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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진 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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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진 공제는 동진의 11대 황제이자 유유의 괴뢰 황제였다. 그는 지적 장애를 가진 형 안제를 보좌하며 인망을 얻었으나, 환현의 난과 유유의 권력 장악 속에서 정치적 입지를 잃었다. 420년 유유에게 선양을 강요당해 동진이 멸망하고 유송이 건국되었으며, 이듬해 유유에 의해 암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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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진 공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진 공제
로마자 표기Jìn Gōng Dì
사마 덕문 (Sīmǎ Déwén)
시호공황제 (恭皇帝) (lit. "공손한")
통치 정보
계승 순서동진 제11대 황제
재위 기간419년 1월 28일 - 420년 7월 7일
연호원희 (元熙): 419년 – 420년
이전 통치자안제
다음 통치자유송 무제 유유
생애
출생386년
사망421년 10월 또는 11월 (35세)
사망 장소건강, 유송
매장지충평릉 (沖平陵), 난징, 장쑤성
가족 관계
왕조동진
가문사마씨
아버지효무제
어머니안덕황후
배우자공사황후
자녀해염공주
부양공주

2. 생애

동진의 마지막 황제이다. 지적 장애를 앓았던 형 안제를 평생에 걸쳐 정성껏 보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러한 모습은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12][13] 그는 환현의 난과 유유의 집권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격변기를 살았다. 419년, 형 안제가 유유에게 살해된 후 그의 뒤를 이어 황제로 추대되었으나, 이는 유유의 제위 찬탈을 위한 과정에 불과했으며 실권은 전혀 없었다.[14] 재위 2년 만인 420년 유유에게 제위를 선양하면서 동진 왕조는 막을 내렸고, 유송이 건국되었다. 선양 후 영릉왕(零陵王)으로 봉해졌으나, 이듬해 유유에 의해 암살당하며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13]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15]

2. 1. 즉위 전

386년 진 효무제와 그의 후궁 진귀비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인 사마덕종은 심각한 지적 장애를 앓아 의사소통이나 기본적인 일상생활조차 어려웠던 반면, 사마덕문은 총명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어린 시절부터 형을 곁에서 돌보았으며, 특히 390년 어머니 진귀비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더욱 극진히 보살폈다. 형이 황제로 즉위한 후에도 이러한 보살핌은 계속되었다.

태원 17년인 392년 12월 27일, 낭야왕에 봉해졌다.[5][11] 이는 황태자 다음으로 존귀한 작위였다. 이후 중군장군, 산기상시 등의 관직을 역임했으며, 융안 2년(398년)에는 위장군·개부의동삼사가 되었고, 이듬해(399년)에는 시중, 영사도, 록상서육조사에 임명되었다.[12][13]

당시 동진의 실권은 숙부인 회계왕 사마도자와 그의 아들 사마원현이 차례로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마도자는 정사를 돌보지 않고 주색에 빠졌으며, 사마원현은 능력은 있었으나 잔혹하고 부패하여 국정을 어지럽혔다. 이들의 실정으로 손은의 난이 발발하는 등 나라는 혼란에 빠졌다.

원흥 원년(402년), 사마덕문은 태재에 임명되었으나, 같은 해 형주자사 환현이 난을 일으켜 사마도자와 사마원현 부자를 살해하고 수도 건강을 장악했다. 이때 사마덕문도 형 안제와 함께 환현에게 사로잡혔다. 403년 환현은 안제를 협박하여 제위를 넘겨받고 초나라를 세웠다. 이로써 동진은 일시적으로 멸망했으며, 안제는 평고왕(平固王)으로, 사마덕문은 석양현공(石陽縣公)으로 강등되어 심양으로 옮겨졌다가 강릉에서 환현의 감시 아래 놓였다.

