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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운십육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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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연운십육주는 당나라 시대에 설치된 행정 구역으로, 현재의 톈진시에서 산시성 다퉁까지 이르는 지역을 가리킨다. 이 지역은 중국 중부 농업 지대와 북쪽 유목 지대를 나누는 산맥을 따라 위치하며, 16개의 주로 구성되었다. 당나라 이후 오대십국 시대에 거란의 요나라가 이 지역을 점령하면서 '연운십육주'라는 명칭이 사용되었고, 북송 시기에는 이 지역을 되찾기 위한 노력이 있었으나 실패했다. 이후 금나라,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 시대에 걸쳐 비한족 왕조의 지배를 받았으며, 만리장성의 군사적 요충지로서 중요성을 지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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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운십육주
지도
개요
유형역사적 지역
위치중국 북부
구성 지역유주 (幽州, 현재의 베이징)
순주 (順州, 현재의 베이징 순의구)
탁주 (涿州, 현재의 허베이성 탁주시)
단주 (檀州, 현재의 베이징 미윈구))
계주 (薊州, 현재의 톈진 지저우구)
유주 (儒州, 현재의 베이징 연경구))
영주 (瀛州, 현재의 허베이성 허젠시)
막주 (莫州, 현재의 허베이성 런추시)
신주 (新州, 현재의 허베이성 줘루현)
규주 ( 규州, 현재의 허베이성 화이라이현)
무주 (武州, 현재의 허베이성 쉬안화구)
삭주 (朔州, 현재의 산시성 朔州市)
운주 (雲州, 현재의 산시성 다퉁시)
응주 (應州, 현재의 산시성 잉 현)
환주 (寰州, 현재의 산시성 숴저우시 朔城区)
헌주 (憲州, 현재의 산시성 번치현)
역사적 배경
주요 사건936년, 후진의 석경당요나라에 할양
결과중원 왕조의 북방 방어선 약화
요나라의 군사적 요충지 확보
정치·군사적 중요성
군사적 중요성중원 왕조의 수도 방어에 필수적인 지역
정치적 영향송나라의 북벌 실패 원인 중 하나
요나라의 중원 진출 용이
기타
관련 용어북벌 (北伐)
중원
화이

2. 명칭

이 지역은 보다 정확하게는 '''연운 16주''' 또는 '''유기 16주''' (여우지 스류 저우/幽薊十六州중국어)로 알려져 있다.

3. 지리적 위치 및 범위

연운십육주는 당나라 시대에 설치된 행정 단위로, 각 주는 현보다 크고 도보다 작은 행정 단위였다.[1] 연운십육주는 현대의 톈진시 지저우 구에서 산시성 다퉁까지 뻗어 있었으며, 중국 중부의 농업 평원을 북쪽의 유목민 초원 지대와 나누는 산맥을 따라 인접해 있었다.[1] 진나라, 남북조 시대 등 여러 왕조는 이 산맥을 따라 만리장성을 건설했다.[1]

연운십육주 중 7개는 내만리장성 안에 위치했고,[1] 나머지 9개는 내만리장성과 외만리장성 사이에 위치했다.[1] 당나라는 만리장성을 건설하지 않고, 북쪽 부족에 대한 방어를 위해 절도사를 활용했다.[1] 현대의 베이징을 기반으로 하는 범양 또는 유주-기주 절도사가 연운십육주 중 11개를 관할했고,[1] 나머지 5개는 현대의 다퉁인 운주를 기반으로 하는 하동 절도사가 관할했다.[1]

[1]한자현대 위치현대 성/시당나라 시대 행정관만리장성과의 근접성[1]
1유주(연주)幽州(燕州)시청구베이징유주-기주내부
2순주順州순이구베이징유주-기주내부
3단주檀州미윈구베이징유주-기주내부
4유주儒州옌칭구베이징유주-기주사이
5기주薊州지저우 구, 톈진톈진유주-기주내부
6영주瀛州허젠허베이유주-기주내부
7막주莫州런추허베이유주-기주내부
8탁주涿州줘저우허베이유주-기주내부
9신주新州줘루허베이유주-기주사이
10귀주嬀州화이라이허베이유주-기주사이
11무주武州쉬안화허베이유주-기주사이
12유주蔚州위 현허베이하동사이
13운주雲州다퉁산시하동사이
14영주應州잉 현산시하동사이
15환주寰州수어저우 동쪽산시하동사이
16삭주朔州수어저우산시하동사이



