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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스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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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실리스쿠스는 475년 동로마 제국의 황제였으나, 1년 만에 폐위되었다. 레오 1세의 매제로서 군 경력을 시작하여 468년 반달 왕국을 상대로 한 해전에서 참패했다. 황위에 오른 후 과도한 세금 부과, 종교 정책 실패, 콘스탄티노폴리스 대화재 등으로 민심을 잃었다. 그는 단성설을 지지하며 칼케돈 공의회를 부정하려 했으나, 반발에 직면하여 철회했다. 결국 제논에게 배신당하고 폐위되어 가족과 함께 카파도키아로 유배된 후 사망했다. 그의 통치는 동로마 제국에 혼란을 가져왔으며, 군사적 무능과 정치적 판단력 부족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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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스쿠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바실리스쿠스와 마르쿠스의 솔리두스. 앞면에는 바실리스쿠스의 모습이, 뒷면에는 바실리스쿠스(왼쪽)와 마르쿠스(오른쪽)의 모습이 담겨 있다.
바실리스쿠스와 그의 아들이자 공동 황제인 마르쿠스의 이미지가 새겨진 금 솔리두스
이름바실리스쿠스
로마자 표기Basiliseukuseu
그리스어 표기Βασιλίσκος
로마자 표기 (그리스어)Basilískos
전체 이름플라비우스 바실리스쿠스 아우구스투스
황제 이름플라비우스 바실리스쿠스 아우구스투스
통치
직위로마 황제
선임 황제제논
후임 황제제논
통치 기간475년 1월 9일 – 476년 8월
즉위일475년 1월 12일
즉위 유형대관식
공동 황제마르쿠스
섭정마르쿠스
율리우스 네포스 (서, 475년)
로물루스 (서, 475–476년)
칭호로마인의 황제
황제 칭호 (라틴어)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바실리스쿠스 아우구스투스
황제 칭호 (그리스어)Αὐτοκράτωρ 카이사르 바실리스코스 아우구스투스
개인 정보
배우자제노니스
자녀마르쿠스
왕조레오니드
사망 장소림나에 (현대 터키, 카파도키아)
사망 시기476년/477년
경력
군사 경력마기스테르 밀리툼
마기스테르 밀리툼 페르 트라키아스
마기스테르 오피시오룸
마기스테르 밀리툼 프레센탈리스

2. 생애

레오 1세 사후, 레오 2세가 7세에 요절하자 제논이 황위를 계승하였다. 그러나 제논은 나약한 인물이었기에 황위를 노리는 자들이 많았다. 475년 제논 즉위 1년도 채 되지 않아 반란이 일어나 제논은 황위에서 쫓겨나고, 제논의 계모인 Verina|베리나영어 (제논의 아내 Ariadne|아리아드네영어의 친어머니)의 남동생인 바실리스쿠스가 황제(대립 황제)로 즉위하게 되었다.

바실리스쿠스는 레오 1세 재위 기간 반달 왕국과의 해전에서 참패한 사령관으로, 능력과 인망이 모두 부족했다. 476년, 소아시아 남부 이사우리아로 추방되었던 제논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하자 제위를 빼앗기고 제논이 황제로 복위하였다.

2. 1. 초기 생애와 가문

바실리스쿠스는 발칸 반도에서 태어났지만, 정확한 출생일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베리나의 남동생이었으며, 베리나는 동로마 제국 황제 레오 1세의 황후였다. 따라서 바실리스쿠스는 레오 왕조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역사가 슈테판 크라우치크는 바실리스쿠스의 조카 아르마투스가 오도아케르라는 야만인의 형제였기 때문에, 바실리스쿠스 또한 오도아케르의 삼촌이자 야만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역사가 볼프람 브란데스와 휴 엘튼은 이러한 주장에 반대한다. 엘튼은 크라우치크의 주장이 단편적인 그리스 자료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의 민족성이나 오도아케르와의 관계를 언급하는 동시대 자료가 전혀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바실리스쿠스는 제노니스와 결혼하여 아들 마르쿠스를 낳았다. 제노니스의 출신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부 학자들은 그녀가 단성론자였을 것으로 추정하며, 바실리스쿠스의 종교 정책을 추진하는 데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본다.

