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
1. 개요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는 폴란드의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폴란드 인민 공화국의 마지막 지도자였다. 그는 1923년 폴란드에서 태어나 제2차 세계 대전 중 소련으로 강제 이주되었고, 이후 소련군에서 복무했다. 1960년대부터 폴란드 군부에서 요직을 맡았으며, 1981년에는 폴란드 총리 겸 공산당 제1서기가 되었다. 같은 해 계엄령을 선포하여 자유 노조 '연대'를 탄압했으나, 1980년대 후반 민주화 과정에서 원탁 회의를 통해 자유 선거를 수용하고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이후 레흐 바웬사에게 대통령직을 넘겨주고 사임했으며, 2014년 사망했다. 그의 계엄령 선포와 관련하여, 찬반 논란이 있으며, 엇갈린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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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이름 | 보이치에흐 비톨트 야루젤스키 |
|---|---|
| 출생일 | 1923년 7월 6일 |
| 출생지 | 쿠루프, 제2 폴란드 공화국 |
| 사망일 | 2014년 5월 25일 |
| 사망지 | 바르샤바, 폴란드 |
| 안장 장소 | 포봉스키 군사 묘지, 바르샤바 |
| 서명 | Wojciech Jaruzelski Signature.svg |
| 직위 | 폴란드 대통령 |
|---|---|
| 임기 시작 | 1989년 7월 19일 |
| 임기 종료 | 1990년 12월 22일 |
| 총리 | 미에치스와프 라콥스키 체스와프 키슈차크 타데우시 마조비에츠키 |
| 전임자 | 직위 복원 |
| 후임자 | 레흐 바웬사 |
| 임기 시작 | 1981년 10월 18일 |
|---|---|
| 임기 종료 | 1989년 7월 29일 |
| 총리 | 본인 즈비그니에프 메스네르 미에치스와프 라콥스키 |
| 전임자 | 스타니스와프 카니아 |
| 후임자 | 미에치스와프 라콥스키 |
| 임기 시작 | 1985년 11월 6일 |
|---|---|
| 임기 종료 | 1989년 7월 19일 |
| 부의장 | 타데우시 스젤라호프스키 카지미에시 바르치코프스키 |
| 총리 | 즈비그니에프 메스네르 미에치스와프 라콥스키 |
| 제1서기 | 본인 미에치스와프 라콥스키 |
| 전임자 | 헨리크 야브원스키 |
| 후임자 | 직위 폐지; 본인이 대통령으로 |
| 임기 시작 | 1981년 2월 11일 |
|---|---|
| 임기 종료 | 1985년 11월 6일 |
| 제1서기 | 스타니스와프 카니아 본인 |
| 전임자 | 유제프 핀코프스키 |
| 후임자 | 즈비그니에프 메스네르 |
| 임기 시작 | 1968년 4월 11일 |
|---|---|
| 임기 종료 | 1983년 11월 22일 |
| 전임자 | 마리안 스피할스키 |
| 후임자 | 플로리안 시비츠키 |
| 소속 | 폴란드 인민 공화국 폴란드 공화국 |
|---|---|
| 군종 | 폴란드 인민군 폴란드군 |
| 복무 기간 | 1943년–1991년 |
| 계급 | 장군 |
|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베를린 전투 |
| 정당 | PPR (1944년–1948년) PZPR (1948년–1990년) 무소속 (1990년부터) |
|---|---|
| 배우자 | 바르바라 야루젤스카 (1961년 결혼) |
| 자녀 | 모니카 야루젤스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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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의 군사에 관한 -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폴란드의 군인이자 정치 지도자로, 폴란드 독립 회복에 기여했으며, 권위주의 정권 수립 후 폴란드 역사상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국가원수 -
볼레스와프 비에루트
