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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백지 광고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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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아일보 백지 광고 사태는 1974년 박정희 정권의 유신헌법 선포 이후 언론 탄압에 저항하여 동아일보 기자들이 자유언론수호대회를 열고 정부 비판 기사를 게재하자, 정부가 광고주들을 압박하여 동아일보 지면에 광고가 실리지 못하게 된 사건이다. 1974년 12월 26일 동아일보 지면이 백지로 발행되었으며, 이에 반발한 시민들의 격려 광고와 동아방송 출연진의 출연료 거부 등의 저항이 있었다. 이후 동아일보는 기자들을 대량 해고했고, 해직된 기자들을 중심으로 한겨레신문이 창간되었다. 2008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중앙정보부의 광고주 압박이 있었음을 밝혀냈고, 이는 박정희 정권의 언론 탄압에 대한 추가 조사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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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백지 광고 사태
동아일보 백지 광고 사태
주요 정보
1980년 동아일보 백지 광고 사태 당시의 동아일보
발생일1980년 7월
발생 위치대한민국
원인언론 탄압에 대한 광고주들의 항의 및 지지 표명
결과동아일보 광고 중단
언론 자유에 대한 사회적 관심 증가
배경
당시 상황12·12 군사 반란 이후 신군부의 언론 통제 강화
동아일보를 비롯한 언론사들에 대한 검열 및 압력 심화
광고 중단의 시작1980년 5월 17일 전국비상계엄 확대 조치 이후 광고 감소
7월 들어 광고 게재 중단 사태 본격화
전개 과정
광고주들의 반응신군부의 언론 통제에 대한 항의 표시
동아일보에 대한 지지 의사 표현
광고 게재 중단을 통해 언론 자유 옹호
독자들의 반응동아일보 구독 운동 확산
격려 광고 게재 및 성금 전달
언론 자유 수호에 대한 공감대 형성
동아일보의 대응백지 광고 게재를 통해 상황 알림
언론의 자유를 위한 노력 지속
독자 및 광고주들과의 연대 강화
영향
사회적 영향언론 자유에 대한 중요성 인식 확산
민주화 운동에 대한 지지 증가
신군부의 언론 통제에 대한 비판 여론 형성
언론계에 미친 영향언론의 자유를 위한 투쟁 의식 고취
언론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자각
이후 언론 개혁 운동의 동기 부여
같이 보기
관련 항목동아일보
언론 자유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
12·12 군사 반란
신군부

2. 원인

1972년 10월 박정희 정권이 비상 계엄령과 국회 해산을 포함한 유신 헌법을 발효시키고 나서 많은 지식인, 종교인, 언론인들에 의한 저항이 시작되자 정부는 74년 여러 번의 긴급조치로 대응했다.[2] 이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장기형이 쏟아졌고, 모든 언론을 강하게 탄압하기 시작하여 언론인들이 정부에 비판적인 보도를 하지 못하도록 기사에 사용된 어휘 하나하나까지 따지기 시작한다.[2]

이러한 언론의 보도 태도에 불만을 품은 학생들이 동아일보사 앞에서 동아일보를 불태우자, 기자들은 1974년 10월 24일 ‘자유언론수호대회’를 열게 되었다.[2]

다음은 자유언론수호대회 결의문의 내용이다.

#신문, 방송, 잡지에 대한 어떠한 외부간섭도 우리의 일치된 단결로 강력히 배제한다.

#기관원의 출입을 엄격히 거부한다.

#언론인의 불법연행을 일절 거부한다. 만약 어떠한 명목으로라도 불법 연행이 자행되는 경우 그가 귀사할 때까지 퇴근하지 않기로 한다.

자유언론수호대회 결의문은 경영진의 반대로 10월 24일 석간 신문에 실리지 못하고, 기자들은 기사 제작 거부로 경영진의 방해에 저항하다가 결국 10월 25일자 신문에 결의문이 게재되었다.[2] 이후 동아일보에는 그동안 지면에 실리지 못했던 인권운동가나 야당 인사에 관한 내용의 기사가 실리게 된다.[2]

