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메이섬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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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메이섬 학살은 1630년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라메이섬 원주민을 공격하여 대량 학살한 사건이다. 네덜란드 선박 난파와 관련된 원주민 살해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1633년과 1636년에 걸쳐 여러 차례 원정이 이루어졌다. 1636년 2차 원정에서 네덜란드군은 동굴에 숨은 원주민들에게 유독 가스를 살포하여 300여 명을 학살했으며, 생존자들은 노예로 강제 이주되었다. 이 사건으로 라메이섬은 무인도가 되었고, 이후 섬에 대한 지배 세력의 변화 속에서 학살의 진실은 왜곡되거나 잊혀졌다.

라메이섬 학살 - [전쟁]에 관한 문서
위치 정보
기본 정보
사건명라메이섬 학살
위치류큐 제도, 타이완섬 남서쪽
날짜1636년 4월~5월
결과원주민 학살 및 네덜란드의 노예화, 섬의 최종적인 인구 감소
교전 세력
교전 1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교전 2류큐 원주민
지휘관 및 지도자
교전 1불명
교전 2불명
병력 규모
교전 1네덜란드 군인 100명, 포르모사 동맹군 불명
교전 2불명
피해 규모
교전 1정확한 수치 불명, 경미한 피해
교전 2약 300명 사망, 323명 포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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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적 배경

1624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타이완 남부에 거점을 마련하면서 라메이섬(현재의 소류구)과의 접촉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초기 관계는 순탄치 않았다. 네덜란드 선박이 섬 인근에서 난파되고 승무원들이 원주민과의 충돌로 사망하는 사건들이 발생했다. 이러한 사건들은 네덜란드 측의 적대감을 키웠고, 결국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라메이섬 원주민에 대한 강경 대응을 결정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네덜란드인들은 라메이섬 원주민과의 사이에 "다양한 문제"가 존재한다고 인식하고 있었으며, 이는 향후 무력 충돌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2.1. 초기 사건

1624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타이완에 주둔하기 2년 전, '골든 라이언'(Gouden Leeuw네덜란드어)이라는 이름의 네덜란드 선박이 당시 라메이섬(현재의 소류구)의 산호초에 난파되었다. 이 사고로 승무원 전원이 섬의 원주민에게 살해되었다. 조르지우스 캄디우스가 1628년 12월 27일 대만 행정 장관 피터 노이츠에게 보낸 서한에 따르면, 포르모사(타이완)에서 약 약 4.83km 떨어진 이 섬은 현지인에게 투긴(Tugin), 라메이(Lamay), 람베이(Lambay) 등으로 불렸으나, 유럽인들은 이 사건 이후 배의 이름을 따 '골든 라이언 섬'(Gouden Leeuwseylant네덜란드어)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다만 '골든 라이언' 호에 대한 기록은 캄디우스의 서한 이전에 명확히 나타나지 않아 자세한 내용은 불분명한 측면이 있다.

이 사건 이후, 네덜란드령 동인도 총독 헨드릭 브라우어는 포르모사 총독 한스 풋만스에게 "우리 사람들에게 저지른 살인 행위에 대한 본보기로 [...] 골든 라이언 섬 사람들을 처벌하고 몰살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최고위층에서 라메이 원주민들의 행위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강경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후 1631년에는 '베버바이크'(Beverwijck네덜란드어)라는 이름의 네덜란드 요트 역시 라메이섬의 위험한 암초에 난파되었다. 배에서 살아남은 약 50명의 생존자들은 섬의 원주민들과 이틀 동안 교전을 벌였으나 결국 모두 사망했다.

네덜란드가 이후 라메이섬을 침공했을 때 붙잡힌 원주민 지도자 등의 증언에 따르면, 수년 전('골든 라이언' 호 사건을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 배가 좌초되어 섬에 표류한 선원들과 원주민 사이에 문제가 발생하여 선원들이 살해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젤란디아 성 일지』 1636년 5월 1-4일 조항). 네덜란드 측 기록에서도 침공 결정 당시 라메이섬과의 사이에 "다양한 문제"가 있었다고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1633년경에는 이미 네덜란드령 타이완의 네덜란드인들과 라메이섬 원주민 사이에 여러 갈등이 존재했으며, 이것이 라메이섬 공격의 주요 원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2.2. 네덜란드의 보복 결정

1624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타이완에 주둔하기 2년 전, Gouden Leeuwnld이라는 이름의 네덜란드 선박이 류큐섬(라메이섬)의 산호초에 난파되었다. 이때 승무원 전원이 원주민에게 살해당했다.

