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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트 게르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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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쿠르트 게르슈타인은 1905년 독일에서 태어난 기술자이자 무장친위대 장교로,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 만행을 목격하고 이를 외부에 알리려 했던 인물이다. 그는 나치당에 입당했으나 반기독교적 정책에 반대하며, 무장친위대에 입대하여 절멸 수용소에서 학살의 실상을 파악하고, 스웨덴 외교관에게 이를 폭로하려 했다. 종전 후 프랑스군에 항복하여 보고서를 작성했으나, 나치 전범으로 취급되어 수감 중 자살했다. 사후에는 그의 행적에 대한 평가가 엇갈렸으나, 재심을 통해 명예가 회복되었다. 그의 삶은 여러 대중 매체를 통해 다루어지며, 홀로코스트에 대한 증언과 저항의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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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트 게르슈타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쿠르트 게르슈타인, 무장친위대 칼라 탭 착용
쿠르트 게르슈타인, 무장친위대 "게르마니아" 칼라 탭 착용
출생일1905년 8월 11일
출생지뮌스터, 프로이센 왕국, 독일 제국
사망일1945년 7월 25일
사망지파리, 프랑스
소속나치 독일
군사 경력
복무무장친위대
복무 기간1945년까지
계급무장친위대-슈투름하웁트퓌러
부대해골 부대
관련 정보
소속위생 연구소
관련 용어절멸 수용소(Vernichtungslager)

2. 생애

쿠르트 게르슈타인은 1905년 8월 11일 베스트팔렌 뮌스터에서 7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1] 아버지는 전직 프로이센 장교이자 권위적인 인물인 루드비히였다.[1] 게르슈타인 가문은 쇼비니즘적 성향이 강하고 "권위에 전적으로 순응하는" 프로이센 중산층 가정으로 묘사된다.[1] 그의 가계에는 아리아인 혈통만이 존재한다고 자랑했으며, 여러 세대에게 "인종의 순수성을 보존하라!"고 외쳤다.[1]

게르슈타인은 20세에 중등학교를 졸업했지만,[4] 학업은 부진했고 불성실한 학생이었다.[29] 1925년 노이루핀 고등학교를 졸업 후, 마르부르크 대학교에서 3학기 동안 공부하고 아헨베를린/샤를로텐부르크 공과대학으로 옮겨 1931년 광산 기술자로 졸업했다.[4] 마르부르크 대학교에서 학생 주최 민족주의 단체에 가입했고,[30] 아버지 요청으로 "독일에서 가장 민족주의적인 학생 단체 중 하나"인 토이토니아에 가입했다.[5] 사교 클럽 학생들의 경박함은 불편해했지만, 초민족주의는 개의치 않았다.

1936년 튀빙겐으로 이사하여 튀빙겐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아내 엘프리데와 함께 살았다. 1937년 8월 31일 목사의 딸 엘프리데 벤쉬와 결혼하여[3] 딸 아델하이트를 두었다. 1925년부터 프로테스탄트 청년 조직(YMCA) 및 성서 서클 정회원으로 활동했다.[32][33]

게르슈타인은 학교에서 기독교 종교 교육을 받았고, 대학교에서는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6] 1925년부터 기독교 학생 및 청년 운동에 활동했으며, 독일 기독교 학생 협회(DCSV)에 가입했다. 1928년에는 복음주의 청년 운동(CVJM-YMCA)과 독일 성경 서클 연맹의 적극적인 회원이 되었으며, 히틀러 유겐트 인수 시도 후 1934년 해체될 때까지 지도적인 역할을 했다.[7] 1934년 나치가 독일 개신교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려는 시도에 대한 항의로 마르틴 니묄러 목사를 중심으로 형성된 고백교회로 기울었다.[8]

1933년 5월 1일 나치당에 입당했고,[25][34][35] 같은 해 10월 돌격대(SA)에도 가입했다.[25] 나치당 가입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지인 목사 증언에 따르면 "나치당에는 강력한 힘이 있고, 내부에서 어떻게든 해야 한다"라고 말하며 나치 정책에 공감했던 것은 아니었다.[25]

나치당 입당 후에도 기독교 신앙을 버리지 않아 게슈타포 감시 대상이 되었다.[25] 1933년 12월, 소속 프로테스탄트 청년 단체가 히틀러 유겐트에 흡수 통합되자 발두어 폰 쉬라흐에게 항의 전보를 보냈다.[36] 1935년 1월 30일, 하겐 시에서 상연된 반기독교적인 연극에 항의하다 유혈 사태를 겪었다.[37][38]

