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흐 바웬사
1. 개요
레흐 바웬사는 폴란드의 노동 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 1980년 폴란드에서 자유 노조 '연대'를 결성하여 공산 정권에 맞서 싸웠다. 1983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으며, 1990년 폴란드 최초의 민선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민영화와 자유 시장 경제를 추진했다.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정치적 갈등과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했으며, 1995년 재선에 실패했다. 퇴임 후 강연 활동을 했으며, 과거 공산 정권 시절 비밀경찰 협력 의혹에 휩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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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레흐 바웬사 |
|---|---|
| 로마자 표기 | Lech Wałęsa |
| 출생일 | 1943년 9월 29일 |
| 출생지 | 포포보, 단치히-서프로이센 제국관구, 나치 독일 |
| 배우자 | 다누타 바웬사 (결혼: 1969년 11월 8일) |
| 자녀 | 8명 ( 야로스와프 바웬사 포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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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위 | 제2대 폴란드 대통령 |
|---|---|
| 임기 시작 | 1990년 12월 22일 |
| 임기 종료 | 1995년 12월 22일 |
| 전임 대통령 |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 (국내), 리샤르트 카초로프스키 (망명 정부) |
| 후임 대통령 | 알렉산데르 크바시니에프스키 |
| 총리 | 타데우시 마조비에츠키 얀 크시슈토프 비엘레츠키 얀 올셰프스키 발데마르 파블라크 한나 수호츠카 발데마르 파블라크 유제프 올렉시 |
| 정당 | 연대 (1980–1988) 연대 시민위원회 (1988–1993) 개혁 지지 무소속 블록 (1993–1997) 연대 선거행동 (1997–2001) 제3 폴란드 공화국 기독교 민주주의 (1997–2001) |
| 수상 내역 | 전체 목록 |
|---|---|
| 노벨 평화상 | 1983년 |
| {"caption":"그단스크 협정 체결 후 바웬사의 연설 (1980년 8월 31일 녹음)","sound_file":"L_Walesa-Strajk_zakonczony.og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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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의 반체제자 -
브로니스와프 게레메크
브로니스와프 게레메크는 폴란드의 역사학자이자 정치인으로, 중세 유럽 사회 연구, 폴란드 민주화 운동 참여, 그리고 민주화 이후 폴란드와 유럽의 정치 발전에 기여했다. -
독립자치노동조합 '연대' 관련자 -
얀 올셰프스키
얀 올셰프스키는 폴란드의 변호사이자 정치인으로, 공산 정권 시기 반체제 운동에 참여, 1991년부터 1992년까지 폴란드 총리를 역임했으며, 탈공산화 이후에도 폴란드 정치계에서 활동했다. -
독립자치노동조합 '연대' 관련자 -
즈비그니에프 라우
즈비그니에프 라우는 폴란드의 법학자이자 정치인으로, 우치 대학교 법학 교수와 폴란드 외무장관, 유럽안보협력기구 의장을 역임했으며, 법과 정의당을 지지하는 보수주의 성향의 인물이다. -
폴란드의 반공주의자 -
레흐 카친스키
레흐 카친스키는 폴란드의 반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하고 '연대' 노동조합에서 활동한 후 바르샤바 시장을 거쳐 2005년부터 2010년 사망할 때까지 폴란드 대통령을 역임한 법과 정의당 출신의 정치인이다. -
폴란드의 반공주의자 -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폴란드 출신의 미국 외교 정책 전문가로, 지미 카터 행정부 국가안보보좌관을 역임하며 냉전 시기 반공주의적 입장을 견지하고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추진하는 등 미국의 외교 전략 수립에 기여했으며, 2017년 사망했다.
2. 어린 시절
레흐 바웬사는 1943년 9월 29일 폴란드 브워츠와베크 근처 포포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볼레슬와프 바웬사(1909년-1945년)는 목수였는데,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군에 의해 강제 노역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전쟁 후 두 달 만에 탈진과 질병으로 사망했다.
