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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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손호는 오나라의 마지막 황제로, 264년에 즉위하여 280년 서진에 항복할 때까지 통치했다. 그는 손권의 손자이자 손화의 아들로, 초기에는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펼치며 칭송받았으나, 곧 가혹한 형벌, 미신, 사치, 폭정으로 민심을 잃었다. 손호는 잔혹한 형벌과 토목 공사로 백성들을 괴롭혔고, 후궁에 수천 명의 여성을 들이는 등 폭군으로 묘사된다. 서진의 침공으로 오나라가 멸망하자 항복했고, 서진에서 귀명후로 봉해졌으며, 284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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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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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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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손호 (孫皓) |
자 | 원종 (元宗) |
출생 | 242년 |
사망 | 284년 1월 또는 2월 (41-42세) |
묘지 | 낙양, 허난 성 |
작위 | |
통치 | |
동오 황제 | 264년 9월 3일 – 280년 5월 1일 |
재위 기간 | 264년 – 280년 |
연호 | 원흥 (元興): 264–265년 감로 (甘露): 265–266년 보정 (寶鼎): 266–269년 건형 (建衡): 269–271년 봉황 (鳳凰): 272–274년 천책 (天冊): 275–276년 천새 (天璽): 276년 천기 (天紀): 277–280년 |
가계 | |
왕조 | 손씨 |
부친 | 손화 |
모친 | 하 부인 |
배우자 | 등황후 장 부인 (손위) 장 부인 (손아래) |
자녀 | 손근 손천 기왕 진류왕 장릉왕 성기왕 선위왕 중산왕 대왕 손총 손번 |
기타 | |
휘 | 손호 (孫皓) |
초명 | 손팽조 (孫彭祖) |
시호 | 말황제 (末皇帝) |
2. 생애
242년, 손화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손화는 241년 손등이 사망한 후 242년에 태자로 책봉되었으나, 250년에 손권에 의해 폐위되어 평민으로 강등되었다. 이로 인해 손호는 황위 계승 예정자에서 평민의 아들로 신분이 하락했다.[3]
252년, 손권은 죽기 직전 손화를 남양왕으로 봉했다. 손권 사후 손량이 즉위하고 제갈각이 섭정할 때, 손화를 황제로 옹립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253년 제갈각이 암살되고 손준이 섭정하자, 손준은 손화를 평민으로 강등시키고 자결을 강요했다. 이후 하 부인은 손호와 세 아들을 키웠다.
258년 손침에 의해 손량이 폐위되고 손휴가 황제가 되었다. 258년12월 10일,[5] 손휴는 손호를 오정후(烏程侯)로 봉했다. 손호는 오성현의 현령인 만욱과 친구가 되었는데, 만욱은 손호를 총명하고 학구적인 인물로 평가했다.[6]
264년 9월 3일,[7] 손휴가 사망하자, 보즐과 장포는 만욱의 추천과 성숙한 황제를 원하는 백성들의 여론을 고려하여 손호를 황제로 옹립했다.
264년 7월, 경제 손휴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그의 아들 손완(孫𩅦)이 후계자로 지목되었다.[35] 그러나 촉한이 멸망하고 위나라에 교지를 빼앗긴 상황이었기에, 오나라에는 능력 있는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강했다. 만욱은 오정령으로 있을 때 손호와 친분을 쌓았는데, 이러한 분위기를 틈타 승상 복양흥에게 어린 태자 대신 나이가 많고 총명한 손호를 옹립할 것을 제안했다. 복양흥과 장포는 이에 동의하여 손호를 황제로 즉위시켰다.[35] 손호는 즉위 후 연호를 원흥으로 바꾸었다.