1936년 9월, 반나치 자료 배포 혐의로 체포, 구금되어 나치당에서 제명되었다.[41] 광부 협회 초대장에 '광견 동반 승객용 객실' 문구를 넣어 당시 법률을 위반했고, 자택 수색 결과 반국가적 인쇄물 1000통이 압수되었다.[25] 독일 각 성 국장 및 고급 관료에게 8000통 이상 반나치 팜플렛을 보낸 혐의도 받았다.[42][25]

공직에서 추방되었고,[25][43] 의학 공부와 종교 활동, 반나치 팜플렛 배포를 계속했다.[25] 1938년 7월, 반국가 활동으로 다시 체포되어 강제 수용소에 수용되었다.[25] 석방 후 생활고를 겪던 게르슈타인은 아버지 도움으로 1939년 6월 22일 나치당 제명 처분이 취소되고 퇴당으로 변경되었다.[45][46][25]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쿠르트 게르슈타인은 1905년 8월 11일 베스트팔렌 뮌스터에서 7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1] 그의 아버지는 전직 프로이센 장교이자 권위적인 인물인 루드비히였다.[1] 게르슈타인 가문은 쇼비니즘적 성향이 강하고 "권위에 전적으로 순응하는" 프로이센 중산층 가정으로 묘사된다.[1] 그의 가계에는 아리아인 혈통만이 존재한다고 자랑했으며, 여러 세대에게 "인종의 순수성을 보존하라!"고 외쳤다.[1]

게르슈타인은 중등학교에서 많은 나쁜 보고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20세에 졸업했다.[4] 1925년 노이루핀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학업은 부진했고 불성실한 학생이었다.[29] 고등학교 졸업 후, 마르부르크 대학교에 진학하여 학생이 주최하는 민족주의 단체에 가입했다.[30] 마르부르크 대학교에서 3학기 동안 공부한 후, 아헨베를린/샤를로텐부르크의 공과대학으로 옮겨 1931년 광산 기술자로 졸업했다.[4] 마르부르크에 있는 동안 아버지의 요청에 따라 "독일에서 가장 민족주의적인 학생 단체 중 하나"인 토이토니아에 가입했다.[5] 그는 사교 클럽 학생들의 경박함을 불편해했지만, 그들의 초민족주의는 개의치 않는 듯했다.

1936년, 튀빙겐으로 이사하여 튀빙겐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아내 엘프리데와 함께 살았다. 1937년 8월 31일 목사의 딸인 엘프리데 벤쉬와 결혼했다.[3] 그들은 딸 아델하이트를 두었다. 1925년부터 프로테스탄트 청년 조직(YMCA) 및 성서 서클의 정회원으로 활동했다.[32][33]

2. 2. 종교 활동

게르슈타인은 학교에서 기독교 종교 교육을 받았다. 대학교에서는 동급생들의 경박한 활동에 대한 일종의 해독제로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6] 1925년부터 기독교 학생 및 청년 운동에 활동했으며, 같은 해 독일 기독교 학생 협회(DCSV)에 가입했다. 1928년에는 복음주의 청년 운동(CVJM-YMCA)과 독일 성경 서클 연맹의 적극적인 회원이 되었으며, 히틀러 유겐트의 인수 시도 후 1934년 해체될 때까지 지도적인 역할을 했다.[7] 처음에는 개신교 복음주의 교회 내에서 종교적 안식처를 찾았지만, 1934년 나치가 독일 개신교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려는 시도에 대한 항의로 마르틴 니묄러 목사를 중심으로 형성된 고백교회로 기울었다.[8]

2. 3. 나치당과의 관계

게르슈타인은 1933년 5월 1일에 나치당에 입당했고,[25][34][35] 같은 해 10월에는 돌격대(SA)에도 가입했다.[25] 게르슈타인이 나치당에 입당한 정확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지인 목사의 증언에 따르면 "나치당에는 강력한 힘이 있고, 내부에서 어떻게든 해야 한다"라고 말하며 나치의 정책에 공감했던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25]

그러나 게르슈타인은 나치당 입당 후에도 기독교 신앙을 버리지 않아 게슈타포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25] 1933년 12월, 소속된 프로테스탄트 청년 단체가 히틀러 유겐트에 흡수 통합되자 발두어 폰 쉬라흐에게 항의 전보를 보내기도 했다.[36] 1935년 1월 30일에는 하겐 시에서 상연된 반기독교적인 연극에 항의하다가 유혈 사태를 겪기도 했다.[37][38]