바웬사의 어머니 펠리크사 바웬사(결혼 전 성 카미엔스카; 1915년-1976년)는 아들의 신념과 끈기에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머니는 남편이 사망한 후 그의 처남 스타니스와프 바웬사(1917년-1981년)와 재혼했다. 바웬사에게는 세 명의 친형제자매와 세 명의 이복 남동생이 있었다.
바웬사는 쿠야비포메라니아주 리프노에서 초등학교와 직업학교를 졸업하고 전기 기술자 자격을 얻었다. 학교에서 그는 평범한 성적을 거두었고, 머리는 빠르지만 집중력과 지구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1962년부터 1964년까지 자동차 정비공으로 일했고, 그 후 2년간 군 복무를 마치고 하사 계급을 달았다. 1967년 7월 12일 레닌 조선소에서 전기 기술자로 일을 시작했다.
3. 노동 운동
레흐 바웬사는 1970년 그단스크 조선소 파업에 참여하면서 노동 운동에 뛰어들었다. 1980년 8월, 식료품 가격 인상에 항의하는 파업을 주도하며 '연대' (Solidarność폴란드어) 노조를 결성했다. '연대' 노조는 중앙유럽 최초의 독립적인 민주 노조로, 폴란드 민주화 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바웬사는 노동자들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 민주적인 노동조합 결성을 결심했다. 1976년에는 '죽은 노동자를 위한 기념탑'을 세우기 위한 서명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1981년 3월 10일, 바웬사는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를 만나 폴란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상호 신뢰가 필요하다는 데 동의했다. 바웬사는 "사회주의라는 이름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단지 일부 사람들이 사회주의라는 이름을 망쳤을 뿐입니다"라고 말하며 정부를 비판하기도 했다.
1980년대 중반, 바웬사는 지하에서 '연대' 관련 활동을 계속했다. 1986년 '연대' 활동가에 대한 사면 이후, 바웬사는 계엄령 선포 이후 최초의 공개적이고 합법적인 '연대' 단체인 NSZZ '연대' 임시 위원회를 공동 창립했다. 1988년 중반에는 그단스크 조선소에서 작업 중단 파업을 선동하기도 했다.
3.1. 1970년 '12월 사건'과 민주 노조 결성 시도
바웬사는 학생 시위를 규탄하는 공식 집회를 보이콧하도록 조선소 동료들을 독려했다. 그는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였으며, 1970년 정부의 식량 가격 인상 결정에 항의하는 1970년 시위를 그단스크 조선소에서 조직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파업위원회 의장직을 제안받았다. 30명 이상의 노동자 사망으로 이어진 파업은 바웬사의 변화 필요성에 대한 견해를 강화시켰다.
1970년 12월 12일, 폴란드 정부는 육류 가격 인상을 발표했다. 품목별로 4%에서 92%까지 가격이 올랐고, 12월 14일 그단스크 레닌 조선소에서 파업이 발생했다. 바웬사는 파업 당시 시위 행렬의 선두에 섰고, 정부 주도 노동조합 위원을 맡고 있었다.
1976년 6월, 바웬사는 불법 노조, 파업, 그리고 1970년 시위 희생자들을 기리는 캠페인에 계속 참여했기 때문에 그단스크 조선소에서 해고당했다. 그는 1976년 노동조합 선거에서 정부 주도 노조를 비판한 결과, 1976년 3월 조선소에서 해고되었다.
3.2. 1980년 8월 파업과 '연대' 노조 결성
1980년 7월, 폴란드 정부는 육류 가격을 40%에서 60%까지 대폭 인상한다고 발표했다. 이에 다음 날부터 전국적으로 파업이 시작되었다. 8월 14일, 그단스크 레닌 조선소에서 1만 6천 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했고, 레흐 바웬사는 이 파업을 지휘했다. 바웬사를 위원장으로 하는 파업 위원회는 그단스크 지방 위원회 및 공장 당국과 협상을 진행하여 8월 16일 요구 조건을 수용받고 파업 해제를 결정했다. 하지만 바웬사의 독단적인 파업 해제 결정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고, 결국 파업은 계속되었다.
바웬사는 정부에 21개 항의 요구 조건을 제시했는데, 여기에는 언론의 자유와 정부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자주 노동조합 설립 허가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1980년 8월 31일, 바웬사와 미에치스와프 야기에우스키 제1부총리가 합의 문서에 서명하면서 21개 항의 요구가 수용되었다.
