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1차 대표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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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1차 대표자회는 1905년 러시아 혁명 이후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로 분열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 핀란드 탐페레에서 개최한 회의이다. 이 회의는 원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혁명으로 인한 불안정한 상황으로 인해 장소가 변경되었다. 대표자회에서는 당의 분열, 농업 문제, 국가두마 선거 대응 등이 논의되었으며, 선거 보이콧과 무장 봉기를 통한 혁명 노선이 재확인되었다. 또한 블라디미르 레닌과 이오시프 스탈린이 처음 만난 자리로, 러시아 혁명과 핀란드 노동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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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1차 대표자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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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 정보 | |
회의 명칭 |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1차 탐페레 회의 |
로마자 표기 | I konferentsiya Rossiyskoy sotsial-demokraticheskoy rabochey partii |
개최 연도 | 1905년 |
개최 장소 | 탐페레 |
회의 관련 정보 | |
목적 |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내부 문제 논의 및 해결 |
주요 의제 | 당의 강령, 조직 문제, 중앙위원회 선출 등 |
참가자 | 블라디미르 레닌 요시프 스탈린 기타 당 대표자들 |
중요성 | 레닌과 스탈린의 첫 만남이 이루어진 역사적인 회의 |
기타 정보 | |
관련 문서 | http://www15.uta.fi/koskivoimaa/vuodet/1905/1905b.htm https://helda.helsinki.fi/handle/10138/153710 |
2. 배경
1905년 러시아 혁명의 격동 속에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은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로 분열된 상태였다. 본래 볼셰비키는 1905년 11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러시아 총대표자회"를 개최하려 했으나, 혁명으로 인한 사회 불안과 교통 문제 등으로 인해 계획은 축소되어 '대표자회'로 변경되었다.[3]
불안정한 러시아 내 상황 때문에 회의 장소는 당시 러시아 제국과 동군연합 관계에 있어 여권 없이 이동이 가능했던 핀란드 대공국의 탐페레로 결정되었다.[2] 대표자회 개최 직전인 12월 21일에는 볼셰비키가 주도하는 모스크바 노동자 평의회가 무장 봉기를 시도하는 등[4] 혁명의 열기가 고조되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1차 대표자회가 1905년 12월 탐페레에서 개최되었다.
2. 1. 러시아 혁명과 사회민주노동당의 분열
1905년 봄, 런던에서 열린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3차 대회 이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RSDLP)은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로 사실상 분열된 상태였다. 같은 해 발발한 1905년 러시아 혁명은 이러한 당내 상황과 맞물려 대표자회 개최에 큰 영향을 미쳤다.원래 볼셰비키는 11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러시아 총대표자회"를 개최할 계획이었으나, 혁명으로 인한 사회 불안과 철도 파업 등으로 모스크바, 사마라, 니즈니노브고로드 등 주요 지역 대표들의 참석이 불투명해졌다.[3] 결국 회의는 당초 계획보다 축소된 '대표자회'로 격하되었다. 한편, 멘셰비키는 11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자체적으로 "제2차 전체 회의"를 개최하며 볼셰비키와의 노선 차이를 드러냈다.
대표자회 개최 직전인 12월 21일, 볼셰비키가 장악한 모스크바 노동자 평의회는 다른 혁명 정당들과 함께 무장 봉기를 시도했다. 대표자회가 열렸을 때 봉기의 결과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으며,[4] 새롭게 발표된 국가 두마 선거법 또한 회의의 주요 논쟁거리였다.
