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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켈리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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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스켈리누스는 프랑스 출신의 중세 철학자로, 유명론적 사상을 주장하며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을 제시했다. 그는 삼위일체의 세 위격을 세 개의 실체로 보는 것이 관례일 뿐이라고 주장하여, 수아송 공의회에서 삼신론으로 정죄받고 파문당했다. 이후 영국으로 망명했으나, 안셀무스를 공격하여 실패하고 로마에서 가톨릭 교회와 화해한 후 프랑스로 돌아와 활동하다가, 아벨라르의 삼위일체론에 반대하는 글을 마지막으로 생애를 마쳤다. 로스켈리누스는 보편자가 단어에 불과하다는 유명론적 입장을 통해 중세 철학의 보편자 논쟁에 영향을 미쳤으며, 안셀무스와 아벨라르에게 비판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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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켈리누스
기본 정보
이름로스켈리누스 콤펜디엔시스
출생1050년경
사망1120년경 또는 1121년경
활동 분야신학자, 철학자
학문적 배경
영향피에르 아벨라르
관심사논리학, 인식론
사상
주요 아이디어보편 논쟁에서 유명론적 입장 옹호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독자적 해석 제시
비판삼위일체에 대한 견해가 정통 교리와 충돌한다는 비판 받음
기타
출신지콩피에뉴

2. 생애

프랑스 콩피에뉴에서 태어난 로스켈리누스는 그의 생애에 대해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그의 사상은 주로 안셀무스와 아벨라르의 저술을 통해 전해진다.[1] 그는 수아송랭스에서 공부했고, 샤르트르 대성당에 봉직했으며 콩피에뉴의 교구회원이 되었다. 1087년 초부터 콩피에뉴의 수도사로서 가르쳤으며, 랑프랑, 안셀무스, 샤르트르의 이보와 교류했다.

로스켈리누스는 유명론적 사상을 삼위일체 교리에 적용하면서, 삼위일체의 세 위격이 각각 독립적인 실체라고 주장하여 널리 주목받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랑프랑과 안셀무스를 인용했다.

1092년/1093년, 랭스 대주교가 소집한 수아송 공의회는 그의 해석을 삼신론으로 정죄했고, 파문과 대중에 의한 돌로 치는 형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주장을 철회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나중에 다시 자신의 주장을 고백했다.

파문과 대중의 비난을 피해 영국으로 망명했으나, 안셀무스를 공격하면서 인기를 얻지 못했다. 이후 로마로 간 그는 가톨릭 교회와 화해하고 프랑스로 돌아와 투르로슈(아벨라르가 그의 제자였던 곳)에서 가르쳤으며, 베장송의 교구회원이 되었다. 1121년경 아벨라르의 삼위일체론에 반대하는 글을 쓴 것이 마지막으로 알려진 그의 활동이다.

그의 저술 중에는 삼위일체에 관해 아벨라르에게 보낸 편지 한 통만이 남아 있다.[1]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콩피에뉴에서 태어난 로스켈리누스는 수아송랭스에서 교육을 받았고, 이후 샤르트르 대성당에 봉직하며 콩피에뉴의 교구회원이 되었다.[1] 그는 1087년경부터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랑프랑, 안셀무스, 샤르트르의 이보 등 당대의 주요 신학자들과 교류했다.

2. 2. 삼위일체 논쟁과 수아송 공의회

로스켈리누스는 삼위일체의 세 위격이 각각 독립적인 실체라고 주장했으며, 만약 세 위격이 하나의 실체라면 성부성령성자와 함께 성육신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그가 유명론적 사상을 삼위일체 교리에 적용하면서 널리 주목받게 되었다.[1]

그는 삼위일체의 세 위격이 세 가지 실체 또는 신으로 언급되는 것은 관례일 뿐이며, 만약 그들이 실제로 하나의 실체라면 성부와 성령이 성자와 함께 강생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랑프랑과 안셀무스를 인용했다.

1092년/1093년, 랭스 대주교가 소집한 수아송 공의회는 로스켈리누스의 해석을 삼신론으로 정죄했다. 로스켈리누스는 파문과 대중에 의한 돌로 치는 형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주장을 철회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나중에 다시 자신의 주장을 고백했다.