바실리스쿠스는 또한 황제 율리우스 네포스와 인척 관계였는데, 율리우스 네포스의 아내의 삼촌이었다.

2. 2. 군사 경력

바실리스쿠스는 레오 1세 치하에서 군 장교로 복무했으며, 465년에 동방의 집정관으로 임명되었다. 464년경부터 467/468년까지 트라키아의 군사령관(Magister militum per Thracias|마기스테르 밀리툼 페르 트라키아스la) 직위를 맡아 훈족과 고트족을 상대로 여러 전투에서 승리했다. 466/467년에는 아나가스트, 아스파르, 오스트리스와 함께 이 두 세력의 혼합 집단을 상대로 전쟁을 이끌었다.

468년, 바실리스쿠스는 반달왕국을 상대로 한 원정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원정군의 규모는 다음과 같았다.

항목규모
총비용48750kg 상당의 황금
함대1,113척
병력약 10만 명



바실리스쿠스는 시칠리아 근처에서 반달 함대를 격파하는 등 초반에는 순조롭게 작전을 이끌었다. 그러나 본곶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가이세리크의 평화 협상 제안에 속아 5일간의 휴전을 받아들였다. 가이세리크는 이 틈을 타 화공선으로 로마 함대를 기습 공격했고, 본곶 해전에서 로마군은 대패했다. 바실리스쿠스는 시칠리아를 거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도망쳤다. 이 원정 실패로 동로마 제국은 막대한 재정적 손실을 입었다.

2. 3. 권력 장악

475년 레오 1세가 죽고 어린 황제 레오 2세도 죽자, 이사우리아 출신의 제논이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제논은 이사우리아 출신이라는 이유로 평판이 좋지 않았고, 동족을 고위직에 승진시킬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평민과 원로원 계급 모두에게 인기가 없었다. 바실리스쿠스는 이러한 상황을 틈타 누나인 황태후 베리나와 손을 잡고, 이사우리아인 일루스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475년 1월 9일, 제논은 쿠데타의 위협을 느끼고 동료들과 자금을 가지고 고향인 이사우리아로 도망쳤다. 제논의 도주 소식이 퍼지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남아 있던 많은 이사우리아인들이 학살당했다. 바실리스쿠스는 원로원을 설득하여 자신을 황제로 추대하도록 했고, 헵도몬 궁전에서 즉위했다. 그는 즉시 아들 마르쿠스를 카이사르la로 임명하고, 나중에는 공동 황제로 즉위시켰으며, 아내 제노니스를 아우구스타la로 임명했다.

2. 4. 통치와 몰락

바실리스쿠스는 황제가 된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이사우리아인을 학살하고 중과세 정책으로 백성의 지지를 잃었다. 그는 그리스도 단성론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칼케돈 공의회의 결정을 취소하려 했다. 그러자 주민들이 대대적으로 반기를 들었고 결국 그는 그 결정을 취소했다.

476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큰 화재가 발생하여 율리아누스 황제가 세운 도서관과 수많은 예술품들이 불에 타버렸다. 이 화재로 바실리스쿠스는 백성의 신망을 잃었고, 일루스는 이사우리아로 가서 다시 제논과 한편이 되었다. 이 화재로 12만 권의 책을 소장한 바실리카 도서관, 라우스 궁전, ''크니도스의 아프로디테'', 린디안 아테네, 사미안 헤라가 파괴되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이를 바실리스쿠스에 대한 신의 분노의 징표로 여겼다.

원작이 475/476년 화재로 소실된 ''크니도스의 아프로디테''의 복제품


바실리스쿠스는 아카키우스와의 갈등으로 인해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의 지지를 잃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칼케돈파였다. 제국의 거의 파산 상태로 인해 바실리스쿠스는 광범위한 세금을 징수하고 공직을 돈을 받고 팔아야 했다.

바실리스쿠스는 아르마투스를 magister militum praesentalisla로 임명했다. 이로 인해 테오데리크 스트라보는 아르마투스를 증오했기에 그에게 반감을 갖게 되었다. 아르마투스는 476년에 바실리스쿠스와 함께 집정관으로 임명되었다. 일루스와 트로군데스는 제노의 고향에서 그를 포위 공격하다가 그에게로 전향했다. 476년 2/3월부터 바실리스쿠스는 수도 민중을 두려워하여 Hebdomon에 머물렀다.