혁명으로 인한 불안 때문에 대표자회 장소는 러시아 본토 대신 당시 러시아 제국과 동군연합 관계에 있어 여권 없이 이동 가능했던 핀란드 대공국으로 변경되었다. 핀란드 사회민주당 서기 위리외 시롤라는 러시아 주둔군이 없고 노동 운동이 활발하며 차르주의 폭정에 비판적인 탐페레를 회의 장소로 추천했다. 레닌은 처음에는 핀란드 개최에 부정적이었으나, 10월 말에서 11월 초 핀란드에서 일어난 총파업 등 혁명적 분위기를 확인하고 마음을 바꾸었다.[2] 12월 21일, 볼셰비키 기관지 『신생활』(Новая Жизнь|노바야 쥐슨ru)은 대표자회 장소가 탐페레로 변경되었음을 공지했고, 대표들은 핀랸츠키 역에서 소규모 그룹으로 나뉘어 탐페레로 이동했다.[3] 탐페레 현지에서 회의 준비를 도운 핀란드인 조직가들의 신원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지역 신문 『칸산 레흐티』의 사무장 비흐토리 코소넨 등이 유력하게 거론된다.[4]
2. 2. 탐페레 대표자회 개최 결정
1905년 11월 말, 볼셰비키 기관지 『신생활』(Новая Жизнь|노바야 쥐슨ru)에는 각 지구당 대표자들이 참석하는 회담이 12월 23일에 열릴 것이라는 공고가 실렸다.[3] 이 회담은 본래 11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러시아 총대표자회"로 개최될 예정이었으나, 1905년 러시아 혁명으로 인한 불안정한 상황 때문에 계획이 변경되었다. 특히 철도 파업으로 모스크바, 사마라, 니즈니노브고로드 대표들의 참석이 불가능해지면서, 회담은 당초 계획했던 총대표자회보다 격이 낮은 대표자회로 축소되었다.[3]상트페테르부르크 개최가 어려워지자, 대표자들은 러시아 제국과의 동군연합 상태였지만 여권 없이 이동 가능했던 핀란드 대공국을 새로운 개최지로 선정했다.[2] 핀란드 사회민주당 당서기 위리외 시롤라는 탐페레를 회의 장소로 추천했는데, 그 이유는 당시 탐페레에 러시아 주둔군이 없었고, 노동조합이 강한 좌파 성향의 도시였으며, 시장 역시 차르 체제에 반대하는 활동가들에게 호의적이었기 때문이다.[2] 레닌은 처음에는 핀란드에서의 회의 개최에 부정적이었으나, 10월 말에서 11월 초 핀란드에서 일어난 총파업을 보고 마음을 바꾸었다.[2]
결국 12월 21일, 『신생활』에는 대표자회 장소가 탐페레로 변경되었으며, 대표자들이 핀란드 역에서 소규모 그룹으로 나뉘어 이동할 것이라는 공고가 다시 실렸다.[3] 탐페레 현지에서 회의 준비를 도운 핀란드인 조직가들이 정확히 누구였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칸산 레흐티』 신문의 사무장 비흐토리 코소넨이 유력한 인물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4]
3. 대표자회 진행과 결론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1차 대표자회는 1905년 12월, 핀란드 대공국 탐페레의 탐페레 노동자회관에서 열렸다.[2] 탐페레 노동자협회와 국민위병의 도움으로 차르 비밀경찰의 감시를 피해 비밀리에 진행되었다.[2] 레닌이 의장을 맡았으며,[3] 표도르 단, 레오니트 크라신, 율리우스 마르토프, 알렉세이 리코프 등 러시아 전역에서 모인 41명의 대표자들이 참석했다.[5] 보안을 위해 참석자들은 가명을 사용했다.[3]
회의는 혁명적 열기 속에서 진행되었으며,[2] 나데즈다 크룹스카야는 당시 탐페레 국민위병들이 대표자들에게 사격술을 가르쳐주기도 했다고 회고했다.[7] 주요 논의 의제는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간의 당 분열 해소 방안, 농업 문제, 그리고 새로 구성될 국가두마 선거 대응이었다.[3] 논의 결과, 당의 형식적 통합 지지, 토지 몰수 요구, 국가두마 선거 보이콧 등이 결정되었다. 특히 선거 보이콧 결정은 무장 봉기를 혁명의 주요 수단으로 삼는 노선을 재확인하는 의미를 가졌다.[3] 또한 민주집중제 원칙에 따른 당 재조직에도 합의했다.[3]
대표자들은 회의 기간 중 탐페레 시내에서 열린 평등보통선거권 요구 시위에도 참여했다.[2] 회의는 신년 전야에 마무리되었고, 참석자들은 경찰의 추적을 피해 여러 경로로 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갔다.[2] 이러한 보안 노력에도 회의 개최 사실은 결국 당국에 알려졌다.[3]
3. 1. 회의 진행 과정

회담 장소는 5년 전 완공된 탐페레 노동자회관이었다.[2] 탐페레 노동자협회는 회관을 무료로 빌려주었고, 국민위병을 동원하여 차르 비밀경찰로부터 회관을 보호해주었다.[2] 대표자들은 탐페레 시내 호텔에 머물렀다.[2] 회의는 12월 23일에 시작되었으나, 공식적인 회담은 다음 날 열렸다.[2]
레닌이 의장으로, 고레프와 보로딘이 공동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3] 비밀경찰에게 신원이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레닌의 제안에 따라 모든 참석자는 가명을 사용했다.[3] 그 외 주요 참석자로는 표도르 단, 레오니트 크라신, 율리우스 마르토프, 알렉세이 리코프 등이 있었다.[5] 핀란드 사회민주당 측에서는 레오 라우키가 대표로 참석했다.[6]