로스켈리누스는 세 위격을 세 천사처럼 서로 독립적인 존재로 간주했다. 그는 용어가 허락한다면, 세 신이 있다고 진실로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렇지 않다면,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과 함께 성육신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교리의 외양을 유지하기 위해 그는 세 위격은 하나의 뜻과 능력만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했다.

2. 3. 망명과 복귀

로스켈리누스는 파문과 대중의 비난을 피해 영국으로 망명했으나, 안셀무스를 공격하면서 인기를 얻지 못했다.[1] 로마로 간 그는 가톨릭 교회와 화해하고 프랑스로 돌아와 투르로슈(아벨라르가 그의 제자였던 곳)에서 가르쳤으며, 베장송의 교구회원이 되었다. 1121년경 아벨라르의 삼위일체론에 반대하는 글을 쓴 것이 마지막으로 알려진 그의 활동이다.[1]

3. 유명론 (Nominalism)

프라이징의 오토(오토)는 로스켈리누스를 "우리 시대에 처음으로 술어 이론을 제창했다"고 기록했지만,[3] 그 이전에도 "요하네스 선생"이라는 인물이 유사한 주장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4]

로스켈리누스는 보편자는 단순히 소리의 발산('''flatus vocisla''')일 뿐이라고 보았다.[8] 그는 중세 실재론에 도전한 최초의 중세 철학자라는 위치 때문에, 근대의 선구자로 언급되기도 한다.[9]

안셀무스와 아벨라르는 로스켈리누스를 전체와 복합적 실체에 대한 모호한 개념 때문에 비판했다.[10]

로스켈리누스의 지지자로는 그의 동시대인 릴의 라임베르트(Raimbert of Lille)가 있었고, 투르네의 헤리만(Hériman of Tournai) 수도사가 그의 교리에 대해 전하는 내용은 콩피에뉴의 선생의 진술과 일치한다. 헤리만은 보편적 실체는 단지 숨결에 불과하다고 말했다.[12] 그는 안셀무스의 말에 대해 농담조로 논평하며,[13] 릴의 라임베르트의 바람 같은 수다를 이해하려면 손에다 숨을 불어넣기만 하면 된다고 말했다.[14]

3. 1. 보편 논쟁과 반실재론

로스켈리누스는 중세 철학의 핵심 논쟁이었던 보편자 문제에서 반실재론적 입장을 취하였다. 그는 보편자(예: 인간성, 아름다움)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개별적인 사물들에 붙여진 이름(vocesla)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7] 그는 보편자는 단순히 소리의 발산(''flatus vocisla'')일 뿐이라고 보았다.[8]

프라이징의 오토(오토)에 따르면, 로스켈리누스는 "우리 시대에 처음으로 술어 이론을 제창했다"고 한다.[3]

로스켈리누스는 속(類)과 종(種)의 철학적 개념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때로는 유사 명목론자 또는 온건 실재론자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중세 실재론에 도전한 최초의 중세 철학자라는 그의 위치 때문에, 그는 근대의 선구자로 언급되기도 한다.[9]

안셀무스와 아벨라르는 로스켈리누스를 전체와 복합적 실체에 대한 모호한 개념 때문에 비판했다. 안셀무스에 따르면, 로스켈리누스는 색깔이 그것을 지지하는 말 이외에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영혼의 지혜는 지혜로운 영혼 외부에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10] 안셀무스는 로스켈리누스가 집이나 사람과 같은 전체의 부분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부정하고, 단어만이 부분을 갖는다고 주장한다고 논증한다.[11]

로스켈리누스에게는 지지자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중에는 그의 동시대인 릴의 라임베르트(Raimbert of Lille)가 있었고, 투르네의 헤리만(Hériman of Tournai) 수도사가 그의 교리에 대해 전하는 내용은 콩피에뉴의 선생의 진술과 일치한다. 헤리만은 보편적 실체는 단지 숨결에 불과하다고 말한다.[12]

3. 2. 전체와 부분에 대한 관점

로스켈리누스는 전체가 부분들의 합 이상이며 실제로 존재한다는 실재론적 관점을 비판했다. 그는 색깔이 말을 떠나 존재할 수 없고, 영혼의 지혜가 영혼 바깥에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10]

안셀무스는 로스켈리누스가 집이나 사람과 같은 전체의 부분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부정하고, 단어만이 부분을 갖는다고 주장한다고 비판했다.[11]

4. 영향 및 평가

로스켈리누스의 유명론은 당대에는 이단으로 여겨졌지만, 후대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사상은 윌리엄 오컴과 같은 후기 스콜라 철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근대 철학의 경험론적 전통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된다. 현대 철학에서도 로스켈리누스의 유명론은 인식론과 형이상학의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지고 있다.

