화 | 이름 | 선대와의 관계 | 관위 | 비고 |
|---|---|---|---|---|---|
| 8 | ![]() | 시마즈 히사토요 | 우지히사의 차남 | 사쓰마, 오스미, 휴가 슈고. | |
| 9 | ![]() | 시마즈 다다쿠니 | 선대의 아들 | 초명 「타카히사 (貴久)」. | |
| 10 | -- | 시마즈 다쓰히사 | 선대의 아들 | 사쓰마, 오스미, 휴가 슈고. | |
| 11 | ![]() | 시마즈 다다마사 | 선대의 아들 | 초명 「타케히사(武久)」. | |
| 12 | -- | 시마즈 다다하루 | 선대의 장남 | 사쓰마, 오스미, 휴가 슈고. | |
| 13 | -- | 시마즈 다다타카 | 선대의 동생 | 사쓰마, 오스미, 휴가 슈고. | |
| 14 | -- | 시마즈 가쓰히사 | 선대의 동생 | 초명 「타다카네(忠兼)」. | |
| 15 | ![]() | 시마즈 다카히사 | 선대의 양자 | 사쓰마, 오스미, 휴가 슈고. | |
| 16 | ![]() | 시마즈 요시히사 | 선대의 장남 | 정4위하 | 초명 「타다요시(忠良)」, 「요시타쓰(義辰)」. |
| 17 | ![]() | 시마즈 요시히로 | 선대의 동생 | 종4위하증정3위 | 초명 「타다히라(忠平)」, 「요시히로(義珍)」. |
| 18 | ![]() | 시마즈 이에히사 | 선대의 3남 | 종3위 | 초명 「타다쓰네(忠恒)」. |
| 19 | -- | 시마즈 미쓰히사 | 선대의 아들 | 종4위상 | 초명 「타다모토(忠元)」. |
| 20 | -- | 시마즈 쓰나타카 | 선대의 손자 | 종4위상 | 초명 「노부히사(延久)」. |
| 21 | -- | 시마즈 요시타카 | 선대의 아들 | 종4위상 | 초명 「타다타케(忠竹)」. |
| 22 | -- | 시마즈 쓰구토요 | 선대의 아들 | 종4위상 | 초명 「타다야스(忠休)」. |
| 23 | -- | 시마즈 무네노부 | 선대의 장남 | 종4위상 | 초명 「타다아키(忠顕)」. |
| 24 | -- | 시마즈 시게토시 | 선대의 동생 | 종4위상 | 초명 「히사카도(久門)」. |
| 25 | ![]() | 시마즈 시게히데 | 선대의 아들 | 종3위 | 초명 「히사카타(久方)」, 「타다히로(忠洪)」. |
| 26 | ![]() | 시마즈 나리노부 | 선대의 장남 | 정4위상 | 초명 「타다타카(忠堯)」. |
| 27 | ![]() | 시마즈 나리오키 | 선대의 장남 | 종3위 | 초명 「타다요시(忠温)」. |
| 28 | ![]() | 시마즈 나리아키라 | 선대의 장남 | 종4위상증정1위 | 초명 「타다카타(忠方)」. |
| 29 | ![]() | 시마즈 다다요시 | 선대의 양자 | 종1위 | 초명 「타다노리(忠徳)」, 「모치히사(茂久)」. |
| 대수 | 초상화 | 이름 | 선대와의 관계 | 관위 | 비고 |
|---|---|---|---|---|---|
| 29 | -- | 시마즈 다다요시 | 선대의 양자 | 종1위 | 초명 「타다노리(忠徳)」, 「모치히사(茂久)」. |
| 30 | -- | 시마즈 다다시게 | 선대의 4남 | 정2위 | 2대 공작. |
| 31 | -- | 시마즈 다다히데 | 선대의 장남 | 농림성 근무. | |
| 32 | -- | 시마즈 노부히사 | 선대의 차남 | 테루쿠니 신사 궁사. |
시마즈 요시히로를 17대 당주로 보는 자료는 에도 막부 말기에 편찬된 『시마즈씨 정통계도』로 여겨진다.[38] 이후 시마즈 가문의 족보는 이를 바탕으로 만들어져 "요시히로=17대 당주"라는 인식이 자리잡았다. 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 후, 시마즈 요시히사에게 오스미를,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사쓰마를 각각 창고입지로 배정한 것도 요시히로가 당주라는 인식을 보강하는 자료가 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시마즈 가문 당주의 증거인 "오시게모노(御重物)"에 대한 연구가 니시모토 세이지에 의해 진행되어[51] 당주 지위가 요시히사로부터 다다쓰네에게 직접 양도된 사실이 판명되자, 요시히로는 17대 당주가 아니었다는 학설이 야마구치 켄이치와 후쿠시마 가네하루 등 많은 연구자들에게 지지를 받았다.[52] 이후 요시히로는 "당주였던 설"과 "당주가 아니었던 설"이 병렬하게 되었다.