1936년 9월, 게르슈타인은 반나치 자료 배포 혐의로 체포되어 구금되었고, 나치당에서 제명되었다.[41] 그는 광부 협회 초대장에 '광견 동반 승객용 객실' 등의 문구를 넣어 당시 법률을 위반했고, 자택 수색 결과 반국가적인 인쇄물 1000통이 압수되었다.[25] 또한, 독일 각 성의 국장 및 고급 관료에게 8000통 이상의 반나치 팜플렛을 보낸 혐의도 받았다.[42][25]

이후 게르슈타인은 공직에서 추방되었고,[25][43] 의학을 공부하면서도 종교 활동과 반나치 팜플렛 배포를 계속했다.[25] 1938년 7월에는 반국가 활동으로 다시 체포되어 강제 수용소에 수용되기도 했다.[25]

석방 후 생활고를 겪던 게르슈타인은 아버지의 도움으로 1939년 6월 22일 나치당 제명 처분이 취소되고 퇴당으로 변경되었다.[45][46][25]

3. 제2차 세계 대전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쿠르트 게르슈타인은 나치T4 작전에 희생된 처제에 대한 분노, 혹은 나치 내부 상황을 파악하고 범죄를 알리려는 의도 등으로 인해 1941년SS에 입대했다. 그는 고백 교회의 요원으로서 SS에 입대했다고 아내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15]

나치 독일의 독일 절멸 수용소 지도에서 벨제크 위치(중앙 하단) 표시 (흑백 해골로 표시)


기술 교육 배경 덕분에 게르슈타인은 기술 소독 서비스 책임자가 되었고, 오딜로 글로보치니크, 크리스티안 비르트와 함께 절멸 수용소에서 대량 학살의 기술적 측면에 대해 일했다. 그는 Degesch 회사에서 아우슈비츠의 루돌프 회스에게 치클론 B를 공급하는 협상을 맡았다.[16]

1942년 8월, 게르슈타인은 오딜로 글로보크니크의 안내를 받아 베우제츠와 트레블링카 수용소를 시찰하면서 학살 행위를 직접 목격했다.[60] 그는 바르샤바에서 베를린행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스웨덴 외교관 예란 폰 오터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국제 사회에 폭로하려 했다.[17] 폰 오터는 스웨덴 외무부 고위 관계자들과 대화를 나누었으나, 게르슈타인의 폭로는 연합국이나 다른 정부에 전달되지 않았다. 중립국이었던 스웨덴은 독일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하여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25][69] 스웨덴이 유대인 대량 학살 정보를 런던에 전달한 것은 종전 후였다.[25]

게르슈타인은 바티칸 대표, 스위스 베를린 공관, 고백교회와 관련된 여러 사람들에게도 접촉을 시도했다.[18] 그의 연락책 중 한 명인 네덜란드 시민 J.H. 우빈크는 게르슈타인의 증언을 네덜란드 레지스탕스에 전달했고, 이는 런던의 네덜란드 망명 정부에도 알려졌다. 그러나 1942년부터 1945년까지 게르슈타인이 외교관 및 종교 관계자들에게 한 진술은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65][66][67][68] 로마 교황청 대사관에도 가서 유대인 학살을 알리려 했지만, 군인 신분 때문에 문전박대를 당했다.[64][25]

그는 직무상 학살에 사용될 치클론 B 조달을 담당했다.[61] 하지만, 그는 치클론 B 조달에 전적으로 관여한 것은 아니었으며, 발주량만으로는 소독용인지 학살용인지 알 수 없었다.[25] 그는 치클론 B의 보존 기간을 제조사에 문의하여, 보존 기간 초과를 이유로 폐기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73]

1945년 4월, 게르슈타인은 항복 후 프랑스어로 가스 살포와 절멸 수용소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보고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1945년 5월에 두 개의 독일어 버전이 뒤따랐다. 이것이 게르슈타인 보고서이다. 게르슈타인이 남긴 수기는 뉘른베르크 재판과 뉘른베르크 계속 재판의 의사 재판에서도 증거로 활용되었다.[84][85]

3. 1. 무장친위대 입대

1941년 초, 쿠르트 게르슈타인은 SS에 입대했다. 입대 동기는 복합적이었다. 한 문서에 따르면, 정신 질환자 안락사 프로그램인 T4 작전으로 인해 사망한 처제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다고 한다.[11][12] 다른 문서에서는 처제가 살해되기 전 이미 SS 입대를 결심했으며, 처제의 죽음이 SS 내부 상황을 파악하고, 정책 변화를 추구하며, 범죄를 알리려는 그의 의지를 강화했다고 한다.[13] 그는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백 교회의 요원으로서 SS에 입대했다고 밝혔다.[15]