그는 중세 실재론에 도전한 최초의 중세 철학자로 평가받으며, 보편자는 단순히 소리의 발산(flatus vocisla)일 뿐이라는 주장을 펼쳤다.[8] 이러한 주장은 당시 철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로스켈리누스는 안셀무스와 아벨라르 등 당대 철학자들에게 비판을 받기도 했다. 안셀무스는 로스켈리누스가 전체와 부분의 관계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10][11] 그러나 릴의 라임베르트(Raimbert of Lille)와 투르네의 헤리만(Hériman of Tournai)과 같은 지지자들도 있었다.[12][13][14]

4. 1. 한국 철학계의 수용

프라이징의 오토(오토)는 로스켈리누스를 "우리 시대에 처음으로 술어 이론을 제창했다"고 언급했다.[3] 그러나 "프랑스 역사"의 한 편년사가는 그보다 앞서 "요하네스 선생"을 언급했는데, 그의 정체는 아직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4]

초기 중세 철학자들은 보편자 문제(보편자 문제)에 대한 반실재론(반실재론)적 해결책 중 하나로 "술어(sententia vocum)" 이론을 제시했다. 이들은 포르피리오(포르피리오)가 제시한 이분법에 따라[5] 속(속)과 종()을 실체(resla) 또는 단어(vocesla)로 보았다. 명목론자들은 다음처럼 주장했다.

# 개체만이 존재한다(resla).[6]

# 보편자(보편자)는 단지 단어(vocesla)일 뿐이다.[7]

로스켈리누스는 보편자를 보에티우스가 정의한 대로 단순히 소리의 발산('''flatus vocisla''')으로 보았다.[8] 그는 속과 종의 철학적 개념에 대해 명확히 논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사 명목론자 또는 온건 실재론자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중세 실재론에 도전한 최초의 중세 철학자라는 점에서 그는 근대의 선구자로 언급되기도 한다.[9]

안셀무스와 아벨라르는 로스켈리누스가 전체와 복합적 실체에 대해 모호한 개념을 가졌다고 비판했다. 안셀무스는 로스켈리누스가 색깔은 그것을 지지하는 말 외에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영혼의 지혜는 지혜로운 영혼 외부에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고 비판했다.[10] 또한 안셀무스는 로스켈리누스가 집이나 사람과 같은 전체의 부분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부정하고, 단어만이 부분을 갖는다고 주장한다고 논증했다.[11]

로스켈리누스를 지지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의 동시대인 릴의 라임베르트(Raimbert of Lille)가 그중 한 명이며, 투르네의 헤리만(Hériman of Tournai) 수도사가 전하는 그의 교리는 콩피에뉴의 선생(로스켈리누스)의 진술과 일치한다. 헤리만은 보편적 실체가 단지 숨결에 불과하다고 말하며,[12] 안셀무스의 주장에 대해 농담조로 논평하며,[13] 릴의 라임베르트가 말하는 바람 같은 수다를 이해하려면 손에다 숨을 불어넣기만 하면 된다고 말한다.[14]

참조

[1] 서적 The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Simon & Schuster
[2] 간행물 Notices et extr. de quelques manuscr. lat. Paris
[3] 간행물 Gesta Friderici imp.
[4] 간행물 Recueil des hist. des Gaules et de la France Paris
[5] 문서
[6] 문서
[7] 문서
[8] 문서
[9] 논문 Medievalism as Modernism: Alfred Andersch's Nominalist Littérature engageé
[10] 문서
[11] 문서
[12] 문서
[13] 문서
[14] 문서
[15] 논문 Medievalism as Modernism: Alfred Andersch's Nominalist Littérature engage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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