만욱은 손호를 "장사환왕의 재림이다. 그리고 법을 준수하고 학문을 좋아한다"라고 칭찬하며 복양흥과 장포에게 영향력을 행사했다. 복양흥과 장포는 손호를 황제로 옹립할 것을 주태후 (손휴의 황후이자 주거의 딸)에게 말했고, 주태후는 이를 승낙했다. 이렇게 손호는 23세의 나이로 황제에 즉위했다.[11]
손호는 즉위 초기에 창고를 열어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고, 궁녀들을 내보내 백성들과 혼인시키며, 황실 후원을 개방하는 등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37]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광포하고 교만해졌으며, 주색에 빠져 백성들의 실망을 샀다.[35][36] 만욱은 '장포와 복양흥이 손호를 옹립한 것을 후회했다'고 참언했고, 이에 손호는 264년 11월에 장포와 복양흥을 주살하고 삼족을 멸했다.[35][36]
265년, 손호는 주태후를 강제로 자결하게 하고 손휴의 네 아들을 유배 보냈으며, 곧 두 맏아들을 처형했다. 또한 건강에서 무창으로 수도를 옮기는 등 국고를 낭비하고, 낭비벽을 비난하는 관료들을 처형했다. 육손의 조카 육개만이 백성들의 존경을 받아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었다.
266년, 현재의 저장성에 사는 백성들은 손호의 과중한 징수를 견디지 못하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제갈정 등에게 진압되었다. 손호는 동생 손건을 처형하고, 수도를 다시 건강으로 옮겼다.
손호는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전 황제 일족을 핍박했다. 감로 원년(265년) 7월, 경제의 황후 주씨를 강제로 자결하게 하고, 경제의 아들들을 오나라의 작은 성에 몰아넣고 나이가 많은 순으로 둘을 죽였다.[35] 아버지 손화의 적장자인 손준(孫俊)도 죽였다.[38]
원흥 원년, 위나라에서는 경제 말년에 오에서 빼앗은 교지에 태수를 임명했다. 사마소는 상국이 되어 옛 오나라의 항장 서소와 손욱을 오나라에 보내 손호에게 항복을 권유했다.[35]
265년, 손호는 보천의 건의를 받아들여 건업에서 무창(武昌)[39]으로 천도했다.[35] 당시, "형주에 왕기가 있어 양주를 깨트리니 건업궁이 불리하다."라는 예언이 있었기 때문이다.[41] 그러나 무창으로 천도한 후, 양주의 백성들은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 서울에 물자를 공급해야 했으므로 많은 고통을 받았다. 육개의 상소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동요가 퍼질 정도였다.[42] 결국 266년 12월, 손호는 다시 건업으로 돌아왔다.[35]
266년, 진나라와 평화를 맺으려는 시도와는 달리, 손호는 진나라를 공격할 생각을 품었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35] 268년, 손호는 정기적으로 진나라 변경 지역을 공격하는 정책을 시작했다. 그는 장수 주계(朱繼)에게 강하를 공격하게 하고, 만욱에게 양양을 공격하게 하는 한편, 자신은 합비를 공격할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이러한 공격은 모두 진나라 군대에 의해 격퇴되었다.[35]
271년 초 겨울, 손호는 직접 진나라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으나, 병사들의 불만으로 인해 철수해야 했다.[35] 같은 해 늦여름, 오나라 군대는 교주를 되찾았고, 이로 인해 손호는 진나라에 대한 군사 행동을 진지하게 계획하게 되었다.[35]
272년, 왕준이 오나라를 정복하기 위해 대규모 함대를 건설하기 시작하자, 오나라 장군 오엄은 북서부 국경 강화를 요청했지만, 손호는 이를 거절했다.[35] 같은 해 늦여름, 부찬이 반란을 일으켜 진나라에 투항했다. 이는 오나라 장군들이 황제에 대해 품고 있던 불신을 드러냈고, 진나라 장군들은 정복 계획을 제안하는 데 더욱 용기를 얻었다.[35]
274년, 여강이 사망하면서 마지막 상소에서 손호에게 오나라 서부 국경 방어를 강화할 것을 요청했지만, 손호는 이를 무시했다.[35] 이후 몇 년 동안, 손호는 진나라 정복 계획에 모든 노력을 쏟았다.[35]