폴란드의 공산주의 정치인 볼레스와프 비에루트는 폴란드 사회당과 공산당에서 활동하며 혁명에 기여하고, 제2차 세계 대전 후 폴란드 공산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대통령과 총리를 역임하면서 폴란드를 소련의 영향력 아래 두고 스탈린주의적 정책을 시행했다. -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국가원수 -
에드바르트 오하프
에드바르트 오하프는 폴란드 공산주의 정치인이자 지도자로, 폴란드 공산당 활동, 폴란드 인민군 창설 기여, 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제1서기 역임, 국가평의회 의장 등을 지냈으나 반유대주의에 반발하여 은퇴했다. -
폴란드의 공산주의자 -
볼레스와프 비에루트
폴란드의 공산주의 정치인 볼레스와프 비에루트는 폴란드 사회당과 공산당에서 활동하며 혁명에 기여하고, 제2차 세계 대전 후 폴란드 공산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대통령과 총리를 역임하면서 폴란드를 소련의 영향력 아래 두고 스탈린주의적 정책을 시행했다. -
폴란드의 공산주의자 -
펠릭스 제르진스키
펠릭스 제르진스키는 볼셰비키 혁명에 기여하고 비밀경찰 체카를 창설하여 적색 테러를 자행하며 공포 통치를 펼쳤으며, 소련 정부의 요직을 역임했으나 냉전 종식 후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
2. 어린 시절
1923년 7월 6일 폴란드 루블린주 쿠루프의 상류층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에 참전했다. 바르샤바 근처 로마 가톨릭교회 계통 기숙 학교에서 교육받았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가족과 함께 리투아니아로 피신했으나, 소련에 병합되면서 시베리아로 강제 이주당했다. 시베리아에서 강제 노동 중 눈 맹(눈 맹)에 걸려 눈과 허리에 영구적인 손상을 입었다. 이로 인해 평생 어두운 선글라스를 착용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1942년 이질로 사망했고, 어머니와 여동생은 전쟁에서 살아남았다.
3. 군사 경력
1943년 모스크바에서 남쪽으로 100마일 떨어진 랴잔에 있는 소련 후원 폴란드 육군 사관 학교에서 수학했다. 졸업 후 제1 폴란드 육군에 입대하여 소련군의 베를린 침공에 참가했다.
1945년과 1947년 사이에는 폴란드에서 반공 지하 운동을 진압하는 데 참여하여 전투 경험을 쌓았다. 1947년 고등 보병 학교와 1948년부터 1951년까지 바르샤바 참모 학교에서 수학했다. 1947년 폴란드 공산당(이듬해 폴란드 연합노동자당으로 개칭)에 입당했다.
1956년 폴란드 육군 최연소 준장이 되었고, 1년 후 제12 동력 사단의 사령관이 되어 1960년까지 복무했다. 이후 육군의 주요 정치 행정부 우두머리(1960년 ~ 1965년)로 옮겨졌다. 1962년부터 1968년까지 국방부 차관, 1965년부터 1968년까지 참모총장을 역임했다. 1968년 국방부 장관이 되었다.
1968년 8월, 야루젤스키는 국방장관으로서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도록 명령하여 1968년 11월 11일까지 체코슬로바키아 북부를 군사 점령했다.
다음은 야루젤스키의 군사 경력을 나타낸 표이다.
| 날짜 | 내용 |
|---|---|
| 1943년 12월 16일 | 소위보(少尉補) |
| 1944년 11월 11일 | 소위(少尉) |
| 1945년 4월 25일 | 중위(中尉) |
| 1946년 7월 22일 | 대위(大尉) |
| 1948년 7월 10일 | 소좌(少佐) |
| 1949년 1월 25일 | 중좌(中佐) |
| 1953년 12월 31일 | 대좌(大佐) |
| 1956년 7월 14일 | 소장(少将) |
| 1960년 7월 13일 | 폴란드군 정치총국장, 중장(中将) |
| 1965년 | 폴란드군 참모총장 |
| 1968년 | 대장(大将) |
| 1973년 | 상급대장(上級大将) |
폴란드 최고 군사훈장인 "비르투티 밀리타리"(Virtuti Militari) 훈장을 수훈했다.
4. 정치 경력
야루젤스키는 1947년부터 폴란드 노동당(1948년부터 폴란드 통일 노동자당) 당원이었다. 상급보병학교와 K. 스베르체프스키 명칭 참모본부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1957년 제12기계화사단장을 역임했다. 1960년 군 정치총국장, 1965년 군 참모총장, 1962년 국방차관, 1968년 4월부터 1983년 11월까지 국방장관을 역임했다.