시마즈 가문 관련 물품을 소장, 연구, 전시하고 있는 쇼코슈세이칸에서는 족보를 중시하는 관점에서 요시히로를 17대 당주로 인정했지만, 2004년에 쇼코슈세이칸 문화재 과장이자 가고시마 대학 법문학부 시간강사인 마츠오 치토세도 요시히로는 당주가 아니라는 논문을 발표했다.[53] 현재도 시마즈 본종가 및 쇼코슈세이칸 자체에서는 2016년 현재도 요시히로를 17대 당주로 하고 있다.
시마즈 가문의 가독 상속에 관해서는 무로마치 시대 중기에 시마즈 다다쿠니가 한때 동생인 모치히사에게 가독을 물려주었다가 최종적으로 가독을 되찾았다는 니이나 카츠히토의 설[25]이나, 센고쿠 시대에 시마즈 가쓰히사를 추방한 삿슈 가문의 시마즈 사네히사가 중신의 지지를 받아 가독을 일시 승계했다는 야마구치 켄이치의 설[27]도 나와 있어, 시마즈 본종가 및 쇼코슈세이칸의 견해와는 다른 변천상이 그려지고 있다.
4. 계보
시마즈 가문은 여러 분파로 나뉘어 발전해 왔으며, 각 분파는 고유한 역사와 역할을 가지고 있다. 주요 분가는 다음과 같다:
- 본가(嫡流)
- 총주가: 형계 종가로, 상총개가(上総介家) 또는 사쓰마 수호(薩摩守護)로도 불렸다.
- 오슈가: 아우계 종가로, 육오수가(陸奥守家) 또는 오스미 수호(大隅守護)로 불렸으며, 후에 사쓰마 번주가(薩摩藩主家)가 되었다.
- 사쓰마 번주가: 후의 시마즈 공작가(島津公爵家)가 되었다.
- 서류(庶流) (에도 시대 이전)
- 에치젠가
- 삿슈가: 사쓰마 수호가(薩摩守家)였다.
- 호슈가: 호고 수호가(豊後守家)였다.
- 우슈가[43]: 오시마씨(大島氏)라고도 한다.
- 하쿠슈가[44]: 요시오카씨(義岡氏), 시와이케씨(志和池氏)라고도 한다.
- 소슈가: 사가미 수호가(相模守家)였으며, 후에 타리미즈가(垂水家)가 되었다.
- 조슈가: 가쓰라씨 또는 다로베에가(太郎兵衛家)라고도 불렸다.
- 요슈가: 사코미즈씨, 요시미쓰씨라고도 불렸다.
- 셋슈가: 기이레씨 또는 셋쓰 수호가(摂津守家)라고도 불렸다.
- 신슈가: 시나노 시마즈씨라고도 불렸다.
- 서류(庶流) (에도 시대 이후, 일문가(一門家), 일소지(一所持), 일소지각(一所持格), 지번(支藩), 막부 기본(幕府旗本))
- 주후가: 시마즈 일문가(島津一門家)로, 에치젠가 또는 주방수가(周防守家)라고도 불렸다.
- 가지키가: 시마즈 일문가(島津一門家)로, 효고가(兵庫家)라고도 불렸다.
- 타리미즈가: 시마즈 일문가(島津一門家)로, 겐반가(玄蕃家)라고도 불렸다.
- 이마이즈미가: 시마즈 일문가(島津一門家)로, 와이즈미씨 또는 안게 수호가(安芸守家)라고도 불렸다.
- 타마사토가
- 히우가 사도와라가: 사도와라 번주(佐土原藩主)였으며, 타리미즈가(垂水家)의 분가(分家)이고 아와지 수호가(淡路守家)라고도 불렸다.
- 히오키가: 일소지(一所持)였으며, 대신분(大身分) 또는 사에몬조가(左衛門尉家)라고도 불렸다.