러시아 전역의 사회민주노동당 지역 조직에서 총 41명의 대표자가 참석했다. 회의 초기에는 각 지역의 상황 보고와 당 중앙위원회의 활동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2] 레닌은 회의 중 최소 두 차례 이상 연설했으며, 스탈린은 이에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전해진다.[2] 회의 분위기는 혁명의 열기로 가득했다. 레닌의 아내 나데즈다 크룹스카야는 당시 탐페레 국민위병들이 회의 참석자들에게 사격술을 가르쳐주기도 했다고 회고했다.[7]
주요 논의 주제는 당의 분열 문제였다.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간의 통합 방안과 협력 문제가 다루어졌다. 또한 농업 문제와 1905년 러시아 혁명 이후 새로 구성될 국가두마 선거에 대한 대응 방안도 논의되었다.[3]
12월 28일, 대표자들은 탐페레 시내에서 열린 평등보통선거권을 요구하는 시위에 참여했다. 1만 명 이상이 모인 이 시위는 노동자회관에서 중앙광장까지 이어졌다.[2] 회의 마지막 날, 참석자들은 노동자회관에 다시 모여 민중가요를 불렀고, 신년 전야에 탐페레를 떠났다.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여러 그룹으로 나뉘어 각기 다른 경로로 이동했으며, 대부분 별 어려움 없이 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갔다. 레닌은 위조 여권을 사용했다.[2] 이러한 보안 노력에도 불구하고, 회담 개최 사실은 결국 경찰에게 알려졌다.[3]
3. 2. 주요 의제 및 논의 내용
대표자회의의 주요 논제는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파벌 간의 당 분열 문제였다.[3] 볼셰비키는 분열 해결을 원했지만, 그 과정에서 볼셰비키의 주도권을 유지하고자 했다. 결국 대표자회는 두 파벌 간의 평등 원칙 하에 분열을 해결하고, 지역 조직들의 통합을 지지하기로 결정했다.또한 농업 문제가 논의되었는데, 이는 소농들이 대지주들의 토지를 장악하고자 하는 요구와 관련된 마르크스주의 내 논쟁이었다.[3] 대표자회는 모든 사유지, 국가 소유지, 교회 소유지의 몰수를 요구하기로 결의했다.
1905년 혁명 이후 새로 구성될 국가두마 선거에 대한 대응 방안도 주요 의제였다.[3] 대부분의 대표자들은 새 선거법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며 선거 보이콧을 주장했다. 레닌은 처음에는 선거 참여를 주장했으나, 다수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보이콧 결정을 수용했다. 이 결정은 무장 봉기가 혁명의 필수 수단이라는 노선을 재확인하는 의미를 가졌으며[3], 당시 진행 중이던 모스크바 봉기에 대한 지지와도 연결되었다.
더불어 민주집중제 원칙에 따라 당 조직을 개편하기로 결정했다.[3]
3. 3. 결의 내용
대표자회의 주요 논제는 당의 분열 상태, 소농들의 토지 요구에 관한 농업 문제, 그리고 새로 설치될 국가두마 선거에 대한 대응 등이었다.[3]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양 파벌 간의 분열을 해소하고, 평등의 원칙에 기반하여 지역 조직을 통합하려는 논의가 이루어졌다. 농업 문제에 대해서는 모든 사유지, 국가 소유지, 교회 소유지의 몰수를 요구하기로 결정했다. 국가두마 선거와 관련해서는 레닌 등이 선거 참여를 통한 전략적 활용을 주장했으나, 다수 대표자들은 선거법을 비판하며 보이콧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무장 봉기가 혁명의 필수 수단임을 재확인하는 입장이었다. 또한 민주집중제 원칙에 따라 당을 재조직하기로 합의했다.[3]대표자회에서 논의되고 결의된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8][9][10][11][12]
발제 | 선출 내역 | 결의된 사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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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레닌과 스탈린의 첫 만남
탐페레 대표자회는 레닌과 스탈린이 처음으로 만난 역사적인 자리였다. 두 사람은 탐페레 노동자 회관의 소회의실에서 처음 만났으며, 이 방은 현재 레닌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14]
스탈린은 훗날 회고록에서 레닌과의 첫 만남이 다소 실망스러웠다고 회상했다.[16] 그는 레닌이 위풍당당하고 다른 사람들보다 신체적으로 더 큰 지도자의 풍모를 갖춘 인물일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실제 레닌은 평균 키보다 작았고 다른 대표자들과 외모에서 크게 다르지 않아 구분하기 어려웠다고 썼다.[16] 또한 스탈린은 위대한 인물은 보통 행사에 일부러 늦게 도착하여 기다리는 대중의 기대를 모으는 것이 관례라고 생각했으나, 레닌은 오히려 정시에 도착하여 구석 테이블에서 지인들과 이야기하며 다른 대표들을 격의 없이 맞이했다고 한다.[16] 스탈린은 처음에는 이러한 레닌의 모습이 "특정 필수 규칙을 위반하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적었지만, 나중에는 이러한 레닌의 "소박함과 겸손함"이야말로 인류의 "일반 대중"을 이끄는 지도자로서 가진 가장 큰 자질임을 깨달았다고 평가했다.[16]
