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니 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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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니 존슨은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에서 태어난 미국의 블루스 및 재즈 기타리스트, 보컬리스트, 작곡가이다. 1925년 Okeh Records와 계약을 맺고,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에 재즈 뮤지션들과 협연하며 인기를 얻었다. 1948년 "Tomorrow Night"로 리듬 앤 블루스 차트 1위를 기록했으며, 1950년대에는 영국 투어를 진행했다. 밥 딜런 등 많은 음악가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1970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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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니 존슨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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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명 | 알론조 존슨 |
| 출생 | 1899년 2월 8일, 미국,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 |
| 사망 | 1970년 6월 16일, 캐나다, 토론토 |
| 직업 | 음악가 |
| 악기 | 기타, 바이올린, 보컬 |
| 장르 | 재즈, 블루스 |
| 활동 기간 | 알 수 없음 |
| 레이블 | Okeh Bluebird King Bluesville |
2. 생애
로니 존슨은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의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기타를 비롯한 여러 악기를 다루었다.[5] 1918년 인플루엔자 유행으로 가족 대부분을 잃는 비극을 겪은 후,[6]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로 이주하여 음악 활동을 이어갔다.
1925년 블루스 경연 대회 우승을 계기로 Okeh 레코드와 계약하며 전성기를 맞이했다.[10] 그는 블루스와 재즈를 넘나들며 수많은 곡을 녹음했고, 루이 암스트롱, 듀크 엘링턴, 베시 스미스, 에디 랭 등 당대 최고의 음악가들과 협연했다. 특히 기타 솔로 연주 분야를 개척하여 후대 기타리스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3] 그의 음악은 뛰어난 기교뿐만 아니라 도시 흑인들의 삶과 사랑의 복잡한 감정을 섬세하게 담아낸 가사로도 주목받았다.[7]
대공황 시기에는 잠시 음악 외의 일을 하기도 했으나,[7] 1930년대 후반 데카 레코드, 블루버드 레코드와 계약하며 활동을 재개했고, 이 시기 일렉트릭 기타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리듬 앤 블루스로 전향하여 킹 레코드에서 "내일 밤"과 같은 히트곡을 발표했다.[15]
1950년대 음악 활동이 잠시 중단되었으나, 1959년 디스크 자키 크리스 앨버트슨에게 발견되어 포크 리바이벌 붐과 함께 재조명받았다. 이후 블루스빌 레코드 등에서 앨범을 발표하고 활발히 공연 활동을 펼쳤다. 1960년대 중반 캐나다 토론토로 이주하여 활동을 이어갔으나,[17] 1969년 교통사고로 심각한 부상을 입고 건강이 악화되었다.[18] 그는 1970년 6월 16일 세상을 떠났다.[17][21]
2. 1. 초기 생애 (1889년?~1920년대 초)
존슨은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에서 태어나 음악가 집안에서 성장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바이올린, 피아노, 기타를 배웠고 만돌린을 포함한 다양한 악기를 다루었지만, 전문적인 활동은 주로 기타 연주에 집중했다. 그는 "우리 주변에는 항상 음악이 있었고, 우리 가족에서는 양철 깡통을 두드리는 것일지라도 무언가를 연주해야 했다"라고 회상했다.[5]1917년, 존슨은 잉글랜드를 순회하는 레뷰에 합류했다. 1919년 미국으로 돌아왔을 때, 형제 제임스를 제외한 가족 모두가 1918년 인플루엔자 유행으로 세상을 떠난 비극적인 소식을 접했다.[6]
1921년, 그는 형제와 함께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 정착하여 듀오로 공연 활동을 시작했다. 또한 강 배에서 연주자로 일했으며, 찰리 크리에스가 이끄는 오케스트라에서도 활동했다. 재즈 음악가 페이트 마라블과는 친분이 있었지만 함께 연주하지는 않았다.
2. 2. 전성기 (1920년대 중반~1930년대)
1925년, 존슨은 세인트루이스의 부커 T. 워싱턴 극장에서 열린 블루스 경연 대회에서 우승하여 Okeh Records와 음반 계약을 맺었다.[10] 그는 1925년부터 1932년까지 Okeh에서 약 130곡을 녹음하며 큰 인기를 얻었고, 레이블의 대표적인 아티스트 중 한 명이 되었다. 이 시기 그는 뉴욕으로 초청되어 당대 최고의 블루스 가수 중 한 명인 빅토리아 스파이비와 컨트리 블루스 가수 알제 "텍사스" 알렉산더 등과 함께 녹음했다. 또한 극장 소유주 예약 협회(TOBA)의 최고 인기 스타였던 베시 스미스와 함께 순회공연을 하기도 했다.
