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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소카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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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소카와씨는 아시카가씨의 선조를 따라 미나모토노 요시키요를 시조로 하는 가문이다. 가마쿠라 시대에 호소카와 지로를 자칭하며 미카와국에 진출했으나, 가마쿠라 시대 말기부터 난보쿠초 시대에 걸쳐 아시카가 타카우지를 따르며 유력한 슈고 다이묘로 성장했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관령직을 독점하며 막부 정치를 이끌었으며, 오닌의 난을 거치며 센고쿠 시대를 겪었다. 에도 시대에는 도쿠가와 막부를 지지하며 구마모토 번을 다스렸고, 메이지 시대 이후에는 화족으로 귀족 지위를 얻었다. 호소카와 가문은 케이초 가문을 중심으로 여러 분가를 형성했으며, 료안지를 연고 사원으로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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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소카와씨
기본 정보
성씨호소카와
성씨 (일본어)細川
가문 문양Japanese Crest Hosokawa Kuyou.svg
가문 문양 설명호소카와 구요 (히고 호소카와 가문)
본성세이와 겐지요시쿠니 류
(가와치 겐지・아시카가 씨 류)
가조아시카가 요시스에
창립자아시카가 요시스에
종별무가
화족 (후작) - 구마모토 가문
화족 (자작) - 우토 가문
화족 (자작) - 모테기 가문
화족 (자작) - 다카세 가문
화족 (남작) - 나이젠 가문
화족 (남작) - 교부 가문
화족 (남작) - 모리야키 가문
출신지미카와국누카타군호소카와 향
근거지단바국
셋쓰국
아와국
사누키국
도사국
아와지국
도쿄부
현재 수장호소카와 모리히로
해산현존
통치 종료1947년, 일본국 헌법에 따라 작위 폐지
주요 인물호소카와 요리유키
호소카와 가쓰모토
호소카와 마사모토
호소카와 스미모토
호소카와 다카쿠니
호소카와 하루모토
호소카와 후지타카 (유사이)
호소카와 다다오키 (산사이)
호소카와 시게가타
호소카와 모리히로 (제79대 내각총리대신)
주요 분가나가오카 가문
구마모토
구마모토-신덴
우도
히타치-야타베
사이큐 가문
아와 슈고 호소카와 가문 (무가)
이즈미 슈고 호소카와 가문 (무가)
구마모토 호소카와 가문 (무가, 후작)
우토 호소카와 가문 (무가, 자작)
덴지쿠 씨? (무가) 등
기타
일본어 표기ほそかわし

2. 중세

아시카가씨의 선조 아시카가 요시야스의 서장자 야다 요시키요가 호소카와씨의 선조이다. 헤이안 시대 말기, 요시키요는 키소 요시나카에 속해, 수도에서 쫓아낸 헤이케군과 싸운 미즈시마 전투에서 그 동생 요시나가와 함께 전사했다.

가마쿠라 시대에 아시카가 본가의 요시우지가 미카와 슈고가 되었을 때, 요시키요의 손자 요시스에는 형 니츠키 사네쿠니, 동생 토가사키 (戸賀崎) (토자키 (戸崎)) 요시무네 등과 함께 미카와국에 진출하여 호소카와향을 소유하는 '''호소카와 지로()'''라고 자칭했다. 그러나 아시카가가 동문에서도 가문이 높고 본가로부터 독립성이 강했던 시바씨나 하타케야마씨와는 달리, 이 시대의 호소카와씨는 그다지 유력한 고케닌이 아니며, 활동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야다 요시키요가 장년에 전사했을 때, 남겨진 유족은 어렸다고 여겨져 유력한 인척 관계도 없이 아시카가 요시카네 등 일족의 비호를 받은 것 같지만, 그 결과, 배신, 가신이라고 하는 지위에까지 떨어진 것이 원인같다. 그 때문에 헤이안 말기 ~ 가마쿠라 초까지는 지행지도 거의 없고, 세력이 전혀 없었다고 생각된다. 미카와로 옮긴 뒤, 서류도 분출하여 겨우 세력을 키울 수 있었던 것 같다.

가마쿠라 시대 말기부터 남북조 시대에 걸쳐 카즈우지, 요리하루 형제나 그 사촌인 아키우지, 죠젠 등이 아시카가 타카우지를 따랐다. 겐코 3년 / 쇼쿄 2년 (1333년)에 타카우지가 도막의 군사를 올리자, 카즈우지는 우에스기 시게요시와 함께 고다이고 천황에게 귀순을 바라는 사자 역할을 했으며, 교토의 로쿠하라 단다이 공격에도 가담했다. 게다가 닛타 요시사다의 봉기로 가마쿠라를 함락시킨 타카우지의 적자 센쥬오 (후의 무로마치 2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라)를 보좌하기 위해 하향해, 요시사다에 대항하여 가마쿠라아시카가씨로 하여금 장악하게 한다. 카즈우지와 아키우지는 타카우지의 명에 의해 시코쿠에 건너가 아와국, 사누키국을 중심으로 남조쪽과의 싸움을 이기고, 재지호족의 피관화를 추진했다. 이 시대에 호소카와씨는 유력한 슈고 다이묘로 성장한다.

카즈우지의 적자인 호소카와 키요우지는 당초 쇼군 요시아키라의 집사직 (후의 관령)으로 막부 정치의 실권을 잡았으나, 사사키 도요의 참언으로 실각했다 (게이안의 정변). 남조에 속했으나, 일족 호소카와 요리유키에게 추토당해 별망하고, 또 요시우지의 아들 호소카와 시게우지도 급사하였기 때문에, 요리하루의 적자인 요리유키가 호소카와씨의 제일 실력자가 된다. 대대로 막부의 관령으로 임명될 호소카와씨 본가 케이쵸가는 자식이 없었던 요리유키의 동생으로 그 양자가 되어 대를 이은 호소카와 요리모토의 후예를 가리키며 (요리모토의 핏줄은 마사모토까지밖에 못감), 그 밖의 유력한 서가・분가도 대부분 요리유키 시대에 파생되었다.

무로마치 시대의 호소카와씨는 케이쵸가를 중심으로 한 동족 연합체라고도 할 수 있는 집단을 형성해, 일족 내분의 위험을 줄이고, 이로 인해 유력 슈고 세력을 축출하려는 쇼군의 간섭을 배제하고, 관령・유력 슈고의 지위를 유지했던 것이다.

