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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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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곽마는 삼국 시대 오나라의 인물로, 합포 태수 수윤의 부곡의 독이었다. 수윤 사후 사병대 분할에 불만을 품고 279년 하전, 왕족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광주독 우수 등을 살해하고 광주 자사 서기를 몰아냈다. 곽마의 반란은 오나라 멸망의 원인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곽마의 이후 행적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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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마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곽마(郭馬)
직책안남장군(安南將軍) (자칭)
생애
활동 시기3세기 후반
임관 시기279년
소속
국가
직위장수

2. 생애

합포태수 수윤계림 태수로 전임 발령을 받았으나, 곽마를 먼저 부임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윤이 병사하자 곽마 등은 사병대 분할 명령을 받았으나 거절하였다.[10]

손호는 징세를 위해 광주에서 호적 조사를 하려 했다. 그해 여름, 곽마는 하전, 왕족, 오술, 은흥 등과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광주독 우수, 남해 태수 유략[8]을 살해하고, 광주 자사 서기를 몰아냈다. 또한 왕번의 동생으로 광주로 유배되었던 왕저, 왕연도 죽였다. 곽마는 스스로 도독·광주 2주 제군사·안남장군을 자칭하고, 은흥을 광주 자사, 오술을 남해 태수로 임명했다. 하전은 창오군, 왕족은 시흥군으로 침공했다.

오나라는 등수[9]에게 진압을 명하고, 도황, 도준 형제를 원군으로 파견했지만, 진압하지 못한 채 11월에 서진의 침공을 받았다. 결국 오나라는 반란 진압 대신 다음 해(280년) 서진에 항복했다. (오나라의 멸망)

서진 (266–420)이 오나라에 대규모 침공을 시작할 때 곽마의 반란은 그해 12월까지 이어졌다. 도준은 무창까지 진군했는데, 소식을 듣고 서둘러 동쪽으로 돌아가 침공을 막으려 했지만 진나라 군대에게 패배했다.[4] 등수는 침공에 대해 알기 전에 여전히 반란군과 싸우고 있었다. 도준과 마찬가지로 그는 침공에 맞서기 위해 작전을 포기했지만, 등수는 도중에 어려움에 직면하여 최전선에 도달하지 못했다.[5]

280년 5월, 손호는 진나라에 항복하여 동오와 삼국 시대가 종식되었다. 등수와 도황[6] 모두 진나라에 항복했고, 도준의 운명은 알려지지 않았다. 곽마는 이 시점부터 기록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으며 사망 시기가 기록되지 않았다.

서진의 육기는 『변망론』에서 "태강의 역"과 곽마의 반란("광주의 난")을 오나라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꼽았다.

2. 1. 초기 생애와 수윤과의 관계

합포 태수 수윤은 시안 태수로 전임했지만, 병으로 인해 곽마에게 선발대로서 500명의 병사를 주어 비한족을 위무하도록 했다.

천기 3년(279년), 수윤이 병사하자 병사들은 다른 무장에게 분할될 처지에 놓였다. 그러나 곽마 등은 이 명령을 거부했다.[10] 곽마는 수윤의 부곡의 독(部隊長)이었는데, 부곡은 대대로 한 가문에 종속되는 사병과 같은 존재였다.

2. 2. 곽마의 난

합포태수 수윤이 계림태수로 전임 발령을 받았으나, 먼저 부임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윤이 병사하자 사병대 분할 명령을 받았으나 거절하였다.[10]

이에 손호(孫晧)가 직접 광주 호적 조사에 나서자 반란을 일으켜 광주독 우수 등을 죽였다. 오나라에는 '오가 멸망할 때 남방에서 반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는데, 손호는 곽마의 반란 소식을 듣고 "이 세상은 망했다"고 한탄했다고 한다.[10]

도준(陶濬)과 도황(陶璜) 등이 난을 진압하려 하였으나, 서진의 오 정벌전이 시작되면서 도준과 도황은 이를 막기 위해 북쪽으로 진군했다. 손호는 이에 겁을 먹고 사마염에게 항복하여 오나라가 멸망하였다. 이후 곽마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곽마는 합포 태수 수윤부곡 지휘관이었다. 부곡은 무장의 사병과 같은 존재로, 대대로 수윤 가문에 종속되었다. 수윤은 시안 태수로 전임되었지만, 병으로 인해 곽마에게 500명의 병사를 주어 비한족을 위무하게 했다.