역사가 프레데릭 W. 모트는 실제로 19개의 주가 있었다고 기록했지만,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다.[9]

"연운십육주"라는 명칭은 북송 휘종 (재위: 1100년 - 1126년) 시기부터 사용되기 시작했으며,[44] 그 이전에는 "연대", "유계", "유연" 등으로 다양하게 불렸다.[44] 태항산맥 동남의 7개 주는 "산전칠주", 서북의 9개 주는 "산후구주"라고 부르기도 했다.[44]

3. 1. 연운십육주에 속하는 주

연운십육주는 당나라 시대에 설치된 행정 단위로, 각 주는 현보다 크고 도보다 작은 행정 단위였다.[1] 연운십육주는 현대의 톈진시 지저우 구에서 산시성 다퉁까지 뻗어 있었으며, 중국 중부의 농업 평원을 북쪽의 유목민 초원 지대와 나누는 산맥을 따라 인접해 있었다.[1] 진나라, 남북조 시대 등 여러 왕조는 이 산맥을 따라 만리장성을 건설했다.[1]

연운십육주 중 7개는 내만리장성 안에 위치했고,[1] 나머지 9개는 내만리장성과 외만리장성 사이에 위치했다.[1] 당나라는 만리장성을 건설하지 않고, 북쪽 부족에 대한 방어를 위해 절도사를 활용했다.[1] 현대의 베이징을 기반으로 하는 범양 또는 유주-기주 절도사가 연운십육주 중 11개를 관할했고,[1] 나머지 5개는 현대의 다퉁인 운주를 기반으로 하는 하동 절도사가 관할했다.[1]

[1]한자현대 위치현대 성/시당나라 시대 행정관만리장성과의 근접성[1]
1유주(연주)幽州(燕州)시청구베이징유주-기주내부
2순주順州순이구베이징유주-기주내부
3단주檀州미윈구베이징유주-기주내부
4유주儒州옌칭구베이징유주-기주사이
5기주薊州지저우 구, 톈진톈진유주-기주내부
6영주瀛州허젠허베이유주-기주내부
7막주莫州런추허베이유주-기주내부
8탁주涿州줘저우허베이유주-기주내부
9신주新州줘루허베이유주-기주사이
10귀주嬀州화이라이허베이유주-기주사이
11무주武州쉬안화허베이유주-기주사이
12유주蔚州위 현허베이하동사이
13운주雲州다퉁산시하동사이
14영주應州잉 현산시하동사이
15환주寰州수어저우 동쪽산시하동사이
16삭주朔州수어저우산시하동사이



역사가 프레데릭 W. 모트는 실제로 19개의 주가 있었다고 기록했지만,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다.[9]

"연운십육주"라는 명칭은 북송 휘종 (재위: 1100년 - 1126년) 시기부터 사용되기 시작했으며,[44] 그 이전에는 "연대", "유계", "유연" 등으로 다양하게 불렸다.[44] 태항산맥 동남의 7개 주는 "산전칠주", 서북의 9개 주는 "산후구주"라고 부르기도 했다.[44]

4. 역사

4. 1. 당나라 시대의 행정 구역

연운십육주는 당나라 시대에 설치된 행정 단위였다. 각 주는 현보다 크고 도보다 작은 행정 단위였다.[1] 연운십육주는 현대의 톈진시 지현에서 산시성 다퉁까지 뻗어 있었으며, 중국 중부의 농업 평원을 북쪽의 유목민 초원 지대와 나누는 산맥을 따라 인접해 있었다.[1] 진나라, 남북조 시대를 포함한 여러 왕조는 이 산맥을 따라 만리장성을 건설했다.[1]

