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토미 쓰루마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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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요토미 쓰루마쓰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장남으로, 1589년에 태어나 1591년에 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히데요시는 후계자로 삼으려 하였으나, 쓰루마쓰는 어려서 병을 얻어 사망했다. 쓰루마쓰의 죽음에 히데요시는 큰 슬픔에 잠겼으며,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한 사찰을 건립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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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요토미 쓰루마쓰 | |
|---|---|
| 기본 정보 | |
![]() | |
| 씨족 | 도요토미 씨 (하치스카 씨) |
| 시대 |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 |
| 출생 | 덴쇼 17년 5월 27일 (1589년7월 9일) |
| 사망 | 덴쇼 19년 8월 5일 (1591년9월 22일) |
| 개명 | 기마루 → 쓰루마쓰 |
| 별명 | 아명: 기 또는 기마루 (스테마루), 오스테, 쓰루마쓰 통칭: 하치만타로 |
| 계명 | 쇼운인덴 교쿠겐린코 신도 |
| 묘소 | 교토부교토시우쿄구 하나조노 묘신지초의 묘신지 탑두 교쿠호인 |
| 부모 | 아버지: 도요토미 히데요시, 어머니: 요도도노 (아자이 나가마사의 딸) |
| 형제자매 | 히데카쓰 (이시마쓰마루), 여아, 쓰루마쓰, 히데요리 양형제: 히데카쓰 (오쓰기마루), 히데토시, 히데쓰구, 히데카쓰 (쇼키치), 고우히메, 히데이에, 히데야스 |
2. 생애
1589년 5월 27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장남으로 야마시로 요도 성에서 태어났다. 이때 히데요시는 53세였다.[1] 히데요시는 늦은 나이에 얻은 아들을 매우 기뻐하며,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로 "기(棄)"라는 이름을 지었다. 이는 버려진 아이가 잘 자란다는 민간 신앙에 따른 것이었다. 이후 "쓰루마쓰"로 개명했다고 알려졌지만, 정확한 시기와 경위는 불분명하다.
쓰루마쓰는 1590년 오다와라 정벌 등 히데요시가 주요 전투를 치르는 동안에도 병을 앓는 등 병약했다. 1591년에 병에 걸렸고, 회복하는 듯했으나, 8월 2일에 다시 병에 걸려 8월 5일에 3세의 나이로 오사카성에서 사망했다.[1]
히데요시는 쓰루마쓰의 죽음에 크게 슬퍼하며 도후쿠지에서 머리카락을 자르고 상복을 입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여러 다이묘들도 삭발하며 애도했다. 쓰루마쓰의 장례는 묘심사에서 치러졌고, 법명은 상운원전옥엄린공신동(祥雲院殿玉厳麟公神童)이다.[1] 히데요시는 호코지 대불 옆에 쓰루마쓰의 보리사인 상운사(린자이종)를 건립하고 난카 겐코를 개산조로 맞이했다.[2]
2. 1. 탄생과 후계자 지명
1589년 5월 27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장남으로 야마시로 요도 성에서 태어났다. 이때 히데요시는 53세였다.[1] 히데요시는 친자식을 잃은 만년에 얻은 아들이었기에 후계자로 크게 기대했다. 아들의 출생을 기뻐하며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로 "기(棄)"라는 이름을 지었는데, 이는 버려진 아이가 잘 자란다는 민간 신앙에 따른 것이었다.나중에 "쓰루마쓰"로 개명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시기나 경위는 불분명하다. 쓰루마쓰라는 이름으로 기록된 고문서는 매우 적으며, 당시에는 기군 또는 와카기미 등으로 불렸다. 쓰루마쓰의 후견인으로는 노신 이시카와 미쓰시게가 임명되었다.
생후 30일에는 금중에서 산의 등 축하 물품을 받았고, 공가, 가신, 마을 사람들에게서도 많은 축하와 선물을 받았다. 가모 우지사토는 조상 효타(후지와라 히데사토)가 큰 지네를 퇴치할 때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화살촉을 칼로 고쳐 선물하기도 했다.
생후 4개월이 되던 9월 13일, 히데요시는 쓰루마쓰를 후계자로 삼고자 요도노와 함께 오사카성으로 맞이했다. 고요제이 천황은 축하의 의미로 태도를 하사했고, 공가와 군신들도 다시 축하 물품을 보냈다. 쓰루마쓰는 가마에 태워져 화려한 행렬을 이루며 요도성에서 오사카성으로 입성했다.