404년, 유유가 군사를 일으켜 환현을 격파하고 안제를 복위시켰다. 사마덕문도 건강으로 돌아와 낭야왕의 작위를 회복하고 대사마, 서주자사 등에 임명되었으나[12][13], 실질적인 권력은 환현 토벌을 주도한 유유에게 넘어갔다. 같은 해 말, 안제와 사마덕문은 잠시 환현의 조카 환진(桓振)에게 사로잡히는 위기를 겪기도 했는데, 환진이 환현의 아들 환승(桓昇)의 죽음에 대한 복수로 안제를 살해하려 하자 사마덕문이 간청하여 목숨을 구했다.

이후 유유는 남연, 서촉, 후진 등 경쟁 세력을 차례로 격파하고 유의, 제갈장민, 사마휴지 등 내부 경쟁자들을 제거하며 권력을 더욱 공고히 했다. 사마덕문은 이 기간 동안 의희 4년(408년) 다시 영사도로 임명되고, 의희 6년(410년)에는 도독궁성제군사가 되는 등[12][13] 형식적으로 존중받았으나 실제 권력은 없었다. 그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으며, 안제의 치세 동안 귀족 가문 출신의 저령원과 결혼하여 두 딸(해염공주, 부양공주)을 두었다.

의희 12년(416년), 유유의 북벌에 참여하여 후진으로부터 탈환한 낙양을 방문해 동진 황실의 옛 능을 복원하는 임무를 자청하기도 했다.[12][13] 이듬해 북벌군이 돌아올 때 함께 건강으로 귀환했다.

418년 말, 유유는 제위 찬탈을 위해 안제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창명(효무제의 자) 이후 두 명의 황제가 더 있을 것"이라는 당시의 예언을 믿고, 안제를 죽인 뒤 사마덕문을 잠시 내세웠다가 자신이 제위를 차지하려 한 것이다. 사마덕문은 이를 감지하고 항상 형의 곁을 지켰기에 유유가 보낸 암살자들은 기회를 잡지 못했다. 그러나 의희 14년 12월(419년 1월), 사마덕문이 병으로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유유의 심복 왕소지(王韶之)가 안제를 교살했다.[14] 안제가 사망하자 유유는 계획대로 사마덕문을 황제로 옹립했다.

2. 2. 즉위와 최후

418년 말, 유유는 황위를 찬탈할 목적으로 "창명(효무제의 자) 이후 두 명의 황제가 더 있을 것"이라는 예언을 이용해, 안제를 살해하고 사마덕문을 황제로 세우려 계획했다.[14] 그러나 지적 장애가 있던 형 안제를 평소 정성껏 돌보던 사마덕문이 항상 곁을 지켰기에, 유유가 보낸 암살자들은 기회를 찾지 못했다.

419년 초(의희 14년 12월), 사마덕문이 병으로 잠시 자리를 비우자[12][13], 유유는 이 틈을 타 중서시랑 왕소지(王韶之)에게 지시하여 안제를 교살(絞殺)했다.[14] 형 사마덕종이 사망하자, 유유는 사마덕문을 황제로 옹립하니 이가 동진의 제11대 황제인 공제이다.[14] 공제는 즉위 후 419년 봄에 부인 저령원을 황후로 책봉하고, 당시 송공(宋公)이었던 유유를 송왕(宋王)으로 진봉했다. 유유는 처음에는 사양했으나 그해 가을에 왕위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공제는 형과 마찬가지로 실권이 없는 유유의 괴뢰황제에 불과했다.[14]

원희 2년(420년) 봄, 유유는 수양에서 조력자 부량을 수도 건강으로 보내 공제에게 선양을 압박했다. 공제는 그해 여름 유유를 수도로 소환하는 것으로 대응했으나, 결국 부량의 요구에 따라 선위 조서를 직접 작성하고 황궁을 떠나 낭야왕 시절 살던 옛 사저로 물러났다. 사흘 뒤, 유유는 황제에 즉위하여 유송 왕조를 창건했고, 이로써 동진은 멸망했다. 《진서》에 따르면, 선양할 당시 공제는 "진(동진)은 이미 오래전에 멸망했어야 했다. 무엇을 원망할 일이 있겠는가"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13]

유유는 사마덕문을 영릉왕으로 봉하고 건강 인근에 거처를 마련해 주었으며, 겉으로는 보호를 명목으로 장군 유준고(劉遵考|유준고zho)에게 호위를 맡겼으나 실제로는 감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유유는 여전히 사마덕문을 후환으로 여겨 제거하려 했다. 먼저 옛 시종이었던 장위(張偉|장위zho)에게 독주를 보내 사마덕문을 독살하도록 명령했으나, 장위는 "이토록 선량한 분을 독살할 수는 없다."며 자신이 그 독주를 마시고 자결했다.