이후 1631년에는 Beverwijcknld라는 요트도 위험한 암초에 난파되었고, 약 50명의 생존자는 라메이인들과 이틀 동안 싸우다 전멸했다.

'골든 라이언' 호 생존자 살해 사건 이후, 네덜란드인들은 이 섬을 '골든 라이언 섬'(Gouden Leeuwseylantnld)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네덜란드령 동인도 총독 헨드릭 브라우어는 포르모사 총독 한스 풋만스에게 "우리 사람들에게 저지른 살인 행위에 대한 본보기로 [...] 골든 라이언 섬 사람들을 처벌하고 몰살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최고위층에서 살인을 용서하지 않으려는 강경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3. 학살 과정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1633년 11월, 대만의 최고 결정 기관인 대만 평의회를 통해 여러 문제를 해결한다는 명분 하에 라메이섬 공격을 결정했다. 《젤란디아 성 일지》에 따르면, 백인 병사 300명과 현지 타이완 원주민 협력군을 동원하여 섬을 공격했으나, 초기 원정은 큰 성과 없이 끝났다. 이 과정에서 네덜란드군은 원주민들이 위급 시 피신하는 큰 동굴의 존재를 파악했다.

1636년 4월, 네덜란드는 라메이섬 완전 정복을 목표로 2차 원정을 감행했다. J. 린가 중위가 이끄는 부대는 원주민들을 동굴로 몰아넣은 뒤, 입구를 봉쇄하고 유황과 타는 송진 등을 이용한 유독 가스 공격을 자행했다. 8일간 계속된 가스 공격으로 동굴 안에서는 약 300명의 남녀노소가 질식사했으며, 투항하거나 동굴 밖으로 나온 이들도 다수 체포되었다. 네덜란드 측은 원주민의 완강한 저항 때문에 사상자가 많았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원주민 측의 평화 협상 제안을 거부하고 저항하는 포로를 사살하는 등 잔혹 행위를 저질렀다. 이 2차 원정으로 최소 540명 이상의 원주민이 사망하거나 포로로 잡혔으며, 이 중 323명이 포로로 연행되었다.

같은 해 6월 말, 섬에 남아있던 네덜란드 병사 3명이 살해당하자, 네덜란드 측은 이를 빌미로 원주민을 "살인을 좋아하는 습성을 가진" 야만족으로 규정하며 7월에 3차 침공을 단행, 잔존 세력 소탕에 나섰다. 이후 강압적인 방식의 한계를 느끼고 8월부터는 신변 안전 보장을 조건으로 투항을 유도하는 선무책(宣撫策)으로 전환했다. 생활 기반이 파괴된 원주민 100명 이상이 추가로 투항하여 연행되었고, 저항하는 이들은 살해되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공식 기록(『동인도 사무 보고』, 『바타비아 성 일지』 등)에 따르면 총 554명의 원주민이 포로로 연행되었고 약 300여 명이 살해되었다고 하나, 《젤란디아 성 일지》 등 다른 기록과 정황을 고려할 때 실제 사망자 수는 이보다 훨씬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일련의 과정은 라메이섬 원주민 공동체의 완전한 파괴로 이어졌다.

3.1. 1차 원정 (1633년)

네덜란드령 대만의 총독 한스 푸트만스는 라메이섬 공격을 계획하며 마두의 원주민 전사들에게 협력을 요청하기도 했다. 1633년 이전부터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 라메이섬 원주민 사이에는 여러 갈등이 존재했는데, 이는 네덜란드 선박 가우텐 레우(Gouden Leeuw)호 선원들이 섬 주민들에게 살해당한 사건 등이 배경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1633년 11월 8일,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대만 최고 결정 기관인 대만 평의회는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한다는 명분으로 라메이섬 공격을 공식 결정했다. 《젤란디아 성 일지》 기록에 따르면, 백인 병사 300명과 신강, 샤오룽 지역의 타이완 원주민들을 동원하여 2척의 야흐트선과 4척의 정크선에 나눠 태워 파견하기로 했다.

