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돌프스 가이타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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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돌프스 가이타르스는 1907년 셈갈리아 펜쿨레 교구에서 태어났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 라트비아에서 활동한 군인이다. 그는 소련의 라트비아 점령 이후 학교에서 해고된 후 라트비아군에서 복무했으며, 이후 무장 부대를 조직하여 소련 활동가들을 체포했다. 동부 전선에서 전투에 참여하여 여러 훈장을 받았으며, 1944년에는 금색 독일 십자 훈장을 받은 최초의 라트비아인이 되었다. 1945년 쿠르란트 포켓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1945년 3월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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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돌프스 가이타르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 |
| 이름 | 루돌프스 가이타르스 |
| 현지어 표기 | Rūdolfs Gaitars |
| 출생 | 1907년 5월 29일 |
| 출생지 | 러시아 제국 펭쿨레 교구 |
| 사망 | 1945년 3월 22일 |
| 사망지 | 오스틀란트 잔테 교구 |
| 군 복무 | |
| 소속 | 무장친위대 |
| 복무 기간 | 1942년 ~ 1945년 |
| 최종 계급 | 상급돌격지도자 |
|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
| 부대 | 제19 무장친위대 척탄병 사단 (제2 라트비아) |
| 훈장 | |
| 훈장 내역 | 철십자 훈장 1등급 철십자 훈장 2등급 보병 돌격 뱃지 독일 십자장 (금장) 근접전투 고리 (청동 및 은) 부상장 |
2. 전쟁 이전의 삶
(내용 없음)
2. 1. 출생 및 성장
가이타르스는 1907년 5월 29일 셈갈리아 펜쿨레 교구에서 태어났다. 전쟁 전에는 펜쿨레 지역 초등학교에서 학교 행정가로 일했다.2. 2. 직업
전쟁 전에는 펜쿨레 지역 초등학교에서 학교 행정가로 일했다.3.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1940년 9월 소련의 라트비아 점령 이후 학교에서 해고된 그는[1] 라트비아군에서 복무하며 준위 계급에 도달했다. 1941년 6월 14일 소련의 대규모 추방 당시 추방자 명단에 올랐으나 숲에 숨어 피신했고, 그의 가족은 시베리아로 보내졌다.
나치 독일의 소련 침공 작전인 바르바로사 작전이 1941년 6월 시작되자, 가이타르스는 펜쿨레에서 무장 부대를 조직하여 소련 활동가 체포 등의 활동을 벌였다. 1942년 5월 제19 라트갈레 경찰대대에 입대하여 동부 전선에 배치되었고, 레닌그라드 전선 인근 전투에 참여했다.
1943년 4월, 소속 대대의 잔여 병력과 함께 제2 무장 SS 여단에 편입되어 볼호프 전선에서 싸웠다. 그는 Untersturmführer 계급으로 진급했으며, 전투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철십자 훈장 1급과 2급을 수여받았다. 1944년에는 중대를 이끌고 소련 부대를 격퇴하고 군사 열차를 파괴하는 등의 전과를 올려 라트비아인 최초로 금색 독일 십자 훈장을 받았다.
독일군이 러시아에서 라트비아로 철수하던 1944년 여름과 가을 동안 전투를 계속했으며, 쿠르란트 포켓 전투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2] 회복 후 전선에 복귀했으나 1945년 3월 22일 다시 부상을 입고 투쿰스 근처 잔테의 야전 병원에서 사망했다. 그는 '다르지니' 농가 근처 묘지에 묻혔다.[3]
3. 1. 소련 점령에 대한 저항
그는 1940년 9월 소련의 라트비아 점령 이후 학교에서 해고되었다.[1] 이후 라트비아군에 복무하여 준위 계급까지 올랐다. 1941년 6월 14일 소련의 대규모 추방 당시, 가이타르스는 추방 대상자 명단에 있었으나 숲으로 숨어 피신했다. 그러나 그의 가족은 시베리아로 추방되었다.나치 독일의 소련 침공 작전인 바르바로사 작전이 1941년 6월 시작되자, 가이타르스는 펜쿨레 지역에서 무장 부대를 조직했다. 그는 아이자르기(Aizsargi, 라트비아의 전 향토 방위군)의 전 구성원들과 함께 도로에 검문소를 설치하고 소련 활동가와 정치인들을 체포했으며, 펜쿨레 교구의 사령관이 되었다.
1942년 5월, 그는 제19 라트갈레 경찰대대에 입대하여 동부 전선에 배치되었다. 그는 레닌그라드 전선 인근의 풀코보 천문대에서 벌어진 전투에 참여했으며, 이 전투에서 대대는 큰 피해를 입었다.