또한 유유는 사마덕문에게 후사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황후 저씨의 남동생인 저수지(褚秀之|저수지zho)와 저담지(褚淡之|저담지zho)에게 명하여, 황후나 후궁이 아들을 낳을 경우 모두 살해하도록 했다. 이 때문에 사마덕문은 죽음을 매우 두려워하여 항상 황후 저씨와 함께 지냈으며 직접 식사를 준비하는 등 극도로 경계했다.

영초 2년(421년) 가을, 유유는 저담지와 그의 형 저유지(褚裕之|저유지zho)[8]를 보내 황후를 만나게 했다. 황후가 별실에서 오빠들을 만나는 사이 유유가 보낸 병사들이 사마덕문의 거처에 들이닥쳐 그에게 독약을 마시라고 강요했다.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공제는, "불교에서는 자살하면 다음 생에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수 없다"고 말하며 독약 마시기를 거부했다. 《위서》와 《자치통감》 등에도 비슷한 기록이 남아있다.[15] 병사들은 결국 이불을 뒤집어씌워 그를 질식사시켰다.[13] 사마덕문은 사망 후 황제의 예우로 장례가 치러졌다.

3. 인물됨과 평가

사마덕문은 독실한 불교 신자로, 6척 높이의 금불상을 만들어 직접 와관사까지 10여 리를 걸어가 맞이했다.[13] 또한 신중하고 선량한 성품으로 지적 장애를 앓던 형 사마덕종을 평생 정성껏 돌보았다.[5] 사마덕종은 기본적인 의사 표현조차 어려울 정도의 발달 장애가 있었으나, 동생 사마덕문은 어린 시절부터 지능이 뛰어나 형을 보살피는 데 익숙했다고 전해진다.[5] 이러한 인품 덕분에 훗날 장위처럼 그를 대신해 목숨을 바친 인물도 있었다.

어린 시절에는 다소 잔인하고 급한 성격도 보였다. 낭야왕 시절 에게 활을 쏘는 것을 즐겼는데, 어떤 이가 "말은 국성(사마씨)인데 스스로 죽이는 것은 매우 불길하다"고 충고하자 자신의 행동을 깊이 후회했다고 한다. 이후 불교에 더욱 귀의하여 천만 전을 들여 6장 높이의 금불상을 만들기도 했다.

형 진 안제 치세 동안 여러 명예로운 관직을 받았으나[12][13] 실권은 거의 없었다. 권력은 숙부 사마도자, 사촌 사마원현, 군벌 환현을 거쳐 결국 유유에게 넘어갔다. 사마덕문은 이 기간 동안 형식적인 존경만 받았을 뿐 정치적으로는 무력했다. 환현이 찬탈했을 때는 안제와 함께 석양현공으로 강등되어 유배되었고[13], 환현의 조카 환진에게 형과 함께 살해될 뻔했으나 그의 간청으로 위기를 넘겼다.

418년, 유유는 황위 찬탈을 위해 "창명(효무제의 자) 이후 두 황제가 더 있을 것"이라는 예언을 빌미로 안제를 제거하고 사마덕문을 황제로 세우려 했다. 사마덕문은 형의 신변을 염려하여 늘 곁을 지켰으나, 419년 초 병으로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안제는 유유가 보낸 자객 왕소지에게 살해당했다.[14] 이후 유유에 의해 황제로 옹립되었으나, 이는 선양을 위한 허수아비에 불과했다.[14]

공제로 즉위한 후 치세는 짧고 무력했다. 420년, 유유의 측근 부량의 압박을 받아 결국 유유에게 제위를 선양할 것을 강요당했다. 그는 직접 선양 조서를 작성하고 황궁을 떠나 옛 낭야왕 시절의 저택으로 물러났다. 이때 "진(동진)은 이미 오래전에 멸망했어야 했으니, 무엇을 원망하겠는가"라고 말했다고 《진서》는 기록한다.[13] 이로써 동진은 멸망하고 유송이 건국되었다.