며칠 뒤인 11월 중순, 클라에스 브루인(Claes Bruyn)이 이끄는 원정대가 라메이섬에 도착했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이 원정대는 네덜란드 병사 250명, 한족 해적 40명, 그리고 타이완 원주민 동맹군 250명으로 구성되었다. 11월 18일부터 23일까지 이어진 원정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일부 네덜란드 병사가 원주민과의 교전 중 사망했으며, 원주민들이 섬의 큰 동굴로 피신하자 네덜란드군은 섬의 집락을 불태우고 가축인 돼지를 죽이는 데 그친 채 철수해야 했다.

군사적 성과는 미미했지만, 원정대는 중요한 정보를 확보했다. 이전에 섬에서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는 네덜란드 선박 베버르윅(Beverwijck)호 선원들의 유품으로 보이는 동전, 배의 주방에서 사용된 구리 제품, 네덜란드식 모자 등을 발견했다. 또한, 원주민들이 위급 상황 시 피난처로 사용하는 큰 동굴의 존재를 확인했는데, 이는 이후 2차 원정에서 중요한 정보가 되었다.

원정 이후 네덜란드 측은 라메이섬과 교류가 있던 팡서이의 수령을 중재자로 내세워 강화 회담을 시도했다. 그러나 서로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 협상 장소를 정하는 데 실패했다. 네덜란드 측은 원주민의 기습을 우려해 선상 회담을 고집했고, 라메이섬 주민 측 역시 네덜란드인을 믿지 못하고 섬에서의 회담을 요구했기 때문에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다.

3.2. 2차 원정 (1636년)

1636년 4월 16일, 대만의 네덜란드 평의회는 지지부진한 협상에 불만을 품고 라메이섬의 완전 정복을 결정했다. J. 린가 중위가 지휘관으로 임명되었고, 게오르기우스 칸디디우스 등이 보좌했다. 계획은 식량을 준비해 장기전을 대비하고, 섬 주민들을 동굴로 몰아넣어 항복시키거나 소탕하는 것이었다.

4월 19일, 네덜란드 병사 및 선원 100명과 시라야족 싱칸(新港) 부족 등 원주민 동맹군 70~80명이 정크선 3척과 삼판선 여러 척에 나눠 타고 출발했다. 그러나 21일 상륙 후 잠시 교전하여 주민 부락을 점령, 소각했으나, 마실 물이 부족하여 둥강진 부근 하단수로 일시 철수했다. 행정 장관 한스 푸트만스는 식수가 없으면 야자 열매 즙으로 대신하고, 동굴 주변에 울타리를 치며 연기로 주민들을 몰아내라고 지시하며 재출정을 명령했다. 4월 26일, 싱칸 부족과 팡수이야 부족에서 각각 80명의 지원군을 추가로 받아 다시 섬으로 향했다.

현지 지리에 익숙한 원주민 동맹군이 라메이섬 주민들이 숨어든 큰 동굴을 발견했다. 네덜란드군은 동굴 입구들을 막고, 유황과 타는 송진을 피울 작은 구멍만 남겨두었다. 네덜란드군은 연기와 유독 가스를 피워 공격했다. 일부 주민들은 연기를 피해 동굴 밖으로 나왔으나 네덜란드군에게 체포되었다. 4월 29일에는 42명, 5월 3일에는 79명(주로 여성과 어린이)이 투항했다. 5월 4일까지 총 222명의 원주민이 포로로 타이오완(현 타이난시 안핑 구)으로 보내졌다.

동굴 안에서는 8일간 연기와 유독 가스가 계속 피워졌고, 갇힌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5월 4일, 동굴이 조용해지자 병사들이 진입하여 연기와 가스에 질식해 숨진 남녀노소 약 300명의 시신을 발견했다. 5월 7일까지 네덜란드 측이 파악한 동굴 내 인원은 약 540명이었으며, 이 중 323명이 포로로 잡혔고 나머지는 동굴 안팎에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네덜란드 측은 원주민이 완강히 저항했기 때문에 사상자가 많았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원주민 측의 평화 협상 제안을 거부하고, 저항하는 포로는 사살하기도 했다.