- 하나오카가: 일소지(一所持)였으며, 대신분(大身分) 또는 다이가쿠가(大学家)라고도 불렸다.
- 미야노조가: 일소지(一所持)였으며, 대신분(大身分) 또는 도쇼가(図書家)라고도 불렸다.
- 토죠가: 일소지(一所持)였으며, 대신분(大身分) 또는 호쿠고씨 또는 치쿠고 수호가(筑後守家)라고도 불렸다.
- 이카리야마가: 총주가 또는 쇼소가(将曹家)라고도 불렸다.
- 다이조가
- 에이키치가: 추무가(中務家)라고도 불렸다.
- 치란가: 사다씨 또는 목공가(木工家)라고도 불렸다.
- 사지가: 누이도노가(縫殿家)라고도 불렸다.
- 스케노부가
- 요리모가
- 구마가
- 타이토가
- 나이키가
- 신조가: 요인가(要人家)라고도 불렸다.
- 야가라가
- 나이조가
- 이치나리가: 후키네씨 또는 수수이가(主水家)라고도 불렸다.
- 시마노우치가: 이요 수호가(伊予守家)라고도 불렸다.
- 가메야마가: 오슈가 후예(後裔)였다.
- 서가(庶家)
- 야마다씨
- 아소야씨
- 마치다씨: 칸모쓰가(監物家)라고도 불렸다.
- 이주인씨
- 이사쿠씨: 후에 소슈가(相州家)와 일체(一体)가 되었다.
- 와이즈미씨
- 사다씨
- 니나씨: 코노에 수호가(近江守家)라고도 불렸다.
- 가바야마씨: 슈케이가(主計家)라고도 불렸다.
- 호쿠고씨: 후의 토죠가(都城家)가 되었다.
- 이시사카씨
- 가와카미씨: 쿠마가(久馬家)라고도 불렸다.
- 노노야마씨
- 히라사 호쿠고씨: 호쿠고씨(北郷氏) 분가(分家)였으며, 사쿠자에몬가(作左衛門家)라고도 불렸다.
- 오노씨: 사쓰슈가(薩州家) 분가(分家)였으며, 다구미야가(多宮家)라고도 불렸다.
- 요시토시씨: 사쓰슈가(薩州家) 분가(分家)였으며, 모쿠에몬가(杢右衛門家)라고도 불렸다.
| 서류 | 서가 | |
|---|---|---|
| 에도 시대 이전 | 에도 시대 이후 | |
| 에치젠가 | 카지키가 (시마즈 일문 4가) | 혼고가 |
| 이자쿠가 | 타루미즈가 (시마즈 일문 4가) | 아소다니씨 |
| 오슈가 | 시게토미가 (시마즈 일문 4가) | 이주인씨 |
| 삿슈가 | 이마이즈미가 (시마즈 일문 4가) | 和泉氏 |
| 소슈가 | 타마자토가 | 宇宿氏 |
| 소슈가 | 미야노조가 | 가쓰라씨 |
| 호슈가 | 나가요시가 | 가바야마씨 |
| 우슈가 | 히오키가 | 가와카미씨 |
| 하쿠슈가 | 휴가 사도와라가 (사도와라번주) (타루미즈가의 분가) | 기이레씨 |
| 시나노가 | 하나오카가 | 사코미즈씨 |
| rowspan="7" | | 아리시로가 (新城家) | 사타씨 |
| 사시가 (佐志家) | 니이로씨 | |
| rowspan="5" | | 노노야마씨 | |
| 마치다씨 | ||
| 야마다씨 | ||
| 요시오카씨 | ||
| 요시미츠씨 | ||
시마즈 종가 당주 목록 (29대 ~ 32대)
| 대수 | 초상화 | 이름 | (생몰년) | 선대와의 관계 | 관위 | 비고 |
|---|---|---|---|---|---|---|
| 29 | -- | 시마즈 다다요시 | (1840년-1897년) | 선대의 양자 | 종1위 | 초명 「타다노리(忠徳)」・「모치히사(茂久)」. |
| 30 | -- | 시마즈 다다시게 | (1886년-1968년) | 선대의 4남 | 정2위 | 2대 공작. |
| 31 | -- | 시마즈 다다히데 | (1912년-1996년) | 선대의 장남 | 농림성 근무. | |
| 32 | -- | 시마즈 노부히사 | (1938년-) | 선대의 차남 | 데루쿠니 신사 궁사(宮司). |
5. 시마즈 가문 관련 문화
시마즈 가문일본어 관련 문화는 다음과 같다.