1943년 4월, 제19 대대의 남은 병력은 제2 라트비아 SS 보병 여단에 편입되어 볼호프 전선에 투입되었다. 가이타르스는 나치 독일의 무장친위대 계급인 Untersturmführer|운터슈투름퓌러deu(SS소위)로 진급했으며, 1943년 8월에는 철십자 훈장 2급을, 같은 해 10월에는 1급 훈장을 수여받았다.
1944년 2월, 가이타르스가 지휘하는 중대는 대대 규모의 소련 부대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했으며, 이후 자폴리에 근처에서 소련 군사 열차를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공로로 그는 1944년 5월, 라트비아인으로서는 최초로 금색 독일 십자 훈장을 받았다.
그의 중대는 나치 독일군이 러시아에서 라트비아로 철수하는 동안인 1944년 여름과 가을 내내 전투를 지속했다. 가이타르스는 쿠르란트 포켓 전투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어 1945년 1월까지 최전선에서 물러나야 했다.[2] 이후 전선에 복귀했으나 1945년 3월 22일 다시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투쿰스 근처 잔테의 야전 병원에서 부상으로 사망했다. 루돌프스 가이타르스는 '다르지니' 농가 근처의 작은 시골 묘지에 묻혔다.[3]
3. 2. 무장 부대 조직 및 활동
그는 1940년 9월 소련의 라트비아 점령 이후 학교에서 해고되었다.[1] 이후 라트비아군에서 복무하며 준위 계급까지 올랐다. 1941년 6월 14일 소련의 대규모 추방 당시, 가이타르스는 추방 대상자 명단에 포함되었으나 숲으로 숨어 피신했다. 그의 가족은 시베리아로 강제 이주되었다.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바르바로사 작전이 1941년 6월 시작되자, 가이타르스는 펜쿨레 지역에서 무장 부대를 조직했다. 그는 라트비아의 향토 방위군이었던 아이자르기의 전 구성원들과 함께 도로에 검문소를 설치하고 소련 측 활동가와 정치인들을 체포하는 활동을 벌였다. 이후 가이타르스는 펜쿨레 교구의 사령관이 되었다. 1942년 5월, 그는 제19 라트갈레 경찰대대에 입대하여 동부 전선에 배치되었다. 그는 레닌그라드 전선 인근의 풀코보 천문대에서 벌어진 전투에 참여했으며, 이 과정에서 소속 대대는 큰 피해를 입었다.
1943년 4월, 제19 대대의 남은 병력은 제2 무장 SS 여단에 편입되어 볼호프 전선으로 이동했다. 가이타르스는 SS 계급인 Untersturmführer|운터슈투름퓌러de로 진급했으며, 같은 해 8월에는 철십자 훈장 2급을, 10월에는 1급 훈장을 받았다.
1944년 2월, 가이타르스가 지휘하는 중대는 대대 규모의 소련 부대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으며, 이후 자폴리에 근처에서 소련의 군사 열차를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러한 전공으로 그는 1944년 5월, 최초의 라트비아인으로서 금색 독일 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그의 중대는 독일군이 러시아에서 라트비아로 철수하던 1944년 여름과 가을 내내 전투를 이어갔다. 가이타르스는 쿠르란트 포켓 전투 중 심각한 부상을 입어 1945년 1월까지 전선을 떠나 치료를 받아야 했다.[2] 1945년 3월 22일, 그는 다시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결국 투쿰스 근처 잔테의 야전 병원에서 부상으로 사망했다. 루돌프스 가이타르스는 '다르지니' 농가 인근의 작은 시골 묘지에 묻혔다.[3]
3. 3. 동부 전선 참전
그는 1940년 9월 소련의 라트비아 점령 이후 학교에서 해고되었다.[1] 이후 라트비아군에서 복무하며 준위 계급에 도달했다. 1941년 6월 14일 소련의 대규모 추방 당시 가이타르스는 추방자 명단에 올랐으나 숲에 숨어 피신했다. 그의 가족은 시베리아로 강제 이주되었다.독소 전쟁의 시작을 알린 바르바로사 작전이 1941년 6월 개시된 후, 가이타르스는 Penkule|펜쿨레lav 지역에서 무장 부대를 조직했다. 그는 아이자르기(Aizsargi|아이자르기lav, 라트비아의 전 향토 방위군)의 전 구성원들과 함께 도로에 검문소를 설치하고 소련 측 활동가와 정치인들을 체포하는 활동을 벌였다. 가이타르스는 펜쿨레 교구의 사령관 역할을 맡았다. 1942년 5월, 그는 제19 라트갈레 경찰대대에 입대하여 동부 전선에 배치되었다. 그는 레닌그라드 전선 인근의 풀코보 천문대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에 참여했으며, 이 과정에서 소속 대대는 큰 피해를 입었다.