네덜란드군은 섬에서 자국 선박 외에 스페인 등 다른 유럽 국가 선박의 난파 흔적도 발견했다. 5월 12일, 푸트만스 장관과 평의회는 남아있는 원주민을 소탕하기 위해 네덜란드 병사 30명을 섬에 상주시키기로 결정했다. 5월 30일 주둔 시설이 완성되었고, 6월 2일 주둔 병력 30명을 남기고 주력 부대는 철수했다. 같은 해 6월 2일 자 《젤란디아 요새 일지》에는 라메이섬의 추정 인구를 1,000명으로 기록하고, 이 작전으로 약 500명을 포로로 잡았으며(생존자: 남성 134명, 여성 157명, 어린이 192명), 나머지는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기록했다. 이는 2차 원정 기간 동안 최소 300명 이상이 학살되거나 전투 중에 사망했음을 보여준다.

3.3. 3차 및 4차 원정

1636년 6월 말, 이미 원주민이 거의 없다고 여겨졌던 라메이섬에서 네덜란드 병사 3명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네덜란드인들은 이전의 잔혹 행위는 외면한 채, 원주민을 "살인을 좋아하는 습성을 가진" 야만족으로 규정하고 섬에서 완전히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7월 2일, 제3차 침공이 결정되었고, 7월 7일에는 링가 중위가 이끄는 네덜란드 병사 30명과 타이완 각지에서 동원된 원주민 협력대 300명이 섬에 상륙했다. 이번 원정의 목표는 길을 개척하며 섬에 남은 원주민을 철저히 소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타이완 원주민 협력대는 힘든 토목 작업과 장기 체류에 불만을 품고 12일 만에 대부분 돌아가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군은 원주민 30명의 목을 베고 청년 1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보고했다. 이 과정에서 협력대에 의해 여성과 아이를 포함한 다른 포로들이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다.

3차 침공 이후에도 섬에 원주민이 남아있다는 정보가 계속 들어오자, 타이완의 네덜란드 행정 당국은 강압적인 방법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다. 8월 21일, 행정 장관과 평의회는 원주민을 회유하여 투항시키는 선무책(宣撫策)으로 방향을 바꾸기로 결정했다. 9월 9일부터 링가 중위는 소수의 호위병과 포로로 잡혔던 원주민을 데리고 섬으로 들어가, 신변 안전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투항을 권유했다. 이미 생활 기반이 완전히 파괴된 원주민들 중 일부는 저항하다 살해되었으나, 100명 이상이 투항하여 타이오완(현재의 타이난시 안핑구)으로 연행되었다. 네덜란드 측은 이로써 원주민 소탕 작전이 완료되었다고 판단하고, 9월 24일 주둔 병력을 15명으로 줄인 뒤 철수했다.

그해 12월 28일 자 『동인도 사무 보고』에는 총 554명의 원주민을 연행했고 나머지 300여 명은 살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11월 26일 자 『바타비아 성 일지』의 기록과도 일치하여 공식적인 피해 규모로 여겨진다. 하지만 『제란디아 성 일지』 등 다른 기록들을 고려할 때, 실제 사망자 수는 공식 발표보다 훨씬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4. 결과 및 영향

라메이섬 학살 사건 이후, 섬에서 살아남은 원주민들은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했다. 생포된 남성들은 네덜란드령 동인도바타비아(현재 자카르타)와 타이완으로 끌려가 노예로서 강제 노동에 시달렸으며, 여성과 아이들은 타이완에 있는 네덜란드인 가정의 하녀로 보내졌다. 일부 여성은 네덜란드인 남성과 결혼하기도 했다.

이러한 강제 이주와 네덜란드의 지속적인 탄압 끝에, 1645년에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로부터 권리를 임대한 중국 상인이 마지막 남은 원주민 13명을 섬 밖으로 데려가면서 라메이섬은 결국 완전히 비워지게 되었다.

4.1. 강제 이주 및 노예화

섬에서 생포된 남자들은 네덜란드령 동인도바타비아(현재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와 타이완에서 노예로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다. 여자와 아이들은 타이완에 있는 네덜란드인 가정의 하녀로 보내졌으며, 일부는 나중에 네덜란드인 남성과 결혼하기도 했다.