1980년 9월 17일, 그단스크에서 열린 전국 대표단 회의에서 독립 자주 노동조합 "소리다르노시치"(연대) 창설이 결정되었다. 각 직장과 지역에 설치된 전국 조정 위원회(KKP) 의장으로 바웬사가 선출되었다. "소리다르노시치"는 1981년에 회원 수가 1천만 명에 달할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다.
3.3. 계엄령 선포와 탄압
1981년 12월 11일,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 정권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연대' 노조를 불법화하면서 바웬사는 체포되었다. 그는 소련 국경 근처에서 1982년 11월 14일까지 약 11개월간 구금되었다가 석방되었으나, '연대'는 이미 불법적인 단체로 인정되어 있었다.
4. 노벨 평화상 수상
1983년 10월 5일, 바웬사는 노동자로는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폴란드 정부는 바웬사를 비판했고, 바웬사는 망명객이 될 것을 우려하여 부인 다누타가 대신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5. 원탁 회의와 민주화
1988년, 바웬사는 야루젤스키 정권과 협상하여 원탁 회의를 개최했다. 원탁 회의를 통해 폴란드는 대통령제와 의회 민주주의를 도입하고, '연대' 노조의 합법화를 이끌어냈다. 1989년 총선에서 '연대' 노조는 압승을 거두었고, 타데우시 마조비에츠키를 총리로 하는 비공산주의 정부가 수립되었다.
6. 대통령 재임 (1990-1995)
1990년 12월 9일, 레흐 바웬사는 대통령 선거에서 압도적인 표 차이로 당선되어 63년 만에 폴란드 최초로 자유롭게 선출된 국가 원수이자 45년 만에 최초의 비공산주의 국가 원수가 되었다. 그는 "하고 싶지 않지만 해야 한다(Nie chcę, ale muszę)"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대통령직에 출마했다.
바웬사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폴란드는 민영화와 자유 시장 경제로의 전환(발체로비치 계획), 1991년 폴란드 최초의 완전 자유 총선, 국가 외교 관계 재정립의 시기를 거쳤다. 그는 폴란드 주둔 소련군 철수를 성공적으로 협상하고 외채를 상당히 감축했다. 또한 폴란드의 NATO 및 유럽 연합 가입을 지지했는데, 두 사건 모두 그의 대통령직 이후인 각각 1999년과 2004년에 발생했다. 1994년에는 폴란드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대한민국을 방문했다.
그러나 바웬사는 대립적인 스타일과 전 동료 연대원들이 서로 충돌하여 매년 정권 교체를 초래하는 "정상의 전쟁"을 선동한 것에 대해 비판받았으며, 이로 인해 정치 무대에서 점점 고립되었다.
1995년 대통령 선거에서 바웬사는 1차 투표에서 33.11%의 득표율을 기록했고, 민주좌파동맹(SLD)을 대표하는 알렉산데르 크바시니에프스키와의 결선 투표에서 48.28%를 득표하여 근소한 차이로 패배했다.
6.1. 대통령 재임 기간의 논란
레흐 바웬사는 1990년 대통령 선거에서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되었지만, 재임 기간 동안 여러 논란에 휩싸였다.
그는 '최고위층에서의 전쟁(war at the top)'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개혁을 추진했지만, 폴란드가 유럽 연합(EU)에 가입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폴란드의 러시아와의 제휴를 끝내고, 폴란드가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에 가입하는 것에 대한 러시아의 반대를 무마하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경제 성장에도 불구하고, 많은 국민들은 경제 전환 과정의 어려움과 즉각적인 변화의 부재에 실망했다.
비판적인 시각에서는 바웬사가 공산주의에서 자유 민주주의로의 경제 전환 과정에서 폴란드를 제대로 준비시키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결국 그는 1995년 대통령 선거에서 전 공산당원인 알렉산데르 크바시니에프스키에게 패배했다.