2. 2. 병약함과 죽음
1589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1591년 오사카성에서 3세의 나이로 병사했다.[1]히데요시는 53세의 늦은 나이에 쓰루마쓰를 얻어 크게 기뻐하며 후계자로 삼으려 했으나, 1590년 7월경부터 병을 앓기 시작했다. 히데요시는 전국 각지의 신사와 사찰에 병이 낫기를 빌었고, 쓰루마쓰는 잠시 회복되는 듯했다.
1591년 윤 1월 3일에 다시 병을 앓았으나 회복되었다. 그러나 8월 2일에 다시 병에 걸렸고, 히데요시는 전국의 신사와 사찰에 다시 기도를 명하고, 가스가 신사에 많은 봉물을 바치며 간절히 기도했다. 천하의 명의들을 불러 모으고, 히데요시 자신도 도후쿠지에서 기도했지만, 쓰루마쓰는 8월 5일에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히데요시는 큰 슬픔에 빠져 도후쿠지에서 머리카락을 자르고 상복을 입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모리 데루모토 등 여러 다이묘와 측근들도 삭발을 하고 애도했다. 쓰루마쓰의 장례는 묘심사에서 치러졌고, 법명은 상운원전옥엄린공신동(祥雲院殿玉厳麟公神童)이다.[1]
히데요시는 호코지 대불 옆에 쓰루마쓰의 보리사인 상운사를 건립하고, 난카 겐코를 초대 주지로 맞이하여 쓰루마쓰의 인형을 모시게 했다.[2] 상운사는 1593년에 완공되었고, 1596년에는 300석의 사령(寺領)이 주어졌다. 가모 우지사토가 보낸 화살촉검 등 쓰루마쓰의 유품은 묘심사 린카인에 보존되어 있다.
도요토미 씨가 멸망한 후, 상운사는 지샤쿠인에 흡수되어 폐사되었지만, 묘심사의 쓰루마쓰 영묘는 현재도 남아있다. 쓰루마쓰의 인형은 린카인으로 옮겨져 공양을 계속하고 있다.[2]
2. 3. 사후
히데요시는 쓰루마쓰의 죽음에 큰 슬픔을 느껴 교토 히가시 산에 임제종 사찰인 쇼운지(祥雲寺)를 세웠다.[2] 이 절은 도요토미 가문이 멸망한 후, 히데요시와 대립했던 네고로지의 승려에게 주어져 진언종 사찰인 지샤쿠인(智積院)이 되었다.[2]쓰루마쓰는 덴쇼 19년(1591년) 8월 2일에 병에 걸렸다. 히데요시는 전국 신사와 절에 병이 낫기를 빌었고, 가스가 신사에는 많은 봉물을 바치며 기도를 올렸다. 천하의 명의들을 불러모았지만, 8월 5일에 요도 성에서 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1] 유해는 도후쿠지로 옮겨졌고, 히데요시는 큰 슬픔에 빠졌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여러 다이묘와 측근들도 삭발을 했다.
쓰루마쓰의 장례는 묘심사에서 치러졌고, 법명은 상운원전옥엄린공신동(祥雲院殿玉厳麟公神童)이다.[1] 히데요시는 호코지 대불 옆에 쓰루마쓰의 보리사로 상운사(린자이 종)를 건립하고 난카 겐코를 개산으로 맞이했다.[2] 분로쿠 2년(1593년)에 준공된 상운사에는 300석의 사령이 기증되었다.
도요토미 가문 멸망 후, 상운사는 지샤쿠인에 흡수되어 폐사되었지만, 묘심사의 쓰루마쓰 영묘(상운원 영묘)는 현재도 옥봉원 옆에 남아있다. 쓰루마쓰의 인형상은 난카 겐코와 연고가 있는 묘심사 탑두 린카인으로 옮겨져 공양을 계속하고 있다.[2]
3. 일화
4. 관련 작품
쓰루마쓰를 다룬 작품은 다음과 같다.
4. 1. 드라마
(변경 사항 없음)
참조
[1]
문서
祥雲院殿玉嚴麟公神童
妙心寺, 相国寺
[2]
웹사이트
人形供養
http://www.rinkain.c[...]
2022-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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