279년, 서진(西晉)의 사마염은 왕준과 두예의 조언을 받아들여 동오를 정복하기 위한 대규모 공격을 시작했다. 공격은 6개 방면으로 이루어졌는데, 사마염의 숙부인 사마주, 왕혼, 왕융, 호분, 두예, 그리고 왕준이 이끄는 군대가 투입되었으며, 왕혼과 왕준이 이끄는 군대가 가장 큰 규모였다.[43] 각 진나라 군대는 빠르게 진격하여 목표로 했던 국경 도시들을 점령했고, 왕준의 함대는 양쯔강을 따라 동쪽으로 진격하며 오나라 함대를 몰아냈다. 오나라 재상 장제는 마지막으로 왕혼의 군대를 격파하려 했지만 패배하여 죽임을 당했다. 왕혼, 왕준, 사마주는 각자 건업으로 향했다. 손호는 280년 5월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43]
280년 3월 15일[22], 손호는 황태자 손근, 노왕 손건 등 21명을 이끌고 건업에 육박한 왕준의 군문에 나아가 항복했다.[23] 이때 손호는 망국의 예를 갖춰 양손을 뒤로 묶고 관을 지참했지만, 왕준은 그 밧줄을 풀고 관을 불태운 후 손호를 본진으로 불러 회담했다.[23] 그 후, 손호로부터 인수를 받은 사마주가 그의 신변을 서진의 수도까지 호송하게 했고, 5월 1일에 손호 일행은 수도에 도착했다. 손호는 귀명후에, 황태자 손근은 중랑, 그의 동생인 여러 왕들은 랑중에 임명되었다.[24]
손호와 그의 일족은 진나라 수도 낙양으로 호송되었다. 포로가 된 손호는 스스로 흙을 뒤집어쓰고 손을 뒤로 묶는 등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었다. 사마염은 손호의 결박을 풀고 다음 황실 회의에서 그를 옆자리에 앉혔다. 그는 "오랫동안 당신을 위해 이 자리를 비워두었다"라고 말했다. 손호는 "신도 건업에 폐하를 위한 자리를 마련해 두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진나라 관료 가충은 손호를 모욕하려 하며 "사람들의 눈을 찌르고 얼굴 가죽을 벗기는 등 잔혹한 형벌을 가했다고 들었습니다. 그것은 어떤 형벌입니까?"라고 물었다. 손호는 "신하가 황제를 시해하려 하거나 반역을 꾀한다면 그에게 그런 형벌을 가했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위나라 황제 조모의 죽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가충은 수치심을 느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43]
사마염은 손호를 사면하고 280년 7월 9일에 그에게 "귀명후"(말 그대로 "운명에 순응하는 후작")라는 칭호를 수여했다.[8] 손호의 아들들은 진나라 정부에서 하급 관료가 되었다. 손호는 284년 초에 사망했다.[43]
태강 5년(284년) 12월[25], 손호는 낙양에서 사망했다. 향년 42세였다. 하남현 망산에 장례되었다.[25] 등황후는 개인적으로 애도의 뜻을 써서, 그 내용은 매우 슬픈 애수에 잠긴 것이었다.[26]
2. 1. 즉위 전
손화가 승상 손준의 명령으로 자결한 후, 생모인 하씨(何氏)에게 양육받았다.[34] 경제 손휴가 황제에 즉위하자 오정후(烏程侯)에 봉해졌다.[35]손호는 243년에 손화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손화는 241년 손등이 사망한 후, 242년에 태자로 책봉되었으나,[3] 250년에 손권에 의해 폐위되고 평민으로 강등되었다. 이로 인해 손호는 황위 계승 예정자에서 평민의 아들로 신분이 하락했다.
252년, 손권은 죽기 직전 손화를 남양왕으로 봉했다. 손권 사후 손량이 즉위하고 제갈각이 섭정할 때, 손화를 황제로 옹립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253년 제갈각이 암살되고 손준이 섭정하자, 손준은 손화를 평민으로 강등시키고 자결을 강요했다. 이후 하 부인은 손호와 세 아들을 키웠다.
258년 손침에 의해 손량이 폐위되고 손휴가 황제가 되었다. 258년12월 10일,[5] 손휴는 손호를 오정후(烏程侯)로 봉했다. 손호는 오성현의 현령인 만욱과 친구가 되었는데, 만욱은 손호를 총명하고 학구적인 인물로 평가했다.[6]
264년 9월 3일,[7] 손휴가 사망했다. 보즐과 장포는 만욱의 추천과, 성숙한 황제를 원하는 백성들의 여론을 고려하여 손호를 황제로 옹립했다.