아시카가 요시즈에는 아시카가 요시자네의 아들이며 호소카와 성을 처음으로 사용한 인물이다.[3] 막말 가마쿠라 시대의 호소카와 가문 출신인 호소카와 요리하루는 가마쿠라 막부에 맞서 아시카가 씨족을 위해 싸웠다.[3] 또 다른 인물인 호소카와 아키우지는 아시카가 막부의 설립에 기여했다.[3]

호소카와 가문은 무로마치 시대(1336~1467), 센고쿠 시대(1467~1600), 그리고 에도 시대에 걸쳐 상당한 권력을 행사했지만, 수 세기에 걸쳐 시코쿠에서 키나이로, 그리고 규슈로 이동했다.[3]

이 가문은 아시카가 막부 아래에서 관령(쇼군의 부관)직을 독점한 세 가문 중 하나였다.[3] 그러한 인물 중 하나가 호소카와 요리유키이다.[3] 아시카가 정권 초기에 호소카와 가문은 시코쿠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3] 이 기간 동안 호소카와 가문 구성원들은 아와, 아와지, 비츄, 이즈미, 사누키, 셋쓰, 탄바, 토사, 그리고 야마시로현의 수령(슈고)을 역임했다.[3]

thumb(Hosokawa Tadaoki),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

다섯 번째 관령인 호소카와 가쓰모토와 그의 장인 야마나 소젠 사이의 쇼군 계승을 둘러싼 갈등은 오닌의 난을 촉발했고, 이는 막부의 몰락과 150년간의 혼란과 전쟁 시대인 센고쿠 시대를 초래했다.[4] 교토에 본거지를 둔 아시카가 막부의 몰락 후, 교토, 그리고 명목상으로는 국가의 통제권은 몇 세대 동안 교토 관령(쇼군의 교토 부관)직을 차지한 호소카와 가문의 손에 떨어졌다.[4]

가쓰모토의 아들인 호소카와 마사모토는 15세기 말에 이러한 방식으로 권력을 장악했지만, 1507년에 암살당했다.[4] 그의 죽음 이후, 가문은 분열되었고 내분으로 약해졌다. 그러나 그들이 여전히 가지고 있던 권력은 교토와 그 주변에 집중되어 있었다.[4] 이는 그들에게 어느 정도 권력을 강화할 수 있는 지렛대를 제공했으며, 정치적으로 그리고 명나라와의 무역을 장악하는 측면에서 모두 오우치 씨족과 강력한 경쟁자가 되었다.[4] 호소카와 가문은 약 100년 동안 교토에 머물렀고, 오다 노부나가의 공격을 받자 도시에서 도망쳤다. 많은 사람들이 멸망했다고 믿는 가문의 또 다른 분파는 사이큐 씨족(細九氏)이다.[4]

2. 1. 가마쿠라 시대 ~ 남북조 시대

호소카와씨의 선조는 아시카가씨의 선조인 아시카가 요시야스의 서장자 야다 요시키요이다. 가마쿠라 시대에 아시카가 본가의 요시우지가 미카와 슈고가 되었을 때, 요시키요의 손자 요시스에는 미카와국에 진출하여 호소카와향을 소유하며 '''호소카와 지로()'''라고 자칭했다.

가마쿠라 시대 말기부터 남북조 시대에 걸쳐 카즈우지, 요리하루 형제나 그 사촌인 아키우지, 죠젠 등이 아시카가 타카우지를 따랐다. 겐코 3년 / 쇼쿄 2년 (1333년)에 타카우지가 도막의 군사를 올리자, 카즈우지는 고다이고 천황에게 귀순을 바라는 사자 역할을 했으며, 교토의 로쿠하라 단다이 공격에도 가담했다. 카즈우지와 아키우지는 타카우지의 명에 의해 시코쿠에 건너가 아와국, 사누키국을 중심으로 남조쪽과의 싸움을 이기고, 재지호족의 피관화를 추진했다. 이 시대에 호소카와씨는 유력한 슈고 다이묘로 성장한다.

카즈우지의 적자인 호소카와 키요우지는 당초 쇼군 요시아키라의 집사직 (후의 관령)으로 막부 정치의 실권을 잡았으나, 사사키 도요의 참언으로 실각했다 (게이안의 정변). 남조에 속했으나, 일족 호소카와 요리유키에게 추토당해 별망하고, 또 요시우지의 아들 호소카와 시게우지도 급사하였기 때문에, 요리하루의 적자인 요리유키가 호소카와씨의 제일 실력자가 된다. 요리유키는 관령으로서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를 보좌하며 막부 정치의 중심 역할을 수행했다. 대대로 막부의 관령으로 임명될 호소카와씨 본가 케이쵸가는 자식이 없었던 요리유키의 동생으로 그 양자가 되어 대를 이은 호소카와 요리모토의 후예를 가리킨다.

2. 2. 무로마치 시대

호소카와씨는 아시카가 요시야스의 서장자 야다 요시키요를 선조로 한다. 가마쿠라 시대 말기부터 남북조 시대에 걸쳐 호소카와 카즈우지・요리하루 형제나 그 사촌인 아키우지・죠젠 등이 아시카가 타카우지를 따랐다. 겐코 3년 / 쇼쿄 2년 (1333년)에 타카우지가 도막의 군사를 올리자, 카즈우지는 고다이고 천황에게 귀순을 바라는 사자 역할을 했다.

무로마치 시대의 호소카와씨는 케이초가를 중심으로 한 동족 연합체라고도 할 수 있는 집단을 형성했다. 호소카와 가문은 무로마치 시대(1336~1467)에 상당한 권력을 행사했다.[3] 케이초 가문은 대대로 관령직을 맡아 시바 가문, 하타케야마 가문과 함께 '삼관령'으로 불렸다. 이 가문은 아시카가 막부 아래에서 관령(쇼군의 부관)직을 독점한 세 가문 중 하나였다.[3]

호소카와 요리유키는 관령이 되어 어린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満)을 보좌하여 막정(幕政)을 통괄했다. 요리유키의 동생으로 그 양자가 되어 대를 이은 호소카와 요리모토의 후예를 가리키며, 그 밖의 유력한 서가・분가도 대부분 요리유키 시대에 파생되었다.

다섯 번째 관령인 호소카와 가쓰모토와 그의 장인 야마나 소젠 사이의 쇼군 계승을 둘러싼 갈등은 오닌의 난을 촉발했다.[4] 호소카와 가쓰모토오닌의 난에서 동군 총사령관으로 활약하며 막부 권력을 장악했다.[4]

thumb(Hosokawa Tadaoki),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

2. 3. 센고쿠 시대

호소카와 가문은 무로마치 시대(1336~1467)에 이어 센고쿠 시대(1467~1600)에도 상당한 권력을 행사했다. 호소카와 가쓰모토와 그의 장인 야마나 소젠 사이의 쇼군 계승을 둘러싼 갈등은 오닌의 난을 촉발했고, 이는 아시카가 막부의 몰락과 150년간의 혼란과 전쟁 시대인 센고쿠 시대를 초래했다.[4]

가쓰모토의 아들인 호소카와 마사모토는 쇼군을 폐립하고 실권을 장악하며 호소카와 가문의 전성기를 이끌었으나, 1507년에 암살당했다.[4] 그의 죽음 이후, 가문은 분열되었고 내분으로 약해졌다. 그럼에도 그들이 여전히 가지고 있던 권력은 교토와 그 주변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는 그들에게 어느 정도 권력을 강화할 수 있는 지렛대를 제공했으며, 정치적으로 그리고 명나라와의 무역을 장악하는 측면에서 모두 오우치 씨족과 강력한 경쟁자가 되었다.[4]

마사모토 사후 양자 간의 권력 다툼과 미요시 가문의 대두로 인해 호소카와 가문은 분열되고 쇠퇴했다. 호소카와 하루모토미요시 나가요시와의 항쟁 끝에 분국을 잃고 몰락했다. 방계 출신 호소카와 후지타카는 아시카가 요시아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기며 가문을 유지했다.

thumb(Hosokawa Tadaoki),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

3. 근세

고쿠라(후에 구마모토)의 호소카와 가문은 에도 시대에 호소카와 씨의 "본가"가 되었다. 호소카와 다다오키(細川忠興)의 아내인 호소카와 그라시아는 기독교로 개종한 가장 유명한 사무라이 중 한 명이었으며,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딸이기도 했다.