1636년 12월 28일자 '동인도 사무 보고'에 따르면, 총 554명이 섬에서 끌려갔으며, 이후에도 추가로 연행된 사람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중 재능이 있고 건강하며 용모가 단정한 172명은 네덜란드의 아시아 거점이었던 바타비아로 보내졌다. 남은 사람들 중 저항하는 이들은 쇠사슬에 묶여 노예로서 왕칸(현재 자이현 부다이진)이나 타이오안(Tayoan, 현재의 타이난시 안핑 구 일대)에서 강제 노동에 시달렸다. 이는 1634년 중국 해적 유향이 왕칸과 타이오안을 공격하여 네덜란드 정청(젤란디아 성)에 피해를 입힌 것에 대한 보복 조치의 일환으로 추정된다.

한편, 여성과 아이들은 신칸 사(新港社, 현재 타이난시 신스 구) 지역에 흩어져 살게 되었고, 네덜란드 당국은 이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려 했다. '젤란디아 성 일지'에는 평의회 결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붙잡힌 모든 여성과 10세 이하의 남자 아이들을 신칸 사에 보내되, 노예로 취급하는 것은 금지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네덜란드와 우호적이고 기독교에 호의적이었으며 라메이 섬 침공에 협력했던 신칸 사를 배려한 조치로 보인다. 그러나 '젤란디아 성 일지'(1637년 7월 11일 자 등)에는 라메이 섬 사람들이 신칸 사에서 사실상 노예와 다름없는 취급을 받았고 네덜란드인들도 이를 묵인했음을 시사하는 기록이 남아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라메이 섬 사람들은 신칸 사 주민들과 점차 동화되었고, 신칸 사의 지도자 중에는 라메이 섬 출신임을 나타내는 '라메이어'(Lameyer)라는 성을 사용하는 인물도 등장했다. 또한 1645년나가사키 네덜란드 상관장이었던 피터 안토니스존 오프르트워터의 하인 중에 '피터 라메이어'(Pieter Lameyer)라는 이름의 인물이 기록에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많은 라메이 섬 사람들은 가혹한 노예 노동으로 목숨을 잃거나 고향을 떠나 떠돌아다니는 비참한 삶을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1645년, 동인도 회사로부터 섬에 대한 권리를 임대한 중국 상인이 마지막 남은 13명의 주민을 데려가면서 섬은 완전히 비워졌다. 이후 대만 지배 세력이 여러 차례 바뀌면서 라메이 섬에서의 학살과 강제 연행 사실은 점차 잊혀 갔고, 대만 본토나 인도네시아 등지로 끌려간 원주민 생존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기 어렵게 되었다.

4.2. 섬의 변화

라메이섬 학살 이후, 섬에서 생포된 원주민 남성들은 네덜란드령 동인도바타비아와 타이완에서 노예로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다. 여성과 아이들은 타이완에 거주하는 네덜란드인의 집에 하녀로 보내졌으며, 일부는 시간이 흘러 네덜란드인 남성과 결혼하기도 했다.

네덜란드의 습격은 이후에도 계속되었고, 1645년에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로부터 섬에 대한 권리를 임대한 중국 상인이 마지막 남은 원주민 13명을 데려가면서 섬은 완전히 비워지게 되었다.

원주민을 제거한 후, 네덜란드 당국은 섬의 활용 방안을 모색했다. 1636년 12월 28일 자 『동인도 사무 보고』에 따르면, 네덜란드는 코코야자 재배를 위해 연 300레알이라는 상당한 금액에 섬을 중국인에게 임대했다. 당시 행정 장관이었던 파울루스 트라우데니스의 월급이 210굴덴(약 70레알)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매우 높은 임대료였다. 그러나 섬의 경영은 순탄치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1645년 4월 28일 자 『젤란디아 성 일지』에는 임대료가 70레알로 대폭 인하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러한 경영상의 어려움은 1637년 이후 네덜란드 행정 장관과 원주민 사이의 정책 변화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중국인에 의한 농장 경영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는 사실은 1661년 말, 정성공의 젤란디아 성 공격에 대비하여 네덜란드 측이 라메이섬에서 대량의 야자 열매, 염소, 채소 등을 조달했다는 『바타비아 성 일지』 기록을 통해 확인된다. 그러나 이듬해 젤란디아 성이 함락되면서 네덜란드의 타이완 지배는 끝나고 정씨 왕국이 들어섰다. 정씨 정권은 타이완 해협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던 청나라와의 관계 속에서, 섬의 중국계 주민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고 섬을 무인화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정씨 정권 붕괴 후인 1685년, 청나라에서 편찬된 『대만부지』에 이 섬이 '소류구'라는 이름의 무인도로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추측할 수 있다. 네덜란드 지배 말기에 존재했던 중국계 주민들이 불과 20여 년 만에 사라진 것이다.