2. 2. 즉위 과정
264년 7월, 경제 손휴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그의 아들 손완(孫𩅦)이 후계자로 지목되었다.[35] 그러나 촉한이 멸망하고 위나라에 교지를 빼앗긴 상황이었기에, 오나라에는 능력 있는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강했다. 좌전군 만욱(萬彧)은 오정령으로 있을 때 손호와 친분을 쌓았는데, 이러한 분위기를 틈타 승상 복양흥(濮陽興)에게 어린 태자 대신 나이가 많고 총명한 손호를 옹립할 것을 제안했다. 복양흥과 장포는 이에 동의하여 손호를 황제로 즉위시켰다.[35] 손호는 즉위 후 연호를 원흥으로 바꾸었다.좌전군 만욱은 과거 오정현령이었고 손호와도 친했는데, 손호를 "장사환왕의 재림이다. 그리고 법을 준수하고 학문을 좋아한다"라고 칭찬하며 손휴의 측근이었던 승상 복양흥과 좌장군 장포에게 영향력을 행사했다. 복양흥과 장포는 손호를 황제로 옹립할 것을 주태후 (손휴의 황후이자 주거의 딸)에게 말했고, 주태후는 이를 승낙했다. 이렇게 손호는 23세의 나이로 황제에 즉위했다.[11]
2. 3. 초기 통치와 폭정
손호는 즉위 초기에 창고를 열어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고, 궁녀들을 내보내 백성들과 혼인시키며, 황실 후원을 개방하는 등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37]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광포하고 교만해졌으며, 주색에 빠져 백성들의 실망을 샀다.[35][36]만욱은 '장포와 복양흥이 손호를 옹립한 것을 후회했다'고 참언했고, 이에 손호는 264년 11월에 장포와 복양흥을 주살하고 삼족을 멸했다.[35][36] 백성들은 새 황제가 세금을 감면하고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모습에 감명을 받았으나, 손호가 가혹한 형벌을 내리고 미신과 향락에 빠지면서 그 희망은 사라졌다.
265년, 손호는 주태후를 강제로 자결하게 하고 손휴의 네 아들을 유배 보냈으며, 곧 두 맏아들을 처형했다. 또한 건강에서 무창으로 수도를 옮기는 등 국고를 낭비하고, 낭비벽을 비난하는 관료들을 처형했다. 육손의 조카 육개만이 백성들의 존경을 받아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었다.
266년, 현재의 저장성에 사는 백성들은 손호의 과중한 징수를 견디지 못하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제갈정 등에게 진압되었다. 손호는 동생 손건을 처형하고, 수도를 다시 건강으로 옮겼다.
2. 4. 친족 정책
손호는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전 황제 일족을 핍박했다. 감로 원년(265년) 7월, 경제의 황후 주씨를 강제로 자결하게 하고, 경제의 아들들을 오나라의 작은 성에 몰아넣고 나이가 많은 순으로 둘을 죽였다.[35] 아버지 손화의 적장자인 손준(孫俊)도 죽였다.[38] 같은 해, 손호는 전 주태후를 강제로 자결하게 하고 손휴의 네 아들을 유배 보냈으며, 곧 두 맏아들 손완(전 황태자)과 손공을 처형했다.2. 5. 교지(交趾)를 둘러싼 분쟁
원흥 원년, 위나라에서는 경제 말년에 오에서 빼앗은 교지에 태수를 임명했다. 또 사마소가 상국이 되어 옛 오나라의 항장 서소와 손욱을 오나라에 보내 손호에게 항복을 권유했다.[35]2. 6. 무창(武昌) 천도와 건업(建業) 환도
265년, 손호는 서릉독 보천의 건의를 받아들여 건업에서 무창(武昌)[39]으로 천도했다.[35] 당시, "형주에 왕기가 있어 양주를 깨트리니 건업궁이 불리하다."라는 예언이 있었기 때문에 수도를 무창으로 옮겼다.[41]그러나 무창으로 천도한 후, 양주의 백성들은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 서울에 물자를 공급해야 했으므로 많은 고통을 받았다. 육개의 상소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동요가 퍼질 정도였다.[42]
결국 266년 12월, 손호는 다시 건업으로 돌아왔다.[35]
2. 7. 북벌 시도와 실패
266년, 진나라와 평화를 맺으려는 시도와는 달리, 손호는 진나라를 공격할 생각을 품었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35]268년, 손호는 정기적으로 진나라 변경 지역을 공격하는 정책을 시작했다. 그는 장수 주계(朱繼)에게 강하를 공격하게 하고, 만욱에게 양양을 공격하게 하는 한편, 자신은 합비를 공격할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이러한 공격은 모두 진나라 군대에 의해 격퇴되었다.[35]