Okeh 레코드는 광고에 루이 암스트롱과 존슨의 이미지를 함께 사용하며 그의 인기를 활용했다.[11] 1927년 12월, 존슨은 시카고에서 루이 암스트롱 앤 히즈 핫 파이브의 게스트 아티스트로 참여하여 "I'm Not Rough", "Savoy Blues", "Hotter Than That" 등의 곡을 녹음했다. 특히 "Hotter Than That"은 다중 박자, 스캣, 대화 형식, 집단 즉흥 연주 등 뉴올리언스 재즈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곡으로 평가받는다.[12] 존슨은 당시 드물게 여러 Okeh 재즈 그룹의 녹음 세션에 참여하도록 초청받았다. 1928년에는 듀크 엘링턴과 함께 "Hot and Bothered", "Move Over", "The Mooche"를 녹음했으며, 맥키니의 코튼 피커스 멤버들이 참여한 초콜릿 댄디스 그룹과도 협연했다.
존슨은 1927년 발표된 "6/88 Glide"에서 기타 솔로 연주를 선보이며 이 분야를 개척했으며, 초기 녹음에서는 12현 기타 솔로를 연주하기도 했다. 그의 연주는 조지 반스, 찰리 크리스찬, 장고 라인하르트와 같은 후대의 재즈 기타리스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쳐 기타라는 악기에 재즈적인 표현 가능성을 부여했다. 그는 기악 연주에서도 뛰어난 실력을 보였으며, 1929년에는 백인 재즈 기타리스트 에디 랭과 함께 여러 기악곡을 녹음했다.
존슨의 음악은 실험적인 즉흥 연주를 특징으로 하며, 오늘날에는 재즈보다는 블루스로 분류되는 경우가 많다. 블루스 역사가 제라르 에르자프트는 존슨을 "재즈, 블루스, 컨트리, 록의 표준이 된, 피크를 사용하여 음 하나하나를 연주하는 기타 솔로의 창시자"라고 평가했다.[3] 그의 스타일은 델타 블루스 연주자들과 도시 블루스 연주자들 모두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이들은 존슨의 단음 솔로를 받아들여 현대적인 일렉트릭 블루스 스타일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작가 엘리야 월드는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존슨이 기타 연주자보다는 세련된 가수로 더 널리 알려졌다고 지적하며, 당시 그의 음반 광고에서는 기타 연주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었다고 주장했다.[13]
존슨의 자작곡 가사는 당시 도시 흑인들이 처한 사회적 현실을 반영하는 경우가 많았다("Racketeers' Blues", "Hard Times Ain't Gone Nowhere", "Fine Booze and Heavy Dues").[7] 또한 그의 사랑 노래는 틴 팬 앨리 풍의 단순한 감상주의를 넘어 남녀 관계의 복잡한 감정을 섬세하게 묘사했다.[7] 그의 노래들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능력을 보여주었는데, 존슨 자신은 이것이 블루스의 본질이라고 생각했다.
1929년 베시 스미스와의 투어를 마친 후, 존슨은 시카고로 이주하여 스트라이드 피아니스트 제임스 P. 존슨과 함께 Okeh에서 녹음했다. 그러나 대공황의 여파로 음반 산업이 침체되면서 음악 외적인 일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고, 한때 일리노이주 피오리아의 제철소에서 일하기도 했다.[7] 1932년에는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로 이주하여 약 10년간 거주하며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가수 풋니 댄드리지의 밴드와 간헐적으로 연주했다.
1930년대 후반, 존슨은 데카 레코드와 계약하고 시카고에서 루즈벨트 사이크스, 블라인드 존 데이비스 등과 함께 녹음 및 공연 활동을 재개했다. 1939년에는 블루버드 레코드에서 피아니스트 조슈아 알테이머와 함께한 세션에서 처음으로 일렉트릭 기타를 사용했다. 이후 5년간 그는 블루버드에서 "He's a Jelly Roll Baker"[14], "In Love Again" 등을 포함하여 총 34개의 트랙을 녹음했다.
2. 3. 후기 (1940년대~1970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존슨은 리듬 앤 블루스로 전향하여, 신시내티의 킹 레코드에서 음반을 녹음했다. 그는 샘 코슬로우와 빌헬름 그로스가 작사한 곡 "내일 밤"으로 1948년에 큰 히트를 기록했다. 이 곡은 ''빌보드'' 레이스 레코드 차트에서 7주 동안 1위를 차지했고, 팝 차트에서도 19위에 올랐으며, 3백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다.[15] 피아노 반주와 배경 보컬이 있는 블루스 발라드 스타일의 이 곡은 존슨의 이전 블루스 및 재즈 음악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이후 발표한 "Pleasing You", "So Tired", "Confused" 역시 R&B 히트곡이 되었다.