청나라 지배 하에 들어가면서, 한때 라메이섬으로 불렸던 이 섬은 '소류구'(小琉球)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었다. 본래 '소류구'는 타이완 본섬을 가리키는 명칭이었으나, 청나라가 타이완을 평정한 후 책봉 관계에 있던 류큐 왕국과의 구분을 위해 '타이완'이라는 호칭을 공식화하면서, 무인도가 된 이 섬에 '소류구'라는 이름이 대신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이후 땔감을 구하기 위해 인근 주민 소수가 섬에 정착하기도 했으나, 주일귀의 난 당시 반란 세력이 소류구에 근거지를 두면서 다시 출입이 금지되었다. 금지가 풀린 뒤 중국계 주민들이 다시 이주했지만, 과거 사람이 살았던 흔적만 남은 채 섬이 비워진 이유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이는 라메이섬 학살 사건 이후 네덜란드에서 정씨 왕국으로, 다시 청나라로 지배자가 빠르게 바뀌면서 사건에 대한 기록이 네덜란드 측에만 남고 중국 측 기록에는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적 공백 속에서 섬의 비극적인 과거를 설명하기 위해 '오귀 전승'(烏鬼傳說)이라는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1894년에 편찬된 『봉산현 채방책』의 「소류구」 항목에는 당시 섬에 6개 촌락, 400호, 인구 2~3천 명이 살고 있다는 현황과 함께 다음과 같은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 (소류구의 석동에 대하여) 전설에 따르면 옛날, 오귀번(烏鬼蕃)이라 불리는 부족이 이곳에 모여 살았다(중략). 후에 천주(泉州) 사람이 그 땅에 건너와 개간하려 하자 충돌이 일어났고, 천주인이 밤을 틈타 불을 질러 그들은 한 사람도 남김없이 타 죽었다……

이 전설은 과거 섬의 원주민들이 동굴에 갇혀 끔찍하게 살해당했다는 사실의 편린을 담고 있지만, 가해자였던 네덜란드의 존재는 사라지고 중국계 한족(천주인)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일본 제국 통치 시기 『대만 지명 사전』을 편찬한 이노 가쿠 등에 의해 채록되어 전파되었고, 오늘날까지도 라메이섬의 과거를 설명하는 통설처럼 여겨지고 있다.

5. 왜곡된 이야기

이 사건에 대한 여러 잘못된 설명이 있는데, 그중 가장 명백한 것은 학살이 일어난 동굴 밖에 있는 현판의 내용이다. 현판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 1661년(영력 명나라 15년) 민족 영웅 정성공(鄭成功)은 연평왕으로 봉해져 네덜란드를 몰아내고 타이완과 펑후를 회복했다. 네덜란드가 도주하는 과정에서 흑인들이 부대에서 떨어져 이 섬에 도착했다. 그들은 이 동굴에서 살았다. 몇 년 후 영국 군인이 탄 배가 동굴 북동쪽에 상륙했다. 그들이 경치를 즐기고 있을 때 그 흑인들은 그들의 음식과 다른 물건을 훔치고 배를 불태우고 모든 영국인들을 죽였다. 영국 군함이 이 섬에 상륙한 것을 발견하고 살인자를 찾았지만, 흑인들은 동굴에 숨었다. 수많은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항복을 거부했다. 결국 영국군은 기름을 사용하여 동굴을 불태웠다. 그리하여 모든 흑인들은 그곳 동굴에서 죽었다. 후에 그것은 흑령동으로 명명되었는데, 이는 외국 흑인들이 전에 살았던 동굴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여러 작가들이 지적했듯이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완전히 사실과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