271년 초 겨울, 손호는 직접 진나라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으나, 병사들의 불만으로 인해 철수해야 했다.[35] 같은 해 늦여름, 오나라 군대는 교주를 되찾았고, 이로 인해 손호는 진나라에 대한 군사 행동을 진지하게 계획하게 되었다.[35]
272년, 왕준이 오나라를 정복하기 위해 대규모 함대를 건설하기 시작하자, 오나라 장군 오엄은 북서부 국경 강화를 요청했지만, 손호는 이를 거절했다.[35] 같은 해 늦여름, 부찬이 반란을 일으켜 진나라에 투항했다. 이는 오나라 장군들이 황제에 대해 품고 있던 불신을 드러냈고, 진나라 장군들은 정복 계획을 제안하는 데 더욱 용기를 얻었다.[35]
274년, 여강이 사망하면서 마지막 상소에서 손호에게 오나라 서부 국경 방어를 강화할 것을 요청했지만, 손호는 이를 무시했다.[35] 이후 몇 년 동안, 손호는 진나라 정복 계획에 모든 노력을 쏟았다.[35]
2. 8. 멸망
279년, 서진(西晉)의 사마염은 왕준과 두예의 조언을 받아들여 동오를 정복하기 위한 대규모 공격을 시작했다. 공격은 6개 방면으로 이루어졌는데, 사마염의 숙부인 사마주, 왕혼, 왕융, 호분, 두예, 그리고 왕준이 이끄는 군대가 투입되었으며, 왕혼과 왕준이 이끄는 군대가 가장 큰 규모였다.[43] 각 진나라 군대는 빠르게 진격하여 목표로 했던 국경 도시들을 점령했고, 왕준의 함대는 양쯔강을 따라 동쪽으로 진격하며 오나라 함대를 몰아냈다. 오나라 재상 장제는 마지막으로 왕혼의 군대를 격파하려 했지만 패배하여 죽임을 당했다. 왕혼, 왕준, 사마주는 각자 건업으로 향했다. 손호는 280년 5월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43]280년 3월 15일[22], 손호는 황태자 손근, 노왕 손건 등 21명을 이끌고 건업에 육박한 왕준의 군문에 나아가 항복했다.[23] 이때 손호는 망국의 예를 갖춰 양손을 뒤로 묶고 관을 지참했지만, 왕준은 그 밧줄을 풀고 관을 불태운 후 손호를 본진으로 불러 회담했다.[23] 그 후, 손호로부터 인수를 받은 사마주가 그의 신변을 서진의 수도까지 호송하게 했고, 5월 1일에 손호 일행은 수도에 도착했다. 손호는 귀명후에, 황태자 손근은 중랑, 그의 동생인 여러 왕들은 랑중에 임명되었다.[24]
손호와 그의 일족은 진나라 수도 낙양으로 호송되었다. 포로가 된 손호는 스스로 흙을 뒤집어쓰고 손을 뒤로 묶는 등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었다. 사마염은 손호의 결박을 풀고 다음 황실 회의에서 그를 옆자리에 앉혔다. 그는 "오랫동안 당신을 위해 이 자리를 비워두었다"라고 말했다. 손호는 "신도 건업에 폐하를 위한 자리를 마련해 두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진나라 관료 가충은 손호를 모욕하려 하며 "사람들의 눈을 찌르고 얼굴 가죽을 벗기는 등 잔혹한 형벌을 가했다고 들었습니다. 그것은 어떤 형벌입니까?"라고 물었다. 손호는 "신하가 황제를 시해하려 하거나 반역을 꾀한다면 그에게 그런 형벌을 가했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위나라 황제 조모의 죽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가충은 수치심을 느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43]
사마염은 손호를 사면하고 280년 7월 9일에 그에게 "귀명후"(말 그대로 "운명에 순응하는 후작")라는 칭호를 수여했다.[8] 손호의 아들들은 진나라 정부에서 하급 관료가 되었다. 손호는 284년 초에 사망했다.[43]
태강 5년(284년) 12월[25], 손호는 낙양에서 사망했다. 향년 42세였다. 하남현 망산에 장례되었다.[25] 등황후는 개인적으로 애도의 뜻을 써서, 그 내용은 매우 슬픈 애수에 잠긴 것이었다.[26]
3.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조부 | 손권 | 동오의 초대 황제 |
부친 | 손화 | 한때 황태자였으나 번왕으로 강등되고 귀양 후 손량 집권기에 사망 |
모친 | 하태후(何太后) | 실제 이름은 불명 |
황후 | 등황후(滕皇后) | 264년 황후 책봉, 실제 이름은 불명 |
아들 | 손근(孫瑾) | 269년 황태자 책봉 |
아들 | 손건(孫虔) | 노왕(魯王). 책봉 시기는 불명 |
아들 | 회양왕(淮陽王) | 269년 책봉, 실제 이름은 불명 |
아들 | 동평왕(東平王) | 269년 책봉, 실제 이름은 불명 |
기타 | 다수의 왕자들 | 278년과 280년에 각각 11명씩 왕자 책봉 기록이 있으나, 그 중 일부가 조카나 사촌일 가능성이 있고, 중복해서 책봉했을 가능성도 있어 정확한 친족의 규모는 알 수 없음. 알려진 왕명은 성기왕(成紀王), 선위왕(宣威王) |
; 형제
- 손덕(孫徳): 이복 동생
- 손겸(孫謙): 이복 동생
- 손준(孫俊): 친형제
- 공주(육경(陸景)의 처): 친여동생
; 후비
- 정실: 황후 등방란(滕芳蘭)
- 측실: 미인 장씨(張氏)(장포의 차녀), 좌부인 장씨(장포의 장녀), 좌부인 왕씨 등(5천 명이라는 설이 있음)