기술 교육 배경 덕분에 게르슈타인은 빠르게 기술 소독 서비스 책임자가 되었고, 오딜로 글로보치니크, 크리스티안 비르트와 함께 절멸 수용소에서 대량 학살의 기술적 측면에 대해 일했다. 그는 Degesch 회사에서 아우슈비츠의 루돌프 회스에게 치클론 B를 공급하는 협상을 맡았다.[16]

게르슈타인이 두 번의 체포 기록에도 불구하고 무장친위대에 입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여러 설이 있지만, 다음 이유들이 거론된다.

  • 게르슈타인 본인의 증언에 따르면, 게슈타포 직원이 자신의 이상주의에 감탄하여 나치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51]
  • 게르슈타인이 게슈타포의 거래에 응했기 때문이다.[25] (거래 내용은 불명)
  • 전후 게르슈타인의 아내 증언에 따르면, "그들은 나를 원하지 않았지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한다.[52] ('그들'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의 의미는 불분명)


게르슈타인은 1940년 8월, 뮌헨의 나치당 본부를 방문하여 나치당 재입당을 신청하고, 1941년 3월 10일 무장친위대 근무를 시작했다.[53][54] 입대 후 약 3개월 훈련을 받고, SS 사령부 본부의 기술·의료 부문에서 포로 수용소, 강제 수용소용 소독 장치, 음료수 여과 장치 제작을 담당했다.[55][56] 초기에는 발진티푸스 진정에 기여하여 사망률을 낮추는 성과를 거두었다.[25]

무장친위대 경력 중, 게르슈타인에게 나치당 제명 처분을 내린 재판소 당국이 그의 SS 소속을 알고 몰아내려 했으나, 의학·과학 지식이 뛰어난 그는 실각을 피할 수 있었다.[57]

3. 2. 홀로코스트 목격 및 폭로

1942년 8월, 쿠르트 게르슈타인은 오딜로 글로보크니크의 안내를 받아 베우제츠와 트레블링카 수용소를 시찰하면서 학살 행위를 직접 목격했다.[60] 그는 바르샤바에서 베를린행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스웨덴 외교관 예란 폰 오터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국제 사회에 폭로하려 했다.[17] 폰 오터는 스웨덴 외무부 고위 관계자들과 대화를 나누었으나, 게르슈타인의 폭로는 연합국이나 다른 정부에 전달되지 않았다.

게르슈타인은 바티칸 대표, 스위스 베를린 공관, 고백교회와 관련된 여러 사람들에게도 접촉을 시도했다.[18] 그의 연락책 중 한 명인 네덜란드 시민 J.H. 우빈크는 게르슈타인의 증언을 네덜란드 레지스탕스에 전달했고, 이는 런던의 네덜란드 망명 정부에도 알려졌다. 그러나 1942년부터 1945년까지 게르슈타인이 외교관 및 종교 관계자들에게 한 진술은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65][66][67][68] 중립국이었던 스웨덴 정부는 독일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하여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았고,[25][69] 스웨덴이 유대인 대량 학살 정보를 런던에 전달한 것은 종전 후였다.[25]

로마 교황청 대사관에도 가서 유대인 학살을 알리려 했지만, 군인 신분 때문에 문전박대를 당했다.[64][25]

그는 직무상 학살에 사용될 치클론 B 조달을 담당했다.[61] 하지만, 그는 치클론 B 조달에 전적으로 관여한 것은 아니었으며, 발주량만으로는 소독용인지 학살용인지 알 수 없었다.[25] 그는 치클론 B의 보존 기간을 제조사에 문의하여, 보존 기간 초과를 이유로 폐기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73]

3. 3. 게르슈타인 보고서

게르슈타인은 바르샤바에서 베를린행 기차에서 스웨덴 외교관 예란 폰 오터와 우연히 마주쳤는데, 몇 시간 동안 이어진 대화에서 자신이 본 것을 말하고 이 정보를 국제적으로 퍼뜨리도록 촉구했다.[17] 폰 오터는 스웨덴 외무부 고위 관계자들과 이야기했지만, 게르슈타인의 폭로는 연합국이나 다른 정부에 전달되지 않았다. 게르슈타인은 바티칸 대표, 스위스 베를린 공관의 언론 주재관, 고백교회와 관련된 여러 사람들과 접촉을 시도했다.[18]

그의 연락책 중 한 명은 네덜란드 시민 J.H. 우빈크였으며, 네덜란드 레지스탕스에 그의 증언을 전달해 달라고 요청했다. 조금 뒤, 런던에 있는 네덜란드 망명 정부의 익명의 한 구성원이 게르슈타인의 보고서와 매우 유사한 증언을 일기에 기록했다.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외교관 및 종교 관계자들에게 한 게르슈타인의 진술은 거의 효력이 없었다.