1952년 존슨은 영국 투어를 했다.[15] 이 투어에 함께 참여했던 영국 음악가 토니 도네간은 존슨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자신의 예명을 로니 도네간으로 바꾸었다. 하지만 존슨의 영국 공연은 투어 기획상의 문제 등으로 인해 현지 청중에게 큰 호응을 얻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16]
미국으로 돌아온 존슨은 필라델피아로 이주하여 제강소 노동자나 청소부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1959년, 필라델피아의 벤자민 프랭클린 호텔에서 일하던 중, WHAT-FM의 디스크 자키 크리스 앨버트슨에게 발견되었다. 앨버트슨은 존슨을 블루스빌 레코드와 연결하여 앨범 ''로니 존슨의 블루스''를 제작했다. 이후 몇 장의 프레스티지 앨범이 더 발매되었는데, 그중 하나인 ''블루스와 발라드''는 앨버트슨이 존슨을 찾는 데 도움을 주었던 엘머 스노든과 함께 작업한 앨범이었다. 스노든은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의 전신인 워싱토니언스의 초대 밴드 리더였다. 이 재발견을 계기로 존슨은 시카고의 플레이보이 클럽 등에서 공연하며 음악계에 복귀했다. 이는 마침 젊은 관객들이 포크 음악에 관심을 보이고 많은 베테랑 연주자들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시기와 맞물려 시기적으로도 좋은 기회였다. 존슨은 듀크 엘링턴과 재회하여 올스타 포크 콘서트에 게스트로 출연하기도 했다.
1961년에는 과거 OKeh 레코드 시절 파트너였던 빅토리아 스피비와 재회하여 프레스티지 앨범 ''Idle Hours''를 녹음했고, 두 사람은 뉴욕의 거데스 포크 시티에서 함께 공연했다. 1963년에는 머디 워터스 등 다른 블루스 뮤지션들과 함께 아메리칸 포크 블루스 페스티벌의 일환으로 유럽 투어를 했으며,[15] 덴마크에서는 오티스 스팬과 함께 앨범을 녹음하기도 했다.
1965년 5월, 존슨은 토론토의 한 클럽에서 단 4명의 관객 앞에서 공연했다.[17] 그러나 2주 후 다른 클럽에서의 공연은 더 많은 관객을 모았고, 토론토의 비교적 자유로운 인종적 분위기에 매력을 느낀 존슨은 그곳으로 이주하기로 결정했다. 1966년, 그는 토론토 요크빌 애비뉴에 자신의 클럽 'Home of the Blues'를 열었지만, 사업은 성공하지 못했고 결국 클럽의 새 소유주에게 해고당했다.[17] 이후 10년 동안 그는 음반 녹음과 캐나다 클럽 연주, 지역 투어 활동을 이어갔다.
1969년 3월, 존슨은 토론토에서 길을 걷던 중 자동차에 치이는 사고를 당해 엉덩이뼈 골절과 신장 부상 등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18] 그의 치료를 돕기 위해 1969년 5월 4일에는 이안 & 실비아, 존 리 후커, 해구드 하디 등 20여 팀이 참여하는 자선 콘서트가 열렸다.[19] 존슨은 사고 후유증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으며, 뇌졸중으로 추정되는 증상을 겪었다. 그는 1970년 2월 23일 토론토 매시 홀에서 열린 공연에 지팡이를 짚고 무대에 올라 버디 가이와 몇 곡을 함께 연주하며 마지막 공연을 가졌고, 관객들로부터 기립 박수를 받았다.[20]
로니 존슨은 1970년 6월 16일에 사망했다. 그의 친구들과 동료 음악가들은 토론토의 마운트 호프 묘지에서 장례식을 치렀으나, 그의 가족들은 시신을 필라델피아로 옮겨 매장하기를 원했다.[17][21] 사망 당시 그는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태였다.[17] 묘비 없이 방치되었던 그의 무덤에는 2014년경, 블루스 음악가들의 묘비를 세워주는 비영리 단체인 킬러 블루스 헤드스톤 프로젝트에 의해 묘비가 세워졌다.[22]
사후인 1993년, 스미소니언 포크웨이즈는 존슨의 포크웨이즈 레코드 녹음들을 모은 앤솔로지 앨범 ''The Complete Folkways Recordings''를 발매했다. 그는 생전에 포크웨이즈의 여러 컴필레이션 앨범에 참여했지만, 해당 레이블에서 단독 앨범을 발매한 적은 없었다.
