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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 2세 (동로마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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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레오 2세는 467년 이사우리아 출신 장군 제논과 레오 1세의 딸 아리아드네 사이에서 태어났다. 레오 1세의 외손자로서 황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472년 카이사르로 임명된 후 이듬해 아우구스투스로 승격되어 레오 1세와 공동 황제가 되었다. 474년 레오 1세가 사망하면서 단독 황제가 되었으나, 7세의 어린 나이로 인해 아버지 제논이 공동 황제가 되었다. 같은 해 10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고, 제논이 단독 황제가 되었다. 레오 2세의 짧은 통치와 죽음에 대한 독살설 및 생존설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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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 2세 (동로마 제국)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금화에 군복을 입은 남성 모습이 담겨 있고, 그의 모습은 텍스트로 둘러싸여 있음.
레오 2세의 솔리두스. leo et zeno }}
이름레오 2세
로마자 표기Reo 2se
그리스어 (로마자)Leōn
출생 추정
사망474년 11월 (7세)
사망 장소콘스탄티노폴리스
매장지성 사도 교회
왕조레오니드 왕조
종교칼케돈 기독교
부모아버지: 제논
어머니: 아리아드네
통치
정치 체제로마 황제 (동로마 제국)
통치 기간473년 11월 17일 – 474년 11월
통치 유형(아우구스투스)
대관식473년 11월 17일
대관식 유형대관식
선임자레오 1세
후임자제논
섭정레오 1세 (1월 18일까지)
제논 (1월 29일부터)
글리케리우스 (서방, 473–474)
율리우스 네포스 (서방, 474)
섭정 유형공동 통치
이전 직위직위: (카이사르)
기간: 472년 10월 – 473년 11월
공식 칭호
기타
참고날짜=2013-6-1

2. 역사적 배경

레오 1세는 병이 깊어지자 후계자를 정해야 했는데, 사위 제논은 인기가 없어 자신의 외손자인 레오 2세를 472년 10월경 ''카이사르 (칭호)|카이사르la''(왕위 계승자)로 임명했다. 473년 11월에는 ''아우구스투스 (칭호)|아우구스투스la''로 승격시켜 공동 황제로 삼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히포드롬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 아카키우스가 주재하는 대관식을 거행했다. 474년에는 단독 집정관에 임명되었다.

474년 1월 18일, 레오 1세가 이질로 사망하자 레오 2세가 단독 황제가 되었으나, 너무 어려 공식 문서에 서명할 수 없었기에 비잔틴 원로원은 아버지 제논을 공동 황제로 임명했다. 그러나 레오 2세는 474년 10월 10일 직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사망했다.

2. 1. 어린 시절과 황제 즉위

레오 2세는 467년에 이사우리아 출신 장군인 제논과 당시 황제 레오 1세의 딸인 아리아드네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황제 레오 1세와 황후 베리나의 외손자로, 황위 계승권을 강력하게 가지고 있었다. 472년 10월경, 레오 1세는 레오 2세를 ''카이사르 (칭호)|카이사르la''(부황제)로 임명했고, 473년 11월에는 ''아우구스투스 (칭호)|아우구스투스la''(정황제)로 승격시켜 공동 황제로 삼았다.

 옥좌에 앉아 있는 두 인물이 묘사된 금화. 둘 다 후광이 있으며, 그들 사이에 십자가가 있다. 전체 장면은 텍스트로 둘러싸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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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4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히포드롬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아카키우스의 주재로 대관식을 거행했으며, 같은 해 레오 2세는 단독 집정관으로 임명되었다.

474년 1월 18일, 레오 1세가 이질로 사망하자 레오 2세는 단독 ''아우구스투스 (칭호)|아우구스투스la''가 되었다. 비잔틴 원로원은 황후 베리나의 승인을 받아 레오 2세가 공식 문서에 서명하기에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 제논을 레오 2세의 공동 ''아우구스투스 (칭호)|아우구스투스la''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레오 2세는 474년 10월 10일 직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사망했다.

2. 2. 짧은 통치와 죽음

474년 1월 18일, 레오 1세이질로 사망하자, 레오 2세는 단독 ''아우구스투스|아우구스투스la''가 되었다. 역사학자 워렌 트레드골드는 레오 2세의 통치 기간 동안 그의 아버지 제논이 왕위 뒤의 실세였다고 기록했다.