선양 후 영릉왕에 봉해졌으나, 421년 9월 유유에게 암살당했다.[13] 그의 죽음에 대해 《위서》는 다른 기록을 전하는데, 유유의 병사들이 독약을 마시라 강요하자, 불교 신자였던 공제는 "불교에서는 자살한 자는 사람으로 전생할 수 없다"며 거부하여 결국 살해당했다는 것이다. 또한 같은 책에서는 황후 저씨의 오빠 저계지와 동생 저담지가 유유와 내통하여 공제에게 아들이 태어날 때마다 살해했다고도 기록한다.[15]

종합적으로 사마덕문은 선량하고 어진 성품을 지녔으나, 혼란한 시대에 실권 없이 권신 유유에게 휘둘리다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인물로 평가된다. 동진의 마지막 황제로서 왕조 멸망을 막지 못한 유약함과 무력함은 부정적 평가의 주된 이유이다.

4. 연호

공제원년2년
서력
(西曆)
419년420년
간지
(干支)
기미(己未)경신(庚申)
연호
(年號)
원희(元熙)
원년
2년

5. 가족 관계


  • '''부모'''
  • * 아버지: 효무제 사마요
  • * 어머니: 진귀비
  • '''형제'''
  • * 사마덕종 (동복형) - 지적 장애가 있었으나, 사마덕문은 어린 시절부터 정성껏 돌보았다.[11]
  • '''배우자'''
  • * 공사황후 추씨 (恭思皇后 河南褚氏중국어; 384년 ~ 436년) - 이름은 영원(靈媛중국어).[13] 유유가 사마덕문을 해치려 하자, 남편과 함께 지내며 직접 식사를 준비하는 등 보호하려 애썼다.[15]
  • '''자녀'''
  • * 해염공주 사마모영 (海鹽公主중국어; 403년 ~ 439년) - 이름은 모영(茂英중국어). 송 소제(406년 ~ 424년)의 황후가 되었다.[13]
  • * 부양공주 (富陽公主중국어)[13] (일부 기록에는 당양공주(当陽公主중국어)로 표기되기도 한다.)
  • * 기타 아들들 - 《위서》에 따르면, 유유는 후환을 없애기 위해 사마덕문의 아들이 태어날 때마다 사람을 시켜 죽였다고 한다.[15] 이 때문에 사마덕문은 아들을 얻지 못했으며, 최소 2명 이상의 아들이 살해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15]

6. 기타

사마덕문은 매우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그는 6척 높이의 금불상을 만들어 와관사까지 직접 10여 리를 걸어가 맞이하기도 했다. 성품이 신중하고 선량하여, 지적 장애를 앓던 형 사마덕종을 평생 동안 정성껏 돌보았다. 그의 이러한 인품 덕분에, 장위( 張偉zho )처럼 그를 대신해 목숨을 버리는 사람도 있었다.

지적 장애가 있었던 이복형 안제와 달리, 사마덕문은 영리한 자질을 갖춘 인물로 평가받는다. 일상생활이 어려웠던 안제를 성실히 보좌했으며, 독실한 불교 신자이기도 했다. 태원 17년(392년)에 낭야왕에 봉해졌고[11], 이후 중군장군, 산기상시 등의 관직을 거쳤다. 융안 2년(398년)에는 위장군, 개부의동삼사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시중, 영사도, 록상서육조사에 임명되었다.[12][13]

원흥 원년(402년)에는 태재가 되었으나, 404년 환현이 제위를 찬탈하자 석양현공으로 강등되어 안제와 함께 심양으로 유배되었다가 강릉으로 옮겨졌다. 환현이 몰락한 후 건강으로 돌아와 낭야왕 작위를 회복하고 대사마, 서주자사 등을 역임했다. 의희 4년(408년) 다시 영사도로 임명되었고, 의희 6년(410년)에는 도독궁성제군사가 되어 중황당에 주둔했다. 의희 12년(416년)에는 유유의 북벌에 참여하여 낙양의 황릉들을 참배했다. 이듬해 북벌군과 함께 돌아왔다.[12][13]

