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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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육개는 동오의 관료로, 손권 치세에 관직을 시작하여 손호 치세에 이르기까지 여러 요직을 역임했다. 그는 영흥과 주지 현령을 지내며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쳤고, 담이군 태수로 주애를 공격하여 영토를 확장하는 공을 세웠다. 또한 수춘 전투에 참여하고, 정북장군, 진서대장군 등을 거쳐 좌승상에 이르렀다. 육개는 손호에게 간언을 서슴지 않았으며, 특히 하정의 전횡을 비판했다. 그는 72세에 사망했으며,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고 소인을 멀리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육개는 강직하고 청렴한 관리로 평가받으며, 진수는 그를 "대장부로서 최고의 일을 완수했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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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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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육개 (陸凱) |
자 | 경풍 (敬風) |
출생 | 198년 |
사망 | 269년 12월 또는 270년 1월 |
사망 장소 | 악주 (어저우시) |
출신지 | 양주 오군 오현 |
작위 | 가흥후 (嘉興侯) |
친척 | 육손 (친척), 육윤 (형), 육모 (친척) |
자녀 | 육이 |
관직 | |
좌승상 (左丞相) | 266년 9월 또는 10월 ~ 269년 12월 또는 270년 1월 (만욱과 공동) |
형주목 (荊州牧) | 264년 ~ 266년 9월 또는 10월 |
진서대장군 (鎮西大將軍) | 264년 ~ 266년 9월 또는 10월 |
정북장군 (征北將軍) | 258년 ~ 264년 |
수원장군 (綏遠將軍) | 255년 ~ 258년 |
탕위장군 (盪魏將軍) | 255년 ~ 258년 |
군사 경력 | |
주요 활동 | 서릉 공략전 저지 교지 반란 진압 |
섬긴 군주 | |
군주 | 손권 손량 손휴 손호 |
2. 초기 생애 및 관직 생활
육개는 오군 오현 (현재의 쑤저우) 출신으로, 육씨 가문은 당시 강남 (또는 오 지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네 가문 중 하나였다.[2] 그는 동오의 세 번째 승상인 육손의 친척이기도 했다.
손권 시대인 황무 연간에 지방 현령과 태수 직을 역임하고, 건무도위가 되었을 때 군권을 맡았다. 적오 연간에 담이 태수가 되어 장군 섭우와 함께 담이로 원정, 반란군을 진압하고 건무교위로 승진했다.
오봉 2년(255년), 영릉의 산월 반란민인 진비를 제거하여 파구독·편장군·도향후에 봉해졌다. 이후 무창 우부독으로 전임되었고, 수춘 전투에 참가한 후 탕위장군과 수원장군에 임명되었다.
손휴 시대에는 정북장군이 되어 가절을 받고 예주 목에 임명되었다.
손호 즉위 후, 진서대장군으로 승진, 파구독·형주 목에 임명되었고, 가흥후에 봉해졌다. 감로 원년(265년), 진과의 화의 과정에서 오관중랑장 정충이 익양 땅 탈취를 권했으나, 육개는 이에 반대했다.
보정 원년(266년), 좌승상에 취임했으나, 손호의 폐립 계획은 좌장군 유평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육개는 손호가 다른 사람을 직시하는 것을 싫어함에도 불구, 간언을 계속하였고, 손호는 육개에게만 직시를 허락했다.
손호의 무창 천도와 폭정으로 오나라의 정치와 경제는 혼란에 빠졌다. 육개는 계속해서 간언했고, 황제의 측근인 하정의 전횡을 면전에서 질책했다.