비잔틴 원로원은 황후 베리나의 승인을 받아 레오 2세가 공식 문서에 서명하기에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 제논을 레오 2세 아래의 공동 ''아우구스투스|아우구스투스la''로 임명했다. 제논은 474년 1월 29일에 공동 황제로 즉위하였다.

레오 2세는 474년 10월 10일 직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죽음으로 제논은 단독 황제가 되었다.

레오 2세가 황제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한 사실은 일부 현대 학자들 사이에서 그가 제논이 단독 황제가 되도록 그의 어머니나 아버지에 의해 독살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낳았다. 그러나 제논이 인기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시대 출처에서는 이러한 제안을 하지 않았으므로, 레오 2세의 죽음은 자연사로 여겨지는 것이 타당하며, 특히 당시의 높은 유아 사망률을 고려할 때 더욱 그러하다.

3. 레오 2세의 죽음에 대한 의혹

레오 2세는 474년 10월 10일 직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사망했다. 요한 말라라스는 그가 "1년 23일"을 통치했다고 언급했지만, 아우구스투스 즉위일로부터 계산하면 사망일은 12월 8일 또는 9일이 된다. 또한 레오는 "13번째 인딕티온의 11월... 가장 박식한 네스토리아노스에 의해 기록되었으며, 그의 연대기는 레오로 끝났다"라고 기록했다. 테오도루스 렉토르는 레오 2세가 474년 1월부터 11월까지 10개월 동안 통치했다고 하며, 이는 신앙 고백자 테오파네스도 뒷받침한다. 조지 오스트로고르스키는 레오 2세가 474년 가을에 사망했다고 간략히 기록했다. 레오 2세는 7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이는 요한 말라라스와 에페소스의 요한이 뒷받침한다. 레오 2세의 죽음으로 제논이 단독 황제가 되었다.

레오 2세의 죽음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의혹이 제기되었다.

3. 1. 독살설

아우구스투스 (칭호)|아우구스투스la로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한 사실은 일부 현대 학자들 사이에서 그가 제논이 단독 황제가 되도록 그의 어머니나 아버지에 의해 독살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낳았다. 그러나 제논이 인기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시대 출처에서는 이러한 제안을 하지 않았으므로, 레오 2세의 죽음은 자연사로 여겨지는 것이 타당하며, 특히 당시의 높은 유아 사망률을 고려할 때 더욱 그러하다. 6세기의 연대기 작가 투누나의 빅토르는 레오 2세가 실제로 죽지 않고 아리아드네에게 데려가 수도원에 숨겨졌다고 말하는데, 이는 비잔틴 사령관 아르마투스의 아들인 바실리스쿠스와의 혼동일 가능성이 높다.

3. 2. 생존설

6세기 연대기 작가 투누나의 빅토르는 레오 2세가 실제로 죽지 않고 아리아드네에게 데려가 수도원에 숨겨졌다고 주장한다. 이는 비잔틴 사령관 아르마투스의 아들인 바실리스쿠스와 혼동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바실리스쿠스는 476년에 카이사르 (칭호)|카이사르la로 즉위했으며, 477년 그의 아버지가 제논에게 살해된 후 아리아드네에 의해 구출되었다. 바실리스쿠스가 제논에 대항한 찬탈자와의 연관성을 피하기 위해 레오로 개명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 이러한 혼동을 설명해준다.

일본어 위키백과 문서에서는 레오 2세가 유스티니아누스 1세 치세까지 생존했다는 설을 소개하며, 비엔나의 아돈의 저서를 인용하여 레오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의 성직자가 되었다는 전설을 언급한다.

4. 레오 2세 사후의 동로마 제국

제논은 왕조적 권위가 부족하여 인기가 없었으며, 비잔틴 엘리트들에게 이방인으로 여겨졌다. 그의 유일한 가족 관계는 레오 1세의 딸인 아리아드네와의 결혼과 지금은 죽은 그의 아들 레오 2세를 통해서였다. 게다가 그는 이사우리아인이었기 때문에 비잔틴 엘리트들에게 이방인으로 여겨졌고, 즉위 당시 국고는 비어 있었다.

제논의 단독 통치에 대해 레오 1세의 미망인 베리나의 형제인 장군 바실리스쿠스가 반대했으며, 그는 475년 1월 황제로 선포했다. 제논은 도망쳤고, 바실리스쿠스는 20개월 동안 통치했지만 제논이 돌아와 왕위를 되찾았다. 제논의 통치는 끊임없는 반란으로 얼룩졌으며, 교활함, 뇌물, 운 덕분에 491년 4월 9일에 사망할 때까지 17년 동안 통치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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