호소카와 가문은 결정적인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에서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에 맞서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를 지지했고, 따라서 도쿠가와 막부(徳川幕府) 아래 후다이(譜代) 다이묘(大名)가 되었다. 그들은 54만 석(石)의 수입을 가진 히고 국(肥後国)을 영지(한(藩))로 받았다.

구마모토 번의 세 번째 영주인 호소카와 타다토시(細川忠利)는 화가[5]이자 검객인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蔵)의 후원자였다.[6]

호소카와 영지는 쇼군(将軍)과 천황의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규슈(九州)에 있었지만, 그들은 가장 부유한 다이묘(大名) 중 하나였다. 1750년까지 히고는 최고의 쌀 생산지 중 하나였으며, 실제로 오사카 쌀 상인(大阪米問屋)에 의해 기준으로 간주되었다. 대부분의 영지가 그랬듯이, 그 영지는 그 후 심각한 경제적 쇠퇴를 겪었지만, 여섯 번째 영주인 호소카와 시게카타(細川重賢)(1718~1785, 재위 1747~1785)는 상황을 호전시킨 여러 개혁을 실시했다. 그는 또한 1755년에 한학(藩校)인 지슈칸(済衆館)을 설립했다.[8]

호소카와 시게카타(細川重賢), 에도 시대 중반 구마모토 번(熊本藩) 다이묘(大名)


후대에는 요코이 쇼난(横井小楠)과 같은 많은 학자들을 배출했다.

1787년, 타다토시(忠利)에서 내려온 본가의 계보는 일곱 번째 영주인 시게카타(重賢)의 아들 하루토시(治年)(1758~1787, 재위 1785~1787)의 죽음으로 끊겼다. 그는 타다토시(忠利)의 동생인 다쓰타카(辰孝)(1615~1645)의 직계 후손인 우도(宇土)의 여섯 번째 영주 나리시게(成重)(1755~약 1835, 재위 1787~1810)에게 계승되었다. 1810년 나리시게는 장남인 나리타쓰(成達)(1788~1826, 재위 1810~1826)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그의 뒤를 이었다. 나리타쓰는 1826년에 후계자 없이 죽었고, 나리타쓰의 동생인 다쓰유키(達之)(1784~1818)의 아들인 조카 나리모리(成森)(1804~1860, 재위 1826~1860)(우도의 일곱 번째 영주)가 그의 뒤를 이었다.[9]

1860년 나리모리(成森)가 죽은 후 그의 장남 요시쿠니(吉国)(1835~1876, 재위 1860~1871)가 구마모토의 열한 번째이자 마지막 영주가 되었다.

에도 시대에는 호소카와 가문의 네 개의 주요 분가가 있었고, 각각 다이묘(大名)의 칭호를 가지고 있었다. 나가오카(長岡) 성을 가진 가문의 두 개의 다른 분가는 구마모토의 호소카와 가문을 섬기는 가로(家老)였다. 그 가문 중 하나인 의 저택은 현재까지도 남아 있으며, 구마모토현(熊本県)의 '''유형 문화재'''이다.

호소카와 겨부 저택(細川刑部邸)


사무라이 영주와 호소카와 가문의 꾸요 문장이 있는 가마


근세에는 네 가문의 다이묘 가문이 나왔는데, 호소카와 유사이(細川幽斎)의 적류는 구마모토 번(熊本藩) 주가였고, 분가에서는 우토 번(宇土藩) 주가, 야타베 번(谷田部藩) 주가, 다카세 번(高瀬藩)(구마모토 신덴 번) 주가가 나왔다. 네 가문 모두 폐번치현(廃藩置県)까지 존속했고,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화족에 서임되었다.

3. 1. 에도 시대

호소카와 후지타카의 아들 호소카와 다다오키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 편에 서서 큰 공을 세웠다.[43] 호소카와 그라시아는 아케치 미쓰히데의 딸이자 기독교로 개종한 사무라이로 유명하다. 다다오키는 이시다 미쓰나리가 이에야스 타도를 외치자 인질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자결한 아내 가라샤의 뜻을 이어받아 동군에서 활약했다. 전투 후, 다다오키는 부젠 국 고쿠라 번 39만 9천 석(분고 국 기쓰키 성 6만 석 포함)을 하사받고, 성을 하시바에서 호소카와로 되돌렸다.[43]

간에이 9년(1632년), 다다오키의 아들 호소카와 다다토시는 히고 국 구마모토 번 54만 석으로 이봉되었다.[43] 이후 구마모토 번은 폐번치현까지 호소카와 가문의 지배 아래 번정 개혁과 지역 발전에 힘썼다. 특히 호소카와 다다토시는 검객 미야모토 무사시의 후원자였다.[5][6]

8대 번주 호소카와 시게카타는 번교 지슈칸을 설립하고[8] 척산흥업을 추진하는 등 '호레키의 개혁'을 통해 번을 부흥시킨 '''히고의 봉황'''으로 칭송받았다.[44] 그는 에도 시대 중기의 삼명군 중 한 명으로 꼽힌다.

호소카와 가문은 구마모토 번 외에도 우토 번, 다카세 번, 야타베 번 등 여러 지번을 통해 번영했다. 구마모토 현에는 호소카와 겨부 저택이 '''유형 문화재'''로 남아있다.

4. 근대 이후

보신 전쟁 당시, 구마모토의 호소카와 가문, 구마모토 신덴, 우도는 천황 정부 편에 서서 아이즈 전투와 하코다테 전투 등 여러 전투에 참여했다.[47]

1871년 봉건 계급 제도 폐지 이후, 호소카와 씨와 그 분가들은 메이지 시대새로운 귀족이 되었다. 본가(구마모토)의 당주는 후작(公爵)의 세습 작위를 받았고, 분가의 당주들은 자작(子爵)이 되었으며, 이 작위는 1947년에 폐지되었다.[47] 본가의 현 당주이자 전 일본의 내각총리대신호소카와 모리히로는 구마모토 호소카와 가문의 후손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 호소카와 가문에서는 후작가 1가문, 자작가 3가문, 남작가 4가문 등 총 8가문의 화족 가문이 나왔다.