연운십육주 중 7개는 내만리장성(Inner Great Wall) 안에 위치했고,[1] 나머지 11개는 내만리장성과 외만리장성(Outer Great Wall) 사이에 위치했다.[1] 당나라는 만리장성을 건설하지 않고, 북쪽 부족에 대한 방어를 위해 절도사를 활용했다.[1] 현대의 베이징을 기반으로 하는 범양(范陽) 또는 유주-기주 절도사가 연운십육주 중 11개를 관할했고,[1] 나머지 7개는 현대의 다퉁인 운주를 기반으로 하는 하동 절도사가 관할했다.[1]

[1]한자현대 위치현대 성/시당나라 시대 행정관만리장성과의 근접성[1]
1유주(연주)幽州
(燕州)
시청구베이징유주-기주내부
2순주順州순이구베이징유주-기주내부
3단주檀州미윈구베이징유주-기주내부
4유주儒州옌칭구베이징유주-기주사이
5기주薊州지저우 구, 텐진텐진유주-기주내부
6영주瀛州허젠허베이유주-기주내부
7막주莫州런추허베이유주-기주내부
8탁주涿州줘저우허베이유주-기주내부
9신주新州줘루허베이유주-기주사이
10귀주嬀州화이라이허베이유주-기주사이
11무주武州쉬안화허베이유주-기주사이
12유주蔚州위 현허베이하동사이
13운주雲州다퉁산시하동사이
14영주應州잉 현산시하동사이
15환주寰州수어저우 동쪽산시하동사이
16삭주朔州수어저우산시하동사이



역사가 프레데릭 W. 모트는 실제로 19개의 주가 있었다고 기록했지만,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다.[9] 중국 역사학자들은 영주 (營州; 현대의 첸안), 평주 (平州; 현대의 루룽)를 연운십육주에 포함하지 않는데, 이는 이 지역이 석경당의 할양 이전에 이미 후당 시대에 요나라에 점령되었기 때문이다.[1][2] 할양 이후 요나라에 속하게 된 이주 (易州; 현대의 이 현) 또한 16개의 주에 포함되지 않는다.[2] 요나라는 기주에서 경주 (景州, 현대의 준화)를, 평주에서 난주 (灤州; 롼 현)를 새롭게 설치했는데, 이들은 원래의 16개 주에 포함되지 않는다.[3]

4. 2. 오대십국 시대와 할양

907년 당나라가 멸망하고 오대 십국 시대가 시작되면서 중국은 혼란에 빠졌다.[6] 이 시기 야율아보기가 이끄는 거란족이 요나라를 세우고 화북 평원을 노리기 시작했다.[3][4][5]

933년 후당에서 절도사 석경당이 반란을 일으켰다.[47] 936년 석경당은 야율요골에게 연운십육주 할양 등을 조건으로 원조를 요청했고,[46][47][48][49][50] 야율요골은 이를 수락하여 석경당을 지원, 후진 건국을 도왔다.[45][46][47][49][50] 이로써 요나라는 화북 평원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했다.[9]

석경당은 요나라에 신하의 예를 갖췄으나, 그의 조카 석중귀는 신하의 예를 폐지하고 세공도 중단했다.[45][47][49] 이에 야율요골은 후진을 공격하여 946년 멸망시키고 국호를 대요로 고쳤다.[45][49] 요나라는 연운십육주를 획득하여 만리장성 이남에 처음으로 영토를 확보했으며,[46][50] 한족 사대부를 등용하여 통치했다.[44] 이후 성종 시기에는 연운십육주를 중화 왕조와 유사한 제도로 통치했다.[51]

