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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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두레는 농업 생산을 위해 조직된 한국의 전통적인 협동 노동 조직이다. 조선 시대에 이앙법의 보급으로 집단 노동의 필요성이 커지면서 체계적인 모습을 갖추었으며, 일제강점기, 한국 전쟁, 산업화를 거치며 소멸했다. 두레는 마을 단위로 구성되었으며, 동두레, 농사두레, 길쌈두레 등의 종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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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레 | |
---|---|
개요 | |
![]() | |
정의 | 농촌에서 농사일을 공동으로 하기 위해 만든 협동 조직 |
기원 | 삼한 시대의 '계' 조직에서 유래 |
목적 | 농번기 노동력 확보, 상부상조, 공동체 의식 함양 |
특징 | |
조직 구성 | 두레꾼: 구성원 두레장: 지도자 유사: 실무 담당자 머슴: 노동 제공 |
활동 내용 | 농사일 (모내기, 김매기, 추수 등) 마을 공동 작업 (길쌈, 돌개기음 등) 농악 공연 및 굿 진행 공동 생활 (식사, 숙박) |
노동 방식 | 공동 노동, 품앗이 |
놀이와 축제 | 두레 농악 굿 각종 민속놀이 |
역사 | |
삼한 시대 | '계' 조직으로 시작 |
고려 시대 | 농민 공동체 조직으로 발전 |
조선 시대 | 전국적으로 확산, 농업 생산력 증대에 기여 |
일제 강점기 | 민족 의식 고취, 항일 운동의 기반 |
현대 | 농촌 공동체 유지, 전통 문화 계승 |
종류 | |
농사 두레 | 농작업 협동 |
길쌈 두레 | 길쌈 작업 협동 |
목청 두레 | 벌목 작업 협동 |
상여 두레 | 장례 지원 |
관련 용어 | |
농계 (nonggye) | 농촌의 계 조직 |
농청 (nongcheong) | 농촌의 자치 기구 |
농기 (nonggi) | 농사에 사용하는 도구 |
목청 (mokcheong) | 벌목 작업 |
격사 (gyaksa) | 농사일을 격려하는 노래 |
동네 논매기 (dongne nonmegi) | 마을 사람들이 함께 논의 김을 매는 활동 |
길쌈 (gilssam) | 옷감을 짜는 작업 |
돌개기음 (dolgae gieum) | 지붕을 이는 작업 |
참고 자료 | |
관련 서적 | 한국민속학 새로 읽기 |
관련 논문 | 조선후기 두레로 본 농업생산의 주체 두레의 농법과 김매기노동 길쌈두레의 구성과 기능 |
2. 역사
두레는 조선 시대에 체계적인 모습을 갖추어 현대 한국 대학에까지 전해졌다.[5] 이앙법(모내기)이 널리 퍼지면서 한 번에 많은 노동력이 필요해졌고, 이에 따라 두레 제도가 확립되었다.[5]
이앙법은 생산성을 높이고 농작업을 편하게 하는 획기적인 농법이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단기간에 함께 일해야 하는 노동력이 필요했다. 봄철 모내기와 김매기(제초) 작업에는 특히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농촌에서는 두레 조직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9]
두레는 일제강점기 말, 해방 직후, 한국 전쟁 종전, 1950년대, 1960년대, 1970년대 말을 거치면서 점차 사라졌다. 특히 일제강점기 말 강제 징용, 공출, 농촌 해체와 한국 전쟁으로 인해 많은 두레가 사라졌다. 해방 후에도 일부 두레가 남아 있었지만, 1950년대 이후 한국의 급속한 산업화로 인해 대부분 소멸되었다.[8]
2. 1. 기원
두레의 기원은 학자들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고대 씨족 사회에서 기원한 것으로 여겨진다. 삼국 시대에도 벼농사가 이루어졌으며, 농사를 목적으로 사람들이 모여 공동으로 경작하는 두레의 기원이 되었다. 두레는 삼남 지방(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지칭)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이앙법의 확산과 함께 점차 북상했다. 17세기 후반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발생했으며, 이앙법은 남부뿐만 아니라 경기도까지 확산되었다.[8]''길쌈'' 두레는 길쌈을 위해 조직된 공동 노동 조직이다. 여성들은 함께 모여 어렵고 지루한 길쌈 작업을 함께 수행했다. 두레가 조직적인 노동 풀인 반면, 길쌈 두레는 사적으로 이루어지는 소규모의 임의적인 노동 교환 형태였다. 여성들은 가사 노동, 밭 작물 심기 및 수확 등 다양한 분야에서 길쌈 두레를 형성했다.[7]