카타야마 토우쿠마와 키노시타 키요타카의 설계로 1893년에 완공된 도쿄시 고이시카와구 타카다오이마츠초의 호소카와후작가 본저.


1916년의 호소카와 후작가의 카루이자와 별장.


막말·메이지유신기의 구마모토번 주인 호소카와 요시쿠니는 1869년에 판적봉환으로 구마모토번 지사로 전직하면서 화족에 서열되었다. 같은 해 보신 전쟁에서의 공적으로 상전금 2000량을 하사받았고, 하코다테 전투에서의 공으로 1000량을 하사받았다. 이듬해 1870년에는 요시쿠니의 동생이자 신정부의 의정직, 형법사무총독, 참여, 사향간기후 등을 역임했던 호소카와 모리히사가 마지막 구마모토번 지사에 취임하여 1871년폐번치현까지 재직했다. 지사 재임 중 모리히사는, 번 대참사에 취임한 동생 호소카와 모리요시, 번 회계권판사 야마다 부포, 지방관 카에츠 우지후사, 호농 타케자키 릿지로·토쿠토미 이케이 등과 함께, 잡세 약 9만 석의 폐지, 구마모토성 파괴, 번 의회 설치, 고성의학교·구마모토양학교 개설 등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인 정책을 추진했다. 구마모토현에 현재 10기 확인되고 있는 치지탑은, 영민들이 모리히사의 개혁에 감사하여 건립한 것이라고 한다.

판적봉환 시에 정해진 가록은 현미로 3만 2968석이다.

1876년의 금록공채증서발행조례에 기초하여, 가록과 교환으로 지급된 금록공채의 액수는 78만 280엔 3전의 거액에 달했고, 화족 수급자 중 4위 수령액이다.

메이지 전기 무렵 모리히사의 주거는 도쿄시니혼바시구하마쵸에 있었다. 이 땅은, 에도 시대에는 구마모토번 호소카와가의 시모야시키 하나인 "하마쵸 오야시키"가 있던 곳으로, 유신 후에 상지되었지만, 그 후 정부로부터 몰수하여 유신 후 호소카와가의 최초의 본저가 되었다. 당시의 가령은 오니즈카 미치나리, 가부는 키요타 정이다. 1877년에는 에도 시대에 호소카와가의 시모야시키 하나인 "메지로다이 오야시키"가 있던 곳 고이시카와구타카다오이마츠초의 토지와 저택을 타케우치 세쓰로부터 매입하여, 1882년에 하마쵸에서 여기로 이사하여 본저로 하게 되었다.

1884년 화족령 시행에 의해 화족이 오작제가 되자 모리히사는 구 대번 지사로서 후작에 서임되었다. 후작이 된 모리히사는 무선거·종신으로 귀족원 의원에 취임하여 재직했다. 모리히사의 부인 호소카와 히로코는 나베시마 나오마사의 다섯째 딸이다.

1893년에는 메이지 천황의 행행을 맞이하기 위해, 타카다오이마츠초에 건축가 카타야마 토우쿠마이나 키코시 키요타카 등의 설계에 의해 엘리자베스 양식의 양관을 건설했다. 인접하여 일상생활용의 화관도 건설되었다. 이 저택은 간토 대지진 때 타격을 받았기 때문에, 일단 철거되었고, 새로운 저택의 건설 계획이 일어섰지만, 곧바로 실현되지 않고, 1932년에 새로운 양관이 건설되었다. 그것이 현재 와케이주쿠 본관이 되어 있는 구 호소카와 후작 저택이다.[47]

그 밖에도 호소카와 후작가는 아카사카구 아오야마 타카기쵸, 고지마치구 고지마치, 고지마치구 후지미쵸, 아카사카구 신자카쵸, 니혼바시구 하마쵸, 에바라군 시나가와, 오오모리구 데엔쵸후, 고이시카와구 묘가야, 가나가와현 하야마, 나가노현 카루이자와, 니이가타현 아카쿠라, 교토후 난젠죠지, 구마모토현에 별저를 소유하고 있었다. 또, 구령인 구마모토현 및 일본의 영토가 된 조선반도의 전라북도와 전라남도에 광대한 농지를 소유하고, 막대한 농업 수입을 올렸다.

1893년에 사망한 호소카와 모리히사 후작의 뒤를 이은 15대 호소카와 모리나리 후작은 동아동문서원 원장이나 동아동문회 부회장으로서 중국인 유학생을 위해 동원의 충실에 힘쓰고, 일화친선에 공헌했다. 모리나리의 부인 호소카와 타카코는 토다 우지토모 백작의 장녀이다.

1914년 모리나리의 사후에 후작위를 계승한 동생인 16대 호소카와 모리타테(모리히사의 네 번째 아들, 종가 가독 전은 후술하는 분가의 호소카와 남작가의 당주였다)는, 고미술품의 수집가·연구가로 알려져 있으며, 도쿄지학협회 회장, 국보보존회 회장, 전후에는 정창원 평의원, 문화재보호위원, 누비아유적보호협력위원장, 동양문고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모리타테의 부인 호소카와 히로코는 이케다 아키마사 후작의 장녀이다.

내각총리대신 코노에 후미마로 공작의 비서관을 역임한 17대 호소카와 모리사다는, 전시 중에도 정치 활동을 하고 『'''호소카와 일기'''』를 남겨 쇼와사의 중요한 기록이 되고 있다. 모리사다는 미술, 화도, 다도, 골프의 애호가로서도 알려져 있으며, 일본골프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모리사다의 전처 호소카와 아쓰코는 코노에 후미마로 공작의 차녀이며, 후처의 카오루코는 마쓰이 아키유키 남작의 장녀이다.

모리사다의 장남인 18대 호소카와 모리히로는 아사히 신문의 기자를 거쳐 1971년에 참의원 의원에 당선, 1983년부터 구마모토현 지사를 2기 역임한 후, 1992년에 신당을 결성하여 참의원 의원에 복귀하고, 이듬해 1993년에는 중의원 의원 초선임에도 불구하고 비자민당 연립 정권(호소카와 내각)의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 정계 은퇴 후에는 아들 호소카와 모리미쓰와 함께 도예가로서 활동하고 있다. 2014년에는 "탈원전"의 슬로건을 내걸고 도쿄도지사 선거에 출마했지만, 전 후생대신 마스조에 요이치에게 큰 차이로 패배했다.[48]

또, 모리히로의 친동생 코노에 타다테루(초명·모리테루)는 코노에 마사코(코노에 후미타카 부인)의 양자로 들어가 외가의 코노에가를 계승하고, 일본적십자사 사장을 역임했다.