'''가몬'''
시마즈 가문의 정식 가몬(家紋)으로 사용된 문양은 시마즈 쥬몬지(十字, 붓글씨로 쓴 십자), '마루니쥬노지일본어(丸に十の字)', '쿠츠와노쥬지일본어(轡十字)' 등이 있다. 모두 쥬몬지(十文字) 문양으로, 재갈 문양이나 쿠루스 문양과는 구별된다. 정식 가몬 외에는 '시마즈 보탄일본어'(시마즈 모란, 고노에 가문에서 받음)과 '고산노키리일본어'(오동나무)를 사용했다.
쥬몬지 문양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 2마리의 용을 나타낸다는 설 (『시마즈 국사일본어』)
-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오슈 전투 정벌 시에 초대 다다히사에게 젓가락으로 십자를 만들어 시마즈 가문의 문양으로 삼게 했다는 설 (『니시번 야사일본어』)
- 가마쿠라 시대에 중국 전통 부적의 영향으로 재앙을 막고 복을 불러오기 위해 십자를 긋는 풍습이 있었고, 그것을 가몬으로 삼았다는 설 (『일본문장학일본어』)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기독교 포교를 위해 가고시마에 처음 방문했을 때, 영주 시마즈 가문의 가몬이 "하얀 십자가"였던 것에 경악했다는 기록이 있다.[50]
'''피관과 격'''
시마즈 가문의 가신은 가문의 격에 따라 세 가지로 구분되었다.
- '''고잇카일본어(御一家)''': 시마즈 가문의 유력 서자 가문으로, 삿슈가, 이자쿠가, 소슈가 등이 포함된다.
- '''미우치일본어(御内)''': 후다이 가신, 직속 가신으로 초대 다다히사를 따라 규슈로 내려온 사람, 남북조 시대까지 가신이 된 중소 재지 영주, 또는 고잇카, 구니슈의 서자 가문으로 독립된 영지를 갖지 못하고 가신이 된 자 등이 포함되었다.
- '''구니슈일본어(国衆)''' 또는 '''구니카타일본어(国方)''': 군지나 지토 등의 국인을 가리킨다. 쓰치모치씨나 이토씨가 포함되었다.
'''공식 서명'''
시마즈 가문 당주의 공식 문서 서명은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유자(猶子)가 된 무로마치 시대 초기에는 '고레무네노아손일본어(惟宗朝臣) ○○', 센고쿠 시대부터 닛타 겐지를 칭할 때까지는 고노에 가문의 서류(庶流)로서 '후지와라노아손일본어(藤原朝臣) ○○'이라고 서명했다. 에도 시대에 도쿠가와 가문으로부터 '마쓰다이라일본어(松平)' 성을 받은 후, 막부의 공식 문서 등에서는 '마쓰다이라 사쓰마노카미일본어 (변동 있음) ○○'라고 기술했다. 에도 시대 중기 이후 내부 공식 문서 등에서는 '미나모토노아손일본어(源朝臣) ○○'이라고 서명했다.