이러한 상황을 느끼고 당황한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은 동아일보의 주거래 광고주들을 호출해 동아일보에 광고를 내지 못하도록 회유 협박하였다.[2] 이 협박이 통하여, 1974년 12월 20일부터 광고주들이 동아일보에 찾아오게 된다.[2] 20일 동아일보의 오랜 광고주였던 한일약품이 돌연 이유 없이 광고를 신문인쇄하는 일에 사용하는 인쇄동판을 회수해 갔고, 대한생명보험이 연말까지 계약된 광고를 일방적으로 해약했다.[2] 12월 24일부터는 럭키그룹 등 7개 광고주가 일시에 계약을 철회했으며 동아방송에도 13개 주요 광고주가 철회를 통고했고 25일 이후에는 큰 광고가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2] 이로 인해 12월 26일 발행된 신문은 급기야 광고를 실어야 할 자리에 계약된 광고가 없어 사실상 백지로 두게 된 것이다.[2]

2. 1. 유신 체제 하의 언론 탄압

1972년 10월 박정희 정권이 비상 계엄령과 국회 해산을 포함한 유신 헌법을 발효시키고 나서 많은 지식인, 종교인, 언론인들에 의한 저항이 시작되자 정부는 74년 여러 번의 긴급조치로 대응했다.[2] 이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장기형이 쏟아졌고, 모든 언론을 강하게 탄압하기 시작하여 언론인들이 정부에 비판적인 보도를 하지 못하도록 기사에 사용된 어휘 하나하나까지 따지기 시작한다.[2]

이러한 언론의 보도 태도에 불만을 품은 학생들이 동아일보사 앞에서 동아일보를 불태우자, 기자들은 1974년 10월 24일 ‘자유언론수호대회’를 열게 되었다.[2] 자유언론수호대회 결의문은 경영진의 반대로 10월 24일 석간 신문에 실리지 못하고, 기자들은 기사 제작 거부로 경영진의 방해에 저항하다가 결국 10월 25일자 신문에 결의문이 게재되었다.[2] 이후 동아일보에는 그동안 지면에 실리지 못했던 인권운동가나 야당 인사에 관한 내용의 기사가 실리게 된다.[2]

이러한 상황을 느끼고 당황한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은 동아일보의 주거래 광고주들을 호출해 동아일보에 광고를 내지 못하도록 회유 협박하였다.[2] 이 협박이 통하여, 1974년 12월 20일부터 광고주들이 동아일보에 찾아오게 된다.[2] 20일 동아일보의 오랜 광고주였던 한일약품이 돌연 이유 없이 광고를 신문인쇄하는 일에 사용하는 인쇄동판을 회수해 갔고, 대한생명보험이 연말까지 계약된 광고를 일방적으로 해약했다.[2] 12월 24일부터는 럭키그룹 등 7개 광고주가 일시에 계약을 철회했으며 동아방송에도 13개 주요 광고주가 철회를 통고했고 25일 이후에는 큰 광고가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2] 이로 인해 12월 26일 발행된 신문은 급기야 광고를 실어야 할 자리에 계약된 광고가 없어 사실상 백지로 두게 된 것이다.[2]

2. 2. 자유언론수호대회

2. 3. 경영진과의 갈등

3. 전개

3. 1. 광고주 압박

3. 2. 백지 광고 발행

4. 격려 광고와 시민 참여

1974년 12월 30일 동아일보는 1면 광고란에 광고국장 명의로 격려 광고 모집 광고를 게재했다.[3] 광고는 대광고주들의 광고 중단으로 인해 개인, 정당, 사회단체의 의견 광고, 협찬 광고, 연하 광고를 적극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3] 많은 사람들이 정부의 광고 탄압에 반발하여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에 격려 광고와 성금을 냈다.[3] 시민 광고는 주로 동아일보 지지, 박정희 군부독재정권의 언론탄압 비판, 언론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현실을 비판하는 내용이었으며, 단체나 개인 이름만 적는 경우도 있었다.[3]

1975년 5월까지 총 1만 352건의 격려 광고가 실렸으며, 최초의 격려광고 게재자는 김대중 전 대통령으로 '언론의 자유를 지키려는 한 시민'이라는 이름으로 게재하였다.[4] 그는 직접 쓴 글을 측근을 통해 게재하였으며, 언론 자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동아일보 지원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4]

<언론의 자유를 지키자>

언론자유는 우리의 생명이다. 그것 없이는 인권도, 사회정의도, 학원과 종교의 자유도 그리고 국민의 자발적 참여에 의한 국가안보도 존재하지 않는다. 언론자유는 민주국가의 혼이요, 모든 소망의 근원이다. 이것을 지키는 것은 우리의 절대적 의무요, 양도할 수 없는 권리다. 동아일보의 백지광고란은 권력의 음모와 오만의 단적인 증거이며, 국민의 알권리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이는 동아일보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사활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

나는 언론자유와 민족회복을 열망하는 한 시민으로서 모처럼 타오르기 시작한 언론자유의 촛불을 지키기 위하여 이 광고문을 유료게재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우리의 노력 방안을 밝히고 뜻있는 국민의 빠짐없는 참여를 호소하는 바이다.