1945년 4월 항복한 후, 게르슈타인은 프랑스어로 가스 살포와 절멸 수용소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보고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1945년 5월에 두 개의 독일어 버전이 뒤따랐다.

역사학자 크리스토퍼 브라우닝은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게르슈타인 증언의 많은 측면은 의심의 여지가 있다.... [벨제츠와 트레블링카에서 신발과 의류 더미의 높이와 같은] 진술에서 게르슈타인 자신이 과장의 원천임이 분명하다. 게르슈타인은 또한 자신이 직접 목격하지 못한 문제에 대해 심하게 과장된 주장을 덧붙였는데, 예를 들어 총 2,500만 명의 유대인과 다른 사람들이 가스 살포를 당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인 문제, 즉 그가 벨제츠에 있었고 르비우에서 온 유대인 수송의 가스 살포를 목격했다는 그의 증언은 완전히 입증되었다.... 이는 벨제츠의 다른 증인들에 의해서도 입증되었다."[14]

저명한 프랑스 역사학자 피에르 비달-나케는 그의 저서 ''기억의 암살자''에서 이러한 비판에 대해 논의한다.[19]

1945년 3월 하순, 게르슈타인은 베를린을 탈출하여 튀빙겐에서 가족과 만났고, 4월 22일 로이틀링겐에서 프랑스군 포로가 되었다.[75] 포로가 된 직후, 네카어 강변의 모처로 연행되었다.[25] 무장친위대에 소속되어 있었지만, 로트바일에서의 대우는 나쁘지 않았으며, 4월 26일부터 프랑스어로 수기를 남기기 시작했고, 5월 4일부터 독일어로 수기를 남기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게르슈타인 보고서가 되었다.[76]

게르슈타인이 남긴 수기는 뉘른베르크 재판과 뉘른베르크 계속 재판의 의사 재판에서도 증거로 활용되었다.[84][85]

4. 체포 및 사망

1945년 4월 22일, 나치 독일 항복 2주 전, 게르슈타인은 로이틀링겐의 프랑스 사령관에게 자진 투항했다. 그는 동정적인 대우를 받았고, 로트바일의 한 호텔로 이송되어 보고서를 작성할 수 있었다.[75] 4월 26일부터 프랑스어로, 5월 4일부터는 독일어로 수기를 작성했는데, 이것이 게르슈타인 보고서가 되었다.[76] 이후 셰르슈미디 군사 교도소로 이송되어 나치 전범으로 취급받았다. 1945년 7월 25일, 자살로 추정되는 상황에서 감방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80][81] 유서는 발견되지 않아 자살 동기는 알 수 없지만, 자살을 암시하는 서간은 발견되었다.[82][83]

5. 사후 평가 및 재조명

쿠르트 게르슈타인은 사후 그의 행적에 대한 다양한 평가와 재조명을 받았다.

1950년 튀빙겐의 탈나치화 재판에서 게르슈타인은 나치 학살 행위에 가담한 것으로 간주되어 종범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1965년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총리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에 의해 유죄 판결이 취소되어 명예를 회복했다.[25]

그의 삶은 여러 대중 매체를 통해서도 재조명되었다. 2002년 롤프 호흐후트의 희곡 ''대리인''을 각색한 영화 ''아멘.''이 개봉되었고, 윌리엄 T. 볼먼의 소설 ''유럽 센트럴''에도 그의 이야기가 다루어졌다. 토마스 키닐리는 희곡 ''Either Or''을 통해 게르슈타인의 삶을 조명했으며, 2010년 에모리 대학교 영화과 학생들은 단편 영화 ''The Gerstein Report''를 제작하여 상을 받기도 했다.[23][24]