4. 3. 요나라의 통치

거란족이 이끄는 요나라는 점령한 주와 현을 통치하기 위해 중국식 행정 형태를 계속 사용했다.[11] 그들은 대동시(연운 16주의 서쪽 끝)을 서경으로 지정했으며, 938년에는 유주 (현대 베이징 근처)에 새로운 요새 도시를 건설하여 남경으로 만들었다.[9][10] 요나라의 통치하에서, 연운 16주는 요나라 5개의 구역 중 두 구역을 대표했다.[9] 두 구역 모두 요나라 제국을 나눈 두 개의 광범위한 구역 중 하나인 남면관의 일부였다. 연운 16주는 요나라가 중국 북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발판이 되었다.[9]

[[파일:Liao circuits.png|500px|right|thumb|요나라의 5개 지역 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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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NGJING: 상경(상경), ZHONGJING: 중경(중경), DONGJING: 동경(동경), XIJING: 서경(서경), NANJING: 남경(남경) 각 도

]]

요나라의 국토는 상경도, 중경도, 동경도, 서경도, 남경도의 5개 지역으로 구분되었으며, 각각 중심 도시가 위치했다.[46][64] 요나라의 오경은 다음과 같다.[46]

  • 상경 임황부(현재 내몽골 자치구츠펑 시바린좌기 남파라성)
  • 중경 대정부(현재 내몽골 자치구 츠펑시 닝청 현)
  • 동경 요양부(현재 랴오닝 성랴오양 시)
  • 서경 대동부(현재 다퉁 시)
  • 남경 석진부(연경: 현재 베이징 시)


5개 지역(오도)의 상경 임황부는 요나라 전체의 수도로서 다싱안링 산맥 기슭에 위치했다.[46][64] 각 방면에 위치하며, 사람들의 본거지였다.[46][64] 동경도는 과거 발해의 영역이었고, 퉁구스계의 여진(주신)인의 땅, 만주에 해당한다.[46][64] 서경도는 과거 사타튀르크인의 중심지에서 내몽골에 걸친 지역으로, 연운 16주의 서쪽 일대를 포함하고 있으며, 그 서남쪽은 티베트계 탕구트(서하)와 접한다.[46][64] 남경도는 한족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지역이다.[64] 연경은 변방의 군사 거점에서 부도로 변모했지만, 부도라고는 해도 요나라 오경 중 최대의 도시였다.[65]

거란은 오경을 설치했지만, 황제 자신은 도시에 살지 않고, 봄·여름·가을·겨울, 계절에 따른 야영지(나파)를 이동했다.[46] 이는 13세기에 성립한 몽골 제국의 군주도 마찬가지였다.[46]

초원 지역과 농경 사회를 함께 지배하는 정복 왕조에게 통치 조직의 이중성은 불가피했다.[66] 936년 이후, 연운 16주를 새롭게 지배하게 된 요나라는 북방의 인구 희소한 거란족을 중심으로 하는 유목 사회는 북면관이 관할하고, 남방의 인구 밀집한 한족·고려인 등의 농경민 사회에 대해서는 군정을 북면관의 담당으로 하는 한편, 민정에 대해서는 별도로 남면관을 설치하여, 이것에 의해 통치하는 이중 통치 체제를 채택했다.[46][51][64][65] 또한, 법령 자체도 이원적인 것이었다.[51]

북면관제는 북남 재상부를 최고 관부로 하고, 그 아래 북추밀원·남추밀원·적렬마도사·북남이왕원·이리필원·선휘원이 설치되었으며, 각각 육부의 병부, 이부, 예부, 호부, 형부, 공부에 대응하며, 중국 관제를 참조했다고는 하지만 거란의 독자성이 농후하며, 정복 왕조 특유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66] 요나라는, 유목 사회에 대해서는 이러한 관청 아래, 인민을 사대장족·태조 20부·성종 24부 등의 부족 제도로 편성했다.[51] 이에 반해, 남면관에서는 남추밀원 아래 수나라당나라를 본받은 삼성육부의 조직을 설치하여, 주현제에 의해 농경민을 통치했다.[51] 그러나, 영외의 관인 추밀원이 군정을 관장하고, 때로는 정부를 겸하는 권한을 갖는 등, 실태로서는 성당기의 율령 관제가 아니라 당말에서 오대까지의 관제이며, 또한, 삼성 정립이라고는 하지만, 중서성이나 문하성은 부차적인 의미밖에 갖지 못했다.[66] 또한, 동경·중경·남경에는 별도로 재상부가 설치되는 등, 남면관제에서도 거란의 독자성이 보였다.[66]