# 모든 민주시민은 언론자유를 위해 분투하고 있는 동아「매스컴」에 대하여 적극적인 성원을 보내자.

# 종교전체, 법조인, 문화저작자, 중소 상공업자와 유지 시민은 업무광고, 신년축하, 동아의 건투를 축하는 광고 캠페인을 동아 「매스컴」 전체에 대하여 대대적으로 전개하자.

# 동아일보의 당면한 재정난을 돕기 위하여 구독료 선불 및 성금 각출운동을 적극적으로 펴나가자.

# 동아 「매스컴」 당국이 필요하다고 결단하면 구독료의 인상, 방송청취료제의 채택을 기꺼이 받아들여 노력할 것을 다집하고 동아일보에 알리자.

# 앞으로 어떤 언론기관이라도 이와 같은 시련을 겪을 때는 똑같은 방법으로 노력할 것을 모든 언론기관에 전화, 편지 등으로 알리고 언론자유를 위해 분기하도록 촉구하자.

1975년 1월 1일

언론의 자유를 지키려는 한 시민


동아방송 일부 출연진은 언론의 자유를 탄압하는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횡포에 저항하는 뜻으로 출연료를 받지 않고 방송에 출연하기도 했다.[5]

4. 1. 격려 광고 모집

1974년 12월 30일 동아일보는 1면 광고란에 광고국장 명의로 격려 광고 모집 광고를 게재했다.[3] 광고는 대광고주들의 광고 중단으로 인해 개인, 정당, 사회단체의 의견 광고, 협찬 광고, 연하 광고를 적극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3] 많은 사람들이 정부의 광고 탄압에 반발하여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에 격려 광고와 성금을 냈다.[3] 시민 광고는 주로 동아일보 지지, 박정희 군부독재정권의 언론탄압 비판, 언론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현실을 비판하는 내용이었으며, 단체나 개인 이름만 적는 경우도 있었다.[3]

1975년 5월까지 총 1만 352건의 격려 광고가 실렸으며, 최초의 격려광고 게재자는 김대중 전 대통령으로 '언론의 자유를 지키려는 한 시민'이라는 이름으로 게재하였다.[4] 그는 직접 쓴 글을 측근을 통해 게재하였으며, 언론 자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동아일보 지원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였다.[4] 동아방송 일부 출연진은 출연료를 받지 않고 방송에 출연하며 언론 자유 탄압에 저항했다.[5]

4. 2. 시민들의 참여

1974년 12월 30일, 동아일보는 광고국장 명의로 격려 광고를 모집하는 광고를 1면에 게재했다.[3] 대광고주들의 광고 중단으로 인해 개인, 정당, 사회단체의 의견 광고 및 협찬 광고, 연하 광고를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3] 많은 시민들이 정부의 광고 탄압에 반발하여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에 격려 광고와 성금을 냈다. 시민 광고는 동아일보 지지, 박정희 군부독재정권의 언론탄압 비판, 언론의 자유에 대한 열망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으며, 단체나 개인 이름만 적어 광고를 내기도 했다.

1975년 5월까지 총 1만 352건의 격려 광고가 실렸다.[4] 최초의 격려광고 게재자는 김대중 전 대통령으로, '언론의 자유를 지키려는 한 시민'이라는 이름으로 광고를 게재했다.[4] 김대중은 광고에서 "언론자유는 민주국가의 혼"이라며 언론자유 수호를 위한 동아일보 지원, 광고 캠페인, 구독료 선불 및 성금 모금 운동 등을 제안했다.[4]

{{인용문| <언론의 자유를 지키자>

언론자유는 우리의 생명이다. 그것 없이는 인권도, 사회정의도, 학원과 종교의 자유도 그리고 국민의 자발적 참여에 의한 국가안보도 존재하지 않는다. 언론자유는 민주국가의 혼이요, 모든 소망의 근원이다. 이것을 지키는 것은 우리의 절대적 의무요, 양도할 수 없는 권리다. 동아일보의 백지광고란은 권력의 음모와 오만의 단적인 증거이며, 국민의 알권리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이는 동아일보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사활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

나는 언론자유와 민족회복을 열망하는 한 시민으로서 모처럼 타오르기 시작한 언론자유의 촛불을 지키기 위하여 이 광고문을 유료게재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우리의 노력 방안을 밝히고 뜻있는 국민의 빠짐없는 참여를 호소하는 바이다.

