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진 강제
1. 개요
동진 강제(康帝)는 진나라 명제의 아들이자 유문군의 아들로, 342년부터 344년까지 동진의 황제였다. 그는 성제의 사후 유빙의 주도로 즉위했으며, 재위 기간 동안 후조와의 전쟁이 주를 이루었다. 강제는 유빙과 유익 형제에게 실권을 빼앗겨 황제로서의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고, 23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아들인 목제가 뒤를 이었다.
-
동진 명제의 황자 -
동진 성제
동진 성제는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혼란스러운 시기를 겪었지만, 국가 체제 정비와 북방 출병을 시도한 동진의 제3대 황제이다. -
344년 사망 -
비류왕
비류왕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백제의 제12대 왕으로, 304년 분서왕 사후에 즉위하여 자비로운 정치를 펼치고 이복 동생의 반란을 진압했으며, 신라와 교류하다가 344년에 사망하고 아들 부여구가 근초고왕이 되었다. -
동진의 사도 -
동진 공제
동진 공제는 동진의 11대 황제이자 유유의 괴뢰 황제였으며, 환현의 난과 유유의 권력 장악으로 정치적 입지를 잃고 유유에게 선양을 강요당해 동진이 멸망한 후 암살되었다. -
동진의 사도 -
동진 간문제
2. 생애
함화 원년(326년), 사마악은 오왕이 되었다가 이듬해 낭야왕으로 개봉되었다. 함화 9년(334년)에는 산기상시를 제수받고 표기장군이 더해졌으며, 함강 5년(339년)에는 시중·사도가 되었다.
함강 8년(342년), 성제가 붕어했을 때, 성제에게는 두 명의 어린 아들이 있었다. 그러나 외척으로서 전권을 잃을 것을 두려워한 유빙은 "국난의 시기에 어린 황제는 적합하지 않다"는 명목으로 동모제였던 사마악을 황위에 앉혔다. 원래 부자계승의 원칙에 따라 성제의 아들이 제위에 올라야 했으나, 중서감 유빙이 "국가는 강한 적을 갖고 있으니 의당 어른이 된 군주를 세워야 한다"라고 하여 낭야왕 사마악을 후계자로 삼았다.
강제의 짧은 치세는 대부분 후조의 석호와의 싸움에 소비되었다. 이 싸움 속에서 환온이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조정의 실권은 유빙·유익 형제가 쥐고 있었고, 황제로서의 역량은 발휘하지 못했다. 건원 2년(344년) 9월, 식건전에서 23세의 나이로 붕어했다.
2.1. 즉위 전
사마월(司馬岳)은 322년에 명제의 아들이자 황후 유문군의 아들로 태어났다. 325년 부친이 사망하고 형 성제가 즉위한 후, 326년에 오왕(吳王)으로 봉해졌다. 327년, 숙부 사마유가 더 명예로운 작위를 원했기 때문에 회계왕(會稽王)으로 봉해지고 사마월은 낭야왕(琅琊王)으로 봉해졌다. 소준의 난(326년~328년) 동안 그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형의 재위 기간 동안 그는 여러 관직을 받았지만, 주요 의사 결정에는 실제로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334년, 산기상시를 제수받았고 표기장군이 더해졌다. 339년, 시중·사도가 되었다.
342년 여름, 성제가 위독해졌다. 성제는 첩 주귀비에게서 갓난아기인 두 아들, 사마비와 사마역을 두었다. 당시 최고위 관료 중 한 명이자 성제(그리고 사마월)의 숙부였던 유빙은 어린 황제가 즉위하면 유씨 가문이 권력을 잃을까 두려워, 강력한 적 후조에 맞서기 위해서는 나이 많은 황제가 지정되어야 한다고 성제를 설득했다. 성제는 이에 동의하여 다른 최고위 관료 하충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마월을 낭야왕으로 지정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제가 죽었고, 사마월은 강제(康帝)로 즉위했다.
2.2. 치세
성제가 붕어한 함강 8년(342년), 성제에게는 두 명의 어린 아들(2세의 사마비와 1세의 사마혁)이 있었다. 그러나 외척으로서 전권을 잃는 것을 두려워한 유빙은 "국난의 시기에 어린 황제는 적합하지 않다"는 명목으로 동모제였던 사마악을 황위에 앉혔다. 원래 부자계승의 원칙에 따라 성제의 아들이 제위에 올라야 했으나, 중서감 유빙이 "국가는 강한 적을 갖고 있으니 의당 어른이 된 군주를 세워야 한다"라고 하여 낭야왕 사마악을 후계자로 삼았다.
343년 초, 강제는 부인 저산지를 황후로 책봉했다.
343년 후반, 강제의 또 다른 삼촌인 유익은 후조에 대한 대규모 군사 작전을 제안했는데, 이는 전연의 군주 모용황과 전량의 군주 장준과 조율하는 것이었다. 이 두 명은 명목상으로는 진의 신하였다. 대부분의 관료들은 이 대규모 계획을 두려워했지만, 유빙, 환온(강제의 매형으로, 그의 누이동생 사마흥남 남강공주와 결혼했다), 그리고 교왕 사마무기의 지원을 받아 강제는 이 계획을 승인하고 군대를 동원했다. 유빙은 유익과 협력하기 위해 지방 장관이 되었고, 하충이 그를 대신하여 소환되어 강제의 장인 저포와 함께 근무했다(하지만 곧 그의 직책을 넘겨주었다). 그러나 유익은 결국 알 수 없는 이유로 그의 작전을 거의 수행하지 않았지만, 몇몇 국경 공격을 감행했다.
344년 가을, 강제는 병에 걸렸다. 유빙과 유익은 그의 삼촌인 회계왕 사마유를 황제로 옹립하려 했지만, 하충은 성제에게 했던 이전 조언과 일관되게 강제가 그의 아들 사마단에게 왕위를 물려주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강제는 동의했고 사마단을 태자로 책봉했다. 그는 이틀 후에 사망했고, 1살 된 태자 단(목제)이 뒤를 이었다.
강제의 짧은 치세는 대부분 후조의 석호와의 싸움에 소비되었다. 또한, 이 싸움 속에서 후대에 서부군단을 이끄는 환온이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조정의 실권은 유빙·유익 형제가 쥐고 있었고, 황제로서의 역량은 발휘하지 못했다. 건원 2년(344년) 9월, 식건전에서 붕어했다. 향년 23세였다.
5. 가족 관계
* 정실: 저산자 - 저포의 딸
** 장남: 사마담 (팽자) - 제5대 황제
6. 능묘
숭평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