; 메이지 이후의 역대 당주

  • 구마모토 호소카와가(구마모토번 치지→후작)

# 호소카와 모리히사(사이모루의 아들. 초대 구마모토번 치지, 초대 후작)

# 호소카와 모리나리(2대 후작)

# 호소카와 모리타테(모리히사의 아들, 3대 후작)

# 호소카와 모리사다

# 호소카와 모리히로(구마모토현 지사, 제79대 내각총리대신)

# 호소카와 모리미쓰

마지막 구마모토 신덴번 번주 호소카와 도시나가는 1868년에 타카세로 진야를 옮겼다. 반적봉환 당시 번으로 인정받았으나, 지한사의 임명은 없었고 본번에 병합되었다.

반적봉환 당시 정해진 가록은 현미 1350석이었다.

1876년의 금록공채증서발행조례에 기초하여 가록과 교환으로 지급된 금록공채액은 4만 4964엔 8전 7리(화족 수급자 중 134위)였다.

메이지 전기 무렵 도시나가의 주거지는 도쿄부후카가와구후카가와 조반죠마치에 있었다.

1884년 화족령 시행으로 화족이 5작 제도가 되자, 그 이듬해 8일에 구 소번 지사로서 도시나가는 자작에 서임되었다.

1901년에 도시나가가 사망하자, 장녀 동자의 남편인 호소카와 도시후미(소노 모토요시 백작의 차남)가 사위 양자로서 작위와 가독을 계승했다. 도시후미는 궁내성에 근무하고, 조궁·슈궁의 어용걸을 역임한 후, 온가소 참의를 역임했다. 도시후미 시대의 쇼와 전기에 자작가의 저택은 도쿄부나카노구분엔초에 있었다.

도시후미가 1944년에 사망하자 호소카와 도시히사가 작위와 가독을 계승했다. 도시히사의 부인 츠야는 모리 모토카츠 자작의 넷째 딸이었다.

마지막 우토번 번주 호소카와 유키마사는 1869년 6월 18일 판적봉환에 따라 우토번지사로 전임되었고, 화족에 서임되었으나, 판적봉환 후 번령은 본번인 구마모토번에 흡수되었다.

판적봉환 시에 정해진 가록은 현미 1299석이었다.

1876년의 금록공채증서발행조례에 기초하여, 가록과 교환으로 지급된 금록공채의 액수는 4만 1975엔 47전 2리(화족 수급자 중 139위)였다.

메이지 전기 무렵 유키마사의 주거지는 도쿄부고지마치구시모니반초에 있었다. 가부는 이노우에 이타루, 이토 나오타카였다.

1884년 화족령 시행에 따라 화족이 5작 제도가 되자, 이듬해 8일, 구 소번 지사로서 유키마사는 자작에 서임되었다.

유키마사의 전처 영자는 나카가와 히사아키의 차녀(1881년에 이혼). 후처 리코는 마쓰다이라 나리아키의 육녀였다.

1902년에 유키마사가 사망한 후, 동생 호소카와 타츠오키가 작위와 가독을 계승했다. 타츠오키는 귀족원의 자작 의원에 당선되어 일했다. 타츠오키의 부인 호소카와 치즈코는 우에스기 나리아키의 칠녀였다.

타츠오키의 아들 호소카와 타츠노부의 부인 게이코는 미즈노 타다스케 자작의 장녀였다.

마지막 히타치국 야타베 번주 호소카와 오키카쓰는 1869년 6월 18일 판적봉환에 따라 야타베 번 지사가 되었고, 화족에 서임되었다. 1871년에 번청을 시모쓰케국 모기로 옮겨 2월 8일 모기 번으로 개칭하고 모기 번 지사가 되어, 같은 해 7월 14일 폐번치현까지 번주를 역임하였다.

판적봉환 당시 정해진 가록은 현미 385석이었다.

1876년의 금록공채증서발행조례에 따라 가록과 교환으로 지급받은 금록공채의 액수는 1만 4203엔 67전 3리(화족 수급자 중 289위)였다.

메이지 전기 무렵 오키카쓰의 주거지는 도쿄부 혼고구 고마고미센다기바야시마치에 있었다. 가부는 나카무라 사다무네였다.

1884년 화족령 시행으로 화족이 5계급제가 되자, 이듬해 8일 구 소번 치지로서 오키카쓰가 자작에 서임되었다.

오키카쓰가 1907년에 사망한 후, 오키쓰구가 작위와 가독을 상속받았다. 오키쓰구가 1927년에 사망한 후에는 오키하루가 작위와 가독을 상속받았다. 오키하루는 귀족원의 자작 의원에 당선되어 활동하였다.

당가는 호소카와 후작가의 분가에 해당한다. 호소카와 고쿠 후작의 삼남인 호소카와 고코가 1896년 12월에 호소카와 후작가에서 분가하여 특별 조치로 남작위를 받은 데서 시작되었다.

1898년에 고코가 사망하자, 동생(고쿠의 사남)인 고리쓰가 양자로서 작위와 가독을 계승하였으나, 고리쓰는 1914년 10월 7일에 종가인 호소카와 후작가를 상속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때 당가는 폐가가 되었다.

구 쿠마모토 번에서 6000석을 지행했던 일문 가신인 내선가는 메이지 초기 당주 다다아키 시대인 1871년에 나가오카에서 호소카와로 복성했다. 처음에는 사족으로 분류되었으나, 다다아키의 아들 다다타네가 1900년에 아버지 다다아키의 세이난 전쟁 공적으로 화족 남작에 서임되었다.

내선 호소카와 남작가의 호소카와 다다타네 남작의 삼남 다카하루는 호소카와 씨를 모시는 데미즈 신사 (쿠마모토시)(미즈마에지 조세이엔 내)의 제5대 사지를 지냈다. 오사카 대학 의학부 명예교수 호소카와 고는 다카하루의 손자이다. 또한, 정치가·정치 평론가 호소카와 다카모토와 그의 조카 호소카와 다카이치로는 메이지 시대에 내선가에서 분가한 마키자키 호소카와가 출신이다. 다카모토의 조카 호소카와 다카히데는 규슈 대학 이학부 명예교수이며, 타카히데의 조카 마치나미 리쿠오는 도쿄 대학 의학부 명예교수인 등, 내선가는 근현대에 저명한 학자와 정치가를 다수 배출했다.

구 쿠마모토 번에서 1만 석의 지행을 가지고 있던 일문 가신인 규부케는 메이지 초기 당주 오키마사 시대인 1870년에 나가오카에서 세키가와로 복성하였다. 처음에는 시족으로 분류되었으나, 오키마사의 아들 오키마스 시대인 1897년에 구 만석 이상의 陪臣으로서 화족 남작에 서임되었다.