건형 원년(269년) 11월, 육개는 72세로 사망했다. 임종 직전, 육개는 동조를 통해 하정 등 소인을 멀리하고, 요신, 루현, 하소 등 국가의 기둥이 될 인물을 중용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2. 1. 손권 치하에서의 활동
황무 초, 육개는 영흥현(현재의 샤오산 구, 항저우, 저장성)과 제기현(현재의 저장성 주지시)의 장을 역임하며 관직 생활을 시작했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쳐 좋은 평가를 받았다.[3] 적오 연간(238년 ~ 251년)에는 담이태수로 임명되어 주애(현재의 하이커우 시)를 공격하여 오나라의 영토로 편입시키는 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건무교위로 승진했다.[5]적오 5년(242년), 장군 섭우와 함께 3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주애와 담이를 토벌했다.[72] 적오 13년(250년), 위나라의 왕창과 왕기가 남군과 서릉으로 쳐들어오자 손권의 명으로 장군 대열과 함께 이를 막으러 출진했다가 돌아왔다.[72][67]
육개는 군 복무 중에도 학문에 정진하여 특히 『태현경』과 점술에 관심을 가졌다.[4]
3. 손량, 손휴 치하에서의 활동
오나라 2대 황제 손량 치세인 255년, 육개는 군대를 이끌고 후난성 영릉군에서 도적 진비(陳毖)를 소탕하고 편장군으로 승진, 후난성 파구 지역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며 도향후에 봉해졌다. 이후 후베이성 무창의 우부 지역 사령관으로 재배치되었다.[6]
손량 치세 동안, 육개는 조위와의 군사 작전에 참여하여 안후이성 수춘에서 전투를 벌였다. 수춘 원정 후, "탕위장군", "수원장군" 칭호를 받았다.[7]
258년 11월 30일, 손휴 즉위 후, 육개는 정북장군으로 임명되고, 예주 자사직을 받았다.[8] 예주는 위의 영토였다.
3. 1. 손량 치하
오봉 2년(255년), 육개는 영릉에서 산적 진비(陳毖)를 공격해 죽였다.[72] 이 공으로 파구독(巴丘督)·편장군(偏將軍)이 되고 도향후(都鄉侯)에 봉해졌다.[72] 그 후 무창(武昌; 현재 후베이성 어저우)의 우부 지역 사령관으로 재배치되었다.[6]손량 치세 동안, 육개는 오나라의 라이벌 국가인 조위와의 군사 작전에 참여하여 수춘에서 전투를 벌였다. 수춘 원정에서 돌아온 후 그는 장군으로 승진했으며, 처음에는 탕위장군(盪魏將軍), 나중에는 수원장군(綏遠將軍)이라는 칭호를 받았다.[7]
3. 2. 손휴 치하
손휴가 즉위하자 정북장군, 가절을 받았으며, 예주목이 되었다.[73] 예주는 당시 위나라 영토였기에 명목상의 직책이었다.4. 손호 치하에서의 활동과 죽음
264년, 손호가 손휴의 죽음 이후 오나라 황제가 되자, 육개는 서쪽을 지키는 장군(鎮西大將軍)으로 재임명되고 형주 자사의 직책을 부여받았으며, 파구(巴丘; 현재의 후난성 웨양)에 주둔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또한 "가흥후"(嘉興侯)라는 작위를 받았다.[67]
감로 원년 (265년), 위가 멸망하고 진이 건국되자, 당시 교주를 빼앗기는 등 약화된 오나라는 진과 화의를 맺으려 했다. 사마소에게 조문 사자를 보냈지만, 진에 사신으로 갔던 오관중랑장 정충은 손호에게 익양의 땅을 탈취할 것을 권했다. 차기장군 유찬은 이에 찬성했지만, 육개는 반대하며 손호에게 간언했다. 손호는 속으로는 유찬에게 찬성했지만, 실행할 수는 없었다.[68]
보정 원년 (266년), 육개는 좌승상에 취임했다. 손호는 다른 사람이 자신을 직시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육개는 그 점에 대해서도 간언했기 때문에, 손호는 육개에게는 자신을 직시하는 것을 허락했다.
손호는 수도를 무창으로 옮기고 폭정을 펼쳤기 때문에, 오나라의 정치와 경제는 혼란했다. 육개는 말을 다하여 간언했다. 또한, 황제 측근인 하정은 손호의 총애를 믿고 제멋대로 행동했지만, 육개는 그런 태도의 하정을 면전에서 욕했다. 하정은 육개를 중상했지만, 육개는 개의치 않았다.
건형 원년 (269년) 11월, 육개는 병이 깊어져 72세로 사망했다. 손호는 임종 직전의 육개에게 중서령 동조를 보내 남길 말이 없는지 물었지만, 육개는 하정이나 해희 같은 소인을 멀리하고, 요신, 루현, 하소, 장제, 곽탁, 설영, 등수, 육희, 육항과 같은 나라의 기둥이 될 인물을 중용하도록 유언했다.[73]
손호는 생전의 육개를 꺼려하면서, 육개와 족제인 육항의 힘을 두려워하여 손을 쓸 수 없었지만, 육항이 죽자 육개의 가족을 교주로 강제 이동시켜 보복했다.