2. 2. 조선 시대
조선 시대에 두레는 체계적인 모습을 갖추어 현대 한국 대학에까지 전해졌다. 두레 제도는 이앙법(移秧法)에 따라 확립되었다. 이앙법이 전면적으로 시행되면서 한 번에 많은 노동력을 확보하는 것이 필요했다.[5]이앙법은 불량한 모를 제거하여 생산성을 높이고, 농장 작업을 용이하게 하는 획기적인 농법이었다. 그러나 이앙법은 집단적이고 단기적인 노동력을 요구했다. 집단적인 모내기는 봄에 이루어져야 했고, 제초 작업에도 집중적인 노동력이 필요했다. 모내기와 김매기(제초)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봄과 여름 동안 짧은 기간 안에 노동력이 집중적으로 필요했다. 이앙법은 노동력 감소와 생산량 증가를 가져왔지만, 투입해야 하는 단위 시간당 노동량과 강도는 오히려 증가했다. 따라서 농촌 지역에서는 농민 문화를 조직하고 필요한 노동력을 공급하는 두레 조직이 불가피하게 나타나게 되었다.[9]
두레의 소멸은 일제강점기 말, 해방 직후, 한국 전쟁 종전, 1950년대, 1960년대, 1970년대 말로 나눌 수 있다. 가장 많은 수의 두레는 일제강점기 말부터 한국 전쟁 직후까지 사라졌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강제 징용, 공출, 농촌 해체로 인해 두레가 사라졌다. 해방 후에도 널리 행해졌지만, 전쟁으로 황폐해진 사회로 인해 대부분의 두레가 소멸되었다. 남아있던 두레는 1950년대까지 이어졌으며, 한국의 급속한 산업화로 인해 대부분 사라졌다. 일부 경우에는 늦게까지 연장되었을 수도 있지만, 매우 드문 경우이다.[8]
2. 3.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조선 시대에 체계적인 모습을 갖춘 두레 제도는 이앙법(모내기)에 따라 확립되었다. 이앙법은 획기적인 농법이었지만, 집단적이고 단기적인 노동력을 요구했다. 모내기와 김매기(제초)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아 봄과 여름 동안 짧은 기간 안에 노동력이 집중적으로 필요했다. 따라서 농촌 지역에서는 두레 조직이 불가피하게 나타나게 되었다.[9]두레는 일제강점기 말, 해방 직후, 한국 전쟁 종전, 1950년대, 1960년대, 1970년대 말에 걸쳐 소멸하였다. 가장 많은 수의 두레는 일제강점기 말부터 한국 전쟁 직후까지 사라졌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강제 징용, 공출, 농촌 해체로 인해 두레가 사라졌다. 해방 후에도 널리 행해졌지만, 전쟁으로 황폐해진 사회로 인해 대부분 소멸되었다. 남아있던 두레는 1950년대까지 이어졌으며, 한국의 급속한 산업화로 인해 대부분 사라졌다. 일부 경우에는 늦게까지 연장되었을 수도 있지만, 매우 드문 경우이다.[8]
3. 운영 방식
두레는 자연 마을 단위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자연 마을이 작을 경우, 두레를 형성하기 위해 서로 묶였다. 큰 마을의 경우, 하나의 자연 마을을 몇 개로 나누어 두레를 만들었다. 또한, 몇 개의 자연 마을이 '합두레'라는 이름으로 합쳐져 여러 개의 작은 두레를 결합하여 두레의 규모를 확장하기도 했다. 두레는 최소 10명 이상의 구성원을 가져야 했다. 이는 10명 이상이 함께 작업할 때 효율성이 높고, 작업량을 늘리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농업 생산을 위한 두레는 주로 파종 및 논에서 동질적인 작업이 이루어질 때 집중적으로 조직되고 운영되었다.[5]
두레 아래에서의 노동력 동원은 기본적으로 강제적이었다. 각 가정에서는 '장정'(군역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 1명이 참여해야 했다. 조선 시대에는 군역의 대상이 16세에서 60세 사이였다.[5]
4. 종류
두레는 목적에 따라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 동두레: 마을 전체가 참여하는 대규모 두레이다.
- 농사두레: 김매기를 하는 김매기 두레, 풀을 함께 베는 풀베기 두레 등 농사와 관련된 두레이다.