이 집안은 호소카와 준지로의 공적으로 화족 남작가에 서열되었다. 준지로는 호소카와 요리유키의 후손이라고 자칭하며, 요리유키의 전기를 집필하였다.[49]

준지로는 막말에는 고치번의 봉사로 학문에 정진하였고, 메이지 유신 후에는 개성학교를 거쳐 민부성에 근무하였으며, 미국에 파견된 것을 거쳐 귀국 후에는 원로원 의관에 취임하여 여러 법률의 제정에 참여하고, 사법대보, 원로원 간사, 귀족원 의원, 여자고등사범학교장, 문사비서관장, 枢密顧問官(주밀고문관), 화족여학교장, 동궁대부 등을 역임했다. 또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00년 5월에 공적으로 화족 남작에 서열되었다.

1923년에 준지로가 사망한 후, 장남인 호소카와 이치노스케가 작위와 가독을 계승하였다. 이치노스케는 궁내성 내장료에 근무하였고, 도쿄부 다액납세자였다. 그의 시대인 쇼와 전기에 남작가의 저택은 도쿄시 고이시카와구 토자키초에 있었다.

1945년에 이치노스케가 사망한 후, 이치노스케의 장녀인 토요코의 남편인 호소카와 나오토모(오쿠다 나오야스 자작의 차남)가 작위와 가독을 상속하였다.

4. 1. 주요 분가



'''호소카와 케이초 가문'''(ほそかわけいちょうけ/細川京兆家일본어)은 호소카와씨의 종가이자 적류이며, 셋쓰, 탄바, 사누키, 토사 등의 슈고직을 세습함과 동시에, 대대로 무로마치 막부의 관령직에 임명되었기 때문에 '''관령 호소카와 가문''' (또는 호소카와 관령가)라고도 한다.[10] <케이초(京兆)>란 우쿄노다이부의 당나라식 이름 <경조윤>에서 유래하며, 당주가 대대로 우쿄노다이부의 벼슬에 임명된 것에서 유래한다.[10] 또 이 관위에서 '''호소카와 우케이초(細川右京兆)'''라고도 불린다.[10] 본래 호소카와씨 적류로 권세를 자랑하던 호소카와 키요우지의 실각, 멸망 후 키요우지를 토벌하는 관령으로 막부와 호소카와씨 융성의 기틀을 다진 호소카와 요리유키(키요우지의 사촌)를 시조로 한다.[10] 키요우지의 계통 대신 요리유키의 계통이 호소카와씨의 본가・적통이 되었다.[10]

역대 당주의 돌림자로서, 요리유키의 뒤를 이은 동생 호소카와 요리모토에서 따온 <모토(元)>와 일부 인물은 요리유키에서 따온 <유키(之)>를 사용하고 있다.[10]

요리유키는 츄고쿠 관령, 시코쿠 관령을 역임해, 사누키, 아와, 토사시코쿠의 분국화를 진행시켰다.[10] 중앙에서는 관령이 되어 집정하고, 어린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를 보좌하여 막부 정치를 통할했다.[10] 요리유키요시미츠의 신임은 두터웠지만, 덴쥬 5년/고랴쿠 원년 (1379년)의 고랴쿠 정변으로 일시 실각한다.[10] 그러나 영지인 시코쿠에 건너와, 아와를 중심으로 한 분국 지배를 견지하는 것으로 적대 세력을 물리치고, 이윽고 중앙 정계에 복귀했다.[10]

요리유키 자신은 출가했다는 이유로, 친동생이자 양자 (요리유키는 친자가 없었음) 요리모토를 교토 주위를 굳히기 위해, 탄바, 셋츠의 슈고로 추천하고, 또한 관령으로도 추천했다.[10] 케이초 가문은 아시카가 가문의 시바・하타케야마 두 가문과 함께 쇼군을 보좌하는 3관령(三管領) (3관 4직), 또 무로마치 막부 숙로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10]

무로마치 시대 중후기, 하타케야마 모치쿠니와의 권력 투쟁에서 승리한 호소카와 카츠모토는 세차례에 걸쳐 총 23년간 관령직을 역임하면서, 실력자인 야마나 소젠 (모치토요)과 손을 잡아 하타케야마를 약화시켰다.[10] 그러나 쇼군가와 하타케야마가의 가독 상속 문제 등으로 하타케야마 요시히로를 후원하는 소젠과, 하타케야마 마사나가를 후원하는 카츠모토는 대립, 동군의 총수로서 아시카가 요시미를 추대하여 소젠이 이끄는 서군과의 사이에서 11년에 걸친 오닌의 난을 일으켰고, 그 도중에 병사한다.[10]

세키가하라 전투 후 타다오키는 도쿠가와 가문과의 관계를 중시하고 경계를 풀기 위해 적남 타다타카와 그의 아내 슌코인(마에다 토시이에의 딸 치요)의 이혼을 명했다.[10] 타다타카가 이에 반발하자 적자 자리에서 폐출, 의절하여 이에야스에게 인질로 보낸 나이키 (타다토시)를 후계자로 하여 도쿠가와 가문에 대한 신하로써 복종한다는 뜻을 나타냈다.[10] 폐출된 타다타카는 교토에서 근신 칩거하여 나가오카 큐무(長岡 休無)라 칭하고, 조부 유사이 밑에 피신했으며, 유사이 사후 교토에 있으면서 호소카와 가문의 부지미 3천석을 받고, 공가 사회와 호소카와 가문을 연결하는 재능과 다도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써 여생을 보냈다.[10]

아들인 나가오카 타다츠네・타다하루는 큐무 사후, 번주 호소카와 미츠나오로부터 히고 쿠마모토로 초빙되어 쿠마모토번 일문 가신 나가오카 나이젠 가문이 되었다.[10] 번주 호소카와 츠나토시 시대의 타다하루의 아들 타다시게 (타다스에라고도 함)가 총 6천석을 계승해, 자손은 대대로 일문 수좌에 올랐다.[10] 가몬은 오칠동나무 및 호소카와 쿠요문 외에 가라샤 출신을 그리며 아케치씨의 도라지문을 이문으로 삼았다.[10] 번주가와 지번가 이외의 번주 일문은 호소카와 후지타카가 한때 자칭한 나가오카(長岡)를 에도 시대를 통해 성으로 삼았다.[10]

1755년 (호레키 5년), 쿠마모토 번교 지슈칸 설립시에는 나이젠가 당주 나가오카 타다히데가 초대 총장으로 임명되어, 이후 지슈칸에서의 요코이 쇼난, 키타사토 시바사부로 등의 인재 육성으로 이어졌다.[10] 1871년 (메이지 4년)에 당주 나가오카 타다요시가 호소카와 성씨로 복직하여 호소카와 타다요시를 자칭하고, 그 후 남작에 서위되었다.[10]

호소카와 타다오키의 5남 오키타카가 2만 5천석을 받아 세운 가문으로, 대대로 "나가오카 교부(長岡刑部)" 등을 자칭해, 가록 1만석이었다.[10] 메이지시대에 호소카와 성씨로 돌아와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10] 교부 가문이 쿠마모토 교외의 코가이에 설치한 시모야시키 (구 호소카와 교부 저택)는 현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현재는 쿠마모토성 산노마루에 이축・공개되어있다.[10]