다만, 연운 16주만이 거란에게 농경 지역이었던 것은 아니다.[69] 장성 밖의 요녕 지역은 물론, 상경도의 거란의 본지에도 농경 지대가 존재했었으며, 연운 16주를 포함하여 상당 부분이 농목 복합 지역이었다.[69][70] 요나라에서는 요녕 지역에도 주현을 부치했다.[70] 또한, 초지에서는 부족-석렬-미리라는 계층 구조를 동반하는 행정 구획이 보이지만, 이것은, 부족-씨족-지족의 내용으로 대체하는 것이 가능하며, 또한, 주현제에 있어서 주-현-향의 구성에 대응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70] 거란은 초원과 중화 양쪽의 시스템을 통합하는 새로운 국가의 형태를 추구하고, 그것을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다.[69]

937년 연운 16주를 요나라에 할양했던 후진의 황제 석경당은 942년에 사망했다.[9] 그는 거란의 충실한 동맹 (어떤 이는 꼭두각시라고 말한다)이었지만, 그의 후계자 석중귀는 요 태종을 상위 군주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했다.[12] 긴장된 외교적 교환이 1년 동안 계속된 후, 943년 요나라는 마침내 석중귀의 불복종을 처벌하기로 결정했다.[13] 2년 동안 전투는 결정되지 않았지만, 945년에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전투에 참여했던 요 태종이 허베이성 남부에서 군대가 패주하면서 거의 죽을 뻔했다. 그는 낙타를 타고 전장을 탈출해야 했다.[14] 그러나 이듬해 요나라 황제는 연운 16주 내에 있는 남경에서 새로운 원정을 시작하여 후진의 붕괴를 촉발했다.[15] 947년 초 후진의 수도 개봉을 점령한 후, 그해 말 그는 자신의 왕조 이름을 "대요" (大遼)라고 선포하고 스스로를 중국 황제라고 선언했다.[16] 요 태종은 요나라의 통치에 반감을 가진 많은 정착민들을 다스리는 데 금세 환멸을 느껴 남경으로 퇴각하기로 결정했다.[16] 퇴각로에서의 격렬한 저항과 태종의 947년 사망은 요나라 정부의 계승 위기를 유발했고, 이는 중국 북부에 새로운 왕조가 들어설 기회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토는 여전히 요나라의 수중에 있었다. 그러나 960년경에는 송나라가 907년 이후 중국 북부가 겪었던 혼란을 종식시켰고, 979년경에는 남중국을 사실상 통일했지만 연운 16주는 잃었다.

요나라가 연운 16주를 획득하기 이전에도 유목민 계통의 지배층이 중화 세계를 통치하는 왕조를 세운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남북조 시대에 선비족의 탁발씨가 세운 북위와 이 시기를 전후하여 화북을 지배한 여러 정권들은 이민족 왕조가 이어졌다[52]。또한, 수나라와 당나라 모두 왕조의 시조는 서위에 몸담았던 군인이며, 선비인 혹은 선비화된 한인이었다[53]오대 시대에는 후당·후진·후한은 사타족의 왕조였고, 후량·후주는 한족의 왕조였지만, 이들의 천자는 모두 절도사 출신이었다[54][55]。또한, 후한의 잔당이 세운 북한도 사타족에 의해 건국되었고, 후주의 건국자인 곽위도 후한의 무장이었기 때문에, 순수한 한족 왕조라고만은 할 수 없다[55]。게다가 조광윤도 후주의 중신이었기 때문에, 후량을 제외한 오대·송의 여러 왕조는 모두 사타족 혹은 사타족 계열의 왕조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55]