- 길쌈두레: 여성들이 길쌈을 하기 위해 조직한 두레이다.[9]
4. 1. 동두레
동두레는 마을 전체가 조직하는 대규모 두레로, 이 동두레 조직은 엄격한 규칙에 따라 공동 노동을 수행하고 두레굿을 조직했다.[9]4. 2. 농사두레
두레는 고대 씨족 사회에서 기원한 것으로 여겨진다. 삼국 시대에도 벼농사가 이루어졌으며, 농사를 목적으로 사람들이 모여 공동으로 경작하는 두레의 기원이 되었다. 두레는 삼남 지방(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지칭)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이앙법의 확산과 함께 점차 북상했다. 17세기 후반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발생했으며, 이앙법은 남부뿐만 아니라 경기도까지 확산되었다.[8]두레는 조선 시대에 체계적인 모습을 갖추어 현대 한국 대학에까지 전해졌다. ''두레'' 제도는 이앙법(移秧法)에 따라 확립되었다. 이앙법이 전면적으로 시행되면서 한 번에 많은 노동력을 확보하는 것이 필요했다.[5]
이앙법은 불량한 모를 제거하여 생산성을 높이고, 농장 작업을 용이하게 하는 획기적인 농법이었다. 그러나 이앙법은 집단적이고 단기적인 노동력을 요구했다. 집단적인 모내기는 봄에 이루어져야 했고, 제초 작업에도 집중적인 노동력이 필요했다. 모내기와 김매기(제초)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봄과 여름 동안 짧은 기간 안에 노동력이 집중적으로 필요했다. 이앙법은 노동력 감소와 생산량 증가를 가져왔지만, 투입해야 하는 단위 시간당 노동량과 강도는 오히려 증가했다. 따라서 농촌 지역에서는 농민 문화를 조직하고 필요한 노동력을 공급하는 두레 조직이 불가피하게 나타나게 되었다.[9]
동-두레가 마을 전체의 의무적인 조직인 반면, 두레는 공동으로 농사일을 처리하기 위한 상호 이익에 기반한 자발적이고 부분적으로 조직된 작업 집단이다.[9] 농사 관련 두레로는 김매기를 하는 김매기 두레, 풀을 함께 베는 풀베기 두레 등이 있다.
두레의 소멸은 일제강점기 말, 해방 직후, 한국 전쟁 종전, 1950년대, 1960년대, 1970년대 말로 나눌 수 있다. 가장 많은 수의 ''두레''는 일제강점기 말부터 한국 전쟁 직후까지 사라졌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강제 징용, 공출, 농촌 해체로 인해 두레가 사라졌다. 해방 후에도 널리 행해졌지만, 전쟁으로 황폐해진 사회로 인해 대부분의 ''두레''가 소멸되었다. 남아있던 ''두레''는 1950년대까지 이어졌으며, 한국의 급속한 산업화로 인해 대부분 사라졌다. 일부 경우에는 늦게까지 연장되었을 수도 있지만, 매우 드문 경우이다.[8]
4. 3. 길쌈두레
길쌈 두레는 길쌈을 위해 조직된 공동 노동 조직으로, 여성들이 주축이 되어 운영되었다.[9] 여성들은 함께 모여 어렵고 지루한 길쌈 작업을 함께 수행했다. 두레가 조직적인 노동 풀인 반면, 길쌈 두레는 사적으로 이루어지는 소규모의 임의적인 노동 교환 형태였다. 여성들은 가사 노동, 밭 작물 심기 및 수확 등 다양한 분야에서 길쌈 두레를 형성했다.[7]참조
[1]
웹사이트
About us. Dure?
http://dure-ex.com/a[...]
Nottingham Trent University
[2]
웹사이트
Samulnori: Korean drummers
http://www.csbsju.ed[...]
College of Saint Benedict Saint John's University
[3]
웹사이트
ko:두레
http://100.empas.com[...]
Empas / EncyKorea
[4]
웹사이트
ko:두레
http://100.empas.com[...]
Empas / Britannica
[5]
논문
조선후기 두레로 본 농업생산의 주체
http://www.dbpia.co.[...]
2004
[6]
논문
두레의 농법과 김매기노동
http://www.dbpia.co.[...]
1995
[7]
논문
길쌈두레의 구성과 기능
http://www.dbpia.co.[...]
1993
[8]
논문
부여지역의 두레와 생산풍습
http://www.dbpia.co.[...]
1997
[9]
논문
한국의 두레
http://210.204.213.1[...]
1994
[10]
서적
Han'guk minsokhak saero ilki
https://www.worldcat[...]
Minsogwŏn
2001
관련 사건 타임라인
( 최근 20개의 뉴스만 표기 됩니다. )
옛 민초들 ‘노동요’ 힘차게 불러보자, 미래까지 닿도록
평생 ‘소농두레’의 이상 좇은 자부심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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