히고 쿠마모토번의 지번 히고신덴번 후의 타카세번, 3만 5천석의 번주이다.[10] 호소카와 미츠나오의 아들 호소카와 토시시게로부터 10대까지 이어졌다.[10] 에도 데포스에 살다가, 에도 막부 말기에 히고 타카세 (현 구마모토현 타마나시)로 옮겼기 때문에 타카세 번이라고도 부른다.[10] 본가 6대 호소카와 노부노리는 토시시게의 아들이다.[10]

히고 쿠마모토번의 지번인 우토번 (구마모토현 우토시) 3만석의 번주이다.[10] 호소카와 타다오키의 4남 타츠타카로부터 11대까지 이어졌다.[10] 5대 호소카와 오키노리는 본번의 호소카와 시게카타와 협력하여, 번교 온지관(温知館) 창설과 수도를 통한 농지 관개, 식산 흥업에 노력하는 등 번정 개혁을 실시하였고, 토자마 지번주이면서 막부 노중 임용도 논의되었다.[10] 본가 10대 호소카와 나리시게 및 12대 호소카와 나리모리는 우토 호소카와 가문 출신이다.[10] 또한, 본가 17대 호소카와 모리사다의 부인 요시코는 11대 호소카와 유키자네의 증손이다.[10] ((호소카와 유키자네 - 모리 타카노리 (사이키번 모리 타카아키의 양자) - 코노에 치요코 (코노에 후미마로의 아내) - 호소카와 요시코 (호소카와 모리사다의 아내) - 호소카와 모리히로 (본가 18대))[10]

히타치국 야타베번 (이바라키현 츠쿠바시) 1만 6200석의 번주이다.[10] 호소카와 후지타카의 차남 오키모토로부터 9대까지 이어졌다.[10] 번조인 오키모토는 호소카와 타다오키의 동생이며, 처음 형 타다오키의 영국인 부젠국에서 코쿠라성을 맡았다가, 가문을 나와 도쿠가와 가문을 직접 섬겼다.[10] 야타베번은 쿠마모토번의 지번이 아닌 독립된 번이다.[10]

일찍이 류오 성주였던 호소카와 가문이다.[10] 호소카와 후지타카의 3남 유키타카가 맏형이자 부젠국주 (코쿠라번주) 타다오키에게 부젠 류오 성을 넘겨받아, 류오 1만 석의 영주가 되었다.[10] 그러나 후계자 없이 사망해, 유키타카 1대로 단절되었다.[10] 유키타카는 세키가하라 전투때, 영국을 떠났던 맏형의 집을 잘 지킨 맹장으로, 전공으로 요충지인 류오 성을 하사받았다.[10]

호소카와 씨(교조 가문)의 분가 중 하나로, 세가와 만모토의 셋째 아들 세가와 지켄을 시조로 한다. 당주가 역임했던 우마두·우마조의 당명을 따서 덴큐 가문이라고 불린다. 기본적으로 수호로서 분국을 가지지는 않았고, 초기에는 교조 가문에서 내중(중신들)을 다스리는 역할을 했던 것 같지만, 후에 셋쓰 국 서성군(나카시마 군)의 분군수호를 역임했다.

호소카와 씨(교쵸 가문)의 분가 중 하나로, 호소카와 미쓰모토의 동생 만국을 시조로 한다. 지춘, 교춘, 정춘, 청국으로 이어졌다. 지춘, 교춘이 2대에 걸쳐 '''시모쓰케슈'''를 칭한 것으로부터 야슈케라는 이름이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또한, 호소카와 마사하루가 동생인 춘구의 계통이 단절된 후 비츄슈고를 계승하자, 그 관직명인 '''아와슈'''에서 '''보슈케'''라고도 불리게 되었다. 비추국 아사쿠치군과 이요국 우마군의 분군슈고를 역임했다.

아와 수호 가문(사와슈 가문)은 14세기 중반, 호소카와 요리유키(細川頼之)의 동생 호소카와 아키하루(細川詮春)로부터 시작되어, 역대 당주가 아와(阿波) 수호직을 세습한 데서 유래한다. 또한, 사누키노카미(讃岐守)라고 불린 것에서 사누슈케(讃州家)라고도 한다. 호소카와 나리유키(細川成之) 때부터는 사누키(讃岐) 수호직도 겸임하게 되어, 아와 사누키 호소카와케(阿波讃岐細川家)라고도 불렸다. 동시에 아와 호소카와씨(阿波細川氏)라고도 불린다.

이즈미국에서는 호소카와 씨의 서류 두 가문이 수호직을 세습했다. 두 수호 가문의 조상은 호소카와 요리나가(요리유키의 조카)와 호소카와 모토유키(요리유키의 양자)로, 전자를 상수호 가문, 후자를 하수호 가문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호소카와 요리유키의 동생인 頼有의 자손이 14세기 중반부터 대대로 이즈미 슈고(守護)직을 역임했다. 頼有 이후로는 頼長, 持有, 教春, 常有(교춘의 동생), 政有, 元有이 세습했다.

호소카와 요리유키의 동생인 호소카와 미쓰유키(호소카와 마츠유키)를 시조로 하여, 호소카와 요리시게(호소카와 요리시게), 호소카와 우지히사(호소카와 우지히사), 호소카와 가쓰히사(호소카와 카츠히사)가 대대로 비추국(비추쿠니)의 수호직을 계승했다. 이 외에도 이요국(이요쿠니) 니이군(니이군) 등의 영지를 소유한 기록도 있다.

호소카와 가즈우지(細川和氏)와 호소카와 요리하루(細川頼春)의 동생인 호소카와 모로우지(細川師氏)를 시조로 한다. 그의 아들 호소카와 우지하루(細川氏春)는 사촌 형인 기요우지(카즈우지의 아들)가 남조에 항복하자, 그를 따라 막부군과 싸웠다. 후손들은 대대로 아와지국(淡路国) 수호를 역임하는 한편, 봉공중(奉公衆)의 으뜸번두(一番番頭)를 맡아 쇼군 곁에서 일했다. 전국 시대 초기에 호소카와 나가하루(細川尚春)가 미요시 요이나가(三好之長)에게 멸망당하면서 단절되었다.

호소카와 씨의 여러 가계 중 하나로, 和氏, 頼春의 사촌인 호소카와 아키우지(호소카와 아키우지)가 '''무쓰노카미(무쓰노카미)'''에 임명된 것을 기원으로 하며, 대외양(大外様)이라고도 불린 가계이다.

대대로 당주가 원강 수를 칭한 데서 이 이름이 굳어졌다. 또한, 원주가(遠州家)와 그 분가는 우에노씨(上野氏)라고도 칭했으며, “호소카와(細川)”와 “우에노(上野)”라는 이름이 병용되었다. 토사(土佐) 수호대가(守護代家)라고도 한다.