바실리스쿠스는 아르마투스에게 트라키아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모든 군대와 궁궐 경비를 지휘하여 그 셋에게 맞서라고 명령했다. 충성 맹세에도 불구하고 아르마투스는 제노가 그를 평생 magister militum praesentalisla로 만들고 그의 아들 바실리스쿠스를 caesarla로 즉위시키겠다고 제안하자 바실리스쿠스를 배신했다. 그는 제노가 방해받지 않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입하도록 허용했으며, 제노는 476년 8월에 아무런 저항 없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했다.

제논은 다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왔다. 바실리스쿠스는 폐위되어 겨우 목숨을 구걸하였고 소아시아의 카파도키아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바실리스쿠스와 그의 가족은 도망쳐 교회에 피신했고, 제노가 그들을 처형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후에야 그곳을 떠났다. 제노는 그들을 카파도키아의 림나이로 유배시켰는데, 그곳에서 그들은 말라버린 저수지에 갇혀 굶어 죽게 되었다. 일부 자료에 따르면, 그들은 대신 참수되었다고 한다.

3. 종교 정책

바실리스쿠스는 그리스도 단성론을 공개적으로 지지하였다. 그는 475년 칙령을 발표하여 제1차 니케아 공의회,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에페소스 공의회는 옹호하고, 칼케돈 공의회와 레오의 톰은 단죄했다. 이 칙령은 에페소스와 이집트에서는 열렬한 환영을 받았지만, 수도원과 아카키우스 총대주교를 소외시키고 수도의 칼케돈주의적 성향이 강한 주민들에게는 분노를 일으켰다.

바실리스쿠스는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로 티모테오스 아이루로스를, 안티오키아 총대주교로 페테르 풀러를 복귀시켰다. 그의 통치 하에, 475년에 티모테오스 아이루로스의 주재로 제3차 에페소스 공의회가 열렸고, 이 공의회는 칼케돈 공의회를 공식적으로 단죄했다.

칼케돈 공의회를 부인함으로써 28조를 무효화했고, 아카키우스가 동부 총대주교좌에 대한 통제를 종식시키자, 아카키우스는 이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했다. 아카키우스는 성 소피아 성당에 검은색 천을 덮고, 애도하는 회중을 이끌었다. 이로 인해 바실리스쿠스는 도시를 떠났고, 도시의 상당 부분이 제논의 귀환을 지지하게 되었다.

바실리스쿠스는 곧 그의 칙령을 무효화하고, 이전의 칙령을 철회하고 이단을 단죄하는 것을 재확인하며 아카키우스에게 28조의 권리를 회복했지만, 칼케돈 공의회에 대해서는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새로운 서한, 즉 "반칙령"을 발표했다.

4. 대중문화

바실리스쿠스는 1669년 윌리엄 킬리그루 경(1606–1695)이 쓴 희곡 ''제국의 비극''에서 제논의 두 번째 통치 기간에 유령으로 등장한다.

5. 평가

바실리스쿠스는 군사적 무능함과 정치적 판단력 부족으로 인해 짧은 통치 기간 동안 많은 실정을 저질렀다. 그는 그리스도 단성론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칼케돈 공의회의 결정을 취소하려 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좌를 폐지하려고까지 하였다. 이러한 그의 단성론 지지 정책은 종교적 갈등을 심화시켰고, 제국 내 분열을 초래했다.

바실리스쿠스의 통치는 동로마 제국의 혼란을 가중시켰으며, 제논의 복귀 이후에도 제국은 불안정한 상황을 벗어나지 못했다. 특히, 바실리스쿠스의 반달왕국 원정 실패는 당시 동로마 제국의 군사력 약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후대 역사가들에게 비판받고 있다. 당시 원정군의 규모는 다음과 같다.

항목내용
총비용48750kg 상당의 황금
함대1,113척
병력약 10만 명



그러나 바실리스쿠스는 허영심이 강하고 전투 경험도 거의 없는 무능한 사령관이었다. 그는 가이세리크의 계략에 말려들어 대함대의 절반을 잃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도망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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