진수는 마지막 상주문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면서도, 육개는 남자답고 곧으며 절개를 지켰다고 하며, 반준과 함께 "대장부로서 최고의 일을 완수했다"고 평했다. 육기의 『변망론』 안에서도 육개의 자세는 높이 평가되고 있다.
4. 1. 손호 치하
264년, 손호가 즉위하자 육개는 서쪽을 지키는 장군(鎮西大將軍)으로 재임명되고 형주 자사의 직책을 부여받았으며, 파구(巴丘; 현재의 후난성 웨양)에 주둔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또한 "가흥후"(嘉興侯)라는 작위를 받았다.[73]265년 9월 말 또는 10월, 손호는 오나라의 수도를 건업 (현재의 난징)에서 무창(武昌, 현재의 어저우)으로 옮겼다.[10] 수도 이전 결정은 양주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었는데, 이전 과정에 필요한 물품과 자원을 제공해야 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오나라 정부의 정책 실패로 백성들은 고통을 겪었고 극심한 빈곤에 시달렸다.[11] 이 시기에 육개는 손호에게 수도 이전을 만류하고, 인자함으로 통치할 것을 권고하는 상주문을 올렸다.
266년 2월 또는 3월, 손호는 정충(丁忠)을 사신으로 보내 서진과 화해를 맺게 했다. 정충은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후, 서진의 의양군(弋陽郡, 현재의 허난성 신양시 일대)을 공격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서진의 방어가 부실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손호가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조정 회의를 소집했을 때,[12] 육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나라의 장군 유찬(劉纂)은 손호에게 이 기회를 이용하여 공격을 시작하고, 먼저 첩자를 보낼 것을 제안했다. [14] 손호는 유찬의 제안을 따르려고 했지만, 263년에 촉한이 멸망한 것을 고려하여 결국 이 생각을 접었다. [15][16]
같은 해(266년) 9월 또는 10월경, 손호는 육개(陸凱)를 좌승상(左丞相중국어)으로, 만욱(萬彧)을 우승상(右丞相중국어)으로 임명했다.[17][18]
손호는 자신에 대한 비판을 싫어했지만, 육개는 "군주와 신하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면,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했을 때, 모두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손호는 육개의 말을 듣고 그의 피드백을 허용했다.[19][20]
당시, 손호에게는 황제에게 아첨하고, 뒤에서 관리들을 헐뜯으며,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에게 부당한 특혜를 주는 시종 하정(何定중국어)이 있었다.[21] 육개는 한때 그를 질책했다:
하정은 이 일로 육개에게 앙심을 품고, 계속해서 육개를 곤경에 빠뜨릴 방법을 생각했다. 그러나 육개는 흔들리지 않고 전문적이고 공정한 방식으로 자신의 임무를 계속 수행했다. 그는 황제에게 조언을 할 때 솔직하고 말을 아끼지 않음으로써 손호에게 진심과 충성을 계속 보여주었다.[23]
4. 2. 손호 폐위 음모 (논란)
267년 1월이나 2월 초, 육개는 정봉, 정고(丁固중국어)와 함께 손호를 폐위하고 손휴의 아들로 교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육개는 비밀리에 관리에게 정봉이 손호를 사당으로 호위하는 3,000명의 황실 경호대를 이끌도록 추천하게 했다. 그러나 손호는 이 제안을 거절하고 대신 유평(留平중국어)을 선택했다. 그 후 육개 등은 유평에게 접촉하여 음모에 가담해 줄 것을 요청했다. 유평은 참여를 거부했지만, 어떤 것도 발설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유평의 도움 없이는 음모를 실행할 수 없었다.[24]《오록》()에는 육개가 아들 육의에게 비밀리에 유평에게 연락하여 음모에 가담해 줄 것을 요청하도록 지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육의가 말하기도 전에 정봉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유평은 미소를 지으며 육의에게 "멧돼지가 정봉의 진영에 난입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불길한 징조입니다."라고 말했다. 육의는 유평이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두려움을 느껴 음모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25]
보정 원년 (266년), 좌승상에 취임한 육개는 이 해에 대사마 정봉, 어사대부 정고의 찬성을 얻어 손호의 폐립을 계획했지만, 손호의 호위를 맡고 있던 좌장군 유평에게 반대받아 단념했다고 한다.