; 자녀
- 태자 손근(孫瑾)(269년)
- 노왕 손건(孫虔)(273년)
- 제왕(273년)
- 진류왕(273년)
- 장릉왕(273년)
- 성기왕(278년)
- 선위왕(278년)
- 중산왕(280년)
- 대왕(280년)
- 손충(孫充)
- 손번(孫璠)
- 손희조(孫希祖)[30]
- 기타 22명의 남자
4. 평가
손호는 흔히 폭군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폭정과 실정은 오나라의 멸망을 초래한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된다.
손호는 여러 신하들에게 술을 강요하고 감시하며, 조금이라도 문제가 되는 언행을 하면 처벌했다. 후궁에 수천 명의 여성을 들이고 마음에 들지 않는 궁녀를 살해하여 시체를 유기하기도 했다. 사람의 얼굴 가죽을 벗기거나 눈알을 도려내는 등 잔혹한 형벌을 사용했으며, 토목 공사를 좋아하여 백성들을 노역으로 괴롭혀 민심을 잃었다.[21] 또한 자신의 사후 황위 계승자로 여겨지는 손분에게 아첨하려 했던 예장태수 장준을 거열형에 처하기도 했다.
진수는 《삼국지》에서 손호를 "구제할 수 없는 악인"으로 평가하고, "손호의 항복을 허락하지 않고 허리와 목을 베어 만민에게 사죄했어야 했다"라고 혹평했다.[29]
하지만 항복 이후 그의 언행은 때로는 지혜롭고 때로는 당당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손호는 가신들에게 서신을 보내 오나라 멸망의 책임을 자신이 모두 지고, 가신들은 진나라에 등용되어 재능을 발휘하도록 전했다.[21] 원래 시중이었던 이인은 손호의 잔혹한 형벌에 대해 변명했고, 오나라 멸망 후 진나라에 등용된 오언은 진 무제 앞에서 손호는 영명했다고 변명했다.[28]
서진의 박사 진수는 "손호의 명성은 화하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손호에게 조금이라도 움직임이 있었다면, 진나라 사람들은 두려움을 품었을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4. 1. 긍정적 평가 (일부)
손호는 서예와 변론에 능했다는 기록이 있다.[8] 항복 후 사마염과의 대화에서 기지를 발휘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사마염이 "오랫동안 당신을 위해 이 자리를 비워두었다"라고 말하자, 손호는 "신도 건강에 폐하를 위한 자리를 마련해 두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가충이 손호를 모욕하려 "사람들의 눈을 찌르고 얼굴 가죽을 벗기는 등 잔혹한 형벌을 가했다고 들었습니다. 그것은 어떤 형벌입니까?"라고 묻자, 손호는 "신하가 황제를 시해하려 하거나 반역을 꾀한다면 그에게 그런 형벌을 가했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여 위나라 황제 조모의 죽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가충을 부끄럽게 만들었다.[21] [28]4. 2. 부정적 평가
손호는 잔혹한 형벌을 남용하고 백성을 수탈하여 사치를 일삼았으며, 미신에 빠져 국정을 그르쳤다.[13] 신하들의 간언을 듣지 않고 폭정을 휘둘렀다. 그는 자신의 낭비벽을 비난하는 관료들을 정기적으로 처형했고, 아무런 불이익 없이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었던 유일한 주요 관리는 육개였다.[13]손호는 제위에 오른 초기에는 백성을 가엾게 여기고, 관의 창고를 열어 빈민을 구제하거나, 관료의 처녀들을 풀어 남편이 없는 자에게 시집보내고, 어원을 열어 새와 짐승을 풀어주는 등의 정치를 하여 명군으로 칭송받기도 했다.[13] 그러나 이내 거칠고 교만해졌으며, 소심하고 의심이 많아 술과 여자를 좋아하게 되어, 지위가 있는 자나 없는 자 모두 실망했다고 한다.[13]
여러 신하들에게 술을 강요한 다음 감시하는 관리를 곁에 두고, 만취 상태에서 조금이라도 문제가 있는 언행을 하면 처벌했다. 또한 후궁에 수천 명의 여성을 들이고, 마음에 들지 않는 궁녀를 살해하여, 궁전 안에 끌어들인 강에 시체를 유기했다고 한다. 형벌에서는 잔혹한 방법을 사용했으며, 사람의 얼굴 가죽을 벗기거나, 눈알을 도려내기도 했다고 한다. 마음에 드는 인물은 중용하여 고관으로 등용했다. 또한 토목 공사를 좋아하여 백성들을 노역으로 괴롭혔기에 민심이 떠났다고 한다.[21]
진수는 《삼국지》에서 손호를 "구제할 수 없는 악인"으로 평가하고, "손호의 항복을 허락하지 않고 허리와 목을 베어 만민에게 사죄했어야 했다"라고 혹평했다.[29]
5. 연호
연호 | 사용 기간 | 육십간지 | 서력 |
---|---|---|---|
원흥 (元興) | 264년 ~ 265년 | 갑신(甲申) ~ 을유(乙酉) | 264년 ~ 265년 |
감로 (甘露) | 265년 ~ 266년 | 을유(乙酉) ~ 병술(丙戌) | 265년 ~ 266년 |
보정 (寶鼎) | 266년 ~ 269년 | 병술(丙戌) ~ 기축(己丑) | 266년 ~ 269년 |