1943년 4월, 제19 대대의 남은 병력은 제2 무장 SS 여단에 통합되어 볼호프 전선에 배치되었다. 가이타르스는 SS 운터슈투름퓌러(소위) 계급으로 진급했으며, 1943년 8월에는 철십자 훈장 2급을, 같은 해 10월에는 1급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1944년 2월, 가이타르스가 지휘하는 중대는 대대 규모의 소련 부대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했으며, 이후 Заполье|자폴리에rus 근처에서 소련의 군사 열차를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러한 전투에서의 용맹함을 인정받아 1944년 5월, 가이타르스는 금색 독일 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는데, 이는 라트비아인으로서는 최초였다.
그의 중대는 1944년 여름과 가을 내내 독일군이 러시아에서 라트비아로 철수하는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전투를 치렀다. 가이타르스는 쿠르란트 포켓 전투 중 심각한 부상을 입어 1945년 1월까지 전선을 떠나 치료를 받아야 했다.[2] 1945년 3월 22일, 그는 다시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Tukums|투쿰스lav 인근 Zante|잔테lav의 야전 병원에서 결국 부상으로 사망했다. 루돌프스 가이타르스는 'Dārziņi|다르지니lav' 농가 근처의 작은 시골 묘지에 안장되었다.[3]
3. 4. 무장친위대 복무 및 무공
1940년 9월 소련의 라트비아 점령 이후 학교에서 해고되었고,[1] 이후 라트비아군에서 복무하며 준위 계급까지 올랐다. 1941년 6월 14일 소련의 대규모 추방 당시 추방자 명단에 포함되었으나 숲으로 숨어 피신했으며, 그의 가족은 시베리아로 추방되었다.나치 독일의 소련 침공 작전인 바르바로사 작전이 1941년 6월 시작되자, 가이타르스는 펜쿨레(Penkule)에서 무장 부대를 조직했다. 그는 아이자르기(Aizsargi, 라트비아 향토 방위군)의 전 구성원들과 함께 도로에 검문소를 설치하고 소련 활동가와 정치인들을 체포했으며, 펜쿨레 교구의 사령관이 되었다. 1942년 5월에는 제19 라트갈레 라트비아 경찰대대에 입대하여 동부 전선에 배치되었다. 그는 레닌그라드 전선 근처의 풀코보 천문대 인근 전투에 참여했으며, 이 과정에서 대대는 큰 피해를 입었다.
1943년 4월, 제19 대대의 남은 병력은 무장친위대의 제2 라트비아 SS 보병 여단에 편입되어 볼호프(Volkhov) 전선에 배치되었다. 가이타르스는 Untersturmführer (소위급) 계급으로 진급했으며, 1943년 8월에는 철십자 훈장 2급을, 같은 해 10월에는 1급 훈장을 받았다.
1944년 2월, 가이타르스가 지휘하는 중대는 대대 규모의 소련 부대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했으며, 이후 자폴리에(Zapolye) 근처에서 소련 군사 열차를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러한 전공으로 용감성을 인정받아 1944년 5월, 가이타르스는 라트비아인 최초로 금색 독일 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그의 중대는 나치 독일이 러시아에서 라트비아로 철수하는 1944년 여름과 가을 내내 전투를 지속했다. 가이타르스는 쿠르란트 포켓 전투 중 심각한 부상을 입어 1945년 1월까지 최전선에서 물러나야 했다.[2] 1945년 3월 22일, 그는 다시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투쿰스 근처 잔테(Zante)의 야전 병원에서 부상으로 사망했다. 루돌프스 가이타르스는 '다르지니'(Dārziņi) 농가 근처의 작은 시골 묘지에 묻혔다.[3]
3. 5. 쿠르란트 포켓 전투와 죽음
그의 중대는 독일이 러시아에서 라트비아로 철수하는 동안 1944년 여름과 가을 내내 전투를 계속했다. 가이타르스는 쿠르란트 포켓 전투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1945년 1월까지 최전선을 떠나야 했다.[2] 1945년 3월 22일 그는 다시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투쿰스 근처 잔테의 야전 병원에서 부상으로 사망했다. 루돌프스 가이타르스는 '다르지니'의 농가 근처의 작은 시골 묘지에 묻혔다.[3]3. 6. 사후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루돌프스 가이타르스의 사망 이후 행적이나 평가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아, '사후' 섹션에 해당하는 내용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4. 평가
(내용 없음)
참조
[1]
간행물
Jaunais Komunārs Nr. 25
1940-09-13
[2]
서적
Latviešu leģions patiesības gaismā
2006
[3]
서적
Latviešu kaŗavīrs Otra pasaules kaŗa laikā
Daugavas Vanagu Centrālās Pārvaldes Izdevums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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