4. 3. 죽음
陸凱|육개중국어는 병이 위독해지자, 손호가 보낸 중서령 동조에게 유언을 남겼다. 유언에서 하정 등 소인을 멀리하고, 요신, 누현, 하소, 장제, 곽탁, 설영, 등수, 육희, 육항 등 유능한 인재를 중용할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73] 같은 해(269년) 12월에서 270년 1월 사이에 7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8] 손호는 생전의 육개를 꺼렸지만, 육개와 육항의 힘을 두려워하여 직접적인 해를 가하지 못했다. 그러나 육개가 죽은 후, 손호는 육개의 가족을 건안군(현재의 푸젠성 일부)으로 유배 보냈다.5. 육개의 상소문
육개는 손호에게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주장했는데, 그 내용 중 일부가 전해진다.
; 수도 이전 반대 및 인자한 통치 촉구 상소
: 손호가 수도를 건업에서 무창으로 옮기려는 계획을 반대하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칠 것을 촉구했다.[32] 육개는 상소문에서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므로 백성의 필요를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그들의 삶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라고 강조하며, 손호가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쳐야 한다고 주장했다.[32] 또한 "무창은 위험하고 황량한 곳"이라며 수도 이전의 부적절함을 지적하고, "아이들의 노래"를 인용하여 민심이 수도 이전을 반대하고 있음을 강조했다.[36]
; 손호의 잘못된 정치 20가지 비판 상소 (진위 논란 있음)
: 진수의 《삼국지》에는 육개가 손호에게 올린 것으로 추정되는 상소문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상소문은 손호가 손권의 정치를 따르지 않는 20가지 잘못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다.[40] 그러나 진수는 이 상소문의 진위 여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40] 상소문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통치자가 하늘의 뜻과 자신의 덕에 의지하지 않고 궁궐의 상황에만 의존하는 것[44]
::* 덕망 있는 사람들을 멀리하고, 간신들을 가까이 하는 것[45] [46]
::*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지 않고, 가혹하게 대하는 것[47]
::*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백성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48] [49] [50]
::* 능력 없는 자들을 요직에 임명하고, 파벌을 형성하는 것[51]
::* 신하들과의 소통을 멀리하고, 과도한 음주를 조장하는 것[52]
::* 환관들을 중용하고, 군대를 맡기는 것[53]
::* 백성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고, 가혹한 형벌을 내리는 것[60] [62]
::* 정보 기관을 남용하고, 백성들을 감시하는 것[61]
; 그 외 상소
: 《강표전(江表傳)》에는 육개가 손호의 잔혹하고 사치스러운 행위를 비판하고, 궁궐 건설 계획 중단을 촉구하는 상소문이 기록되어 있다.[65] [66]
육개는 죽기 직전까지도 동조를 통해 손호에게 하정과 같은 소인을 멀리하고, 요신, 누현, 육항 등 나라의 기둥이 될 인물을 중용할 것을 유언했다.
6. 가계
육개는 쑤저우 오현, 오군 출신으로, 강남의 유력 가문 출신이었다. 그는 동오의 세 번째 승상인 육손의 친척이었다.[2]
육개의 아들 육의(陸禕)는 아버지처럼 동오에서 관직을 지냈다. 황문시랑(黃門侍郎)으로 시작하여 편장군(偏將軍)까지 올랐다. 육개 사후 육의는 황궁에서 태자(太子)를 시중들었다.[29]
이 시기에 국사(國史) 화핵은 황제 손호에게 상소문을 올려 육의를 노숙에 버금가는 인재라고 평가하며, 국경 방어에 적합하다고 추천했다.[30]
육개의 가계도는 복잡하며, 일부 기록은 서로 다른 내용을 담고 있어 혼란이 있다.
7. 평가
육개는 강직하고 청렴한 관리이자 충신으로 평가받았다. 진수는 육개를 "남자답고 곧으며 절개를 지켰다"고 평가하며, 반준과 함께 "대장부로서 최고의 일을 완수했다"고 칭찬했다.[68] 육기의 『변망론』에서도 육개의 자세는 높이 평가되고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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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Jiang Biao Zhu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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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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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Jiang Biao Zhu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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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Jiang Biao Zhu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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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三国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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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三国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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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三国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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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三国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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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三国志巻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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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권42 오주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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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삼국지 권61 반준육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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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허장사세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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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수서 경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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