'''시마즈 가문 연고 사찰 및 보다이지일본어(菩提寺)'''
- 스미요시타이샤 (오사카시 스미요시구): 시마즈 가문 시조인 시마즈 다다히사의 탄생지 (스미요시타이샤 경내의 탄생석진좌)
- 도후쿠지 소쿠조인일본어(即宗院) 탑두 (교토부 히가시야마구): 시마즈 우지히사에 의해 개산한 시마즈 가문 교토 보다이지
- 다마류후쿠쇼지일본어(玉龍福昌寺) (가고시마현 가고시마시): 조동종 소지지의 말사(末寺)
- 묘엔지 (가고시마현 히오키시): 시마즈 요시히로의 보다이지
- 간노지 (가고시마현 이즈미시): 시마즈 가문 초대 당주부터 5대 당주까지의 묘소
- 세이센지 (가고시마현 가고시마시): 시마즈 다다요시 공양 재가 보살상
- 다이엔지 (도쿄도 스기나미구): 에도 시마즈 가문 에도 보다이지
- 다이엔지 (도쿄도 메구로구): 시마즈 나리오키 연고 사원
- 즈이쇼지 대웅보전 현판 (도쿄도 미나토구): 시마즈 시게히데 연고의 시마즈 가문 에도 보다이지
- 센가쿠지 본당 현판 (도쿄도 미나토구): 시마즈 나리노부 연고 사원
- 다이코쿠지 (교토부 후시미구): 시마즈 가문 교토 기도 사원
- 쇼코쿠지 린코인일본어(林光院) 탑두 (교토부 가미교구): 시마즈 요시히로 상과 위패, 시마즈 가문 천좌공양(薦座供養) 사원, 사쓰마 번사 묘소
- 조후쿠지 (교토부 가미교구): 시마즈 도시히사, 사쓰마 번 연고 사원, 막부 말기 역사의 무대
- 다이운인 (교토부 가미교구): 휴가 사도와라 번 초대 번주 시마즈 모치히사의 묘소
- 뵤도지 (나라현 사쿠라이시): 시마즈 요시히로 연고 사원
- 고야산 쇼치인일본어(正智院) (와카야마현 고야정): 시마즈 가문 연고 기신인일본어(祈親院)
- 고야산 게이코인일본어(慶光院) (와카야마현 고야정): 시마즈 요시히로, 미야노조 시마즈 가문 연고 사원
- 류타쿠지 (에히메현 세이요시): 시마즈 가문 연고 사원
- 루리코지일본어(瑠璃光寺) (기후현 오가키시): 시마즈 도요히사의 보다이지
- 젠가산 도보쿠지일본어(禅河山東福寺) (도쿄도 시부야구): 휴가 사도와라 번 시마즈 가문 에도 보다이지
- 법화당 유적 (가나가와현 가마쿠라시): 시마즈 가문 시조 시마즈 다다히사의 분묘

6. 시마즈 가문과 한국과의 관계
시마즈 가문은 임진왜란(1592년 ~ 1598년)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명령으로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 주요 가문 중 하나였다.[2] 당시 시마즈 가문의 17대 당주였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는 조선 침략의 선봉에 섰다.[3]
시마즈 군은 조선인들에게 잔혹 행위를 많이 저질렀다. 특히, 많은 조선인을 강제로 일본에 끌고 가거나, 노예로 팔아넘겼다. 이러한 행위는 조선인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었으며, 당시 조선과 일본과의 관계를 크게 악화시켰다.
임진왜란 이후, 도쿠가와 막부(徳川幕府)가 성립되면서, 시마즈 가문은 류큐 왕국(琉球王國, 지금의 오키나와)을 침략하여 지배하게 되었다.[5] 류큐 왕국은 조선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시마즈 가문의 류큐 왕국 지배는 조선과의 관계에 또 다른 갈등 요인이 되었다.
근대에 들어서, 시마즈 가문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에 참여하여 일본의 근대화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시마즈 가문은 한국과의 관계에서 부정적인 역할을 한 가문으로 인식되었다.
현대에 이르러, 시마즈 가문은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한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7. 시마즈 가문의 현대적 의의
시마즈 가문은 가마쿠라 막부 시대부터 메이지 시대까지 번영한 유서 깊은 가문이다. 원래 슈고 가문이었으나, 센고쿠 시대에 다이묘로 성장하여 에도 시대에는 사쓰마번을 다스리는 도자마 다이묘로 존속했다. 전성기에는 미나미큐슈 지방을 지배했으며, 초대 당주 시마즈 다다히사는 여러 지역의 슈고직을 겸임하기도 했다. "시마즈에는 어리석은 군주가 없다"는 평처럼 대대로 뛰어난 당주를 배출했으며, 무예를 숭상하는 가풍을 지녔다.
센고쿠 시대에는 본가에서 서자 계통인 이자쿠가(伊作家)로 당주 자리가 옮겨졌으며, 사쓰마 번주의 가문도 이 계통에 해당된다. 시마즈 본가의 분가인 옥리 시마즈가는 시마즈 다다요시 공작의 아버지인 시마즈 히사미쓰를 시조로 한다. 히사미쓰는 메이지 유신에 공을 세워 본가와 별도로 화족에 서임되었고, 1884년 화족령 시행에 따라 공작가를 받았다. 옥리 시마즈 공작가에서는 1896년 히사미쓰의 넷째 아들 시마즈 다다킨을 시조로 하는 남작가가 창설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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