그러나, 북아시아 유목 사회에 기반을 둔 왕조가 북방의 판도와 유목 경제, 유목 국가 고유의 통치 제도를 유지하면서, 한편으로는 도시를 갖추고 정주 농경 경제의 중화 세계를 지배한 것은 요나라가 연운 16주를 획득하면서 시작되었으며, 이러한 왕조를 "'''정복 왕조'''"라고 칭하는 경우가 있다[52]。이에 반해, 그 이전의 유목민 계통의 지배층을 둔 왕조를 "滲透王朝중국어"[52] 또는 "호족 국가" 등으로 칭한다.

오대의 사타 튀르크족의 군벌 계열 여러 왕조와 후속하는 송나라는 자국 정권을 "중화 왕조"로 간주하고, 북방 유목 국가를 야만족(북적)으로 간주해 왔지만, 그러한 상대에게 영토를 할양하는 것은 굴욕적인 일이었으며, 이 땅을 되찾는 것이 후진 이후의 "중화 왕조"의 현안 사항이자 비원이 되었다[45][50]。이 땅은 또한, 만리장성에 남접하는 군사상의 요지이며, 16주의 상실로 인해, 이후 200년 가까이 화북의 북방 방어는 매우 어려워졌고, 국토 방위상 중대한 결함이 되었다[45][57]。한편, 요나라와 금나라가 만리장성을 쉽게 넘을 수 있었던 것도, 이 땅을 지배했기 때문이며, 16주는 그들에게는 중국 내지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45]。연운 16주는, 영주·막주에서 소금을 입수하기 쉽다는 장점이 있었고[44], 그보다도, 거란에게는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58]。이것은, 후속하는 여진 국가인 금에게도 마찬가지였다[58]。화북을 지배한 여러 왕조는 그 후, 몇 차례 이 지역을 되찾으려고 시도했다.[50]

요나라의 지배층인 거란족에게 연운 16주의 영유는, 유목 국가의 제도를 유지하면서 중화 세계를 통치하는 능력을 키우는 장이 되었다[46]。요나라를 멸망시키고 북방을 지배한 금나라는, 삼림 지대를 중심으로 수렵·채집·농경·목축을 영위하는 여진 (여진)족에 의해 세워진 국가였다[59][60]。금나라는 유목 국가가 아니었지만, 화북 전역을 지배하고, 거란 왕족을 정권 내에 끌어들임으로써 중화 세계를 통치하는 경험을 계승했으며, 거란 문자에서 영향을 받은 여진 문자를 민족 고유의 문자 체계로 정비했다[61][62]。금나라는, 마침내 북송을 멸망시키고 화북 일대를 영유하는 대제국으로 성장한다[63]。요나라와 금나라 양조에서 축적된 농업 지대·농경민 통치의 경험은, 다음 시대에 발흥하는 몽골 제국에 계승되어, 유목 세계와 농경 지대를 안정적으로 포섭하는 대제국의 건설로 이어졌다.

4. 4. 송나라의 회복 노력과 실패

959년, 후주시영연운십육주 탈환을 목표로 와 싸워 십육주 남부의 막주와 영주 2주를 점령했다.[45][71][72][73] 그러나 시영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망하여 후주군은 철수했고, 연운십육주를 완전히 탈환하지는 못했다.[45][73]

960년 조광윤이 을 건국한 후, 북한은 요나라의 지원을 받으며 송에 대항했다.[57][74] 송 태조 조광윤은 남방 공략에 힘을 기울였고,[57][74] 송 태종 조광의는 979년 북한을 병합했다.[57][76] 송나라는 북한을 병합한 직후 요나라에 대한 공세를 시작했다. 송 태종은 군대를 이끌고 요나라 남경(오늘날의 베이징)을 공격했으나, 고량하 전투에서 패배하여 개봉으로 후퇴했다.[17]