1964년 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중앙위원회 위원, 1970년 정치국 위원이 되었다. 1968년 바르샤바 조약 기구 군대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폴란드군이 참여하도록 허용하였다.
1980년 7월, 그단스크에서 육류 가격 인상을 계기로 파업이 발생하자, 레흐 바웬사는 자주 관리 노동조합 「소리다르노시치」(연대)를 조직하고 위원장에 취임했다. 민주화 요구가 높아지는 가운데, 야루젤스키는 1981년 2월 총리에 취임했고, 같은 해 10월부터 당 제1서기를 겸임했다.
4.1. 계엄령 선포와 자유 노조 탄압
1980년 8월 자유 노조 '연대'의 탄생은 폴란드에서 정치적 위기를 심화시켰고, 공산당 통치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을 야기했다. 1981년 2월 총리가 되고, 그해 10월 당서기장을 겸임한 야루젤스키는 자유 노조와의 대화와 위협을 병행하는 정책을 펼쳤다. 11월 레흐 바웬사와 가톨릭 대주교 요제프 클렘프와의 회담을 통해 협정을 모색했지만, 자유 노조를 배제하고 당의 통치를 재확립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결국 야루젤스키는 12월 13일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 결정에 대해 그는 소련의 개입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주장했지만, 민주화 운동을 탄압한 반민주적 행위였다는 비판도 동시에 받았다. 하룻밤 사이에 자유 노조는 분쇄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체포, 구금되었다. 계엄령에 대한 항의 시위는 군대와 준군사 부대에 의해 폭력적으로 진압되었으며, 특히 우예크 평정 사건에서는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9명이 사망하고 21명이 부상당했다. 계엄령 기간 동안의 총 사망자 수는 91명으로 추산된다.
이후 몇 년 동안 그의 정부와 내부 보안군은 수천 명의 언론인과 반대파 활동가들을 기소 없이 검열하고 박해하고 투옥했다. 사회 경제적 위기는 1970년대 후반보다 더 심화되었고 설탕, 우유, 고기와 같은 기본 식품과 휘발유, 소비재와 같은 물자의 배급이 계속되는 동안 인구의 중간 소득은 최대 10% 감소했다. 1981년부터 1989년까지 야루젤스키 통치 기간 동안 10만 명에서 30만 명의 사람들이 폴란드를 떠났다.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의 경제 제재에도 불구하고, 계엄령은 반대 세력을 억압하고 사기를 꺾는 데 성공하여 1980년대 후반까지 연대 운동을 주변화시켰다. 1982년 말 시위가 감소함에 따라 계엄령은 그 해 12월 31일에 해제되었고, 1983년 7월 22일에 공식적으로 해제되었다.
1983년 2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폴란드를 방문했을 때, 야루젤스키에게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실현하도록 강력히 촉구했다. 야루젤스키는 나중에 교황과의 면담이 이후의 방향 전환의 큰 계기가 되었다고 회고했다.
4.2. 민주화 이행 과정
고르바초프의 등장과 표준화 정책의 실패는 야루젤스키의 경력에 큰 전환점을 가져왔다. 정권의 권위가 약화되고 소련이 폴란드의 국내 문제에 대한 개입을 포기하면서, 야루젤스키는 야당과의 화해를 모색했다. 1988년 후반, 야당과의 예비 접촉을 시작하여 공식적인 대화를 위한 길을 열었다. 1989년 1월, 자유 노조가 다시 합법화되었고, 4월에는 자유 선거를 위한 역사적인 원탁 협정에 도달했다. 6월 비밀 투표에서 자유 노조는 압승을 거두었고, 공산당은 참패했다.
원탁 협정에 따라 폴란드 대통령직이 강화되었고, 1989년 6월 4일 야루젤스키는 국회에서 단 한 표 차이로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원탁 협정은 폴란드와 동유럽에서 빠른 정치적 변화를 가져왔다. 8월에는 타데우시 마조비에츠키가 2차 대전 이후 폴란드 최초의 비공산당 총리가 되면서, 공산당 통치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민주적 개혁을 지지하던 레흐 바웬사는 원탁 협정의 폐지와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했다. 야루젤스키는 1990년 11월에 선거를 실시하기로 했다. 바웬사가 대통령 후보로 나서자, 야루젤스키는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5. 이후의 세월
1996년 11월 폴란드 국회는 야루젤스키가 계엄령을 선포한 것에 대해 그를 고발하지 않기로 투표하였다. 의견 투표에서 폴란드 국민의 54%가 그의 결정에 동의하였다.