5. 1. 탈나치화 재판

1950년 8월 17일 튀빙겐의 탈나치화 재판에서 게르슈타인은 종범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고, 상고는 인정되지 않았다[86][87]。판결 요약에 따르면, 나치의 학살 행위를 여러 곳에 알리고 청산을 폐기하는 등의 행위는 평가할 만하지만, 학살 행위를 막기 위해 전력을 다하지 않았고 청산을 발주하는 행위도 있었으므로 학살 행위에 가담한 것으로 간주하여 종범으로 판결하였다[25]。그러나 1964년 말, 바덴-뷔르템베르크 주는 게르슈타인의 탈나치화 재판 재심을 결정했고[25], 1965년 1월 20일,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총리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는 게르슈타인의 유죄 판결을 취소하여 게르슈타인은 명예를 회복했다[25]

5. 2. 대중 매체

그의 삶은 다양한 매체를 통해 재조명되었다. 2002년에는 롤프 호흐후트의 희곡 ''대리인''을 각색한 영화 ''아멘.''이 개봉되었으며, 울리히 투쿠르가 게르슈타인 역을 맡고 코스타 가브라스가 감독을 맡았다.[22] 윌리엄 T. 볼먼의 2005년 전미 도서상 소설 부문 수상작 ''유럽 센트럴''에는 게르슈타인의 이야기를 다룬 "깨끗한 손"이라는 부분이 55페이지 분량으로 포함되어 있다.

토마스 키닐리는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원작인 ''쉰들러의 방주''의 저자로, 친위대 장교로서 게르슈타인의 삶과 강제 수용소를 다룬 희곡 ''Either Or''을 썼다. 이 작품은 2007년 5월 워싱턴 D.C.의 Theater J에서 초연되었다.

2010년, 에모리 대학교 영화과 학생들은 게르슈타인의 죽음에 이르는 사건들을 다룬 단편 영화 ''The Gerstein Report''를 제작했다. 이 영화는 2010년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캠퍼스 무비페스트 국제 그랑데 피날레에서 최우수 드라마상을 수상했다.[23][24]

스웨덴의 음악가 스테판 앤더슨은 2018년 동명의 앨범에 게르슈타인과 스웨덴 외교관과의 만남을 다룬 노래 "Flygblad över Berlin"("베를린 상공의 전단")을 수록했다.

참조

[1] 문서 Friedländer, p. 10.
[2] 문서 quoted in Friedländer 1969, p. 4
[3] 웹사이트 Holocaust Encyclopedia: Kurt Gerstein http://www.ushmm.org[...] 2015-05-01
[4] 문서 Friedländer 1969, p. 11
[5] 문서 Friedländer 1969, p. 8
[6] 문서 quoted in Friedländer 1969, p. 13
[7] 문서 Friedländer 1969, p. 19
[8] 문서 Friedländer 1969, p. 35
[9] 서적 The Holocaust: the fate of European Jewry, 1932-1945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US 2009-08-10
[10] 문서 Friedländer 1969, p. 32
[11] 웹사이트 Archived copy http://www.hans-geor[...] 2014-01-08
[12] 문서 quoted in Friedländer, p. 80 where she is referred to as "aunt [sic]" although page 73 claims it was his sister-in-law
[13] 문서 Pierre Joffroy, L'Espion de Dieu, Paris, Laffont, 2002, p. 133 (taken from French edition of Wikipedia)
[14] 웹사이트 'Evidence for the Implementation of the Final Solution: Electronic Edition, Browning, Christopher R.' http://www.hdot.org/[...] 2013-12-19
[15] 문서 quoted in Friedländer 1969, p. 215
[16] 문서 Yahil 1991, [https://books.google.com/books?id=e_aRvKpLUf0C&q=Kurt+Gerstein&pg=PA351 pp. 356-357.]
[17] 문서 Friedländer 1969, pp. 123-125
[18] 문서 Friedländer 1969, pp. 128-129
[19] 웹사이트 Assassins of Memory Pierre Vidal-Naquet, 1987. Ressources documentaires sur le génocide nazi / Documentary Resources on the Nazi Genocide © Michel Fingerhut, auteurs et éditeurs, 1996-98 http://www.anti-rev.[...]
[20] 문서 Friedländer, 1969, pp. 218–222
[21] 간행물 The Holocaust: the fate of European Jewry, 1932–1945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US 2009-08-10
[22] 간행물 The Deputy https://archive.org/[...] Grove Pr
[23] 웹사이트 2010 International Grand Finale http://campusmoviefe[...] 2010-06-28
[24] Youtube Winning short film https://www.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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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서적 ジョウ下巻(2023年)
[86] 서적 フリートレンダー(1971年)
[87] 서적 フリートレンダー(1971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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