천기 3년(279년), 수윤이 병사하자 병사들은 다른 무장에게 분할될 처지에 놓였다. 그러나 곽마 등은 분할을 꺼렸다. 마침 그 무렵, 손호는 징세를 위해 광주에서 호적 조사를 하려 했다. 그해 여름, 곽마는 하전, 왕족, 오술, 은흥 등과 반란을 일으켜 광주독 우수, 남해 태수 유략[8]을 살해하고, 광주 자사 서기를 몰아냈다. 또한 왕번의 동생으로 광주로 유배되었던 왕저, 왕연도 죽였다. 그는 도독·광주 2주 제군사·안남장군을 자칭하고, 은흥을 광주 자사, 오술을 남해 태수로 임명했다. 하전은 창오군, 왕족은 시흥군으로 침공했다.

오나라는 등수[9]에게 진압을 명하고, 도황, 도준 형제를 원군으로 파견했지만, 진압하지 못한 채 11월에 서진의 침공을 받았다. 결국 오나라는 반란 진압 대신 다음 해(280년) 서진에 항복했다. (오나라의 멸망)

곽마의 이후 행적은 불분명하며, 서진에 등용되었는지, 그 이전에 사망했는지도 알 수 없다.

서진의 육기는 『변망론』에서 서진의 오 정복전인 "태강의 역"과 곽마의 반란("광주의 난")을 오나라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꼽았다.

2. 3. 반란의 진압과 오나라 멸망

손호가 직접 광주의 호적 조사에 나서자 곽마는 반란을 일으켜 광주독 우수 등을 죽였다. 일찍이 오나라에는 '오가 멸망할 때 남방에서 반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는데, 손호는 곽마의 반란 소식을 듣고 "이 세상은 망했다"고 한탄했다고 한다.[10]

그 후 도준도황 등이 난을 진압하려 하였으나, 직후에 서진의 오 정벌전이 시작되었다. 이에 도준과 도황 등은 이를 막으려고 북쪽으로 진군했으며, 손호는 이에 지레 겁을 먹고 사마염에게 항복하여 오나라가 멸망하였다. 곽마의 그 후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서진 (266–420)이 오나라에 대규모 침공을 시작할 때 곽마의 반란은 그해 12월까지 이어졌다. 도준은 무창까지 진군했는데, 소식을 듣고 서둘러 동쪽으로 돌아가 침공을 막으려 했지만 진나라 군대에게 패배했다.[4] 등수는 침공에 대해 알기 전에 여전히 반란군과 싸우고 있었다. 도준과 마찬가지로 그는 침공에 맞서기 위해 작전을 포기했지만, 등수는 도중에 어려움에 직면하여 최전선에 도달하지 못했다.[5]

280년 5월, 손호는 진나라에 항복하여 동오와 삼국 시대가 종식되었다. 등수와 도황[6] 모두 진나라에 항복했고, 도준의 운명은 알려지지 않았다. 이용 가능한 역사 기록은 모두 반란에 대한 결론을 제공하지 못했지만, 진나라가 인수한 직후에 끝났을 가능성이 크다. 곽마는 이 시점부터 기록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으며 사망 시기가 기록되지 않았다. 항복 후, 등수와 도황은 각각 광주와 교주에서 원래의 직위로 복귀했다.

3. 역사적 평가 및 영향

손호 치하 오나라 말기에 일어난 곽마의 반란은 오나라 멸망의 한 원인이 되었다. 육기는 그의 저서 ''망국론(辨亡論)''에서 곽마의 반란("광주에서의 혼란"이라고 언급)이 오나라 멸망의 많은 이유 중 하나였다고 주장했다.[7]

곽마와 그의 반란은 나관중의 14세기 역사 소설 ''삼국지연의''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참조

[1] 서적 Sanguozhi, Volume 65
[2] 서적 Sanguozhi, Volume 48
[3] 서적 Zizhi Tongjian, Volume 80
[4] 서적 Zizhi Tongjian, Volume 81
[5] 서적 Book of Jin, Volume 57
[6] 서적 Book of Jin, Volume 57
[7] 서적 Disquisition of the Fall of a State, Volume 2
[8] 문서 留略の説もある
[9] 문서 「孫晧伝」には滕循とある。
[10] 서적 한진춘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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