2010년부터 폐렴으로 투병해 온 그는 2014년 5월 25일에 92세의 나이로 바르샤바의 병원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시신은 화장되어 바르샤바의 포봉즈키 군사 묘지에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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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평가
야루젤스키는 계엄령을 선포하여 민주화 운동을 탄압한 독재자라는 비판을 받는다. 계엄령 기간 중 민주화를 요구하는 폴란드인들을 탄압했지만, 교회에 피신한 시위대에 대해서는 탄압하지 않았다. 열렬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1983년 2월, 폴란드 출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만나면서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실현하도록 촉구받았고, 이는 이후 그의 방향 전환에 큰 계기가 되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당시 폴란드의 국제 정치 환경을 고려해야 한다는 긍정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1980년대 초 이전 소련의 위성국이었던 동유럽 국가들이 소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 할 때, 소련은 헝가리 혁명, 프라하의 봄과 같이 군사 침공을 감행한 사례가 있었다. 계엄령을 선포하지 않았다면 소련이 제한 주권론(브레즈네프 독트린)에 따라 폴란드에 군사 침공을 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실제로 소련으로부터 최후 통첩을 받았고, 폴란드가 붕괴될 것이라는 위기감 속에 계엄령을 결단했다고 여겨진다.
"쿠쿠린스키 문서"에 따르면, 당시 정부 내부에서는 민주화 운동이 과격해져 수습 불가능한 상태가 되면 "최후의 수단"으로 소련 및 기타 바르샤바 조약 기구군의 수용을 요청하는 방안도 검토되었다. 그러나 당시 폴란드는 소련과의 물물교환으로 국민의 생명을 유지하고 있었고, 무정부 상태가 되면 국민 대다수가 아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동구권 군대의 수용은 "최후의 수단"으로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는 의견도 있다.
야루젤스키는 "계엄령 선포는 (소련의 개입이라는 상황에 비하면) 더 작은 악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정부와 대립했던 아담 미흐니크는 야루젤스키의 입장을 지지했다.
야루젤스키가 곤경을 자처하여 "헝가리 혁명"이나 "프라하의 봄"과 같은 비극을 막았다는 평가도 있다. 폴란드 민주화 운동이 과격화되었다면 평화적인 정권 교체가 어려웠을 것이고, 루마니아 혁명이나 유고슬라비아와 같은 내전에 빠질 우려도 있었다. 당시 대립했던 레흐 바웬사는 "야루젤스키를 재판하는 것은 잘못이다"라고 주장하며, "야루젤스키에 대한 평가는 후세 역사가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고 말했다.
동유럽 혁명에서 바웬사에게 주역 자리를 양보했지만, 야루젤스키 자신도 혁명적 정치가로서 동유럽 혁명의 주역 중 한 명이었다. 말년에는 바웬사와 친분을 쌓아 부부가 함께 식사할 정도로 가까워졌고, 옛 민주화 운동 파티에 초대받기도 했다. 야루젤스키가 건강을 해치자 바웬사가 문병을 오는 일도 잦았다.
8. 저서
* 《현명하게 다르기》(To Differ Wisely; 1999)
* "아마도 최후의 변론일 것이다 (법정에서 제출된 설명)"(It may be the last word (explanations given in the Court); 2008)
* ポーランドを生きる일본어 가와데쇼보신샤(河出書房新社), 구도 유키오(工藤幸雄) 역. ISBN 4309222560
* 변견용(辺見庸) 저, もの食う人びと일본어 교도통신사(共同通信社). ISBN 4043417012 - 르포르타주(ルポルタージュ) 모음. "패배자의 맛" 장은 대통령 퇴임 후 야루젤스키에 대한 인터뷰를 바탕으로 집필되었다.
* 리카르도 오리치오(Riccardo Orioles) 저, 独裁者たちの言い分 トーク・オブ・ザ・デビル일본어 송덕희 역, 백산서당(柏書房), 2003년. ISBN 47601240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