5. 사후적 중요성
핀란드의 관점에서 볼 때, 1905년 12월의 제1차 대표자회보다는 1906년 4월 탐페레에서 열린 제2차 대표자회가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14] 이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은 1907년 7월 콧카에서 제3차 대표자회, 같은 해 11월 헬싱키에서 제4차 대표자회를 개최하는 등, 핀란드 영토 내에서 총 네 차례의 대표자회를 열었다.[15]
한편, 이 대표자회는 레닌과 스탈린이 처음으로 만난 역사적인 자리이기도 하다. 두 사람은 탐페레 노동자회관의 소회의실에서 처음 대면했으며, 이 장소는 현재 레닌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14] 스탈린은 훗날 자신의 회고록에서 레닌에 대한 첫인상이 다소 실망스러웠다고 기록했다. 그는 레닌이 지도자다운 풍채를 지녔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실제로는 키가 작고 평범한 외모여서 다른 참석자들과 구별하기 어려웠다고 술회했다. 또한 스탈린에 따르면, 레닌은 회의에 다소 늦게 도착하여 다른 사람들이 기다려야 했으며, 이는 마치 "일종의 규칙을 깨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썼다.[16]
5. 1. 러시아 혁명에 미친 영향
탐페레 대표자회에서 나타난 핀란드 노동운동의 모습은 이후 볼셰비키의 활동에 상당한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핀란드 적위대는 러시아 적위대를 조직하는 데 모델이 되었다. 또한, 탐페레 총파업 위원회와 적위대 사이의 긴밀한 협력 관계는 레닌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으며, 이는 1917년 2월 혁명 당시 소비에트 구성에 관한 아이디어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제기된다.[14]5. 2. 핀란드 독립 운동과의 관계
탐페레 대표자회는 핀란드 노동운동이 이후 볼셰비키 활동에 영향을 미치는 계기가 된 것으로 평가된다. 핀란드 적위대를 모델로 삼아 러시아 적위대가 창설되었다는 점이 대표적이다. 또한, 탐페레 총파업위원회와 적위대의 유기적인 관계는 레닌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으며, 이는 1917년 2월 혁명 당시 소비에트 구상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도 있다.[14]6. 야사와 일설들
탐페레 대표자회 현장은 보존되지 않았으며, 회의 과정을 담은 사진이나 의사록도 남아있지 않다. 따라서 회의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는 신뢰할 만한 정보는 매우 부족하고, 대부분 참가자들의 사후 회고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2] 특히 레닌과 스탈린 같은 역사적 인물들이 처음 만난 자리라는 점에서, 사실과 다른 여러 이야기나 도시전설이 생겨났다.
예를 들어, 레닌과 그의 아내 나데즈다 크룹스카야가 탐페레의 라우타티엔카투와 퀴텔란카투 모퉁이에 있는 여관에 묵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해당 건물 벽에는 이를 기념하는 명판도 설치되어 있다. 하지만 1905년 당시 그 자리에는 여관이 없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2] 레닌은 다른 대표자들처럼 당시 바우어 호텔(현재의 에마욱센 탈로)에 머물렀을 가능성이 높다.[17]
또 다른 이야기로, 핀란드의 언론인이자 활동가였던 요흔 엘리스 치드배크가 헬싱키에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레닌과 스탈린이 차르 비밀경찰의 체포를 피하게 도왔다는 주장이 있다. 치드배크는 성탄 전야에 이미 수백 명의 경찰과 헌병이 탐페레 시내에 배치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당시 탐페레 노동자협회 회장이었던 에밀 빌랴넨의 증언 등 다른 정보와 일치하지 않아 신빙성이 낮다.[2]
1946년 마티 부올루카의 회고록(또는 1949년 라디오 인터뷰)에는 레닌이 탐페레 대표자회에서 볼셰비키가 러시아 권력을 잡으면 핀란드의 독립을 약속했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이는 부올루카가 1906년 11월 탐페레에서 열린 다른 회의(제2차 당대회 또는 비공식 회의)의 내용을 제1차 대표자회와 혼동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레닌의 약속은 핀란드의 완전한 독립이 아닌 자치령 수준의 내부 자치에 관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17][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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