5. 연고 사원 및 보다이지

참조

[1] 웹사이트 細川氏 http://kotobank.jp/w[...] 2013-05-29
[2] 서적 The Culture of Civil War in Kyoto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3] 서적 Sōtō Zen in Medieval Japan
[4] 서적 A History of Asia
[5] 웹사이트 Art of Miyamoto Musashi http://www.ecole-miy[...] 2020-08-12
[6] 서적 The Lone Samurai
[7] 웹사이트 Mimasaka. Musashi Miyamoto https://www.memorial[...] 2020-08-12
[8] 서적 Proliferating Talent
[9] 웹사이트 細川氏(肥後熊本藩主家) - Reichsarchiv ~世界帝王事典~ https://archive.toda[...] 2022-02-02
[10] 웹사이트 Hosokawa-shi (Higo Kumamoto hanshu-ke) http://nekhet.ddo.jp[...] 2008-09-27
[11] 웹사이트 Hosokawa-shi (Higo Kumamoto-shinden hanshu-ke) http://nekhet.ddo.jp[...] 2008-09-27
[12] 웹사이트 Hosokawa-shi (Higo Udo hanshu-ke) http://nekhet.ddo.jp[...] 2008-09-27
[13] 웹사이트 細川行孝 http://kotobank.jp/w[...] 2013-05-30
[14] 웹사이트 細川立禮 http://kotobank.jp/w[...] 2013-05-30
[15] 웹사이트 Hosokawa-shi (Yatabe hanshu-ke) http://nekhet.ddo.jp[...] 2008-09-27
[16] 서적
[17] 서적 在京大名細川京兆家の政治史的研究 思文閣出版
[18] 서적 戦国期政治史論集 西国編 岩田書院
[19] 서적
[20] 서적 阿波細川氏の研究 戎光祥出版
[21] 서적
[22] 서적
[23] 서적 岡山県中世城館跡総合調査報告書 岡山県古代吉備文化財センター
[24] 논문 角田因幡守入道宗伊・細川陸奥守入道宗賢の事蹟について 戎光祥出版
[25] 서적
[26] 서적
[27] 서적
[28] 논문 天竺氏
[29] 논문 室町幕府外様衆の基礎的研究
[30] 논문 土佐の堅田一族(二)
[31] 문서 細川之系図
[32] 문서 予章記
[33] 서적 武将系譜辞典
[34] 문서 山科家古文書
[35] 문서 応仁別記
[36] 문서 土佐名家系譜
[37] 서적 戦国期の蔭涼職と幕府政治 吉川弘文館 2022
[38] 문서 晴富宿禰記
[39] 서적 土佐物語 国史研究会 1914
[40] 서적 伯耆志 巻四 因伯叢書発行所 1916
[41] 문서 蔭涼軒日録 1460-11-25
[42] 문서 蔭涼軒日録 1488-04-05, 1488-12-07
[43] 서적 肥後藩の百姓一揆 熊本大学
[44] 서적 名君肥後の銀台 細川重賢 実業之日本社 1999
[45] 서적 地下家伝 第21-26 https://dl.ndl.go.jp[...] 日本古典全集刊行会 1938
[46] 서적 地下家伝 第27-33 https://dl.ndl.go.jp[...] 日本古典全集刊行会 1938
[47] 웹사이트 和敬塾本館とは https://www.wakei.or[...] 和敬塾 2023-06-06
[48] 뉴스 舛添氏が初当選 都知事選、宇都宮氏・細川氏ら破る https://www.asahi.co[...] 朝日新聞 2014-02-09
[49] 서적 細川頼之補伝 https://dl.ndl.go.jp[...] 細川潤次郎 1891
[50] 문서 祖父・細川義季の養子
[51] 문서 曽祖父・細川義季の養子
[52] 문서 奥州家・細川繁氏の養子
[53] 문서 仁木頼章の養子
[54] 문서 野州家・細川教春の子
[55] 문서 関白・九条政基の子
[56] 문서 阿波守護家・細川義春の子
[57] 문서 野州家・細川政春の子
[58] 문서 野州家・細川春倶の子
[59] 문서 典厩家・細川尹賢の子
[60] 문서 京兆家・細川頼之の養子
[61] 문서 備中守護家・細川満之の子
[62] 문서 阿波守護家・細川成之の子
[63] 문서 京兆家・細川政元の養子
[64] 문서 畠山尾州家・畠山高政の養子
[65] 서적 寛政重修諸家譜 https://dl.ndl.go.jp[...]
[66] 문서 京兆家・細川氏綱の子 2024-05
[67] 문서 宗家・細川和氏の子
[68] 문서 淡路守護家(佐々木大原氏流)・細川藤孝の子
[69] 문서 佐々木大原氏・大原持綱の子
[70] 문서 幕臣・三淵晴員の子
[71] 문서 삼연청원의 자. 아와지 슈고케(사사키 오하라씨류)-호소카와 하루히로의 양자.
[72] 문서 숙부-호소카와 오키모토의 양자.
[73] 문서 가신-마츠이 오키나가의 양자.
[74] 문서 가신-난죠 모토노부의 양자.
[75] 문서 가신(호소카와(나가오카) 형부가)-나가오카 오키유키의 양자.
[76] 문서 우토번주로부터 전출.
[77] 문서 우토번주로부터 전출.
[78] 문서 히로사키번-히로사키번주-쓰가루 준쇼의 양자.
[79] 문서 다카세 호소카와가-호소카와 도시후미의 자.
[80] 문서 코노에 후미타카의 양자.
[81] 문서 호소카와 하루토시의 양자가 되어 구마모토번주로 전출.
[82] 문서 구마모토번주.
[83] 문서 호소카와 나리키의 양자가 되어 구마모토번주로 전출.
[84] 문서 카시와하라번-카시와하라번주-오다 노부사다(탄바 카시와하라번주)의 양자.
[85] 문서 오가사와라 사다테쓰 5녀-오가사와라 아이코의 남편.
[86] 문서 혼죠 미치요시 5녀-혼죠 쿠메의 남편.
[87] 문서 사에키번-사에키번주-모리 타카타다의 양자.
[88] 문서 사소 사다오의 양자.
[89] 문서 본가 구마모토번-구마모토번주-호소카와 쓰네토시의 양자.
[90] 문서 츠루마키번-츠루마키번주-미즈노 타다요시의 양자.
[91] 문서 백작-소노 모토요시의 자.
[92] 문서 자작-나가오카 고미의 양자.
[93] 문서 다이나곤-아네노코지 키미마사의 자.
[94] 문서 쵸슈번-쵸슈번주-모리 하루치카의 자.
[95] 문서 미쿠사번-미쿠사번주-다니와 우지후쿠의 자.
[96] 문서 타카다번-타카다번주-사카키바라 마사노리의 자.
[97] 문서 구루메번-구루메번 세자-아리마 요리하루의 자.
[98] 문서 시나노 이이다번-구 시나노 이이다번주-호리 치카요시의 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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