바웬사는 과거 공산 정권 시절 비밀경찰인 공안부의 정보원이었다는 의혹을 받았다. 2016년, 국가기억연구소는 바웬사가 1970년부터 1976년까지 공안부의 유료 정보원 '볼렉'으로 활동했다는 증거 문서를 압수했다고 발표했다. 이 문서들은 최근 사망한 체스와프 키시차크 전 내무장관의 집에서 발견되었으며, 필적 감정 결과 진본으로 확인되었다.
문서철에는 바웬사가 공안부와 협력하기로 한 서약서, 자금 수령 확인서, 그단스크 조선소 동료들에 대한 보고서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바웬사는 처음에 협력 사실을 인정하는 듯했으나, 이후에는 모든 문서가 위조되었다고 주장했다.
7. 퇴임 이후
바웬사는 1995년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후, 처음에는 그단스크 조선소의 전기 기술자로 복직할 것이라고 발표했지만, 곧 전 세계를 돌며 강연 활동을 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는 "국제 안보에서 NATO 확장의 영향", "민주주의, 끝없는 투쟁", "연대, 새로운 천년"이라는 세 가지 주제로 강연했으며, 대학 및 기타 공공 행사에서 약 5만 파운드(약 70000USD)의 강연료를 받았다.
1995년, 바웬사는 레흐 바웬사 연구소를 설립했다. 이 싱크탱크의 목표는 폴란드 "연대"의 업적을 알리고, 젊은 세대를 교육하며, 민주주의를 증진하고, 폴란드와 세계의 시민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1997년, 바웬사는 새로운 정당인 폴란드 제3공화국 기독교 민주당을 창당하여 향후 선거에서의 성공을 기대했다.
2000년 폴란드 대통령 선거에 바웬사가 출마했지만, 득표율 1.01%에 그치는 굴욕적인 패배를 당했다. 폴란드 통일 노동자당 당원이었던 알렉산데르 크바시니에프스키가 1차 투표에서 54%를 획득했다. 바웬사는 7위를 기록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2006년, 바웬사는 노동조합이 우익 정당인 법과 정의를 지지하고, 레흐 카친스키와 야로스와프 카친스키가 "연대"에서 주도권을 쥐고 폴란드의 대통령과 총리를 역임하고 있다는 것에 항의하며 "연대"를 탈퇴했다. 바웬사와 카친스키 형제의 불화는 카친스키 형제가 폴란드가 공산주의 통치에 가담했던 자들을 배척하려 하고, 비밀 경찰의 모든 파일을 공개하려 했던 것이 원인으로 지적된다. 바웬사와 그의 지지자들은 이러한 움직임이 정부가 제안한 이 투명성 법은 마녀 사냥이 될 우려가 있으며, 50만 명이 공산당 시대의 비밀 경찰과 협력 관계에 있었다는 이유로 기소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2011년, 바웬사는 리투아니아의 소수 폴란드인 차별에 항의하여 리투아니아의 비타우타스 대공 훈장 수여를 거부했다.
바웬사는 LGBT 권리에 대해 보수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를 보였다. 2013년, 바웬사는 폴란드의 TV에서 "(LGBT 사람들은) 스스로 용인하고 이해하는 것을 다수에게 강요받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동성애 의원은 의회의 맨 뒤쪽이나 벽 너머에 앉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국제적으로 비판을 받았고, 샌프란시스코 당국은 바웬사 거리의 명칭을 변경하기로 결정했으며, 바웬사는 사과하며 "나이든 사람들에게 성적 취향은 민감한 영역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발언 의도가 언론에 의해 왜곡되었다고 말하며 "동성애는 존중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수년 후, 바웬사는 폴란드에서 동성애 결혼 도입을 지지한다고 밝히고, 로베르트 비에드롱과 만나 그를 재능 있는 미래의 폴란드 대통령 후보라고 평가했다.
2013년, 바웬사는 폴란드와 독일 간의 정치 연합 창설을 제안했다.