요 경종 사후 승천황태후가 섭정을 맡아 요 성종과 함께 군사 작전을 이끌었다. 986년 송나라는 다시 공격을 시도했으나, 요나라는 세 전선에서 모두 승리했다.[17][18][19][20][21] 승천황태후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송나라와 싸워 승리했고,[17][18][19][20][21] 포로로 잡은 한족 소년들을 거세하여 환관으로 삼았다.[22][23][24]요사』는 승천황태후의 한족 소년 포획 및 대량 거세를 묘사하고 칭찬했다.[25][26][27][28][29][30][31][32][33][34][35]

한족 엘리트들은 요나라에서 거란 엘리트들과 함께 중요한 지위를 차지했다.[36] 한씨 가문은 거란족에 의해 납치되었지만, 완전히 거란화되어 요나라를 충실히 섬겼다.[36] 한덕양은 요나라 황실과 가까웠고, 승천황태후와 사랑에 빠져 아들을 낳았다고 전해진다.[37][38][39]

990년대 동안 송나라와 요나라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999년부터 요나라는 십육주를 송나라 공격의 발판으로 삼았다. 1004년 요 성종은 대규모 작전을 시작했고, 1005년전연의 맹이 체결되어 송나라는 요나라에 연례 조공을 바치게 되었다. 이 조약으로 양국 관계의 지침이 마련되었고, 십육주는 요나라의 소유로 남게 되었다.

1004년 요나라의 침공에 송나라 조정은 공황 상태에 빠졌으나, 재상 구준의 주장으로 송 진종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단주에서 요나라 군대와 대치했다. 양측은 평화 교섭을 진행했고, 송나라는 매년 은 10만 냥과 비단 20만 필을 요나라에 지급하기로 합의했다.[83][84]

4. 5. 금나라의 점령과 남송과의 갈등

송 왕조가 연운 16주를 회복했을 때, 요나라의 지배를 받던 한족들은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금나라가 이 지역을 침략했을 때는 저항하지 않고 남경(현재의 베이징, 당시에는 연경)을 넘겨주었다.[40] 금 왕조는 반송 성향의 베이징 기반 한족 귀족들의 지지를 받았다.[41] 요나라를 위해 일하던 한족은 송 왕조에게 적대적인 적으로 간주되었으며,[42] 송 왕조 출신 한족 또한 금나라로 투항했다.[43]

1113년, 회령(현재의 흑룡강성하얼빈시아청구 백성)을 거점으로 하는 생여진의 수장이었던 아골타가 1115년 요나라에서 독립하여 금나라를 건국하고 황제가 되었다.[59][89][91][93][94][95] 1116년, 아골타가 이끄는 여진군은 동경 요양부(현재의 요녕성요양시)를 함락시켜 요동 지방을 지배하에 두었다.[93][94]

1120년, 금나라는 북송과 해상의 맹을 맺어 요나라를 협공하기로 했다.[89][97][98][99] 금나라는 약속대로 운주를 제압하고 천조제 야율아과를 음산 산맥 방면으로 패주하게 했다.[97][98][99] 그러나 송은 방랍의 난으로 인해 공격이 늦어졌고,[97][100][101] 연경 수비군에게 패배하는 등 약속을 어겼다.[97][98][100][101] 결국 금나라는 약탈당해 텅 빈 연경(유주) 외 6주를 송에 할양하고, 막대한 돈과 식량을 얻게 되었다.[65][91][97][98][101] 송은 금에게 반란자를 숨기는 등 배신 행위를 반복했고, 세폐를 충분히 보내지 않아 송·금 관계가 악화되었다.[65][91][98][103]

1142년의 금과 남송


1125년, 금 태종 오걸매는 북송의 맹약 위반을 문책하고 남벌 명령을 내려 '''송금 전쟁'''이 시작되었다.[65][103] 금군은 개봉을 함락시키고, 상황 휘종·황제 흠종 등을 포로로 잡아 북쪽 만주 땅으로 연행했다(정강의 변).[98][103] 이로써 북송은 멸망했고, 연운 16주는 모두 금나라의 영토가 되었다.[91] 금나라는 연경에 중국식 관제를 채용하고, 요나라와 같은 일국 양 제도를 도입했다.[90] 금나라 통치하에서 16주에 사는 한민족은 "한인" 혹은 "북인"으로 불렸고, 정강의 변 이후 금나라 판도에 더해진 북송 영토의 한민족("남인")과는 구별되었다.[104]