# 모든 민주시민은 언론자유를 위해 분투하고 있는 동아「매스컴」에 대하여 적극적인 성원을 보내자.

# 종교전체, 법조인, 문화저작자, 중소 상공업자와 유지 시민은 업무광고, 신년축하, 동아의 건투를 축하는 광고 캠페인을 동아 「매스컴」 전체에 대하여 대대적으로 전개하자.

# 동아일보의 당면한 재정난을 돕기 위하여 구독료 선불 및 성금 각출운동을 적극적으로 펴나가자.

# 동아 「매스컴」 당국이 필요하다고 결단하면 구독료의 인상, 방송청취료제의 채택을 기꺼이 받아들여 노력할 것을 다집하고 동아일보에 알리자.

# 앞으로 어떤 언론기관이라도 이와 같은 시련을 겪을 때는 똑같은 방법으로 노력할 것을 모든 언론기관에 전화, 편지 등으로 알리고 언론자유를 위해 분기하도록 촉구하자.

1975년 1월 1일

언론의 자유를 지키려는 한 시민}}

동아방송 일부 출연진들은 출연료를 받지 않고 방송에 출연하며 언론 탄압에 저항했다.[5]

5. 기자 해직과 한겨레신문 창간

1975년 1월 23일 백지광고 사태 와중의 지면을 들여다보는 동아일보 기자


1975년 3월 8일, 동아일보는 경비 절감의 명목으로 심의실 등 4개 부서 폐지를 단행하고 기자·사원을 해고하기 시작했다. 이날 18명이 해고되고, 이틀 뒤 10일에는 자유언론투쟁위원회의 장윤환 기자, 박지동 기자 등 2명이 편집 방침 비판 이유로 해고되었다.

12일에는 동아일보 기자들이 오전 9시부터 편집국에 모여 회사 측에 항의 성명문을 발표하고, 해고철회 등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13일에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동아일보, 조선일보 기자 해고, 기자협회보 폐간은 현 정권의 언론탄압 위한 음모'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고, 조선일보 불매운동, 광고·취재 기타 일절 협력 거부 방침을 밝혔다. 15일에는 송건호 동아일보 편집국장이 기자 대량해고에 항의하며 사표를 제출했다.

17일, 동아일보 경영진은 폭력배를 동원해 회사에서 농성 중이던 기자 130여 명 전원을 무력으로 축출해버렸다. 27일에도 해고는 이어져 부차장급 7명과 12명의 기자를 해고하고 7명을 무기정직처분하며 '3월 31일까지 복귀 않는 기자, 전원 해고'라고 경고하기까지 이르렀다. 이런 '해고 바람'으로 7월 16일, 이로써 7개월간 이어졌던 동아일보 광고 해약사태는 막을 내렸다.

1975년 10월 24일에는 40여 명이 자유언론실천선언 1주년을 맞아 동아일보사 앞에서 침묵시위를 벌인다.

이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자유언론수호 투쟁 해직 기자들과 1980년 정부의 언론통폐합 조치로 강제 해직된 기자들을 중심으로 새 신문사를 창사하자는 기운이 일어나, 1987년 10월 발기인 3,342명을 대표하는 56명으로 창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1988년 2월 2만 7223명의 시민이 50억 원의 기금으로 그해 5월 15일, 8면의 창간호 50만 부를 발행함으로써 한겨레신문이 출범하였다.

5. 1. 기자 대량 해직

1975년 3월 8일, 동아일보는 경비 절감을 명목으로 심의실 등 4개 부서를 폐지하고 기자와 사원을 해고하기 시작했다. 이날 18명이 해고되었고, 이틀 뒤 10일에는 자유언론투쟁위원회의 장윤환, 박지동 기자 등이 편집 방침 비판을 이유로 해고되었다.