3. 음악 스타일 및 영향
로니 존슨은 기타 연주, 특히 피크를 이용해 한 음 한 음 연주하는 단음 솔로 스타일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3] 그의 초기 녹음들은 스트링 벤딩과 비브라토를 활용한 최초의 기타 녹음 중 하나이며,[3] 이는 이후 재즈, 블루스, 컨트리, 록 기타 솔로의 표준적인 연주 방식이 되었다.[3] 그는 초기 녹음에서 12현 기타 솔로를 선보였고, 1939년에는 일렉트릭 기타를 녹음에 사용한 초기 음악가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존슨의 혁신적인 기타 스타일은 수많은 후배 음악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재즈 기타 분야에서는 조지 반스, 찰리 크리스찬, 그리고 특히 장고 라인하르트와 같은 연주자들이 그의 영향을 받아 기타라는 악기에 새로운 가능성을 부여했다. 블루스 영역에서는 델타 블루스 연주자들과 도시 블루스 연주자들이 그의 단음 솔로 스타일을 받아들여 발전시켰으며,[3] T-본 워커를 비롯한 거의 모든 일렉트릭 블루스 기타리스트들의 연주에서 그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영국의 스키플 음악가 로니 도네간은 존슨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바꿀 정도였다.[15]
그의 영향력은 블루스와 재즈를 넘어 다른 장르에도 미쳤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존슨의 히트곡 "내일 밤(Tomorrow Night)"을 커버하면서 존슨의 보컬 프레이징을 모방했으며, 프레슬리 특유의 비브라토와 바리톤 사운드 형성 과정에서 존슨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밥 딜런 역시 로니 존슨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고 직접 밝힌 바 있다.[23]
단순히 연주 기법뿐만 아니라, 존슨의 작곡과 가사 역시 주목할 만하다. 그의 곡들은 "Racketeers' Blues", "Hard Times Ain't Gone Nowhere"처럼 당시 도시 흑인들이 처한 사회적 현실을 담아내거나,[7] 남녀 관계의 복잡한 감정을 섬세하게 포착했다.[7] 그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을 자신의 블루스의 핵심으로 여겼다.
3. 1. 로버트 존슨과의 관계
밥 딜런은 자신의 앨범 ''바이오그래프''의 라이너 노트와 자서전 ''연대기, 1권''을 통해 로니 존슨과의 만남과 그에게 받은 음악적 영향에 대해 언급했다.[23] 특히 딜런은 로버트 존슨이 로니 존슨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고 지적하며, 로버트 존슨의 "Malted Milk"와 같은 일부 곡들은 로니 존슨이 녹음한 곡을 새롭게 해석한 버전으로 여겨진다고 덧붙였다.[23]4. 음반 목록
(내용 없음 - 하위 섹션에서 상세 정보 제공)
4. 1. 리더로서의 앨범
| 앨범 제목 | 레이블 | 발매 연도 |
|---|---|---|
| 고독한 길 (Lonesome Road) | King | 1958 |
| 로니 존슨의 블루스 (Blues by Lonnie Johnson) | Prestige Bluesville | 1960 |
| 블루스와 발라드 (Blues & Ballads) | Prestige Bluesville | 1960 |
| 잃어가는 게임 (Losing Game) | Prestige Bluesville | 1961 |
| 울고 싶은 또 다른 밤 (Another Night to Cry) | Prestige Bluesville | 1962 |
| 한가한 시간들 (Idle Hours) | Prestige Bluesville | 1962 |
| 스윙하는 블루스 (Swingin' the Blues) | Xtra | 1966 |
| 에디 랭 & 로니 존슨 1권 (Eddie Lang & Lonnie Johnson Vol. 1) | Swaggie | 1967 |
| 에디 랭 & 로니 존슨 2권 (Eddie Lang & Lonnie Johnson Vol. 2) | Swaggie | 1970 |
| 미스터 트러블 (Mr. Trouble) | Folkways | 1982 |
| 더 이상 눈물이 떨어지지 않아 (Tears Don't Fall No More) | Folkways | 1982 |
| 블루스, 발라드, 그리고 점핑 재즈 2권 (Blues, Ballads, and Jumpin' Jazz Vol. 2) | Prestige Bluesville | 1990 |
| 잊혀진 블루스 전설 (The Unsung Blues Legend) | Blues Magnet | 2000 |
4. 2. 사이드맨으로서의 앨범
- 빅토리아 스피비, Woman Blues (프레스티지 블루스빌, 1962)
- 빅토리아 스피비, The Queen and Her Knights (스피비, 1965)
5. 참고 문헌
- 사이먼, 줄리아. 『불편한 로니 존슨: 블루스, 인종, 정체성』. 펜실베이니아 주립 대학교 출판부, 202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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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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