1149년, 해릉왕은 황제를 살해하고 제위를 찬탈하여 독재권을 확립했다.[105][106][107][108] 1153년, 도읍을 회령에서 연경(중도대흥부)으로 천도했다.[105][106][107][108][109] 연경은 중원과 가깝고, 남송과의 경제 관계가 밀접한 화북 통치에 유리한 위치였다.[90][106] 해릉왕 사후 즉위한 세종 또한 연경을 수도로 삼고 정무를 수행했다.[113][114]

4. 6.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 시대



금나라의 중도 대흥부는 1215년 몽골 제국(대몽골 울루스)에 의해 점령되었고, 연운 16주도 몽골의 지배하에 들어갔다.[115] 칭기즈 칸의 손자인 쿠빌라이(재위:1260년 - 1294년)는 중국식 연호인 "중통"을 사용하였고, 1266년 이후 중도 대흥부 북동쪽에 "대도"를 건설했다.[116] 쿠빌라이는 1264년 "지원"으로 개원했고, 1271년 국호를 "대원"으로 고쳤다.[117] "원"이라는 글자에는 하늘, 즉 천지 만물의 근원이라는 의미가 있으며, 중화 전통의 "천"의 의미 외에도 북방 민족 고유의 하늘(텡그리)의 뜻도 내포하고 있었다.[117] "대원", "대도"의 "대"에도 "천"의 의미가 깃들어 몽골의 천하 통일, 더 나아가 천조의 수도 "대도"라는 사상이 담겨 있었다.[117] "대원"은 이상적이고 추상적이며, 보편성과 공정성을 추구하는 국호였다.[118] 이러한 명명법은 후속하는 명과 청에도 계승된다.[118] 원, 명, 청의 정식 국호는 각각 "대원", "대명", "대청"이며, "대"는 단순한 존칭이 아닌 영역의 광대함이나 영역 내 주민의 다민족성을 함의하고 있었다.[118] 쿠빌라이는 1268년 이후 남송 공격을 시작했고, 1279년 남송이 멸망하며 거란의 연운 16주 점령 이후 지속된 남북 대치 상황이 끝났다.[119]

1368년, 서달과 상우춘이 이끄는 명의 북벌군이 대도를 공략하고 몽골 세력을 북쪽으로 몰아내면서 연운 16주는 다시 한족의 손으로 돌아왔다.[120] 명나라는 주원장에 의해 건국된 초기에 수도를 강남의 응천부에 두었다.[122] 홍무제 주원장(재위:1368년 - 1398년)은 각지에 아들을 분봉하여 신제국의 방비를 맡게 했지만, 특히 북방의 장성선을 중요하게 여겼다.[122] 북평부(북경)를 근거지로 삼고 있던 연왕 주체(주원장의 넷째 아들)는, 건문제 (재위:1398년 - 1402년)가 삭번의 방침을 내세우자 정난의 변을 일으켰다.[122][123] 주체가 남경의 정부군에 승리하여 영락제 (재위:1402년 - 1424년)로 즉위한 후, 1421년 정식으로 북경으로 천도했다.[122]

17세기에 명나라가 멸망하자, 연운 16주는 다시 여진인(만주인) 왕조인 청 (대청)이 지배하게 되었다. 청의 순치제 (재위:1643년 - 1661년)가 1644년 5월 산해관을 넘어 북경에 입성하여, 명의 후계자로서 정통 중국 왕조임을 강조했다.[125][126] 그리고, 중국 내지를 지배함에 있어서 북경에 수도를 두었다.[126] 연운 16주는 신해혁명까지 비한족의 지배가 지속되었다.

5. 연운십육주와 한국사

6. 결론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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