유유가 제위를 노리고 안제를 살해하려 한다는 것을 눈치챈 사마덕문은 항상 안제의 곁을 지켰다. 그러나 의희 14년 12월(419년 1월),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안제는 결국 살해당했다. 이후 유유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으나, 이는 선양을 위한 허수아비에 불과했다.[14] 원희 2년(420년), 결국 유유에게 제위를 선양하라는 강요를 받았다. 이로써 동진은 멸망하고 유유(고조 무제)에 의한 남조 송 왕조가 시작되었다. 선양할 때 그는 "진(동진)은 이미 오래전에 망했어야 했다. 무엇을 원망하겠는가?"라고 말했다고 《진서》는 기록하고 있다.[13]

선양 후 사마덕문은 유유에 의해 영릉왕으로 봉해지고 건강 인근에 마련된 궁궐에서 지내게 되었다. 유유는 자신의 먼 친척인 장군 유준고( 劉遵考zho )에게 호위를 맡겼는데, 이는 표면적으로는 왕을 보호하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감시하기 위함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유는 여전히 사마덕문을 위협으로 여겨, 그의 옛 시종이었던 장위에게 독주를 보내 독살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장위는 명령을 따르지 않고 자신이 독주를 마시고 죽었다.

한편, 유유는 사마덕문이 아들을 낳아 후환이 될 것을 우려했다. 그는 초공주의 남동생들인 초수지( 褚秀之zho )와 초담지( 褚淡之zho )에게, 초공주나 사마덕문의 후궁이 아들을 낳으면 모두 죽이라고 명령했다. 죽음을 두려워한 사마덕문은 초공주와 한 집에서 지내며 직접 식사를 준비했고, 식자재 비용은 초공주가 부담했다. 이 때문에 유유가 보낸 자객들은 한동안 사마덕문을 살해할 기회를 찾지 못했다.

영초 2년(421년) 가을, 유유는 초담지와 그의 형 초유지( 褚裕之zho )[8]를 보내 누이인 초공주를 잠시 다른 곳으로 불러내게 했다. 초공주가 자리를 비운 사이, 유유의 병사들이 사마덕문의 거처에 들이닥쳐 독약을 마시라고 강요했다. 사마덕문은 이를 거부하며, 불교에서는 자살을 금지하며 자살한 사람은 다음 생에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수 없다고 말했다. 결국 병사들은 담요로 그의 얼굴을 덮어 질식시켜 살해했다. 그는 황제의 예우로 장례를 치렀다.[13]

동진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는 북조의 기록인 《위서》에는 이 사건에 대해 약간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위서》에 따르면, 유유의 병사들이 독살을 명했을 때 사마덕문은 "불교에서는 자살자는 사람으로 전생할 수 없다"라고 말하며 거부했고, 이에 병사들이 그를 때려 죽였다고 한다. 또한 같은 책에는 황후저씨의 오빠 저계지와 동생 저담지가 유유와 내통하여, 사마덕문의 아들이 태어날 때마다 살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15]

영릉왕 작위는 사마씨 가문에 세습되다가, 양 무제가 즉위한 502년 4월에 폐지되었다.[9] 마지막 영릉왕은 490년 3월 30일에 사망한 사마약사였다.[10]

참조

[1] 서적 Book of Jin 419-01-28
[2] 서적 Book of Jin
[3] 서적 Book of Jin 421-10-12
[4] 서적 Book of Jin 420-07-07
[5] 서적 Book of Jin 392-12-27
[6] 서적 Song Shu
[7] 날짜 420-07-10
[8] 서적 Book of Song
[9] 서적 Book of Liang
[10] 서적 Book of Southern Qi
[11] 서적 晋書
[12] 서적 晋書
[13] 서적 晋書
[14] 서적 資治通鑑
[15] 서적 魏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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