건형 (建衡) | 269년 ~ 271년 | 기축(己丑) ~ 신묘(辛卯) | 269년 ~ 271년 |
봉황 (鳳凰) | 271년 ~ 274년 | 신묘(辛卯) ~ 갑오(甲午) | 271년 ~ 274년 |
천책 (天冊) | 275년 | 을미(乙未) | 275년 |
천새 (天璽) | 276년 | 병신(丙申) | 276년 |
천기 (天紀) | 277년 ~ 280년 | 정유(丁酉) ~ 경자(庚子) | 277년 ~ 280년 |
참조
[1]
서적
Sanguozhi
[2]
서적
Wu Lu
[3]
서적
Sanguozhi
[4]
서적
Sanguozhi
[5]
서적
Sanguozhi
[6]
서적
Sanguozhi
[7]
서적
Sanguozhi
[8]
서적
Book of Jin
[9]
서적
삼국지
[10]
서적
삼국지
[11]
서적
삼국지
[12]
서적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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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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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한진춘추
[15]
서적
한진춘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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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강3년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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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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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강표전
[19]
문서
봉선국산비
[20]
서적
진서
[21]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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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서적
진서
[23]
서적
진서
[24]
서적
삼국지
[25]
서적
오록
[26]
서적
건강실록
[27]
서적
진서
[28]
서적
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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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腰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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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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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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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또는 호종(皓宗)
[34]
서적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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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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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어저우 시 어청 구에 해당하며, 우한시와는 다르다.
[40]
문서
기운을 보아 일의 조짐을 알아내는 것.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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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서 권220 열전 제150 동이전 중 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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