2014년 인터뷰에서 바웬사는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의 노벨 평화상에 실망했다는 뜻을 밝혔다. 그는 CNN 인터뷰에서 "오바마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을 때 세계는 큰 희망을 가졌다. 우리는 오바마가 미국에 도덕적 리더십을 되찾아 주기를 기대했지만, 그것은 실패였다. 정치적, 도덕적으로 미국은 더 이상 세계를 이끌 위치에 있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오바마가 노벨 평화상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비난했다. 201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바웬사는 오바마의 경쟁자였던 미트 롬니를 지지했다. 2015년 9월에는 바웬사가 유럽의 난민 위기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언론에 이야기하며 "TV에서 이 난민들의 상황을 보고 나는 충분한 식사와 깨끗한 옷을 입고 아마 우리보다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며, (중략) 유럽이 만약 국경을 개방한다면 수백만 명의 이민자들이 우리와 함께 생활하면서 단두대를 포함한 그들의 관습을 받아들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2017년 8월, 바웬사를 포함한 10명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들은 사우디아라비아에 2011년부터 2012년까지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에 항의 활동에 참여한 14명의 청소년의 사형 집행을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8. 과거사 논란: 비밀경찰 협력 의혹
2000년 특별 검증 법원은 증거 불충분으로 바웬사에게 무혐의 판결을 내렸지만, 그가 1970년대 폴란드 인민 공화국 시절 국가안전부(SB)의 정보원이었다는 의혹은 계속 제기되었다. 2008년, 국가기억원 소속 역사학자 스와보미르 첸키에비치와 피오트르 곤타르치크는 《SB와 레흐 바웬사. 전기의 한 부분》(SB a Lech Wałęsa. Przyczynek do biografii폴란드어)이라는 책을 출판하여 바웬사가 1970년부터 1976년까지 '볼렉'이라는 암호명으로 비밀경찰 정보원으로 활동했다는 증거를 제시했다.
이 책에 따르면, 바웬사는 보고서를 작성하고 20명 이상의 사람들에 대해 정보를 제공했으며, 그 대가로 13000PLN 이상을 받았다. 또한, 바웬사가 1990년부터 1995년까지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비밀경찰과의 협력 증거를 없애기 위해 관련 문서를 제거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2016년 2월, 체스와프 키슈차크 전 내무장관의 유품에서 바웬사의 비밀경찰 협력 서약서가 발견되면서 논란이 다시 불거졌다. 2017년, 국가기억원이 의뢰한 필적 감정 결과는 1970년대 여러 문서에 있는 서명이 바웬사의 것이라고 밝혔다.
바웬사는 비밀경찰 협력 의혹을 강력하게 부인하며, 관련 문서들이 위조되었다고 주장해왔다. 그는 1970년 12월에 서명한 적은 있지만, 이는 비밀경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으며, 협력 계약에 따라 행동한 적은 없다고 주장했다.
9. 개인사
1969년 11월 8일, 바웬사는 레닌 조선소 근처 꽃집에서 일하던 미로스와바 다누타 고워시(미로스와바 다누타 고워시)와 결혼했다. 결혼 후, 레흐의 요청에 따라 그녀는 자신의 이름 대신 미들 네임을 더 자주 사용하기 시작했다. 부부는 보그단(1970년생), 스와보미르(1972년생), 프셰미스와프(1974~2017), 야로스와프(1976년생), 마달레나(1979년생), 안나(1980년생), 마리아-비크토리아(1982년생), 브리기다(1985년생) 등 여덟 명의 자녀를 두었다. 2016년 기준으로, 안나는 그단스크에서 아버지의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고, 넷째 아들 야로스와프 바웬사는 2005년부터 정치 활동을 시작하여 유럽 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 바웬사는 텍사스주 휴스턴의 휴스턴 메소디스트 병원에서 관상동맥 스텐트 시술과 심장 페이스메이커 이식 수술을 받았다. 그는 2021년에도 심장 수술을 받았다. 2022년 1월, 바웬사는 COVID-19 양성 판정을 받았다. 그는 COVID-19 백신을 세 차례 접종했다고 밝혔다.
10. 한국과의 관계
바웬사가 이끌던 '연대' 노조는 1980년대 한국 민주화 운동의 모델이 되었다. 1994년 한국을 방문하여 김영삼 대통령과 회담을 갖고,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2016년에는 계명대학교에서 명예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