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수
1. 개요
등수는 삼국 시대 오나라와 서진 시대의 인물로, 오나라에서 벼슬하여 광주자사를 역임했다. 그는 곽마의 반란을 진압하려 했지만, 오나라가 멸망하자 진나라에 항복했다. 이후 진 무제에게 안남장군과 광주자사로 임명되었으며, 무당후에 봉해졌다. 그는 남방에서 여러 해 동안 선정을 베풀었고, 태강 9년(288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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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8년 사망 -
호분
서진 시대의 무장 호분은 공손연 토벌, 제갈탄의 반란 진압, 오나라 정벌 등 주요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무인 가문 출신임에도 학문을 좋아했으며, 딸이 황후가 된 후에도 권세에 기대지 않는 강직한 성품으로 장후라는 시호를 받았고 거기장군으로 추증되었다. -
288년 사망 -
조지 (서진)
조지는 조위의 황족이자 서진의 관료로, 조식의 아들이며 목향공과 제북왕을 지냈고, 서진 건국 후에는 건성현공과 낙평군 태수를 역임했으며, 산기상시와 국자박사까지 지냈으나 말년에는 정신병을 앓다 사망한 인물이다. -
진나라 (위진)의 정치인 -
진수 (서진)
촉한과 서진에서 벼슬을 지낸 진수는 환관의 핍박을 받기도 했으나 장화의 추천으로 등용되어 《삼국지》를 편찬, 위나라를 정통으로 하는 역사관을 확립한 역사가이다. -
진나라 (위진)의 정치인 -
반악
반악은 서진 시대의 문인으로, 빼어난 문학적 재능과 외모로 명성을 얻었지만 사마륜의 쿠데타로 처형되었으며, 슬픔과 비애를 섬세하게 표현한 작품으로 태강문학을 이끌었다고 평가받는다. -
진나라 (위진)의 장군 -
나헌
나헌은 삼국 시대 촉나라와 진나라의 장군으로, 촉한 멸망 후에도 영안을 지키며 오나라의 침략을 막아낸 인물이다. -
진나라 (위진)의 장군 -
유연 (전조)
4세기 초 중국 북방 흉노족 출신 유연은 팔왕의 난 시기 한나라 부흥을 명분으로 한 왕조를 건국하고 한왕에 즉위하여 광문제로 추존되었으며, 그의 나라 한은 조카 유요에 의해 한조 또는 전조로 불리게 되었다.
2. 생애
등수는 오나라와 서진에서 벼슬한 인물이다. 오나라에서 벼슬을 시작하여 서악후(西鄂侯)에 봉해졌고, 손호 대에는 웅목의 뒤를 이어 광주자사가 되었다. 광주자사 시절 백성들에게 위엄과 은혜를 베풀어 존경을 받았으며, 긴 수염을 가진 새우에 대한 일화가 전해진다.
중앙으로 소환되어 집금오(執金吾)가 되었고, 269년에는 육개가 죽기 직전 등수를 포함한 여러 신하들을 청렴하고 충실하며 탁월한 인재라고 칭찬하며 손호에게 국정을 맡길 것을 요청했다.
279년 광주에서 곽마의 반란이 일어나자 진압을 위해 파견되었으나, 그 사이 서진이 오나라를 침공했다. 등수는 손호를 돕기 위해 군을 돌렸으나, 파구(巴丘)에서 손호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여풍, 왕의와 함께 항복했다.
항복 후, 진 무제(사마염)는 등수를 안남장군·광주목 등에 임명하고 무당후(武當侯)로 봉하여 남방의 업무를 맡겼다. 등수는 남방에서 수년간 일하며 변방의 이민족들까지 귀복시켰다.
태강 9년(288년)에 사망하자, 무제는 그를 기려 성후(聲侯)라는 시호를 내렸고, 후에 아들의 상소로 충후(忠侯)로 고쳐졌다.
2.1. 오나라 시기
오나라에서 벼슬하여 서악후(西鄂侯)에 봉해졌으며, 손호 대에 이르러 웅목을 대신해 광주자사가 되었다.
이후 집금오(執金吾)로 임명되었으며, 광주(廣州)의 사병을 관리하던 곽마가 반란을 일으키자 손호는 등수를 사지절(使持節)·도독광주군사(都督廣州軍事)·진남장군(鎮南將軍)·광주목(廣州牧)으로 삼아 불복종자들을 진압하게 하였다. 하지만 반란을 진압하러 간 사이 서진(西晉)이 오나라를 침공했으며, 소식을 들은 등수는 손호를 돕기 위해 군을 물렸으나, 파구(巴丘)에 이르렀을 때 손호가 오나라에 항복하여 등수 또한 광주자사인 여풍, 창오태수인 왕의와 함께 울며 항복하였다.
이후 안남장군(安南將軍)·광주목·가절(持節)·도독(都督)이 되었고, 무당후(武當侯)를 겸해 남방의 업무를 맡았다.
태강 9년(288년)에 세상을 떠났다.
2.2. 곽마의 반란과 오나라 멸망
오나라에서 벼슬하여 서악후(西鄂侯)로 임명되었으며, 손호 대에는 웅목을 대신해 광주자사(廣州刺史)가 되었다.
이후 중앙으로 소환되어 집금오(執金吾)가 되었다. 269년, 육개는 죽기 직전에 등수를 포함한 여러 신하들을 청렴하고 충실하며 탁월한 인재라고 칭찬하며, 이들에게 국정을 맡길 것을 손호에게 요청했다.
279년, 광주에서 곽마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손호는 등수를 사지절(使持節)·도독광주제군사·진남장군·광주목에 임명하여 토벌하게 하였다. 그러나 곽마의 반란을 진압하러 간 사이 서진이 오나라를 침공했다. 등수는 손호를 돕기 위해 군을 돌렸으나, 파구(巴丘)에 이르렀을 때 손호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물러났다. 이후 등수는 광주자사 여풍, 창오태수 왕의와 함께 항복하였다.
항복 후, 진 무제는 등수를 안남장군·광주목·가절·도독으로 임명하고 무당후(武當侯)로 봉하여 남방의 업무를 맡겼다. 등수는 남방에서 수년간 일하며 변방의 이민족들까지 귀복시켰다.
태강 9년(288년)에 등수가 사망하자, 무제는 그를 기려 성후(聲侯)라는 시호를 내렸고, 후에 아들의 상소로 충후(忠侯)로 고쳐졌다.
2.3. 서진 시기
279년, 광주에서 곽마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손호는 등수를 사지절(使持節)·도독광주제군사·진남장군·광주목에 임명하여 토벌을 명했다. 그러나 곽마의 반란을 평정하지 못한 채 진(晉)나라가 쳐들어오자, 등수는 군사를 이끌고 응전하려 달려갔다. 하지만 파구에 이르러 손호가 이미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상복을 입고 눈물을 흘리며 물러났다. 광주 자사 여풍·창오 태수 왕의와 함께 인수를 반납했다.
이후 조칙에 의해 안남장군에 임명되었고, 광주목·지절·도독의 직위는 그대로 유임되었다. 또한 무당후에 봉해진 뒤 고취를 받으며 남방의 일을 위임받았다. 등수가 남방에 있는 동안 변방의 이적(夷狄)들마저 귀복했다. 태강 9년(288년)에 사망했다.
3. 가계
| 등수의 가계 | ||
|---|---|---|
| 아버지 | 배우자 | 자녀 |
| 등병 | 등함 | 등수 |
| 등둔 | 등념지 | |
| 등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