3월 12일, 동아일보 기자들은 편집국에 모여 회사 측에 항의 성명을 발표하고 해고 철회를 요구했다. 13일에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기자 해고 및 기자협회보 폐간을 현 정권의 언론 탄압 음모로 규정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조선일보 불매 운동과 광고 및 취재 협력 거부 방침을 밝혔다. 15일에는 송건호 동아일보 편집국장이 기자 대량 해고에 항의하며 사표를 제출했다.

3월 17일, 동아일보 경영진은 폭력배를 동원해 회사에서 농성 중이던 기자 130여 명 전원을 무력으로 축출했다. 27일에도 부차장급 7명과 12명의 기자를 해고하고 7명을 무기정직 처분하는 등 해고가 이어졌으며, '3월 31일까지 복귀하지 않는 기자 전원 해고'라는 경고까지 나왔다. 이러한 '해고 바람'으로 7월 16일, 7개월간 이어졌던 동아일보 광고 해약 사태는 막을 내렸다.

1975년 10월 24일, 40여 명이 자유언론실천선언 1주년을 맞아 동아일보사 앞에서 침묵시위를 벌였다.

이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자유언론수호 투쟁 해직 기자들과 1980년 정부의 언론통폐합 조치로 강제 해직된 기자들을 중심으로 새 신문사를 창사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1987년 10월, 발기인 3,342명을 대표하는 56명으로 창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1988년 2월, 2만 7223명의 시민이 50억 원의 기금을 모아 그해 5월 15일, 8면의 창간호 50만 부를 발행함으로써 한겨레신문이 출범하였다.

5. 2. 한겨레신문 창간

1975년 동아일보 백지 광고 사태와 1980년 언론통폐합 조치로 강제 해직된 기자들을 중심으로 새 신문사를 창사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1987년 10월, 발기인 3,342명을 대표하는 56명으로 창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1988년 2월, 2만 7223명의 시민이 50억 원의 기금을 마련하였고, 그해 5월 15일, 8면의 창간호 50만 부를 발행함으로써 한겨레신문이 출범하였다.

6. 진상 조사

2008년 10월 28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동아일보 백지 광고 사태중앙정보부의 광고주 압박으로 일어난 사건이었음을 밝혀냈다.[6]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1974년 12월 중앙정보부는 광고주들에게 강제로 서약서를 쓰게 하는 방법으로, 박정희 정부에 비판적인 동아일보에 광고를 싣지 못하게 하였다.[6] 이는 박정희 정권의 언론탄압의혹에 대한 추가적인 진상조사의 필요성을 보여준다.

6. 1. 중앙정보부 개입 확인

2008년 10월 28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가 중앙정보부의 광고주 압박으로 일어난 사건임을 밝혔다.[6]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1974년 12월 중앙정보부는 광고주들에게 강제로 서약서를 쓰게 하는 방법으로, 박정희 정부에 비판적인 동아일보에 광고를 싣지 못하게 하였다.[6]

6. 2. 추가 조사 필요성

2008년 10월 28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가 중앙정보부의 광고주 압박으로 일어난 사건임을 밝혀냈다.[6]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1974년 12월 중앙정보부는 광고주들에게 강제로 서약서를 쓰게 하여 박정희 정부에 비판적인 동아일보에 광고를 싣지 못하게 했다.[6] 이는 박정희 정권의 언론 탄압 전반에 대한 추가적인 진상 조사의 필요성을 보여준다.

참조

[1] 뉴스 "동아일보 사태, 중앙정보부가 주도"(“東亜日報事態、中央情報部が主導”) http://www.ytn.co.kr[...] 2015-08-16
[2] 웹인용 동아 손 좀 봐! http://donga1024.caf[...] 동아투위 홈페이지 2008-10-31
[3] 뉴스인용 1974년 12월 30일 동아일보 http://dna.naver.com[...] 동아일보(네이버 디지털 신문 아카이브) 2009-10-08
[4] 뉴스 동아사태 때 격려광고 첫 참여자는 DJ http://www.mediatoda[...] 미디어오늘 2006-03-15
[5] 문서 1974년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 당시 동아방송 출연자 회상
[6] 뉴스 2008년 10월 29일 YTN 보도 http://www.ytn.co.kr[...] YTN 2008-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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